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살인마 유영철 비화 공개

법정서 십자가 부수고 악마가 되었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그의 이름은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언론에 이미 알려진 것들이 아닌 법원의 판례를 바탕으로 그의 잔인한 범행 수법과 범행 장소 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유영철은 1970년 전북 고창에서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세때 부친이 죽자 전반적인 경제 사정은 매우 좋지 않았다. 유영철의 지능은 보통이었고 편협한 성격으로 다른사람과 잘 융화되지 못했다. 자신의 요구 사항이 반영되지 않으면 참지 못하고 격분하는 반사회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예체능계에 소질이 많았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육상 단거리 달리기를 했고, 투포환과 기계체조를 하면서 지속적인 체력단련을 통해 손목의 힘과 악력을 길렀고 장차 화가가 되는 꿈도 꿨지만 색약 등의 이유로 예고 입학이 좌절되어 공고에 입학했다. 이후 절도 사건으로 구속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학교도 자퇴하고 전형적인 ‘비행청소년’이 된다.

기독교에 불만
신의 존재 부정

유영철은 친구의 소개로 여자친구를 만나게 된다. 사귀던 도중 특수절도죄로 구속되고 징역 10월을 선고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내심 기대했지만 실형을 선고 받는다. 법정에서 손에 쥐고 있던 나무 십자가를 부수는 등 자신이 믿어왔던 기독교 신앙에 회의를 품고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조금씩 악마가 돼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친구와 어머니의 집에서 동거하며 혼인신고까지 하면서 살게 되는데 또 다시 절도죄로 구속된다.

출소 후 경찰관 신분증을 위조해 퇴폐업소를 상대로 금품을 갈취 하는가 하면 음화판매로 벌금 300만원형을 받기도 했다. 절도죄로 수배생활을 하던 와중에도 같은 범행을 반복하다가 징역 2년형을 선고 받는다. 이후 미성년자를 강간하는 사건으로 3년5개월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때 혼인신고를 했던 여자친구에게 재판상 이혼을 당하게 된다.


이혼 재판 과정에서 모욕적인 욕설까지 듣게 되면서 그녀에게 느낀 환멸감과 극도의 배신감 때문에 여자친구와 아들까지 살해할 마음을 품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살해하기로 마음 먹는다. 교도소 벽에 출소 후 죽일 사람의 숫자까지 기재했다.

2003년 드디어 희대의 악마이자 살인마인 유영철이 탄생하게 된다. 출소 후 어머니의 집에 머물면서 과도로 큰개를 찔러보는 살인 실험을 한다.

피만 많이 나올 뿐 곧바로 죽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 유영철은 둔기로 머리를 강타하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곧바로 쓰러트릴 수 있어 보다 효과적인 살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만의 범행 도구를 특수 제작 하게 된다. 공사장에서 자루가 긴 해머와 짧은 장도리 자루를 이용해 4kg짜리 해머를 제작하고 위협용 잭나이프 칼 한자루와 범행 시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세무장갑, 목장갑을 준비한다.

준비한 범행도구만을 보더라도 주도면밀하고 계획적으로 사람을 살해하려고 마음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디어 범행 준비를 끝내고 주로 노약자와 부녀자들만 집에 있는 출근 후 오전 시간에 범행할 것을 결의하는 계획을 세운다.

2003년 9월24일 유영철에 의한 첫 피해자가 발생했다. 그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소재 A(72)씨의 단독주택 담장을 넘어 정원으로 침입했다. 집안의 동태를 살피면서 코팅 목장갑으로 갈아끼고 잭나이프를 든 채 현관문으로 들어가 거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잔인한 수법·사이코 성향 자세히 기술
주도면밀 범행…소름끼치는 사건의 전말

2층 각 방문을 열어 젖혀 유영철을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A씨를 준비한 재크나이프로 찔러 쓰러트린 후 짧은 해머로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쳤다. A씨의 옆에 있던 피해자 B씨가 장롱속에서 돈을 꺼내주려고 하자 “내가 돈 때문에 그런거 같아?”라며 해머로 B씨의 머리를 내리쳐서 살해했다.


