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프로야구에는 투타에 걸쳐 새로운 기록이 많았다. 당시 ‘괴물신인’로 불렸던 박재홍은 한국 프로야구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프로야구 15년 사상 첫 ‘30-30’(30홈런, 30도루) 기록을 달성 한 것이다. 박재홍 최초의 ‘30-30’ 진기록 정명원 PO 최초 ‘노히트 노런’ 현대와 LG의 프로야구 경기가 펼쳐진 잠실구장. 3회초 1사 1, 3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현대의 ‘괴물신인’ 박재홍은 여느 때처럼 호흡을 고른 뒤 편안한 마음으로 상대투수 김용수를 응시했다. 김용수의 초구가 날아들었다. 몸쪽 높은 포크볼. 특별히 선호하는 코스나 구질이 따로 없는 박재홍은 그대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하는 경쾌한 타구음과 함께 볼은 왼쪽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비거리는 120m. 3점 홈런이자 자신의 시즌 30호 아치였다. 박재홍이 국내 프로야구 사상 첫 ‘30-30클럽’에 가입하는 순간이었다. 한편 마운드에서도 새로운 역사가 쓰여졌다. 현대 유니콘스 정명원이 4사구 3개만 내주고 삼진 9개를 뽑
한 중견 연기자는 “연예인들은 대중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인기의 부침에 따라 수입과 위상의 변화가 불가피하는 연예계 속성을 알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인 자세를 견지하는데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한다”고 충고한다.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과 연예계를 지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인기를 얻어 성공을 하려고만 할뿐 연예계에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는 정신적인 태도나 자세 등에 대해서는 준비하지 않는데 이 부분에 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연예인을 관리하는 연예기획사는 단순히 연예인을 이윤창출도구로만 파악하지 말고 연예인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신속하게 구축해야한다. 연예인을 소비하는 대중들의 문제 있는 태도 역시 개선돼야한다. 근거 없는 악성루머의 유포나 사이버테러는 연예인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연예인들도 정신적, 육체적인 질환에 대해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는 등 태도의 변화도 있어야 한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엄청난 연예인들이 이미지나 남의 시선을 의식해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거나 지인
양현석… 빅뱅, 2NE1등 가수 발굴 이주노… 댄스 아카데미에서 후배양성 양현석은 현재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연예기획자로 바쁘게 활동 중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에서 유래된 YG엔터테인먼트를 차려 지누션, 원타임, 세븐, 거미, 빅뱅, 2NE1 등 국내 최고의 스타들을 보유한 대형 기획사로 성장시키는 수완을 발휘했다. 지난 2010년 3월 양현석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결혼도 발표했다. 그의 배우자로 알려진 사람은 그룹 스위티 출신의 이은주다. 이은주는 YG 소속 가수로 양현석과는 12살 띠 동갑 차이이며 전 젝스키스 멤버인 이재진의 여동생으로도 알려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양현석은 2010년 8월 이은주와의 사이에 딸을 얻었고 현재는 단란한 가정을 꾸리면서 또 다른 스타 발굴에 집중하고 있다. 이주노는 은퇴 후 자신의 특기인 ‘춤’을 살려 댄스스쿨 강사, 댄스 팀을 결성하는 등 계속적으로 꾸준한 활동을 보여왔다. 또 90년대 중반 인기 그룹 영턱스클럽을 발굴하며 음반 제작자로도 성공적인 재능을 선보이기도 했다. 현재 이주노는 댄스아카데미인 DM SKOOL을 운영하며 댄서를 꿈꾸는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고 최근에는
