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모르게…국민연금 비공개 투자내역

수십조 들어간 베일 싸인 투자처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자본시장의 대통령. 500조원 규모의 국민연금을 운용하는 기금운용본부를 일컫는 말이다. 세계 3대 기금으로 성장한 국민연금은 마이크로소프트·애플 등 초국적 기업은 물론이고, 일본 전범기업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기금 가입자이자 수급자인 국민은 내 연금이 어느 곳에 투자됐는지 알기 어렵다. 박근혜정부 들어 기금운용본부는 일부 투자 포트폴리오를 공개하고 있지만 여전히 베일에 싸인 투자처가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1000조. 국민연금관리공단(이하 연금공단)이 2022년께 운영할 것으로 예상되는 연기금 규모다. 세계 3대 기금(일본 연금펀드·노르웨이 국부펀드·한국 국민연금)으로 성장한 국민연금은 국내는 물론 세계 금융시장이 주목하는 '큰손'이다.

연금공단이 2014년 12월 작성한 '기금운용 연차보고서'를 보면 1988년 5300억원으로 시작한 국민연금은 2003년 100조원, 2007년 200조원에 이어 2010년 300조원이 넘는 연기금으로 부상했다. 2014년 말 기금적립금 470조원을 돌파한 국민연금은 올해 들어 이미 500조원을 달성했으며, 2020년에 847조원, 2043년에는 2561조원까지 재원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3대 기금
1000조 가시화

국민이 납부한 '사회보험'인 국민연금은 단순 저축이 아닌 분산투자 형태로 자산이 보전된다. '기금운용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연금공단은 2014년 말 기준 국민연금 재원 470조원 가운데 45%에 해당하는 212조4000억원을 기금운용 수익금으로 조성했다. 1998년부터 2014년까지 금융 이자, 주주 배당, 투자 회수 등으로 200조원이 넘는 재원을 조달했다는 것이다. 연금공단 측이 밝힌 연평균수익률은 6.21%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사모펀드 등 일반 투자자와 달리 단기적인 이윤만 쫓을 수 없다. 일정 부분 기금운용에 대한 사회적인 책무가 요구된다. 연금재정의 장기적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 과제이지 이윤 극대화가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연금공단은 연금 가입자와 수급자의 재산을 관리하는 수탁자로서 충실의무와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진다. 이를 '신의성실의무'라고 부르는 데 기금운용 관련자들은 오직 가입자와 수급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전문적 판단 하에 신중하게 의사결정을 하도록 돼 있다. 바꿔 말하면 오직 국민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연금공단은 최근 국민의 이익에 반한 의사결정과 일본 전범기업 투자로 논란이 됐다. 지난 5일 전북 전주에서 열린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국민연금 투자실태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의결권 행사 등에 대한 집중 추궁이 이뤄졌다.

대기업 편들고
전범기업 투자

이날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의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본질은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라며 "이 과정에 2000만 국민의 노후자금을 책임지는 연금공단은 수익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에 적극 협조했다"라고 주장했다.

실제 연금공단은 합병 발표 전 한 달간(5월1일~26일) 거래량 가운데 10%에 달하는 물량을 매도해 주가를 낮추는 데 공헌했다. 합병비율 역시 연금공단이 추산한 1대 0.46에 못 미치는 1대 0.35에 그쳤다. 그럼에도 연금공단은 삼성일가가 삼성물산(통합) 지분 3.02%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앞서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은 삼성물산 주주총회 2주 전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과 만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신의성실의무를 위반했다는 지적이 안팎에서 제기됐다. 이후 홍 본부장은 자신의 상관이자 인사권자인 최광 이사장과 갈등설이 퍼지면서 연임이 저지됐다.

국연 500조 시대…2022년 1000조 돌파
대기업 오너 경영권 강화용으로 악용


이번 국정감사에서는 기금운용의 '도덕성'과 관련한 지적도 나왔다. 새정치민주연합 인재근 의원은 기금운용본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근거로 "연금공단이 최근 5년간 일본 기업에 16조원을 투자했으며, 이 가운데 4조5000억원은 일본 군수기업과 전범기업, 야스쿠니신사 지원 기업 등에 투자됐다"라고 밝혔다.

인 의원이 밝힌 투자처는 미쓰비시 중공업과 가와사키 중공업, 미쓰비시 전기 등 21곳이다. 투자 규모는 1조2000억원에 육박했다. 인 의원은 "연금공단이 전범기업 97곳에 3조원 이상을 투자했다"고도 말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지원기업인 돗판인쇄에 30억원가량을 투자한 사실 또한 논란을 야기했다. 돗판인쇄는 2014년판 야스쿠니 달력 27만부를 제작하는 등 우익성향의 회사로 분류된다. 인 의원은 "국익을 해치는 행위를 하는 기업에 투자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편에선 수익률만 따지면 일본만한 시장이 없다는 반론도 나온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이 내놓은 국가별 투자 분석에 따르면 일본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수익률(13% 내외)이 높은 시장으로 알려졌다. 전범기업의 일본 내 비중 또한 5분의 1에 해당한다는 것이 투자 찬성론자들의 주장이다.

실제 흥미로운 자료가 있다. 연금공단이 2013년 하반기부터 공개하고 있는 '국민연금기금 해외주식 투자종목 내역'을 보면 기금운용본부가 10억원 이상의 투자처로 삼은 기업은 2659곳에 이른다. 미쓰비시 등 일본 대기업의 주식도 일정 비율 보유하고 있다. 기금운영 포트폴리오상 2006년 11.6%였던 주식투자 비중은 2014년 29.9%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해외투자 비중은 9.4%에서 21.8%로 확대됐다.