2003년 10월9일에는 서울 종로구 구기동 소재 C(85)씨의 단독주택에 담장을 넘어 정원으로 침입해 C씨를 발견하고 재빨리 해머로 머리를 내리쳐 쓰러뜨린 후 계단을 통해 1층 거실로 내려오던 D(60)씨의 배를 발로 걷어 차 소파 쪽에 밀쳐 넣고 해머로 머리를 수회 내리친다. 뒤늦게 인기척을 듣고 계단을 내려오던 E(35)씨도 2층 복도로 끌고 올라와 두개골이 부서져 뇌가 빠져 나올 정도로 머리를 내리쳐 살해했다.

살인에 맛들린 유영철은 교회 또는 성당 부근의 주택에 침입해 2003년 10월16일 피해자 F씨를, 2003년 11월18일 피해자 G씨, H씨를 같은 방식으로 살해한다. 강도범의 소행으로 위장하기 위해 금고문을 훼손 하던 중 사용하던 전지가위가 튀면서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 마디부분이 베여 금고와 방바닥에 피가 떨어졌다. 자신의 피로 인해 범행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유영철은 피를 없애기 위해 집안에 불을 지르기로 마음먹고, 피해자들이 쓰러져 있는 1층 안방으로 내려와 주방에 있던 라이터로 신문지와 옷가지에 불을 붙였다.

범죄는 더욱 더 대담해졌다. 2003년 11월 말 서울 마포구 신수동 소재 그의 오피스텔에서 컴퓨터 스캐너 장비를 이용해 서울지방경찰청장 명의의 공문서인 경찰관 신분증을 위조했다. 2004년 2월9일 인천 남동구 간석동 오거리 육교 부근의 모텔방에서 전화로 불러낸 윤락녀인 피해자 I씨에게 위조된 경찰관 신분증을 제시하고 “윤락행위를 했으니 감방에 보내겠다”고 겁을 주며 수갑을 채웠다.

이어 전화로 모텔까지 데려다 준 사람을 위 모텔로 유인하도록 시켜 전화연락을 받고 온 피해자 J씨에게까지 위조된 경찰관 신분증으로 속여 29만원을 갈취했다. 2003년 저질렀던 4차례의 살해사건에 대해 꼬리가 잡히는 듯 했다.

교도소 벽에
죽일사람 적어

버팔로 신발을 신은 사람에 의한 연쇄살인으로 추정된다고 언론에 보도됐다. 유영철은 자신이 검거될 것을 걱정해 사건 당시 착용했던 버팔로 신발을 폐기하고 거주지도 서울 마포구 신수동 고시원에서 같은 동 오피스텔로 옮겼다. 고립, 불안감이 팽배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에게도 잠시 동안의 안정기간은 있었다. 2003년 12월께 전화방을 통해 만나게 된 K씨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잠시 심리적인 안정을 가졌으나, K씨가 그의 과거 범죄전력 뿐만 아니라 그의 직업, 학력, 가족관계에 관한 내용이 거짓말이었음을 알게 되고, 또 2004년 2월께 K가 다른 남자와 만났던 것에 대해 심한 말다툼을 한 후 K씨의 “성관계를 맺으려면 선불을 달라”는 말에 격분해 몸을 묶고 강제로 성관계를 맺다 그녀의 목을 심하게 조르는 등의 폭행을 가하면서 K씨는 유영철과의 만남 자체를 극도로 기피하게 됐다.
 