서태지는 한국 음악사에 큰 획을 그었다. 1992년 데뷔 당시 한국에서는 처음 접하는 새로운 풍의 음악으로 나타나 한국대중음악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하지만 4년 뒤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해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현재는 탤런트 이지아와의 소송문제로 인해 다시 한 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서울북공고 시절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였던 서태지. 이미 데뷔 전 그룹 시나위에서 김종서와 함께 베이스 기타리스트로도 활동하며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았었다. 이후 서태지는 91년 당시 최고의 춤꾼으로 활약하던 양현석과 이주노를 만나게 돼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란 그룹을 결성, 가요계에 도전장을 내밀게 된다. 당시 한국 가요계에 처음으로 선보인 ‘랩 댄스곡’ 풍의 데뷔곡 난 알아요, 그리고 당시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현란한 안무로 선풍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혜성같이 가요계에 등장해 큰 인기를 모았다. 이러한 인기에 서태지에게는 ‘10대들의 대통령’ ‘X세대 문화의 상징’ 등 수 없이 많은 수식어가 붙여진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 당시 많지는 않았고 당시 음악관계자들조차
배우 이전의 문성근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8년의 사회 경험 쌓았다. 이것이 ‘영화계 현안’으로 그의 관심을 돌리게 만들었다. 결정적 계기는 ‘스크린쿼터’였다. 처음에는 연기에 몰입할 생각으로 이러한 문제들에 거리를 뒀다. 영화계에서 ‘쿼터’를 지켜야하는 이유에 대해 “문화는 약하니까 지켜달라”는 논리에 그는 펜을 들었다. 그는 쿼터라는 게 수출입과 독과점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 결국 <씨네 21> 독자투고란에 글이 실렸고, 시위 연단에 오르게 되었다. 이어 올해 3월 초 그는 조선일보사옥 앞에 섰다. 그의 피켓에는 ‘길 위에서 꽃 한 송이 올립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장자연님’ 이라고 적혔다. 시위의 출발선은 ‘스크린쿼터’ 100만 국민의 뜻 모으려 거리로 그는 “한 인간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생명을 끊었는데 우리 사회가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며 “이제라도 권력이 감추는 진실을 제대로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그는 동료연예인들에게 성상
문성근. 그는 수많은 영화제에서 대상을 거머쥔 ‘명배우’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TV 속의 그는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라는 이미지가 각인됐다. 이런 그가 최근에는 길거리에서 ‘민주-진보 단일정당’을 외치고 있다. 배우인 그가 이제 아예 정계로 방향을 틀어버린 걸까? 그는 딱 잘라 말한다. “나는 배우다”라고. 그러나 1996년 ‘제17회 청룡영화제’에서 대상을 탄 이후 그의 행보는 여전히 심상치 않다. 유쾌한 민란 도모중인 문성근 100만 서명운덩 주도 아버지 고 문익환 목사 뜻 이어 민주진보진영 단일화 배우 문성근은 1953년 통일운동가였던 고 문익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8년 동안 평범한 샐러리맨 생활을 하다 1985년 연극배우로 데뷔했다. 이후 그의 첫 영화인 <그들도 우리처럼>으로 제 27회 백상예술대상 신인상과 제 1회 춘사영화예술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하며 영화계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이어 그는 각종 상을 휩쓸며 국민배우로 성장해 나갔고, SBS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도 진행했다. 한참이나 시간
당시 TV에 방영된 아가동산의 생활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종교의식 장면은 교주를 신처럼 받드는 사이비종교의 전형이었다. 아가동산 교주 김기순. 그녀는 행사 때마다 공주를 연상시키는 차림새였다. 신도들에게도 항상 색동옷과 족두리, 원색의 유니폼을 입혔다. 나이든 신도들도 어린이처럼 행동하고 있다. 아가동산 신도들이 무대에 앉아있는 교주를 에워싸고 강강술래 춤을 추고 있다. 아가동산의 종교의식은 초등학교 운동회처럼 춤과 노래로 가득 찼다. 종교의식다운 엄숙함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교주 김씨의 등장에 신도들은 열광했다. 반쯤은 넋이 나간 표정이다. 손만 잡아줘도 감격한다. 교주와 함께 춤을 춘 소녀들은 눈물을 흘린다. 아가동산 신도들 대부분 사회적으로 소외돼있는 노약자와 부녀자다. 아가동산의 모든 일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하루 16시간의 고된 노동에 이어 밤마다 되풀이되는 행사, 신도들은 교주에게 푹 빠지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당시 탈출 신도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책을 봐도 눈에 안 들어온다. 워낙 심적 통제가 심하다”고 밝혔다. 외출도 늘 함께였다. 아가동산은 동심으로 돌아간다
