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외환거래 44명 신상 공개

조세피난처에 짱박은 검은돈 더 많다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지난주 사회고위층 인사들의 불법 외환거래 사실이 알려졌다. GS·LG·롯데·현대·효성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재벌그룹 일가와 사회 저명인사, 유명 연예인이 대거 적발됐다. 이들은 막대한 외화를 앞세워 해외 부동산 및 금융상품에 투자했다. 외국환거래법 제32조 따르면 외화 유출입을 신고하지 않거나 송금 절차를 위반할 경우 5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 솜방망이 규정이란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적발된 이들의 면면을 낱낱이 공개한다.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이 국내 재벌과 유명 연예인들의 불법 외환거래를 적발했다. 이들은 해외 부동산 취득 및 금융거래 과정에서 1300억원대의 재산처분 사실을 숨긴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3일 금감원은 재벌가와 연예인 등 44명이 신고 없이 해외 부동산을 매입하거나 해외 법인을 설립했다고 전했다. 외국환거래법에 따르면 외국환 자본거래는 우리 금융당국에 신고해야 한다.

신고도 없이
1300억 숨겨

금감원은 이 가운데 상대적으로 거래 규모가 큰 GS그룹 계열의 허남각 삼양통상 회장을 검찰에 통보키로 했다. <시사저널>이 보도한 '외국환거래법 주요위반자 조치 예정 내역'에 따르면 허 회장은 과태료 1건(1198만원), 거래정지 2건, 벌칙 1건으로 모두 4건의 불법을 저질렀다. 특히 <시사저널>은 "허 회장이 14회에 걸쳐 900만달러(현재 환율 기준 97억원)의 외화 채권을 매입하면서 신고하지 않아 검찰 통보 조치를 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허 회장은 GS가 3세이자 장손이다. 아버지는 고 허정구 삼양통상 명예회장으로 LG그룹의 공동창업주인 고 허만정 회장의 장남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는 허창수 GS그룹 회장과는 사촌지간이다. 허 회장의 장남인 허준홍 GS칼텍스 상무는 GS의 주식을 155만6327주(1.67%)나 갖고 있다. 허 회장의 지분은 2.85%(265만1600주)로 주식가치는 약 1000억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범LG가에서도 불법 외환거래가 무더기로 적발됐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여동생인 구미정씨와 구씨의 남편 최병민 깨끗한나라 회장은 2건의 과태료(380만원)와 3건의 거래정지를 함께 조치받을 것으로 전해졌다.


구자준 전 LIG손해보험 회장도 불법 외환거래 명단에 포함됐다. 구 전 회장은 199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 모두 4건의 부동산을 사고팔았지만 단 한건만 신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구 전 회장에게는 2건의 거래정지만 내려질 것으로 알려져 그 내막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장녀 구근희씨에게도 2건의 거래정지가 예고되고 있다. 구씨는 과거 이계순 전 농림부장관의 아들인 이준범씨와 혼인했다. 이씨는 현재 플라스틱 용기 생산업체인 ㈜화인의 최대주주(지분율 76%)로 확인된다.

금감원 재벌·스타 외환법 위반 적발
총 1300억원대 외화 해외 곳곳에 숨겨

현대가도 금감원의 감시망에 포착됐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외동딸인 정경희씨는 금융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미국 하와이 리조트 등을 매매했다가 4건(1590만원)의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금감원 조사결과 정씨는 해외에 숨겨 놓은 수십억원의 예금도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또 정씨는 1990년대 중후반 자신이 소유한 미국 부동산을 사고팔면서 거액의 시세차익을 남긴 것으로 드러났다. 정씨에게는 과태료 외에도 거래정지 3건, 경고 2건 등이 내려졌다.

금감원은 롯데가의 외국환거래법 위반 여부도 조사 중이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동생 신정희 동화면세점 사장이 거래정지 처분을 앞두고 있다. 이번 명단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신 총괄회장 역시 900만달러(약 97억원) 규모의 외환거래가 문제되고 있다. 롯데 측은 신 총괄회장이 세금을 납부하기 위해 외화를 수령했다고 주장했다.