유영철은 K씨의 휴대폰으로 문자메세지를 집요하게 보내면서 재결합을 시도했으나 K씨는 휴대폰을 교체하고 거주지도 옮겼다. 연락 자체를 두절하자 그녀에게 매우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K를 살해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은 그였지만 휴대폰 통화내역 등 자료가 남아있어 곧바로 범인으로 검거될 가능성이 높아 포기한다. K씨에 대한 복수의 불길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K씨와 동종 직업에 종사하는 전화방이나 출장마사지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상대로 범행을 계획 한 것이다.

영업특성상 실종신고를 할 가능성이 적고 실종이 되더라도 찾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K씨로부터 당한 배신감을 보상받기로 마음먹었다. 인터넷 자료검색을 통해 토막살해 장면 등을 집중적으로 내려받아 살인방법을 숙지할 뿐만 아니라, 토막살해 후 사체 암매장을 쉽게 하기 위해 미리 쇠톱, 가위, 망치, 잭나이프 등 살인도구를 준비한 그는 다음 범행상대를 찾아 나섰다.

한방에 보내려
4kg 둔기 제작

그는 2004년 3월15일 서울 서대문구 소재 전화방에서 그 곳으로 전화를 걸어온 L씨와 만나기로 하고 약속장소로 갔다. 돈을 더 줄 테니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그의 말에 L씨는 의심 없이 그의 집으로 이동한다. 성관계를 한 후에도 피해자를 돌려보내지 않자 이상함을 느낀 L씨가 도망을 가려 하자 그 자리에서 L씨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살해 후 사체 운반 시 부피가 크면 발각될 것을 염려해 사체의 형체를 알아 볼수 없을 정도로 토막을 내고 잘게 부숴 10개 정도의 검정비닐봉지에 나눠 담았다. 서울 마포구 대흥동 소재 뒷산 등산로에 삽으로 구덩이를 파서 피해자의 사체를 은닉하기까지 했다. K씨로 시작된 유영철의 그릇된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4년 4월에는 전화방에서 알게된 M씨를 살해하고 피해자의 신원확인이 불가능 하도록 사체를 절단해 구덩이를 파서 묻어 피해자의 사체를 은닉했고, 2004년 5월에는 서울 서대문구 소재 피시방에서 인터넷으로 속칭 ‘조건만남’ 쪽지를 보내고 있는 피해자 N씨에게 접근해 살해하고 같은 방법으로 피해자의 사체를 숨겼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그가 살해한 사람의 수는 21명. 위와 같은 방법을 주로 사용했지만 얼굴, 엉덩이 부위 등을 수회 베고, 손목을 절단하는 등 기이한 행동도 일삼았다. 살해된 피해자들의 공통점은 교회나 성당 근처에 사는 노약자나 부녀들, 그리고 출장 마사지업소에서 일하는 윤락녀라는 점이었다.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것들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면 이런 식으로 반사회적인 성격을 표현했던 것이다.

2004년 7월15일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기동수사대는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에 출장마사지사 등 부녀자들을 유인, 감금해 소지품을 절취하거나 그 부녀자들을 연쇄 살해한 혐의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리고 2004년 6월경 살해당한 출장마사지사의 핸드폰 등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현장에서 확인됐다.

과도로 개 찔러보는 살인 실험
죽지 않자 범행 도구 특수제작

이렇게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의 살인 행각은 막을 내렸다. 체포후 그는 절도, 감금, 부녀자 살인, 부유층 주택 살인사건 혐의 등에 관해 자백과 부인을 반복하다가 간질증세가 있는 양 연극을 펼치기도 했다. 경찰관이 수갑을 풀어 주자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뛰쳐나가 재차 체포됐다. 유영철은 호송되면서도 간질 발작 흉내를 내거나 다리가 아프다며 비명을 지르는 등 갖은 술수를 다 부렸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다시 검거된 유영철은 묵비권을 행사하는 등 제대로 진술하지 않았다. 보고를 받은 수사부장은 직접 유영철을 신문하기로 결정했다.