하얀 공주 옷을 입은 여자 교주를 ‘아가야’라고 부르며 따르는 신도들이 여신도와 어린아이를 때려죽이고 암매장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던 아가동산 사건. 이 사건은 1996년 사회를 발칵 뒤집은 사건 중 하나다. 아가동산을 탈출한 일부 농장 주민이 살인 및 사기혐의로 교주 김기순씨 등을 고발하면서 밝혀졌다. 1989년 아가동산 창시자…신도 30여 명이 살인 및 사기 혐의로 고발 조세포탈·폭행·횡령 혐의 유죄…살인·사기 혐의 무죄 선고 받아 아가동산의 교주 김기순씨는 원래 1978년 전라북도 이리시(현재의 익산시) 주현동 주현교회에서 같은 교회에 다니는 이교부 목사의 신도였는데, 당시 이교부 목사는 신흥 종교 ‘삭발교’의 창시자였다. 하지만 이 목사가 이른바 나체 댄스 사건(1978년 12월 3일부터 1979년 1월 11일까지 이 목사가 자신의 신도들과 함께 나체 춤을 추면서 예배를 본 사건)에 연루, 구속되어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김씨는 이 목사가 맡고 있던 조직을 이탈하기에 이른다. 1982년 아가농장 설립 그 후 김씨는 서울에 살
미모의 여성 ‘로비스트’ 린다김(59)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6년 문민정부 시절 무기 로비스트로 활동하던 린다김은 ‘백두사업’ 응찰업체의 로비스트로 활동하면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당시 국방부장관 등 국내 고위급 인사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 촉망받던 여성 로비스트는 섹스스캔들 주인공으로 전락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정권 실세들의 연서까지 받을 만큼 국제적으로 그 능력(?)을 인정받았던 린다김의 화려했지만 어두웠던 그때를 돌아봤다. 국방장관 비롯한 정·관계 고위인사들과 스캔들 한때 방송출연 하기도 해 눈길…최근 근황은? 린다김하면 떠오르는 단어 로비스트. 바로 이 로비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린다김을 치면 연관 검색어로 린다김 로비사건이 뜬다. 1996년 문민정보 시절 무기 로비스트 린다김이 백두사업 응찰업체의 로비스트로 활동하면서 입찰 과정에 의혹이 제기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린다김의 한국 이름은 김귀옥으로 성장과정이나 경력 등에 관해서는 기
1949년 6월,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다. 사건 당시 안두희는 "김구가 남북협상에 응함으로써 정치와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기 때문에 그를 죽였다"고 살해 동기를 진술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김구 암살사건은 안두희의 단독 범행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한국독립당의 비밀당원이었던 안두희가 당수인 김구를 찾아가 어떤 정치문제에 관해 언쟁을 벌이다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이라는 것. 하지만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안두희는 석 달 뒤 징역 15년으로 감형됐고, 이듬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바로 군에 복귀, 대령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다. 전역 후에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업자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4·19혁명 이후 김구 암살사건의 진상 규명과 안두희에 대한 재처벌 요구가 제기됐지만 안두희는 끝까지 전모를 밝히지 않았다. 제2공화국 정부 역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재처벌은 물론 사건의 진상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안두희의 부분진술이나 지금까지 벌인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김구 암살사건은 배후가 있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범행일 가능성이 크다.
