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미군이 들쑤신' 동두천 가보니

기지촌 불은 꺼졌지만…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전시작전통제권 이양시기가 2020년대 중반 이후로 미뤄졌다. 사실상 무기한 연기다. 한국과 미국은 지난달 23일 제46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이 같이 협의하고, 미2사단의 210화력여단을 동두천 캠프케이시에 잔류시키기로 결정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동두천 시민들은 반발했다. "60년을 참고 살았는데 더는 못 참겠다"며 "청와대 상경 투쟁도 불사하겠다"고 별렀다. 5일 오후 미2사단 정문 앞에선 미군 잔류결정에 반대하는 '동두천시민 규탄대회'가 열렸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한국 정부의 약속 파기를 따져 물었다.

지난 4일 동두천시청 앞에는 20여명의 고교생이 모여 현장학습을 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났는지 자전거를 타고 시청 옆길을 지나가는 중학생도 있었다. 청사 정면에 걸린 대형 현수막에는 이 아이들에게 남겨줄 동두천시민들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동두천 지원 없는 미군 잔류 절대 반대."

얼핏 반미구호를 연상케 하는 현수막은 청사뿐아니라 시내 한복판에도 버젓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현수막 하단에는 주로 보수시민단체의 명의가 적혀 있었다. 동두천시 안에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반미 아냐"

박용선 동두천시 미군 재배치 범시민대책위원회 사무장은 보산동 중심가로 기자를 안내했다. 박 사무장이 건넨 첫 마디는 "한 번 거리를 보세요. 사람이 없습니다"였다. 허울이 좋아 중심가였지 행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동두천시를 관통하는 지하철 1호선 보산역 앞 상점도 마찬가지였다. 1시간 남짓한 이른 저녁시간 동안 가게를 찾은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인근 가게는 모두 셔터를 내리고 영업을 종료한 듯 했다.

한국전쟁 휴전과 함께 미군이 주둔하면서 동두천시는 자연스레 기지촌 역할을 했다. 많은 상인은 미군을 상대로 서비스를 제공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때문에 미군은 그들에게 일종의 전략적 동반자였다. 그렇게 63년을 살았다. 명암은 뚜렷했다. 경제적 의존도는 갈수록 높아졌고, 한편에선 늘 기지촌이란 오명에 짓눌려 살아야 했다.

박 사무장도 그랬다. 그는 "솔직히 어릴 때 (미군과 한국인이) 거리에서 진한 스킨십을 하는 것을 보고 많이 부끄러웠다"며 "요즘은 현저히 줄었지만 그때는 크고 작은 미군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는 참고 살아야 했다"고 회상했다.

그래도 시민들이 지금껏 동두천에 터를 잡고 살았던 것은 정부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은 지난 2002년 LPP(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에 따라 2016년까지 동두천에 주둔하는 미군을 평택으로 완전 이주하기로 협의했다. 미군이 떠나고 남은 캠프는 지자체가 주도하는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생활·여가·교육시설 등으로 탈바꿈할 것이라 기대됐다.

그러나 시민들의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한미 양국은 지난달 23일 제46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미2사단 210화력여단을 동두천 캠프케이시에 잔류시키기로 결정했다. 동두천시민들의 상실감은 컸다. 시가 사활을 걸고 추진한 도시개발계획은 삽도 떠보기 전에 중단됐다. 많은 시민들은 "미군이 주둔하는 한 동두천시는 영원히 밑지는 장사를 할 수밖에 없다"고 탄식했다. 왜일까.

전작권 전환 미루면서 미군 사실상 잔류
도시개발계획 수포…시민들 반발 최고조


박 사무장은 "동두천시의 절반 가까이를 미군이 쓰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무상 제공한 미군 공여지는 40.63㎢로 시 전체면적(95.68㎢)의 42%를 차지했다. 여기에 주민 대부분이 미군을 상대하는 자영업자인 것을 고려하면 미군이 활용하는 땅은 훨씬 넓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군이 쓰고 있는 토지에 비해 경제 기여도가 낮다는 점이다. 박 사무장은 "한때 2만명 넘게 주둔하던 미군이 지금은 2000여명 수준으로 줄었다"며 "미군 1명당 1만평씩 깔고 앉아있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수치(2014년 기준 미군 규모는 약 4000여명으로 추산된다)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으나 그만큼 시민들이 느끼는 체감은 상당했다.

