‘비례대표 47인’ 생존게임 막전막후

만만한 지역구 침부터 바른다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9%, 19대 국회 비례대표 의원이 20대 지역구 재선에 성공한 확률이다. 비례대표제가 시행된 17대 국회부터 비례대표 의원이 다시 비례대표로 재선한 경우는 164석 중 3석, 1.8%에 불과했다. 재선을 위해선 비례대표 의원들이 깃발 꽂을 지역구를 찾아 바닥 민심을 공략해야 한다는 뜻이다. 임기가 1년 남짓한 상황서 현 비례대표 의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요시사>가 그들의 내년 총선 거취를 분석해봤다.
 

20대 국회에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13명,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 17명, 바른미래당(이하 바미당) 13명, 정의당 4명으로, 47명의 비례대표가 있다. 비례대표 의원들은 전문 분야서 능력을 인정받아 국회에 입성한 케이스가 대다수다. 당선 안정권에 드는 비례대표 순번을 받게 된다면 소선거구제서 뽑히기 어려운 정치 신인도 선거 없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

세대교체론
‘깃발’ 뺏기

국회의원은 각종 의정활동 지원비를 제외하고도 국민 1인당 평균소득의 5배인 1억5000여만원의 세비가 지급된다. 면책특권·불체포특권·보좌진 임면권 등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각종 대우와 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

이상돈 바미당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서 “마약도 이런 마약이 없다. 한 번만 국회의원을 하고 본업으로 돌아간다던 사람들이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더라”고 말한 바 있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재선에 사활을 걸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비례대표 의원의 재선 확률은 매우 낮다. 17대 국회의 비례대표 56명 중 5명, 18대 국회의 54명 비례대표 중 8명, 19대 국회의 비례대표 54명 중 재선에 성공한 의원은 5명으로 총 164명 중 18명만이 살아남았다.


비례대표가 ‘초선의 무덤’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김종인 전 민주당 의원처럼 비례대표만으로 5선 국회의원을 지낸 예외도 있지만, 연속으로 비례대표 공천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번 특혜를 받았기에 두 번은 어렵다는 게 여의도 불문율이다.

비례대표 의원들은 보통 1년 임기가 남은 시점부터 재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구를 찾는다. 보통 직장, 출신 학교 등 연고가 있는 지역에 출사표를 낸다. 지역 주민들과 접점을 찾아야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기 쉽기 때문이다.

탄탄한 지지를 받는 경쟁 당의 중진 의원이 지키고 있는 곳은 초선 비례대표가 도전하기 부담되는 이른바 ‘험지’다. 당의 강세 지역은 기존 의원들이 버티고 있어 당내 경선부터 뚫기가 어렵고 총선을 앞두고 ‘집안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정치적 계산이 필요하기에 비례대표 의원들이 지역구를 정할 때 치열한 눈치 싸움은 당연한 수순이다.

‘하늘의 별따기’ 재선에 올인
지난 20대 선거 땐 9%만 귀환

비례대표 47인 중 21대 총선서 출마할 지역구를 확정한 의원은 총 24명이다. 총선 출마 의지가 있지만 지역구를 아직 정하지 못한 의원은 한국당 여성 비례대표인 김현아·송희경·신보라 의원과 바미당 채이배·최도자 의원 등이 있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비례대표 공천으로 이미 당의 특혜를 한번 받았다는 인식이 있어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당의 결정을 기다리는 분위기”라고 전했다.접점이 되는 연고가 없더라도 특정 지역이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력이 있다면 다크호스로 부상할 가능성도 있다. 당내 경쟁력 있는 비례대표의 공천은 당의 입지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 김현미 국토교통부장관

대표적인 인물이 한국당 김현아 의원이다. 3기 신도시 문제로 지역 민심과 멀어진 김현미 국토교통부장관의 지역구인 고양시 을에 부동산 전문가인 김현아 한국당 의원으로 맞불을 놔야 한다는 의견들이 당내서 나오고 있다.