1949년 6월26일 일요일 오전, 육군 소위 안두희는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 선생을 찾아가 45구경 권총으로 살해했다.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된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석 달 뒤 징역 15년형으로 감형됐고, 다음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현역으로 복귀, 대령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전역 후 안두희는 민족의 지도자로 존경받던 백범 김구 암살범이라는 이름하에 여러 사람들에게 피습위협을 받았지만, 암살 배후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은신과 도피를 되풀이하던 안두희의 마지막은 참담했다. 그는 백범 암살범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백주대로를 활보하는데 의분을 느낀 버스운전기사 박기서(당시 46세)씨에 의해 1996년 10월23일 처단됐다. 학창시절부터 백범 김구 선생 추앙, 안두희 살해 결심 정의봉으로 안씨 처단, 죗값 치른 뒤 평범한 일상으로 당시 79세였던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1996년 10월23일 오전 11시30분경 인천 중구 신흥동 3가 동영아파트 502호 자택에서 피습 사망했다. 안두희를 살해한 박기서씨는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했다. 부천 소신여객 버스운전기사로 일하던 박씨는 이날 오전 안두희를 찾아갔다. 마침 안씨의 부인인 김명희(당
사회에 불만을 품어 온 김기환(당시 26세)은 1993년 4월경 학교 후배 강동은, 교도소 동기 문상록 등과 함께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에서 대학입시 부정사건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가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나타내자는데 뜻을 함께하고 지존파를 결성했다. 야타족과 부유층을 대상으로 살인을 계획한 이들은 현대백화점의 고객 명단을 입수하고 이를 범행대상으로 삼았다. 살인 예행연습을 위해 7월 길 가던 20대 여성을 납치해 성폭행하고 살해, 암매장했고 8월에는 조직을 이탈한 조직원을 살해했다. 조직원 포함 총 5명 잔혹 살해 시체 암매장 사체 토막 내 불에 태우거나 일부 먹기도 해 이들은 그들의 아지트에 창살 감옥과 사체 은닉을 위한 사체 소각시설을 갖춰놓고 본격적인 살인을 벌였다. 같은 해 9월 이종원-이경숙(당시 27세·여) 커플과 중소기업 사업가 소윤오 부부를 납치해 돈을 갈취하고 이경숙씨를 제외한 3명을 모두 살해, 토막 내고 불에 태웠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피해자들의 신체 일부를 조리해서 먹는 충격적인 행위까지 저질렀던 것으로 밝혀졌다. 납치됐던 이 경숙씨는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 2명을 죽이고 지존파 일원으로
1996년 10월 말경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사업가 부부를 납치 살해하고 배신한 조직원 1명 등 총 5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뒤 사체를 암매장 하거나 불에 태운 지존파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지존파를 모방한 막가파가 등장한 이유에서다. 20세 젊은피로 구성된 막가파 조직원 5명은 40대 여성을 승용차로 잡치, 금품을 빼앗고 구덩이에 산채로 넣어 살해했다.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른 막가파의 중심에 두목 최정수(35)가 있었다. 40대 술집 여주인 납치 돈 뺏고 구덩이에 생매장 살해 사형확정수 복역 14년째, 종교에 눈 떠 참회의 삶 영위 두목 최정수를 필두로한 막가파 조직원들은 유흥가 등지에서 만나 1996년 9월 중순께 20세의 어린 나이로 지존파를 모방한 막가파를 결성했다. 조직을 결성한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범행에 돌입했다. 같은 해 10월5일 오전 2시께 최씨 등 조직원 3명은 서울 강남구 포이동 모 빌라 앞에 잠복해 있다가 일제 혼다 어코드 승용차를 타고 귀가하던 김모(당시 41·여)를 납치했다. 그들은 김씨의 눈을 가리고 청테이프로 손을 묶어 승용차 뒷좌석에 태운 뒤 김씨가 갖고 있던 현금 4