두산가에선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과 그의 동생인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이 나란히 적발됐다. 복수 언론에 따르면 형인 박 회장은 뉴욕 맨해튼에 '셰필드'라는 이름의 콘도 43층을 갖고 있다. 두 박 회장에게는 거래정지 2건과 경고 1건이 유력시되고 있다.


8000억원대 횡령·배임·탈세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은 거래정지 처분(1건)을 받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위이자 조 회장을 큰아버지로 두고 있는 조현범 한국타이어 사장은 위반자 명단에 없었다.

지난 6월 KBS1TV 탐사보도프로그램인 <시사기획 창>은 "조 사장이 19번째 생일을 기념해 부모로부터 받은 고급 리조트가 미국 하와이 마우이섬에 있었다"고 보도했다. 조 사장은 이를 되팔아 8억원의 시세차익을 봤지만 우리 금융당국에는 신고하지 않았다.

재벌가 3세
무더기 적발

CJ가로 분류되는 민재원씨는 거래정지 처분(1건)을 받았다. 민씨는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민기식 전 공화당 의원의 딸이며,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동생인 이재환 재산커뮤니케이션즈 대표(전 CJ 상무)의 부인이다.

'벤처업계의 신화' 김정주 NXC(옛 넥슨홀딩스·넥슨 지주회사) 대표도 거래정지(2건)가 확정적이다. 일본에 상장한 넥슨의 최대주주(48.5%)인 그는 주식을 포함한 보유자산이 2조원이 넘는 대부호다. 김 대표는 노르웨이 유모차업체인 '스토케'를 5100억원에 인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앞서 일본에서는 환율 변동폭을 이용한 'FX 마진거래'가 증권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때문에 이번 단속에 관련한 내용이 포함돼 있을지 관심의 대상이다. 금융감독원은 2013년 12월 'FX마진거래 규정 위반사례 및 유의사항'을 발표하기도 했다.

딸을 위해 미국 현지에 매장을 개설해 준 '회장님'도 있다. <시사기획 창>에 따르면 김성환 금강제화 회장은 자신의 딸과 사위를 위해 해외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특혜성 대출을 해줬다. 미국 뉴욕 등에 설립된 직영매장은 회사로부터 395만달러(한화 약 43억원)를 지원받았다. 김 회장에게는 김 대표와 마찬가지로 거래정지(2건)가 예고된 상황이다.

17대 대선의 뜨거운 감자였던 BBK 사건의 '키맨' 전세호 심텍 대표도 눈에 띈다. 전 대표는 거래정지(3건)와 경고(1건)를 동시에 받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현 새정치민주연합)은 "전 대표가 이명박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BBK 회장으로 알고 투자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실제로 전 대표는 2001년 11월 "BBK에 투자한 50억원 가운데 30억원을 돌려받지 못했다"며 이 전 대통령의 부동산을 압류한 바 있다.

이종명 폴라리스엔터테인먼트 대표도 외국환거래법 주요 위반자 명단에 있다. 폴라리스엔터테인먼트는 방위사업이 주력인 일광그룹의 계열사로 유명하다. 일광그룹의 회장이자 이 대표의 아버지인 이규태씨는 최근 한 여자 연예인이 제기한 성희롱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소속사 측은 "회장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해당 연예인을 협박 혐의로 고발한 상황이다.

알고 보면
사회고위층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씨의 자녀(거래정지 1건)가 원로배우 신영균씨(대종상영화제 명예이사장)의 자녀와 나란히 위반자 명단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신씨의 자녀는 국내 신고 없이 미국의 한 쇼핑몰을 매입했다가 1억원의 과태료를 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는 2013년 신씨와의 친분으로 대종상영화제 조직위원장직을 수락한 바 있다.

원혁희 코리안리 회장도 거래정지(2건)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코리안리는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국내 유일의 재보험사다. 재보험사는 보험사를 위한 보험사다. 대형사고가 터졌을 때 한꺼번에 많은 보험금을 지급하려면 부담이 크기 때문에 보험사가 보상책임을 재보험사와 분담하는 것이다.