김현아 의원실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강남에 출마하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강남을 당협위원장에 지원해 의원님이 탈락했다. 고양도 얘기가 나오고, 여러 지역구 이야기가 나오지만 아직 정하진 못했다”고 말했다. 현재 고양시엔 민주당 소속인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김현미 국토교통부장관, 심상정 정의당 대표 등 진보 정당 여성 의원들이 포진해 있는 곳으로 한국당이 주도권을 얻기 위해 벼르고 있는 지역이다.

한국당 관계자는 “경쟁력 있는 비례대표 의원들이 수도권서 여당 실세들과 맞붙게 되면 국민적 관심이 고조될 것”이라며 “비례대표 의원이기 이전에 정책 전문가 이미지가 부각될 수 있다면 다선 피로감을 느끼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역구를 밝힌 24명 의원 중 15명의 여·야 의원들이 3선 이상인 중진 의원들의 지역구에 출사표를 냈다. 매 선거 때마다 나오는 ‘세대교체론’으로 정치 신인인 비례대표가 지역구 정치에 변화를 불어넣고자 함이다.

매력적인 험지
정치적 위상↑

대표적인 예로 바미당 김수민 의원의 충북 청주청원 도전이다. 김 의원은 20대 국회 최연소 여성 의원으로 민주당 변재일 의원(4선)의 지역구자 본인의 고향인 충북 청주청원에 정면 승부를 예고했다. 청년 정치인이 결핍된 국회서 상징성을 지닌 김 의원이 지역구에 새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경기 안양동안을은 현재 한국당 심재철 의원(5선)이 터줏대감으로 있는 지역으로, 민주당 이재정 의원, 바미당 임재훈 의원, 정의당 추혜선 의원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

만약 이들 의원이 각 당 공천 경쟁서 승리한다면 내년 4월 안양 동안을에서는 4명의 현역 의원이 각축전을 벌이는 격전지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민주당 송옥주 의원은 현역 최다선인 서청원 무소속 의원(8선)의 경기 화성갑을, 바미당 김중로 의원은 민주당 이해찬 대표(7선)의 지역구인 세종에 출사표를 냈다.

지역색이 강하고, 지연·학연·혈연이 복잡하게 얽힌 지방의 표심을 파고들기는 어렵다는 평가에도 호기롭게 출사표를 낸 의원들이 있다.
 

▲ 김현아 자유한국당 의원

한국당 여상규 법사위원장(3선)의 지역구인 경남사천남해하동엔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던 민주당 제윤경 의원이, 정치 9단이라 불리는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4선)의 지역구인 전남 목포엔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최근 지난 대선 후보였던 바미당 유승민 의원(4선)의 대구 동구을에 한국당 김규환 의원이 출마를 희망했다.

최근 불법 천막 설치로 서울시와 대립각을 이루고 있는 우리공화당의 조원진 대표(3선)의 지역구인 대구 달서병엔 한국당 강효상 의원이 당협위원장을 맡아 일찌감치 지역구를 선점했다. 건강상 이유로 한국당 사무총장직서 물러난 한선교 의원(4선)의 지역구인 경기 용인병도 내년 총선에 기대되는 지역 중 하나다.


한 의원은 당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무총장을 맡는 등 전국적 지명도가 높은 편이지만 막말 정치로 실망한 민심이 작용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민주당 정춘숙 의원은 경기 용인병 출마를 위해 현재 수지구 지역의 시민사회단체와 활발하게 소통하며 구민들과의 스킨쉽 반경을 넓히고 있다.

명분 싸움에
‘환멸’ 느껴

당 지지도가 높은 지역구를 지키고 있는 같은 당 소속 현역 의원에 도전장을 내민 비례대표도 있다.