1996년 당시 피살된 최덕근 재러시아 영사는 외무직 부이사관으로 국장급이면서 외무부서 내에서 몇 안 되는 러시아 정보통으로 꼽혔다.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 공직생활 내내 러시아 관련 업무에 종사했다. 최 영사는 지난 1995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 부임하기 전에도 우크라이나 대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한 바 있다. 사장 전까지 총영사관에서 주로 맡은 업무는 대북정보수집이었으나 이 지역에 탈북자들이 많아 이 일도 담당했다. 무술에도 일가견 “쉽게 당할 사람 아닌데” 성격은 업무에 맞게 조용하면서도 매사에 흐트러짐 없이 치밀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면서도 성격이 모나지 않고 원만해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다는 후문이다. 또 어릴 적부터 운동으로 단련돼 비교적 건강한 체질이며 무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피살소식을 접해들은 주변 사람들이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닌데”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가족은 부인 김영자씨와 슬하에 1남1녀를 뒀다. 부인 김씨는 현지에서 최 영사와 함께 거주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지난 1996년, 세간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벌어졌다. ‘재러 영사 피살사건’이 바로 그것. 당시 북한의 마약밀매 동향을 추적하던 최덕근 영사는 괴한의 습격에 싸늘한 주검으로 남았다. 수사초점은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에 맞춰졌다. 모든 정황이 북한을 지목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사건은 유야무야가 됐다. 외교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러시아 형법상 살인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 올해가 끝이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해 일했던 한 외교관의 죽음이 결국 영구 미제로 남게 된 것이다. 머지않아 한·러 외교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충격적인 사건, 그 전말을 따라가 봤다.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하는 독극물 검출돼 러 무성의, 한국 소극적인 태도에 유야무야 지난 1996년 10월1일 러시아로부터 끔찍한 소식이 들려왔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 총영사관 소속 최덕근 영사가 자택 아파트 계단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 최 영사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한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뒤 귀가하던 중 괴한의 습격을 받고 피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외교관이 해외에서 살해된 것은 이 사건이 처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외에도 잠수함을 이용한 북한의 대남 간첩 침투는 여러 차례 있었다. 해군은 1983년 12월 부산 다대포에서 남파간첩을 내려놓고 귀환하던 북한의 반잠수정을 격침시켰다. 1985년 10월엔 부산 청사포 앞바다에 침투한 반잠수정을 격침시켰다. 1983년 이후 6차례 시도 교류 분위기 1998년 3건 금강산관광 등 남북교류협력 문제가 논의될 무렵인 1998년 3건의 침투 사건이 발생했다. 1996년 9월 ‘강릉 잠수함 침투’에 이어 1998년 6월 무장간첩 9명을 태운 북한 잠수정이 강원도 속초 해안으로 침투했다. 속초 해상에서 어망에 걸려 표류하다가 남한의 추격을 받자 9명 모두 집단 자살했다. 같은해 11월 강화도 부근 해상으로 침투한 북한 잠수정은 남한 해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북으로 도주했다. 12월엔 전남 여수 앞바다로 무장간첩 6∼8명을 태운 북한 반잠수정이 격침됐다. 당시 북한은 “북침전쟁 도발 구실을 찾기 위한 남한의 조작극”이라고 주장했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남북은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치열한 첩보전을 펼쳤다. 북한은 쉴 새 없이 간첩을 내려 보냈고, 정보를 캐는데 열을 올렸다. <일요시사>가 창간하고 4개월 뒤 터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혔다. 국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당시 무장공비들은 모두 사살되고 단 한명만 생존했다. 바로 이광수씨다. 그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강릉 잠수함 침투 무장공비 26명 중 유일 생포 군사시설 정보 캐러 남파…전향 후 해군서 근무 1996년 9월18일 새벽. 경찰에 한통의 신고 전화가 걸려왔다.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부근 해안도로를 운행 중이던 택시기사였다. “해안가에 정체가 불명한 선박이 둥둥 떠 있습니다. 거동이 수상한 자들도 왔다 갔다 하고요.” 비슷한 시간, 강동면 대포동에 위치한 해안초소에서도 이 지점에서 비치는 수상한 불빛과 연기를 감지해 상황실로 보고했다. 군경은 좌초된 선박이 북한 잠수함으로 확인, 공비들의 침투 사실을 인지했다. 결혼하고 학위 취득 무장공비는 모두 26명. 북한 대남공작기구중 하나인 인민무
