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권력기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성완종 게이트'로 낭떠러지에 몰린 여권은 위기를 타개할 '물타기' 카드를 찾고 있다. 표적은 다시 '그 사람'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정원, 국세청이 앞장서고, 검찰은 뒷짐 진 채 특검을 합의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모습이다.
지난 10일 국가정보원이(이하 국정원)이 청와대에 보고하던 이른바 '정치보고서' 작성을 중단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국정원 내부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은 지난 9일 <서울신문> 기자를 만나 이 같이 밝히고 "국정원은 대북 및 해외 관련 업무에 주력할 방침"이라고 주장했다.
국정원 정치개입
비선라인 가능성
국정원은 지난해까지 특정 정치인의 동향이나 정치 현안 등의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해 청와대에 전달했다. 보고서는 크게 두 종류로 대통령이 열람하는 'VIP용' 보고서와 수석실(주로 민정)이 참조하는 '수석용' 보고서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매일 아침 청와대는 국정원이 서류봉투에 담아 보낸 보고서를 읽고 국정현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과거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일요시사>에 정치보고서의 위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통령 자리에선 정무적인 결정을 할 때 수백장에 달하는 모든 보고서를 읽어볼 수 없으므로 국정원 보고서가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될 수밖에 없다. 또 국정원의 힘은 ‘정보’에서 나오는데 정권 안보에 방해되는 ‘세력’을 제거하고자 할 때 국정원만큼 신뢰할 수 있는 조직은 없다."
그런데 보도대로라면 국정원은 자신들의 중요한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국정원 관계자는 같은 날 "정치개입 소지가 있는 것은 일절 안 한다"라고 주장했다. 여권 관계자도 "이병기 전 원장(현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 정치보고서를 없앴고, 이병호(현 국정원장) 체제에서도 변한 게 없는 것으로 안다"라고 거들었다.
앞서 국정원은 '대선 개입'으로 촉발된 야권의 비판에 내부 개혁을 약속하면서 "국내 정치 개입 금지"를 공언했다. 긍정적인 시각에서 보면 자신들의 약속을 이행한 것으로 풀이됐다. 반면 청와대 입장에선 다른 해석이 가능했다. 국정원이 자체 취득한 국내 정치정보를 대통령과 직접 공유하지 않겠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혹은 국정원보다 더 믿을 만한 '비선조직'의 개입 가능성이 점쳐진다. '누군가'가 대통령과 국정원의 직접적인 접촉을 막고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으로부터 정례보고를 받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완종 게이트
국정원에겐 기회
공교롭게도 국정원의 '정치보고서 작성 중단' 보도가 나온 날, 초대형 폭로가 정치권을 덮쳤다. 두 전직 청와대 비서실장의 억대 금품 수수 의혹이다. 이들에게 돈을 건넸다고 폭로한 사람은 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다. 성 회장은 지난 9일 판도라 상자를 열고,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십상시 파문'조차 비교 불가한 비자금 스캔들은 일파만파 확대됐다. 성 회장은 생전 마지막 유언과 메모를 통해 정권 최고실세로 일컬어지는 8인을 지목했다. <경향신문>과의 단독 인터뷰가 만든 소용돌이는 메가톤급 파괴력을 가진 허리케인으로 확대돼 정권을 직접 타격했다.
최초 공개된 성 회장의 메모에는 '김기춘 10만달러' '허태열 7억원'이란 내용이 적혀있었다. 두 전직 비서실장 외에도 남은 6명의 신원이 속속 공개됐다. 메모 속 인물은 '홍준표(1억), 서병수(2억), 홍문종(2억), 유정복(3억), 이병기, 이완구'였다.
<경향신문>은 지난 16일 지면에서 '성완종 인터뷰' 녹취록 전문을 공개했다. 메모에 쓰인 내용과 성 회장이 생전 육성으로 밝힌 주장은 같았다. 보도 과정에서 이완구 국무총리가 성 회장으로부터 3000만원을 받았다는 의혹도 새롭게 제기됐다. 이 총리는 '목숨' 운운하며 결백을 주장했다.
성 회장이 남긴 '성완종 리스트'는 박근혜정부 전·현직 핵심 참모 및 새누리당 유력 정치인을 궁지로 내몰았다. 아울러 이들 대부분은 소위 친박계 정치인이자 각종 선거 과정에서 박 대통령을 도왔기 때문에 청와대가 직격타를 맞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국정원·국세청 동원 비선라인 존재 촉각
참여정부 겨냥해 성완종 사면 의혹 조준
국정원은 이 시점에 등장했다. 얼결에 메모를 입수한 검찰이 대응방향을 고심하고 있을 때 국정원은 발 빠르게 움직여 첩보를 수집했다는 주장이다. 국정원이 모은 정보는 메모 속 8인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국정원은 스스로 선언한 '정치 개입 중단'에 충실했다. 이들은 '기업인'인 성 회장의 과거, 그 중에서도 참여정부 당시 사면을 받았던 정황에 주목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정기관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지난 14일 "국정원이 불리한 국면에서 성완종의 사면 사실을 신속히 밝혀 공을 세웠다"라고 말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여권에 말문을 터줬다는 것이다.
이어 이 관계자는 “'물타기'를 하려는 것인지, 국정원 직원들이 경남기업의 인수합병 과정과 민·관 공사 수주 과정에 대해서도 파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국정원은 정치보고서를 작성하지 않겠다고 했을 뿐 첩보 수집을 멈추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다.
