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종 게이트> ④박근혜 위기탈출 카드 포착

또 물타기? 노무현 잡고 이완구 보낸다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권력기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성완종 게이트'로 낭떠러지에 몰린 여권은 위기를 타개할 '물타기' 카드를 찾고 있다. 표적은 다시 '그 사람'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정원, 국세청이 앞장서고, 검찰은 뒷짐 진 채 특검을 합의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모습이다.

지난 10일 국가정보원이(이하 국정원)이 청와대에 보고하던 이른바 '정치보고서' 작성을 중단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국정원 내부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은 지난 9일 <서울신문> 기자를 만나 이 같이 밝히고 "국정원은 대북 및 해외 관련 업무에 주력할 방침"이라고 주장했다.

국정원 정치개입
비선라인 가능성

국정원은 지난해까지 특정 정치인의 동향이나 정치 현안 등의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해 청와대에 전달했다. 보고서는 크게 두 종류로 대통령이 열람하는 'VIP용' 보고서와 수석실(주로 민정)이 참조하는 '수석용' 보고서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매일 아침 청와대는 국정원이 서류봉투에 담아 보낸 보고서를 읽고 국정현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과거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일요시사>에 정치보고서의 위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통령 자리에선 정무적인 결정을 할 때 수백장에 달하는 모든 보고서를 읽어볼 수 없으므로 국정원 보고서가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될 수밖에 없다. 또 국정원의 힘은 ‘정보’에서 나오는데 정권 안보에 방해되는 ‘세력’을 제거하고자 할 때 국정원만큼 신뢰할 수 있는 조직은 없다."

그런데 보도대로라면 국정원은 자신들의 중요한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국정원 관계자는 같은 날 "정치개입 소지가 있는 것은 일절 안 한다"라고 주장했다. 여권 관계자도 "이병기 전 원장(현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 정치보고서를 없앴고, 이병호(현 국정원장) 체제에서도 변한 게 없는 것으로 안다"라고 거들었다.


앞서 국정원은 '대선 개입'으로 촉발된 야권의 비판에 내부 개혁을 약속하면서 "국내 정치 개입 금지"를 공언했다. 긍정적인 시각에서 보면 자신들의 약속을 이행한 것으로 풀이됐다. 반면 청와대 입장에선 다른 해석이 가능했다. 국정원이 자체 취득한 국내 정치정보를 대통령과 직접 공유하지 않겠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혹은 국정원보다 더 믿을 만한 '비선조직'의 개입 가능성이 점쳐진다. '누군가'가 대통령과 국정원의 직접적인 접촉을 막고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으로부터 정례보고를 받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완종 게이트
국정원에겐 기회

공교롭게도 국정원의 '정치보고서 작성 중단' 보도가 나온 날, 초대형 폭로가 정치권을 덮쳤다. 두 전직 청와대 비서실장의 억대 금품 수수 의혹이다. 이들에게 돈을 건넸다고 폭로한 사람은 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다. 성 회장은 지난 9일 판도라 상자를 열고,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십상시 파문'조차 비교 불가한 비자금 스캔들은 일파만파 확대됐다. 성 회장은 생전 마지막 유언과 메모를 통해 정권 최고실세로 일컬어지는 8인을 지목했다. <경향신문>과의 단독 인터뷰가 만든 소용돌이는 메가톤급 파괴력을 가진 허리케인으로 확대돼 정권을 직접 타격했다.

최초 공개된 성 회장의 메모에는 '김기춘 10만달러' '허태열 7억원'이란 내용이 적혀있었다. 두 전직 비서실장 외에도 남은 6명의 신원이 속속 공개됐다. 메모 속 인물은 '홍준표(1억), 서병수(2억), 홍문종(2억), 유정복(3억), 이병기, 이완구'였다.

