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킹 파문' 국정원 별동대 해부

드러난 세력…들통난 공작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의 해킹 사건과 관련해 연일 의혹이 쏟아지고 있다. 핵심은 우리 정보기관이 자국민을 사찰했는지 여부다. 당장 국내 이동통신사(SKT) 가입자를 상대로 한 해킹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파문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불과 1년 전 '간첩 증거 조작' 사건으로 지탄받았던 국정원은 또다시 국민적 의혹의 중심에 섰다. 국정원이 추락한 원인을 놓고 정보기관 안팎에선 협력자그룹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꼽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정원에는 여러 조직이 있다. 외부로 공개되진 않았지만 '인터넷 동향'을 체크하는 부서도 있다. 국정원 직원이란 말을 듣고 막연히 '제임스 본드'를 떠올리면 오산이다. 누군가는 정보를 취득하고 누군가는 정보를 분석한다. 또 누군가는 이들이 원하는 정보를 취득·분석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도·감청 핵심

지난 18일 숨진 국정원 직원 임모씨는 정보파트가 아닌 지원파트에서 20년간 근무해 온 베테랑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내 사이버 안보분야 전문가로 전해진 임씨는 정보파트 직원들이 공작 대상을 선정하면 기술적인 지원을 통해 대상자와 접촉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맡았다.

임씨는 앞서 이탈리아 해킹팀으로부터 문제가 된 RCS(리모트컨트롤시스템) 프로그램을 직접 구입한 당사자로 지목됐다. 결과적으로 임씨는 당시의 결정이 빌미가 돼 안타까운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울 수는 없다. 국회 내 정보위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국정원 내부 여론은 '임 과장(임씨)의 잘못이 없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카카오톡 해킹 연구' 등 스파이웨어 개발 의뢰는 국정원 내부 필요에 따라 임씨가 실무자로서 '총대'를 멨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정원을 오랜 기간 취재한 한 방송사 기자는 "국정원이 2000년대 초·중반까지 자체 개발(혹은 임대)한 프로그램(R2)을 이용해 도·감청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해킹팀을 비롯한 IT회사에 용역을 넘긴 시점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 국정원은 지난 2005년 일명 '미림팀' 사건에서 갈고닦은 도·감청 실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국정원은 노태우정부부터 김영삼정부까지 사회지도층 인사 수천여명을 동시에 감청했다. 유력 인사가 모인 자리에는 어김없이 도청테이프가 돌아갔다.

국정원의 이 같은 전방위 사찰은 각 거점에 은밀한 협조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명 요정, 호화 룸살롱, 고급 식당을 포함해 호텔 로비 등에도 국정원이 포섭한 종업원이 암약했다. 전직 기무사 관계자는 "지금도 몇몇 마담이 정보기관의 '귀' 역할을 하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국정원의 무차별 감청은 일상생활의 많은 영역이 온라인으로 넘어가면서 곧 한계에 부딪혔다고 전해진다. 스마트폰의 유입, 보안 프로그램의 발달은 일부 감청 업무를 '외주화'한 계기가 됐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국정원은 민간 차원에서 이뤄진 기술 발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3년 국정원 업무조정에서 '테킨트' 기능 강화를 언급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테킨트는 기술을 뜻하는 테크놀로지와 정보를 뜻하는 인텔리전스의 합성어다. 정보기관에서는 특정 정보수집 방식(또는 해당 방식으로 얻은 정보)을 가리킨다. 한 마디로 기계를 사용해서 얻는 정보다. 가령 미국은 고성능 인공위성을 사용해 북한에 있는 핵실험 기지를 확인하고, 평양 시내를 오가는 차량 종류와 번호판까지 판독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국정원은 영상 형태의 정보 수집 능력에서 미국과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미 정보당국의 도움 없이는 북한의 핵실험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대신 국정원은 특정 인사를 겨냥해 유·무선 전화통화와 이메일을 감청하는 데 열을 올렸다.

각 이동통신사와 대형 포털사이트가 국정원의 협력자라는 의혹이 있다. 풍문으로는 국정원의 비밀요원인 '블랙'이 한 통신회사에 상주하고, 온라인 뉴스 편집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확인되진 않고 있다. 국정원과 연관된 모두 업무가 비밀인 까닭이다.