서울경찰청 수사부장. 경찰의 별에 해당하는 경무관으로 거대 서울경찰청 형사들의 최고 우두머리가 직접 피의자 신문을 하겠다니, 위험부담이 매우 큰 모험이었다. 만약 수사부장이 신문해도 별 소득이 없다면 위신이 구겨지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방법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는 부담을 안은 결정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유영철에게도 전달됐다. 유영철은 매우 과시욕이 강하고 우쭐대기 좋아하는 심리적 특성이 있는 터라 서울 경찰 최고위 형사 간부가 직접 자신을 신문하러 온다는 사실에 흥분했다고 한다. 한국의 살인 사건 분석과 프로파일링을 주제로 범죄학 박사 학위까지 받은 김용화 수사부장이 차분히 추궁하자 유영철은 이내 자백하기 시작했다. 우선 4건의 부유층 노인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임을 자백했다.

자백 내용이 구체적이고 상세하며 범인이 아니면 모를 이야기들을 하거나 현장 상황을 정확히 재현해 그리는 점 등으로 보아 범인이 분명했다. 진술에 뒤이은 현장 답사에서도 정확히 피해 주택들을 찾아내고 사건 현장의 처음 모습을 재현해냈다.

11시간 도주하는 동안 증거가 될 만한 물건들을 버렸다는 진술에 따라 수색한 결과 유영철의 하숙집에서 멀지 않은 골목길 구석에서 범행에 사용한 해머가방도 발견해 수거했다. 나중에 이 해머의 손잡이 플라스틱 안쪽에서 피해자의 혈흔을 발견했다.

살인에 맛들려
총 21명 살해

이상한 것은 이미 4건의 연쇄살인을 자백한 유영철이 출장 마사지사 실종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것이었다. 수사부장은 계속해서 유영철이 소지하고 있던 여성용 발찌와 손목시계, 여분의 휴대전화에 대해 그 출처를 집중 추궁했다. 꿋꿋하게 거짓말에 거짓말을 거듭하던 유영철은 마침내 스스로의 거짓말에 지쳐 모든 걸 털어놨다. 10개월 동안 총 21명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은 그 해 11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ktikt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영화 <추격자> 실존인물은…끝나지 않은 유영철 트라우마 

영화 <추격자>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진 보도방 업주 노모(42)씨가 마약 혐의로 또 다시 철창 신세를 지게 됐다. 지난 10월 15일 서울북부지방법원은 마약을 구입해 투약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노씨에 대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앞서 노씨는 필로폰과 대마를 여러 차례 구입해 투약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바 있다. 

지난 2004년 연쇄살인범 유영철 검거에 결정적 도움을 준 노씨는 “유영철 검거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생겼고 이에 시달렸다”고 호소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같은 혐의로 2001년부터 2013년까지 8차례 처벌을 받았고, 2005년 이후엔 유영철 검거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세 번이나 양형 결정에 선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노씨는 유흥업소를 운영하던 지난 2004년 자신의 업소 여성이 실종되자 경찰에 신고한 뒤 자신도 추적에 나섰으며, 결국 다른 업주들과 함께 살인마 유영철을 붙잡아 경찰에 넘기고 포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노씨 인생에 치명타를 남겼다. 이전에도 마약에 가끔 손을 댔던 그는 현장 검증 과정에서 끔찍한 시체들을 직접 목격한 후 트라우마로 마약중독자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마약에 의존하던 노씨는 여러 차례 교도소를 드나들었다. 2010년에는 선처를 받기 위해 중국 폭력조직 흑사파가 국내 조직에 마약을 건네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노씨의 재판에서 배심원은 만장일치로 유죄 의견을 냈다. 재판부는 배심원의 의견인 징역 3년형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자신의 범행을 국가기관의 탓으로 돌리는 등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엄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다만 과거 검거에 기여한 경력이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가족과 지인들이 선처를 탄원하고 있다는 점 등을 참작했다고 덧붙였다.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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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