<경향신문>은 지난 16일 지면에서 '성완종 인터뷰' 녹취록 전문을 공개했다. 메모에 쓰인 내용과 성 회장이 생전 육성으로 밝힌 주장은 같았다. 보도 과정에서 이완구 국무총리가 성 회장으로부터 3000만원을 받았다는 의혹도 새롭게 제기됐다. 이 총리는 '목숨' 운운하며 결백을 주장했다.


성 회장이 남긴 '성완종 리스트'는 박근혜정부 전·현직 핵심 참모 및 새누리당 유력 정치인을 궁지로 내몰았다. 아울러 이들 대부분은 소위 친박계 정치인이자 각종 선거 과정에서 박 대통령을 도왔기 때문에 청와대가 직격타를 맞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국정원·국세청 동원 비선라인 존재 촉각
참여정부 겨냥해 성완종 사면 의혹 조준

국정원은 이 시점에 등장했다. 얼결에 메모를 입수한 검찰이 대응방향을 고심하고 있을 때 국정원은 발 빠르게 움직여 첩보를 수집했다는 주장이다. 국정원이 모은 정보는 메모 속 8인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국정원은 스스로 선언한 '정치 개입 중단'에 충실했다. 이들은 '기업인'인 성 회장의 과거, 그 중에서도 참여정부 당시 사면을 받았던 정황에 주목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정기관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지난 14일 "국정원이 불리한 국면에서 성완종의 사면 사실을 신속히 밝혀 공을 세웠다"라고 말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여권에 말문을 터줬다는 것이다.

이어 이 관계자는 “'물타기'를 하려는 것인지, 국정원 직원들이 경남기업의 인수합병 과정과 민·관 공사 수주 과정에 대해서도 파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국정원은 정치보고서를 작성하지 않겠다고 했을 뿐 첩보 수집을 멈추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다.

또 다른 관계자는 "사정 정보라인에서 '그런 얘기'가 돈 것을 들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 권력기관이 합동으로 성 회장의 과거 행적을 쫓고 있는 상황을 인정했다. 물론 여당 정치인은 예외다. 첩보수집의 방향성은 철저히 참여정부에 맞춰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를테면 참여정부 당시 경남기업이 자사 브랜드인 경남아너스빌을 여러 곳에 착공했는데 이 과정에 특혜가 있었다는 제보를 흘리는 식이다. 정보의 진실성은 중요치 않다. 최대한 참여정부가 부각될 수 있는 '찌라시'를 모아 언론을 통해 의혹을 제기하게끔 하고 "여야 모두가 잘못했다"는 쪽으로 여론이 형성되면 성공이다.

국정원의 동향을 전한 관계자는 "만약 '성완종 리스트'에 김기춘이 아닌 문재인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면 어땠을까. 마찬가지로 여당에 불리한 정보를 취합해 균형을 맞췄을까. 나는 아나라고 본다"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박근혜정부가 위기 탈출을 위해 '노무현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절묘한 타이밍
국세청도 가담

관계자들의 주장은 현실로 드러났다. 국세청은 같은 날 조사관 20여명을 투입해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복수 언론은 16일 "이번 조사가 정기 또는 비정기 조사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라고 보도했다. 정기 조사는 말 그대로 정기적(4~5년)으로 하는 세무조사이며, 비정기조사는 불투명한 자금 거래 등을 밝히기 위해 임의로 하는 특별조사다.

국세청은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를 기획하면서 사전 통지를 생략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국세청이 '특수한 시점'에 맞춰 세무조사에 착수한 뒤 언론을 활용한 셈이다.


지난 2008년 국세청은 태광실업 세무조사로 노 전 대통령을 겨냥한 사정작업의 포문을 열었다. 박 회장은 당시 탈세와 정관계 로비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2년6월을 판결 받았다. 만기 출소한 박 회장은 최근 해외에 머물고 있다. 급작스런 세무조사에 대응하기 힘든 상황이다. 특정 기업에 대한 세무조사는 그간의 사례를 비춰봤을 때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있을 개연성이 높다.

