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천경자 화백의 사망 소식이 뒤늦게 알려진 가운데 여러 의문점이 고개를 들고 있다. 천 화백의 큰딸 이혜선씨가 미국으로 건너간 사이 차녀 김정희씨 등 다른 유족들은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어머니의 유해가 어디 있는지 알려 달라"라고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유족들은 진품 논란이 불거진 '미인도'와 관련해 "위작이라는 증거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천 화백을 둘러싼 미스터리의 진실은 무엇일까.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천경자 화백의 유족이 주최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천경자 화백의 장남 이남훈 팀-쓰리 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회장, 차녀 김정희 미국 메릴란드주 몽고메리 칼리지 미술과 교수, 둘째 사위 문범강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차남 고 김종우의 부인 서재란씨가 자리했다. 오랜 기간 천 화백을 수발한 장녀 이혜선씨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보다 앞선 지난달 22일 천 화백의 사망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천 화백이 석달 전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올 여름 큰딸 이씨가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았다는 보도를 통해서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이씨의 부탁을 받고 관련 사실을 숨겨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2월 대한민국예술원은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천 화백에게 지급해온 수당 지급을 중단한 바 있다. 당시 이씨는 예술원이 생사확인을 위해 요구한 천 화백의 의료기록 등을 제출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천 화백의 근황을 알고 있던 유일한 혈육인 이씨는 외부와의 접촉을 꺼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씨는 천 화백이 지난 2003년 7월 뇌출혈로 쓰러진 뒤 타계하기까지 곁에서 돌봤다. 시중에는 '이씨와 남은 유족들의 관계가 좋지 못하다'는 불화설이 퍼져있다. 천 화백의 차녀 김씨 등은 기자회견에서 "어머니의 유해가 어디 있는지는 알려 달라"라고 이씨에게 요구했다. 이씨는 다음날(10월2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여러 문제가 정리되면 그때 공개하겠다"라고 답했다.
[미스터리1]
사망 시점은?
그간 미술계 안팎에선 천 화백이 10여년 전 세상을 떠났다는 이른바 '사망설'이 돌았다. 하지만 이씨를 비롯한 유족들은 천 화백의 사망 시점이 8월6일임을 확인했다.
이씨는 지난달 28일 미 보건당국이 발급한 사망진단서를 한 언론에 공개했다. 사망자의 이름은 'Kuyngja Chun'(경자 천), 직업은 Painter(화가)로 기재됐다. 사인은 자연사(natural causes), 사망일은 8월6일이었다.
김씨 측도 "지난 4월5일 (병상에 있던) 천 화백을 만나고 왔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달 28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사망설은 사실이 아니며) 언니(이씨) 말이 맞다"라고 강조했다.
[미스터리2]
유해 소재는?
그러나 김씨는 모친의 유해를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다. 이씨는 고인의 유해가 안치된 곳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같은 날 김씨는 "기자회견 이후 이씨에게서 따로 연락을 받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지난 8월 미국 맨해튼의 한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치른 유해는 한국에 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뒤 종적을 감췄다. 이씨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엄마의 유해를 지키겠다"라고 말했다.
앞서 김씨 등은 지난달 19일 한국의 한 은행으로부터 천 화백 명의의 통장이 해지되는 과정에서 전화를 받고서야 모친의 사망 사실을 알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씨는 "어머니를 사랑으로 보내드려야 하는데 이렇게 논란이 된 것에 대해 송구하고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사망 둘러싼 여러 의문점 제기
작품 행방·유언장 등 수수께끼
일각에선 천 화백의 유산을 둘러싼 상속 문제가 이번 갈등의 원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유언장이 없다면 천 화백의 그림 300여점은 한국법에 따라 이씨와 김씨 등 4명의 가족이 분할 상속받게 된다.
하지만 김씨는 일단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김씨는 "생전 어머니가 작품에 대한 권리를 언니에게 위임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며 "재산 갈등으로 (언론에) 비춰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
[미스터리3]
재산 규모는?
천 화백은 박수근·이중섭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근현대화가로 불린다. 여류 작가 가운데는 가장 사랑 받는 작가로 꼽힌다. 강렬하면서도 이국적인 색채의 그림은 미술시장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지난 3년간 천 화백의 그림은 1호당 3000~5000만원 선에서 거래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천 화백은 다작을 하는 편이 아니었으며 작품 관리가 철저해 거래량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 평창동 소재 한 갤러리 실장은 "서울 옥션 등 시장의 수요는 있지만 비슷한 급의 인기 작가와 비교해 경매가 활발한 편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지난 2012년 전남 고흥군으로부터 천 화백의 작품 66점을 돌려받았다. 해당 작품들은 천 화백이 자신의 고향에 기증한 것이다. 당초 고흥군은 천경자미술관 건립을 추진했지만 대리인인 이씨와 건축 설계를 놓고 갈등 끝에 미술관 건립이 무산되자 작품을 반환했다.
이듬해 이씨는 천 화백이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직접 기증한 작품 93점에 대한 반환도 요구했다. 당시 이씨는 '작품 관리가 소홀해 훼손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결과적으로 반환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를 계기로 미술계에선 이씨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힘을 받기 시작했다.
김씨는 "미술관 측에 관리 수준을 높이라고 요구하는 게 맞지 반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반면 미술계 관계자는 "이씨가 돈을 목적으로 그랬다기보다는 모친의 생각을 잘 알기 때문에 작품을 온전히 유지코자 하는 마음이 더 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국립미술관 학예실장 출신 한 교수는 "일반적으로 작품은 팔아야 돈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만약 이씨가 모친의 작품을 팔 의사가 없다면 재산으로 간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스터리4]
미인도 출처는?
천 화백은 지난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에 휩싸였다. 당시 상심을 겪고 절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꾸준히 작업했으며 "그 작품들은 이씨가 갖고 있다"라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또 미인도 위작 논란과 관련해 김씨 측은 "위작이라는 증거를 갖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지난 1999년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림의 소장경위 등을 추적해 진품으로 결론 냈다.
천 화백의 미인도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자택을 압류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가 1991년 판화 형태로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미인도는 천 화백이 김 전 부장에게 직접 선물했거나 화랑을 거쳐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김씨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어머니가 선물을 할 이유가 없었으며, 김재규란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만약 천 화백이 김 전 부장에게 직접 미인도를 건넸다면 진품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게 사실이다. 중간에 '바꿔치기' 했을 가능성을 제외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천 화백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김 전 부장의 미인도 입수 경위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