한국당 임이자 의원은 한국당 김재원 의원(3선)의 지역구인 경북 상주군위의성총송에 출마할 예정이다. 경북 상주는 임 의원의 고향이자 TK 지역으로 공천을 받으면 지역구 의원이 되는 것은 크게 무리가 없는 곳이다. 민주당 권미혁 의원은 같은 당인 이석현 의원(6선)의 지역구인 경기 안양동안갑에 도전한다.

비례대표 의원들이 같은 당 소속인 현역 의원이 지키고 있는 지역구에 선뜻 도전하지 않는 이유가 단순 ‘집안싸움’을 피하고자 함은 아니다. 같은 당 소속 의원의 지역구 도전이 험지 출마보다 높은 당선 가능성을 보장하지도 않고, 험지 개척은 성공한다면 당내 정치적 위상이 달라질 수 있어 승부사인 정치인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수도권 출마를 고려 중인 한국당 비례대표 의원은 “다른 당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구를 가져올 수 있다면 ‘플러스 2’의 효과가 발생한다”며 “이른바 험지서 불리는 곳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정치적 몸집도 이전보다 훨씬 커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례로 민주당 김현권 의원은 한국당 장석춘 의원(초선)의 지역구인 경북 구미을에 출마를 준비 중이다.
 

경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이란 상징성을 가지는 ‘보수의 성지’임에도 지난해 지방선거서 장세용 구미시장이 최초로 민주당 간판을 달고 당선되는 이변이 나오기도 했다. 구미 공단의 배후 신도시와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젊은 직장인들인 유권자들이 주를 이뤄 대구·경북(TK) 지역 가운데 민주당이 공략하기 적절한 지역구라는 분석도 나온다.

민주당 박경미 의원은 한국당 박성중(초선) 의원의 지역구인 서초을에 대항마로 나섰다. 서초구는 선거구가 신설된 1988년 이후 민주당 계열 국회의원이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험지로 꼽히는 곳이다. 지난 해 지방 선거서 서울 25개 기초단체장 중 유일하게 한국당 소속 구청장이 살아남았다.

전문성과 신선함 어필
중진 골라 험지 개척

박 의원은 교수 출신 이력을 살려 교육열이 높은 지역구민들의 바닥 민심을 다지고 있다.

20대 총선서 전현희 민주당 의원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강남을 지역구서 승리하며 최대 이변을 보여준 데 이어 박 의원이 ‘강남 3구’서 다시 한 번 ‘민주당 바람’을 일으킬지 주목된다.

한편 한길리서치 홍형식 소장은 “비례의원들은 지역구로 갈 경우 정치신인에 준하는 프리미엄을 줘야 한다”며 “말이 현역 의원이지, 지역구에서는 몇 년 동안 닦아온 다른 의원들을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당 유민봉·조훈현 의원과 바미당 이상돈 의원 3명은 내년 총선 불출마 의지를 밝혔다.

유 의원은 지난해 6·13지방선거서 한국당의 참패 책임을 지고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지난 해 지방 선거 이후 “한국당 의원으로서 국민과 지지자 여러분께 부끄럽다”며 “박근혜정부서 2년간 청와대 수석을 역임한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의원실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작년 입장 그대로”라며 불출마의 뜻을 거듭 밝혔다.

바둑기사 출신으로 20대 총선 이전에 입당 제의를 받고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조 의원도 불출마 의사를 표명했다. 조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서 여야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 때문에 정치 발전은 어려울 것이라 꼬집은 바 있다.

정치 싫어서
국회 떠난다

그는 “바둑에선 상대가 좋은 수를 두면 그걸 받아들인다. 그런데 국회는 상대가 한 것은 무조건 반대하거나 바꾸려고만 하니 제대로 된 승부가 안 되고 이상해질 수밖에 없다”며 여의도 정치에 회의감을 표했다. 중앙대 법대 명예교수인 이 의원도 내년 국회를 떠날 예정이다. 그는 공천을 위해 지도부와 당론에 충성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정치가 쉽게 개선되기 어려운 이유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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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