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조 보물선’ 신일그룹의 실체

‘대박이냐 신기루냐’ 보물 찾는 사람들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수백조원 가치의 금화와 금괴가 실린 보물선 ‘돈스코이호’를 발견했다고 발표한 신일그룹에 대해 재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주장만 있을 뿐 배나 금괴의 존재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일각에선 신일그룹이 설립된 지 50일밖에 안 된 신생회사인 것을 두고 실체가 불확실하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갑자기 등장한 신일그룹의 본모습은 무엇일까?
 

지난 17일, 신일그룹은 150조원 규모의 보물이 실린 러시아 철갑순양함 돈스코이호를 경북 울릉도 인근 해저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에 관련기업인 제일제강 주가가 이날 상한가로 치솟기도 했다.

금화와 금괴
가능한 이야기?

돈스코이호는 1905년 러일전쟁에 참여했다가 일본군 공격을 받고 울릉도 앞바다서 침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배에는 현재 가치로 약 150조원의 금화와 금괴 약 5500상자(200여t)가 실려 있다는 소문이 오래전부터 돌았다.

신일그룹은 수년 전부터 돈스코이호 탐색에 나선 끝에 지난 15일 울릉군 울릉읍 저동리서 1.3㎞ 떨어진 수심 434m 지점서 돈스코이호 선체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오는 30일 울릉도서 인양한 유물과 잔해를 일부 공개하고 9∼10월쯤 본체를 인양할 계획이다. 

돈스코이호는 지난 2000년 동아건설로 인해 화제가 된 바 있다. 동아건설이 보물선 실체를 확인했다고 알려지면서 2000년 12월15일 360원이던 동아건설 주가는 17일 후 3265원까지 폭등했다.


그러나 동아건설은 돈스코이호를 인양하지 못했고 유동성 위기로 2001년 3월 상장 폐지됐다. 고점에 주식을 산 소액주주들은 큰 피해를 봤다. 1980년대에는 도진실업이 배와 보물을 인양하기 위해 일본서 잠수정을 도입했지만 실패했다. 

신일그룹은 ‘신일그룹 돈스코이호 국제거래소’ 홈페이지에 고해상도 영상카메라로 돈스코이호로 추정되는 선체를 촬영한 영상과 사진을 공개했다. 영상 속 선체의 꼬리 쪽에는 ‘DONSKOII’(돈스코이)라는 함명이 적혀 있다. 

영상을 본 일부 네티즌은 발견된 선박이 진짜 돈스코이호가 맞는지에 의혹을 제기했다. 제정 러시아 선박임에도 선박 명칭이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로 표기돼있다는 점 때문이다. 

신일그룹 측은 돈스코이호가 러시아어로도 적혀 있지만 식별이 불가능해 선명한 영어 표기만 공개했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전문가는 선박 명칭이 시대와 나라별로 다르게 표기돼 돈스코이호에 이름이 영어로 적혀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선박명 표기와 관련해 한국선급 관계자는 “선박 명칭 표기와 관련한 별도의 국제규정이나 관례가 없어 정확히 말하기 힘든 부분”이라고 말했다.

돈스코이호 발견한 신일…정체성 논란
법인설립 50여일 신생기업…인양 능력?

갑작스레 불어닥친 돈스코이호 열풍의 가장 큰 의문점은 금화와 금괴의 실존 여부다. 현재까지 이 배에 실제 금이 실렸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다만 러시아 대외비 문서, 돈스코이호 침몰을 목격한 울릉도 주민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추정할 뿐이다. 


신일그룹에 따르면 돈스코이호 내부에 있는 금화는 한국은행이 보유한 금(104.4t)의 약 2배 가까운 엄청난 양이다. 러일전쟁 당시 이 배에 연료, 식수, 보급품 구매와 수병 임금 지급을 위한 군자금이 실린 것으로 알려졌지만 식량과 포탄 적재가 우선인 무장 함선에 금화 200t을 싣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총배수량이 5800t에 불과한 작은 배에 200t 가까운 금화를 싣는 것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제는 신일그룹이 돈스코이호 가치가 150조원 규모의 금화를 포함, 총 160조원가량이라고 주장하며 이 배를 담보로 암호화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화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으며 200t의 금화가 있다고 해도 그 가치가 150조원에 못미칠 가능성이 높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18일 기준 국내 금 시세는 4만5080원으로 200t의 금 가격은 약 9조160억원에 불과하다. 금화가 골동품의 가치를 인정받아 금 시세보다 가격이 높아질 수 있지만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서 그 가치를 담보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신일그룹은 ‘신일골드코인’이란 암호화폐를 발급해 인양 후 보물 가치의 10%인 15조원을 보유자들에게 이익배당금으로 지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가상화폐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금화의 실체가 없고 코인의 백서와 기술적 처리방식이 모두 공개되지 않아 스캠코인(사기코인)일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배 담보로 
암호화페 사업

신일그룹은 지난 6월1일 자본금 1억원으로 설립된 신생 법인이다. 류상미 대표를 비롯해 김필현·손상대·김해래씨가 주주로 등록돼있다. 신일그룹은 홈페이지를 통해 “1979년 설립된 신일건업을 모태로 한 글로벌 건설·해운·바이오·블록체인그룹”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외부에 공식적으로 드러난 회사는 신일그룹, 신일그룹 돈스코이호 국제거래소 2개 회사뿐이다. 이 둘은 모두 올해 들어 설립됐다.  