문서 위조에 자료 해킹까지 '발칵'
공기관 정보원 등 외곽그룹에 의존

대체로 국정원은 'NLL 논란'에서 보듯 '부업'인 국내 여론전에서 위력을 드러냈다. 반대로 '본업'인 대외 정보력에선 허점을 드러냈다.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은 물론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때조차 관련 정보를 재빨리 인지하지 못했다. 이는 국정원의 핵심부서인 대북 정보파트가 약화됐다는 증거다. 정보 전문가들은 국정원의 대북 휴민트 붕괴를 주된 이유로 꼽고 있다.

휴민트는 인간을 뜻하는 휴먼과 정보를 뜻하는 인텔리전스의 합성어다. 풀이하면 사람을 출처로 얻는 정보다. 일반적으로 내부협력자 또는 공작원(혹은 적대그룹)을 통해 얻는 '말'을 가리키지만 보고서나 책 등도 휴민트의 영역에 포함된다.

이 가운데 내부협력자로부터 나온 정보는 선호도가 높다. 신뢰성에 의문이 있지만 파괴력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공작 대상의 '민감한 정보'는 그와 가까이 있는 내부자만이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북한 수뇌부와 관련한 정보는 당 기관지(로동신문)나 국영방송(조선중앙TV)을 제외하고 온전히 고급 휴민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정원은 앞서 밝혔듯 대북파트에서 약점을 노출했다. 때로는 언론을 통해 북한발 소식을 흘려 국내 정치에 혼란을 야기했다. 불확실한 정보의 출처로는 일부 탈북자그룹이 지목됐다. 북한 내 고급 정보원을 잃어버리자 상대적으로 접근이 용이한 탈북자그룹을 꾀어내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주장이다.

남한 국적을 희망하는 탈북자들은 북한을 빠져나와 중국을 경유, 제3국을 통해 입국한다. 이 과정에서 국정원의 직간접적인 도움을 받게 된다. 간혹 중국에서 직접 밀항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공안에 체포될 경우 강제북송을 각오해야 한다.

일반적인 탈북자들은 브로커를 통해 남한 정부와 접촉한다. 탈북자 브로커인 Y씨는 "중국과 미얀마, 라오스 등을 오가며 국정원과 여러 번 손발을 맞췄다"라고 말했다. Y씨는 중국에 파견된 국정원 직원(블랙)이나 영사관에 소속된 영사(화이트)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했다. 외교적인 마찰을 피하기 위해 중국 공안을 포섭하는 것도 그의 임무였다.

Y씨는 자신이 상대한 블랙요원 '김 사장' 등을 기억했다. 기자와 만났던 그는 "우리(브로커)가 없었다면 영사관이나 국정원 모두 국가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또 "공안에게 돈을 건네고, 북한을 오가는 무역상에게서 정보를 빼내고, 북한 주민과 통화를 시켜주는 등 모든 일이 불법인데 이런 일을 어떻게 국가 공무원이 직접 할 수 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실제 '유우성 간첩 증거 조작 사건'에서 탈북자 출신 중국 국적자 김모씨는 국정원의 협력자로 일하며 위조된 공문서를 국정원에 건넸다. 또 북한을 드나든 일부 화교 출신 탈북자들은 유우성씨와 관련한 악의적인 소문을 정보기관 쪽에 퍼뜨리기도 했다. 국정원은 이처럼 한 루트의 휴민트만 맹신했다가 역풍에 휩싸였다.

국정원의 협력자는 일본에도 있다. 과거엔 주로 조총련계 재일교포였다고 한다. 드물게는 스포츠선수가 일본을 오가며 협력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지금은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주는 수준'이라 것이 정보당국 관계자의 설명이다. 일본에 있는 요원들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휴민트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이다.

해외 공작의 비중을 줄인 국정원은 상당한 역량을 국내로 집중했다. 댓글을 통한 대선 개입을 지시하는 등 이들의 공작은 무고한 시민을 향했다. 그 사이 진짜 휴민트는 자취를 감췄다. 풍선효과처럼 테킨트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이 가운데 임씨가 조직을 위한 '무명의 충성심'을 발휘했던 것은 아닐까.

정보의 외주화?


올해 국정원 앞으로 할당된 특수활동비는 4782억3600만원이다. 영수증이 필요 없는 현금성 예산이다. 블랙 요원들은 이 돈을 정보 공작에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선수(정보요원들을 가리키는 은어)들이 쓰는 술값"이라고 말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협력자 김씨와 Y씨 모두 국정원과 약속한 공작금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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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