코리안리는 국내 재보험 물량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우월적인 시장 지위를 점하고 있다. 앞서 <일요시사>는 '코리안리 황제경영 해부(인터넷판 2014년 11월10일)'라는 기사에서 원 회장과 그의 자녀를 중심으로 한 오너 경영체제를 점검한 바 있다. 2013년 원 회장은 급여와 상여금, 배당금 등을 합쳐 모두 12억원을 수령해간 것으로 드러났다.

중견기업 KCC정보통신은 위반자 숫자와 위반 횟수가 가장 많았다. IT솔루션 제공, 수입차 딜러 등을 주력으로 하는 KCC정보통신은 지주회사를 포함한 연매출이 5000억원에 달하는 알짜 회사다.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과 장남인 이상현 KCC오토모빌 대표, 차남인 이상훈 KCC시큐리티 대표 등 11명은 과태료 4건(1967만원), 거래정지 9건, 벌칙 2건의 제제가 가해진 것으로 전해졌다.

<시사기획 창>에 따르면 이 회장 일가는 미국 하와이주에 있는 마우이섬 부동산을 대거 소유하고 있다. 2010년 마우이섬의 한 대저택을 700만달러(현재 환율 기준 75억5000만원)에 사들였고, 1995년에는 당시 1∼3살이었던 손주들에게 하와이 카우아이 섬을 선물했다. 매입가는 110만달러(현재 환율 기준 118억6000만원)로 전해졌다.

GS·LG·현대 일가 미국 호화 부동산 투자
이수만·한예슬 등 유명 연예인 꼼수 도마

이 회장 일가는 하와이 부동산에 최소 2000만달러(215억7000만원)를 투자했다. 20여년이 흐른 지금 실제 부동산 가치는 2배 이상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들은 해외 부동산 투자가 합법화(2006년 5월 100만달러 이내 허용·2008년 6월 무제한 허용)되기 전부터 부동산을 거래했다. 대부분의 부동산은 국내 거주자인 자녀나 부인 명의를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은 이 회장 일가에 대한 특별세무조사를 실시하고 60여억원의 증여세를 추징하기로 했다. 이와 별도로 금감원은 이 회장 일가의 외환거래법 위반 사실을 검찰에 통보키로 결정했다.


이 회장과 함께 혐의가 중대하고 판단돼 통보 조치된 유명인은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대표다. 이 대표는 4892만원(1건)의 과태료와 2건의 거래정지, 2건의 벌칙 처분을 받았다. 이 대표는 미국 현지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LA 등지에서 다수의 부동산을 매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대표가 해외에 비밀리에 투자한 돈은 2500만달러(약 269억원) 수준인 것으로 전해졌다. SM엔터테인먼트 측은 "신고 과정에 일부 착오가 있었다"는 입장이다.

솜방망이 처벌
재벌은 코웃음

한인타운 빌딩을 매입한 여자연예인 한예슬씨도 적발됐다. 신씨와 함께 과태료 납부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위반 건수는 2건이다. 한씨 측은 "누락된 것에 대해 실수를 인정하고 과태료를 낼 것"이라며 "일부 오해가 있다"고 성명을 냈다.

금감원은 지난해 10월 국내그룹 관계자 117명을 대상으로 외환검사를 실시한 결과 272건의 미국 부동산 매입을 밝혀냈다. 삼성·SK·한화·효성·LG 등 재벌가 소유가 포함된 부동산 규모는 4억9000만달러. 우리 돈으로 5286억원 규모다. 1인당 평균 45억1700만원의 해외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전수조사가 불가능한 이상 법망을 빠져 나간 돈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을 넘어 여러 조세피난처에 분산되는 있는 자산까지 더하면 사회고위층의 불법 외환거래는 천문학적인 수준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외국환거래법 제32조가 규정하고 있는 최대 과태료는 5000만원에 불과하다. 주식으로만 수천억원씩 굴리고 있는 재벌들에게 5000만원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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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