신일그룹은 홈페이지서 계열사로 신일건설산업, 신일바이오로직스, 신일국제거래소, 신일골드코인 등이 있다고 밝히고 있으나 대부분 법인 등록이 돼있지 않다. 암호화폐 거래 사업을 하는 신일그룹 돈스코이호 국제거래소만 서울중앙지방법원 등기국에 등록돼있는데 이 역시 설립된 지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신일그룹 측은 “임원들이 개인적으로 인양 준비를 하던 2년 전 해양수산부에 매장물 발굴허가에 관해 문의한 결과 개인보다는 법인으로 진행하는 것이 낫겠다는 조언을 받아 법인을 설립한 것”이라며 “법인을 좀 더 일찍 설립하려고 했지만 5월에 추모제를 진행하다 보니 설립이 늦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시장에선 제일제강의 인수계약자가 신일그룹이 아닌 개인 2명이라는 점도 의아해하고 있다. 신일그룹이 이미 제일제강을 인수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지만 두 사람은 계약금 18억5000만원만 납부한 상태다. 오는 9월12일까지 중도금·잔금을 납부해야 한다. 

지분 17%를 인수하는 데 필요한 금액은 185억원이다. 


이와 관련해 신일그룹 관계자는 “신일그룹은 관계사로 싱가포르 신일그룹과 신일건업돈스코이국제거래소를 갖고 있으며 제일제강에 대한 (주식 양수도 계약) 잔금 처리가 끝나면 제일제강이 계열사로 들어오게 된다”며 “신일건업은 싱가포르 신일그룹과 관계된 곳으로 인양사업과는 별개의 기업”이라고 말했다.

상한가 행진을 이어가던 제일제강은 18일 “신일그룹과 최대주주 관계가 아니며 보물선 사업과는 일체 관계가 없다”는 공시에 다시 급락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2시50분경에는 3560원까지 추락했다. 

발굴보증금 
15조 있나?

아울러 신일그룹이 돈스코이호를 인양할 자금을 충분히 보유했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신일그룹 측의 주장대로 매장물 추정가액이 150조원이라면 15조원을 발굴보증금으로 미리 납부해야 한다. 

논란이 되는 발굴보증금에 대해 신일그룹은 150조원으로 추정되는 금괴 값의 10%가 아니라 돈스코이호의 철근값 12억원의 10%만 납부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회사 측은 “금괴에 대한 이야기는 뉴욕타임스(NYT)의 보도 등으로 알려졌지만 금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배에 있는 금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철근값 12억원의 10%인 1억2000만원을 현금 또는 서울보증증권으로 납부해 매장물 발굴허가를 받은 뒤 발굴되는 금괴의 가치에 따라 다시 10%를 현금이나 서울보증증권으로 납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신일그룹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포항지방해양수산청 관계자는 “지난 1년여간 150조원의 금괴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갑자기 고철값만 내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사태를 주시하던 금융 당국이 결국 ‘경고 주의’ 입장을 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18일, 울릉도 앞바다서 보물선 돈스코이호를 발견했다고 발표해 화제를 모으고 있는 신일그룹과 관련해 코스닥 기업들이 주가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며 투자자 피해를 경고했다. 

금감원은 “보물선 인양 사업과 관련해 구체적인 사실관계 확인 없이 풍문에만 의존해 투자할 경우 큰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며 “투자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금감원은 이어 “보물선 인양과 관련해 확인되지 않은 허위사실 또는 과장된 풍문을 유포하는 경우 불공정거래 행위로 형사처벌이나 과징금 부과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과거에도 보물선 인양과 관련해 주가가 급등했던 회사가 자금난으로 파산하면서 투자자들 피해가 크게 발생했던 사례가 있었다”고 밝혔다. 

금괴 있나 “모든 의문점 밝히겠다”
동아건설과 소유권 분쟁 가능성도 

신일그룹이 ‘최초 발견자 권리’로 보물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가운데 동아건설이 “최초 발견자는 우리”라며 보물 소유권 분쟁에 나섰다. 

동아건설은 지난 19일 “돈스코이호는 2003년 우리가 발견했고, 그 사실은 당시 기자회견으로 대외에 공표했다”며 “포항 해양청에 허가를 받아 정상적인 루트로 해당 함선을 찾아낸 우리에게 최초 발견자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최초 발견자가 법적으로 어떤 권한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며 “최근 신일그룹이 마치 침몰 113년 만에 최초로 발견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어 이 부분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앞서 동아건설은 돈스코이호 발견 소식으로 2000년 12월15일부터 이듬해 1월4일까지 주식시장서 17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했다. 기업의 상장폐지 후에도 해양연구원과 탐사를 이어가며 2003년 6월 ‘돈스코이호 추정 물체’를 발견했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하지만 채권단 반대로 인양에는 나서지 못했고, 2014년 발굴 허가기간이 종료됐다.

동아건설 측은 신일그룹이 주장하고 있는 돈스코이호의 가치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동아건설 측은 “우리는 돈스코이호에 금 500kg 정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며 현재 가치로는 220억원 수준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현재까지 러시아 정부가 소유권 주장을 하지 않는 점을 들어 국내법상 인양 후 발견된 금화의 80%를 자신들이 소유할 수 있다는 게 신일그룹 측의 설명이다. 

하지만 실제 다량의 금화가 발견될 경우 러시아 정부가 소유권을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국제법에 따라 당사국 간 협의를 통해 소유권이 결정된다. 하지만 협의가 무산될 경우 국제재판소로 넘어간다. 돈스코이호가 ‘군(軍)함’이라는 점이 소유권 결정에 중요한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제일제강 관계는?
증폭되는 궁금증

돈스코이호에 대한 의문이 커지자 신일그룹은 홈페이지를 통해 이와 관련된 내외신 기자회견을 오는 25∼26일 열겠다고 밝혔다. 신일그룹은 “돈스코이호에 대한 더욱 놀랄 만한 사실과 사진, 영상 등을 추가로 공개하겠다”고 밝힌 만큼 어떤 내용에 대해 이야기할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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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