종목별 분류에서 해외주식 투자총액 1위는 마이크로소프트(4856억원)였다. 2위는 오라클(4691억원), 3위는 애플(4359억원)로 모두 미국계 IT기업이 차지했다. 4위는 미국 은행인 웰스파고(4296억원), 5위는 스위스 바젤에 본사가 있는 제약회사 노바르티스(3844억원)였다.

그 다음으로 스위스 제약회사 로슈(3698억원), 미국 투자은행 JP모건(3599억원), 미국 제약회사 존슨앤존슨(3142억원)이 각각 이름을 올렸다. 9위를 기록한 업체는 구글(3048억원)로 확인되며, 10위는 비아그라 생산업체로 유명한 제약회사 화이자(3042억원)였다.

이밖에 시티그룹, 네슬레, 페이스북, 인텔, 엑손모빌, AIA, 시스코(미국 보안업체), 뱅크오브아메리카, 사노피(프랑스 제약회사), 아마존 등이 국민연금의 해외주식 투자처로 나타났다. 국민연금은 미국의 대표 상장지수펀드(ETF)인 'SPDR S&P 500 ETF Trust'에도 2659억원(14위)을 투자하고 있다. 투자순위 20위권 밖에 있는 기업들도 P&G, 필립모리스 등 세계적인 기업이다.

미국 일변도
부동산 쉬쉬

일본 도요타(1804억원)는 38위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 텐센트(2283억원), 바이두(2199억원)가 각각 22∼23위를 기록한 것과 대조적이다. 물론 해당 자료는 주식만을 표집으로 했기 때문에 투자 총액으로 간주하는 데 무리가 있다. 해외주식 지역별 보유비중은 북미권이 53.47%, 유럽이 24.19%, 아시아(일본 제외)가 10.43%, 일본이 6.9%, 남미가 1.69%, 아프리카 및 중남미가 0.71%로 나타났다.

연금공단이 채택한 '2014∼2018년 중기자산배분안'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포트폴리오는 국내주식 20% 이상, 해외주식 10% 이상, 국내채권 50% 미만, 해외채권 10% 미만, 대체투자 10% 이상으로 조정될 예정이다. 이 가운데 2014년 기준 대체투자 비중은 9.9%(46조7000억원)를 기록했다. 대체투자란 부동산, 인프라, 벤처투자, 사모투자 등을 포함한 고수익 모델을 지칭한다.

기금운용본부는 해외투자 비중을 늘림은 물론 대체투자 비중을 높인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연금공단에서 기금운용본부를 독립시켜 공사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좋게 보면 수익성에 특화된 미국식 전문가그룹을 만들자는 것인데 나쁜 예를 들면 미국 내 투자집단은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원흉으로 지탄받는다.


글로벌 '대체투자' 비공개
전범기업·페이퍼컴퍼니 논란

금융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투자 다변화를 위해선 해외투자와 대체투자가 불가피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문제는 있다. 복잡한 투자모형을 설계해 국민의 감시에서 벗어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최소한의 정보조차 공개하지 않으려는 '비밀주의'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연금공단은 국내대체투자 및 해외대체투자 내역에 대한 정보 공개를 꺼리고 있다. 말 그대로 중개기관이 '대체' 형태(펀드·신탁 등)로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약관계상 상세한 내용을 공개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일반 국민으로서는 돈의 용처를 가늠하기 어려운데 연금공단이 '인프라투자' '프로젝트형 부동산투자' 등으로 투자 내역을 명시하고 있는 까닭이다.

가령 서울 중구 충무로에 있는 극동빌딩은 연금공단이 소유하고 있다. 연금공단은 부동산신탁회사 리츠 '지이엔피에스제1호'를 통해 빌딩을 매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2월 탐사보도 전문매체 <뉴스타파>가 보도한 연금공단의 프랑스 오파리노 쇼핑센터, 독일 베를린 소니센터 매입은 기대했던 수익률에 한참 못 미쳐 비판받았다. 특히 페이퍼컴퍼니 설립을 통한 '우회 투자'는 조세회피 문제와 연결됐다.

또 국민연금은 미국, 중국, 싱가포르 등 해외 26개 투자회사에 부동산 투자를 맡기며 보수를 지급하고 있다. 매년 소요되는 수수료만 4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감사원은 지난 2월 '국민연금 운용 및 경영관리 실태' 감사 보고서에서 해외대체투자 평균 수익률이 3% 내외라고 발표했다. 해외대체투자는 전액 중개기관이 위탁운용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외국인이다.

자원외교 실패에
국민연금 동원설


대체투자의 위험성은 지난 6월 CBS 등이 보도한 하베스트 투자 계획 등에서도 드러난다. 캐나다 하베스트는 이명박정부 당시 한국석유공사가 4조5000억원을 들여 인수한 정유회사다. 이후 이른바 '깡통' 논란에 휩싸이며 현재는 부도 위기에 직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부실 회사에 국민연금을 투입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발상이었다. 정부 실책을 감추기 위해 국민연금을 동원할 경우 대체투자라면 그 실상에 접근하기 어렵다.

기금운용본부는 대체투자로 서울외각순환 민자도로를 매입한 뒤 통행료를 걷고 있다. 2015년 2분기 기준 지분 5% 이상을 획득한 기업만 215곳에 이른다. 삼성, 현대차그룹, SK 등 대기업은 물론이고, SBS 등의 지분도 함께 갖고 있다. '자본시장의 대통령'이란 별명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권력이 막강한만큼 그에 따른 감시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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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