또 다른 관계자는 "사정 정보라인에서 '그런 얘기'가 돈 것을 들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 권력기관이 합동으로 성 회장의 과거 행적을 쫓고 있는 상황을 인정했다. 물론 여당 정치인은 예외다. 첩보수집의 방향성은 철저히 참여정부에 맞춰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를테면 참여정부 당시 경남기업이 자사 브랜드인 경남아너스빌을 여러 곳에 착공했는데 이 과정에 특혜가 있었다는 제보를 흘리는 식이다. 정보의 진실성은 중요치 않다. 최대한 참여정부가 부각될 수 있는 '찌라시'를 모아 언론을 통해 의혹을 제기하게끔 하고 "여야 모두가 잘못했다"는 쪽으로 여론이 형성되면 성공이다.
국정원의 동향을 전한 관계자는 "만약 '성완종 리스트'에 김기춘이 아닌 문재인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면 어땠을까. 마찬가지로 여당에 불리한 정보를 취합해 균형을 맞췄을까. 나는 아나라고 본다"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박근혜정부가 위기 탈출을 위해 '노무현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절묘한 타이밍
국세청도 가담
관계자들의 주장은 현실로 드러났다. 국세청은 같은 날 조사관 20여명을 투입해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복수 언론은 16일 "이번 조사가 정기 또는 비정기 조사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라고 보도했다. 정기 조사는 말 그대로 정기적(4~5년)으로 하는 세무조사이며, 비정기조사는 불투명한 자금 거래 등을 밝히기 위해 임의로 하는 특별조사다.
국세청은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를 기획하면서 사전 통지를 생략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국세청이 '특수한 시점'에 맞춰 세무조사에 착수한 뒤 언론을 활용한 셈이다.
지난 2008년 국세청은 태광실업 세무조사로 노 전 대통령을 겨냥한 사정작업의 포문을 열었다. 박 회장은 당시 탈세와 정관계 로비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2년6월을 판결 받았다. 만기 출소한 박 회장은 최근 해외에 머물고 있다. 급작스런 세무조사에 대응하기 힘든 상황이다. 특정 기업에 대한 세무조사는 그간의 사례를 비춰봤을 때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있을 개연성이 높다.
국세청은 박근혜정부 들어 '연말정산 파동'과 '세수 결손' 등으로 미운털이 박혔다. 증거 조작으로 물의를 빚은 국정원과 마찬가지로 조직의 입지가 위태롭다. 정권 차원의 위기 상황은 조직의 '충성'을 시험할 수 있는 무대다. 이 같은 배경으로 국정원과 국세청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는 주장도 있다.
검찰은 주춤한 모습이다. 성 회장을 압박해 이명박정부 실세를 낚으려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죽음을 통해 드러난 성 회장의 실체는 'MB맨'이 아닌 '근혜맨'이었다. 결과적으로 검찰은 벌집을 건드려 '아군'에 피해를 입혔다.
박근혜-김무성 단독회동
'이완구 자르기' 합의설
'MB를 직접 겨냥하진 못할 것'이란 세간의 예측은 맞아 떨어지고 있다. 성 회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원 쪽을 뒤지다 없으면 그만둬야지. 마누라와 아들, 오만 것까지 다 뒤져서 가지치기 해봐도 또 없으니까 1조원 분식 얘기를 했다. (검찰이) 저거(이명박정부의 자원외교)와 제 것(배임·횡령 혐의)을 '딜'하라고 그러는데, 내가 딜할 게 있어야지요"라고 말했다.
이는 성 회장에 대한 수사가 궁극적으로는 이명박정부를 겨누기 위한 발판이었다는 증거다. 하지만 성 회장의 죽음을 계기로 관련한 수사는 사실상 중단된 상황이다.
발등의 불은 '친박'의 명운을 쥔 대선자금 수사다. 그러나 일각에선 검찰의 수사의지를 의심하고 있다. 당장 검찰 주변엔 USB를 비롯한 핵심 증거 확보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나아가 <조선일보>는 지난 17일 "여야 인사 14명이 포함된 '성완종 장부'가 나왔다"라고 보도했다. 보도의 핵심은 '여'가 아닌 '야'다. 지금껏 언급되지 않았던 야당 정치인 7~8명에 대한 로비 자료가 포함됐다는 내용이다. 관련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의심되는 '윗선'은 성 회장이 언급한 8인에 대한 수사를 늦추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신 야권이 연루된 자료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한 관계자는 알렸다.
<조선일보>가 보도한 야당 정치인 중 일부는 성 회장으로부터 '통상적인' 정치후원금을 받았다. 이는 성 회장이 여당 쪽에 제공한 '대선 자금'과는 성격이 다른 돈이다. 그럼에도 검찰은 이 부분에 대한 수사를 보강할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내부에선 검찰의 역할을 '여야 균형 맞추기'로 보는 분위기다.
이완구 아웃?
문재인 엮는다
특히 여당은 특검 도입을 주장함으로써 야당의 딜레마를 적극 이용하고 있다. 앞서 여당이 사건 직후 특검을 제안한 이유는 시간을 벌기 위함으로 전해졌다. 당초 야당은 특검으로 이슈가 분산될 것을 우려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당의 노림수에 말려들고 있다. 박 대통령도 특검에 찬성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지난 16일 박 대통령과 단독으로 회동한 자리에서 이 총리의 거취 문제를 논의했다. 김 대표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남미 순방을 다녀와서 결정하겠다"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이 총리의 사퇴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차기 총리 후보로 황교안 법무부장관이 내정됐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완구를 자르는 선에서 사건을 봉합하고, 대선자금 수사는 흐지부지 종결하겠다'는 게 소문의 요지다.
변수는 이 총리다. 이 총리가 순순히 사퇴에 응할지는 미지수다. 관련한 맥락에서 이 총리 팬클럽으로 알려진 '완사모(이완구를 사랑하는 모임)' 회장에 대한 60억원대 횡령 수사가 눈길을 끈다. 완사모가 언급된 연이은 검찰발 보도는 박근혜정부의 숨은 의중을 가늠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