클럽가의 원조나 다름없는 보산동 외국인 관광특구는 개점휴업 상태로 접어들었다. 오후 영업을 준비해야 할 클럽이나 주점 등은 적막했다. 호황을 누렸던 옷가게도 서너 곳만 명맥을 잇고 있었다. 보산역 개통과 함께 미군들은 상대적으로 젊은 분위기의 홍대나 이태원에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클럽가의 몰락은 주변 상권의 붕괴로 이어졌다.

객관적인 지표라 할 수 있는 경기개발연구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난 60여년간 동두천시가 입은 경제적 피해액은 18조원으로 추산됐다. 또 매년 300억원대의 재산세 손실이 추정 집계됐다. 미군 재배치 범시민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매년 430억원의 지방세와 연간 3200억원의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한종갑 미군 재배치 범시민대책위원장은 재향군인회 출신이다. 그는 "우리가 반미하자는 것도 아니고 희생에 상응하는 합당한 대책을 내놓으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위원장은 "미군의 존재가 한때는 안보적인 불안을 해소했던 것도 맞다"며 "시 인구가 채 10만명도 안 되는데 인구 유입이 안 되는 것은 지역에 변변한 공장 하나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 위원장은 그러면서 국방부로부터 받은 문서를 공개했다. 대책위가 9월26일 '동두천에 미군이 잔류하는 것'이냐고 물은 것에 대한 답변이다. 10월13일 국방부는 "미2사단이 LPP에 따라 재배치되면 계획대로 평택으로 이전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정부는 같은달 24일 SCM에서 LPP를 사실상 무기한 연기했다. 불과 9일 만에 자신들의 답변을 뒤집은 셈이다. 일부 언론은 미군 기관지 <성조>를 인용해 "우리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에서 동두천 캠프케이시 잔류를 먼저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부인했지만 결과적으로 평택 기지로의 이전이 지연되면서 우리 정부가 부담하게 될 이자는 연간 84억원으로 잠정 집계됐다.

한 위원장은 "기본적인 행정이라면 주민과 최소한 협의를 거치든가 그게 어려웠으면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려줬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 "평택의 경우는 '국가지원도시'로 지정돼 국고보조를 받고 있지만 동두천은 정부 지원 없이 미군 입만 쳐다보다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다"고 안타까워했다.

경제는 파탄

기자가 방문한 당일 미2사단 정문 앞에선 1인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박 사무장은 "집회 신고를 해도 경찰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제약이 많다"고 말했다. 1인 시위에 참석한 김성보 대한노인회 동두천시지회장은 "여건이 되는 한 계속 (시위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시민 2000여명은 같은 곳에 모여 '동두천시민 규탄대회'를 열었다. 동두천시는 지금 폭풍전야다.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동두천시 범시민 궐기대회


지난 5일 미군 잔류에 반대하는 '동두천시민 규탄대회'가 미2사단 정문 앞에서 열렸다. 동두천시 미군 재배치 범시민대책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집회에서 시위 참가자들은 약속을 뒤집은 박근혜정부를 강력 규탄했다. 이들은 "국가 안보를 위해 잔류가 불가피하다면 평택에 준하는 지원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시민뿐 아니라 공무원도 대거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오세창 동두천시장은 선두에서 집회를 독려했다. 오 시장은 "지난달 24일 정부는 동두천 미군기지 이전 약속을 깨고 아무 대책 없이 210여단을 남기겠다고 통보했다"며 "동두천을 폐허로 만들겠다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오 시장은 "반미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동두시민이 국방을 위해 희생한다면 그에 따른 최소한의 보상을 해달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집회에는 경찰 추산 1200여명(주최측 추산 2000여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구호 제창을 하다 기습적으로 캠프 케이시 정문으로 행진을 시도했으며 이를 막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지속된 대치는 오 시장이 흥분한 시민들을 설득하면서 마무리됐다. 이후 시위대는 예정대로 중앙시장 쪽으로 행진했다.

한편 경찰은 시위대 중 일부가 현행법을 위반했다고 보고 사법처리할 방침을 밝혔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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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