국세청은 박근혜정부 들어 '연말정산 파동'과 '세수 결손' 등으로 미운털이 박혔다. 증거 조작으로 물의를 빚은 국정원과 마찬가지로 조직의 입지가 위태롭다. 정권 차원의 위기 상황은 조직의 '충성'을 시험할 수 있는 무대다. 이 같은 배경으로 국정원과 국세청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는 주장도 있다.

검찰은 주춤한 모습이다. 성 회장을 압박해 이명박정부 실세를 낚으려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죽음을 통해 드러난 성 회장의 실체는 'MB맨'이 아닌 '근혜맨'이었다. 결과적으로 검찰은 벌집을 건드려 '아군'에 피해를 입혔다.

박근혜-김무성 단독회동
'이완구 자르기' 합의설

'MB를 직접 겨냥하진 못할 것'이란 세간의 예측은 맞아 떨어지고 있다. 성 회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원 쪽을 뒤지다 없으면 그만둬야지. 마누라와 아들, 오만 것까지 다 뒤져서 가지치기 해봐도 또 없으니까 1조원 분식 얘기를 했다. (검찰이) 저거(이명박정부의 자원외교)와 제 것(배임·횡령 혐의)을 '딜'하라고 그러는데, 내가 딜할 게 있어야지요"라고 말했다.

이는 성 회장에 대한 수사가 궁극적으로는 이명박정부를 겨누기 위한 발판이었다는 증거다. 하지만 성 회장의 죽음을 계기로 관련한 수사는 사실상 중단된 상황이다.


발등의 불은 '친박'의 명운을 쥔 대선자금 수사다. 그러나 일각에선 검찰의 수사의지를 의심하고 있다. 당장 검찰 주변엔 USB를 비롯한 핵심 증거 확보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나아가 <조선일보>는 지난 17일 "여야 인사 14명이 포함된 '성완종 장부'가 나왔다"라고 보도했다. 보도의 핵심은 '여'가 아닌 '야'다. 지금껏 언급되지 않았던 야당 정치인 7~8명에 대한 로비 자료가 포함됐다는 내용이다. 관련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의심되는 '윗선'은 성 회장이 언급한 8인에 대한 수사를 늦추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신 야권이 연루된 자료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한 관계자는 알렸다.

<조선일보>가 보도한 야당 정치인 중 일부는 성 회장으로부터 '통상적인' 정치후원금을 받았다. 이는 성 회장이 여당 쪽에 제공한 '대선 자금'과는 성격이 다른 돈이다. 그럼에도 검찰은 이 부분에 대한 수사를 보강할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내부에선 검찰의 역할을 '여야 균형 맞추기'로 보는 분위기다.

이완구 아웃?
문재인 엮는다

특히 여당은 특검 도입을 주장함으로써 야당의 딜레마를 적극 이용하고 있다. 앞서 여당이 사건 직후 특검을 제안한 이유는 시간을 벌기 위함으로 전해졌다. 당초 야당은 특검으로 이슈가 분산될 것을 우려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당의 노림수에 말려들고 있다. 박 대통령도 특검에 찬성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지난 16일 박 대통령과 단독으로 회동한 자리에서 이 총리의 거취 문제를 논의했다. 김 대표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남미 순방을 다녀와서 결정하겠다"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이 총리의 사퇴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차기 총리 후보로 황교안 법무부장관이 내정됐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완구를 자르는 선에서 사건을 봉합하고, 대선자금 수사는 흐지부지 종결하겠다'는 게 소문의 요지다.

변수는 이 총리다. 이 총리가 순순히 사퇴에 응할지는 미지수다. 관련한 맥락에서 이 총리 팬클럽으로 알려진 '완사모(이완구를 사랑하는 모임)' 회장에 대한 60억원대 횡령 수사가 눈길을 끈다. 완사모가 언급된 연이은 검찰발 보도는 박근혜정부의 숨은 의중을 가늠케 한다.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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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