‘한보 사태’당시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계와 관계, 금융계 등 핵심 인사 33명이 조사를 받았다. 국회에선 ‘한보 사태’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열려 58명의 증인과 4명의 참고인이 채택됐다. 정·관계 인사 33명 조사 김영삼 차남 현철씨 구속 그중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도 있었다. 문민정부 때 ‘소통령’으로 불린 현철씨는 검찰의 한보그룹 특혜비리 수사 과정에서 업체들로부터 이권청탁 명목으로 65억원을 받고 증여세 13억원을 포탈한 혐의가 드러나 1997년 구속, 2년을 복역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사건으로 대국민사과까지 했다. 현철씨는 1999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된 뒤 17대와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 2004년엔 불법 정치자금 20억원을 수수한 혐의로 다시 구속되는 수모를 겪었다. 현재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으로 있는 그는 “차기 총선에서 출마할 뜻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IMF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 1996년. 당시 암흑의 시대를 예고한 국내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의 줄도산 이어졌다. ‘대우그룹, 쌍용그룹, 동아그룹, 삼미그룹, 진로그룹, 해태그룹…’ 한국경제 파탄의 서곡을 알린 기업이 바로 한보그룹이다. 그 뒤엔 ‘로비의 귀재’ 정태수씨가 있었다. IMF 도화선 한보 부도 이어 금융스캔들 터져 15년형 선고 2002년 사면…4년째 도망자 신세 1996년 재계 서열 14위였던 한보그룹은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다 결국 이듬해 1월 부도가 났다. 이는 대기업들의 연쇄부도로 이어졌고, 한국경제의 파탄을 불러온 IMF 도화선이 됐다. 한보그룹의 부도액은 국내 부도사상 최대 금액인 1조원을 넘어 전 국민을 경악케 했다. 특히 부도 과정에서 5조7000억원에 달하는 특혜 대출 비리가 드러나 온 나라가 술렁거렸다. 권력형 금융 스캔들엔 정계와 관계, 금융계 등 핵심 인사들이 연루돼 충격을 더했다. 건국 이래 초유의 금융부정 사건으로 기록된 이른바 ‘한보 사태’의 주역이 바로 정태수씨다. 한보그룹 오너였던 정씨는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19
E1은 지난 2005년 10월부터 현재까지 축구 국가대표 공식 후원사다. 지난 2010년까지 총 64억원을 후원했다. 규모로는 나이키와 KT에 이은 세 번째다. E1은 국내 최초로 액화석유가스(LPG) 수입 사업을 시작한 대표적인 LPG 전문 기업이다. 지난 2001년부터 E1을 독자적으로 경영해 온 구 부회장은 회사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그가 건강하고 에너지 넘치는 기업의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축구 중심의 마케팅을 펼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톡톡한 홍보효과 거둬들여 LG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한 이후 구 부회장은 효과적인 브랜드 노출을 위한 파워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LPG라는 에너지 기업으로서 적절한 타깃은 중ㆍ장년층 남성. 그들이 선호하는 스포츠로 축구가 낙점됐던 것이다. 특히 아버지인 구평회 E1 명예회장이 2002년 한ㆍ일 월드컵 공동 유치를 이끌어낸 주역으로서 축구와 인연이 깊었던 점도 큰 배경으로 작용했다. E1은 현재 에너지 업계에서 유일하게 축구국가대표팀을 공식 후원하고 있다. E1은 공교롭게도 공식 후원사로 참여하면서 국가대표팀이 새로운 비상을 시작해 덩달아 E1의 홍보효과를 톡톡히 거두고 있다. E1 관계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