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못할 신춘호의 '3가지 고민'

‘절대강자’ 농심이 흔들린다

[일요시사 경제2팀] 박효선 기자 = 내년 창립 50주년을 맞는 농심. 요즘 농심의 행보는 질주 그 자체다. 그만큼 신춘호 농심 회장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그동안 라면시장의 강자로 군림하던 농심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탓인지 지난해부터 농심의 대리점주를 향한 ‘갑질’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게다가 신 회장이 직접 이름까지 지어 야심차게 내놓은 ‘강글리오’는 커피시장에서 굴욕을 맛봤다. 생수시장에서는 삼다수를 빼앗기고 백산수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백산수의 취수원을 백두산이 아닌 장백산이라고 표기한 사실이 드러나 국내 소비자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라면 황제 농심은 요즘 경쟁사들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국물 없는 라면 전성시대가 오면서 시장판도가 서서히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라면 ‘춘추전국시대’가 예고되고 있다. 경쟁사들이 이 같은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식품업체들은 다양한 라면을 출시하고 화려한 마케팅을 펼치며 농심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다급해진 농심
갑의 횡포 논란

올해 들어 농심의 성장 동력은 떨어진 모습이다. 그동안 독점해왔던 라면 점유율(판매수량 기준)도 감소했다. 시장조사업체 AC닐슨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62.8%의 점유율을 기록한 이후 연속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농심의 2분기 라면 시장점유율은 61.4%로 전년보다 4.6%, 전분기보다 2.9% 떨어졌다.

지난 6월 57.2% 점유율을 기록하며 독주체제를 회복한 모습이지만 경쟁업체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반면 같은달 오뚜기의 라면시장 점유율은 18.2%로 전년 동월 대비 2.3% 상승했다. 후발주자들의 도전에 농심은 맥을 못 추고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매출액과 영업이익도 떨어졌다. 농심의 2분기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9%, 19.8% 감소한 4320억원과 103억원을 기록했다. 반면 오뚜기와 삼양식품의 매출은 각각 17%와 23% 늘어났다.


여파는 주가로 이어졌다. 지난 8월 농심의 주가는 떨어졌다. 농심 라면 리뉴얼 소식에 9월 이후 다시 오름세를 탔지만 증권가에서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증권가에서도 농심의 동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국내 증권사 한 연구원은 “볶음면을 중심으로 한 국물 없는 라면 제품 인기 확대와 국물 있는 라면 부문에서 경쟁사들의 판촉확대 영향이 지속되며 농심의 라면 부문 매출 감소와 영업이익 감익 추세가 하반기에도 지속될 전망”이라며 “전통적인 비수기인 3·4분기를 지나 4·4분기 이후 점유율의 재상승 여부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진단했다.

위기감을 느낀 농심은 승부수를 던졌다. 28년 만에 주력상품인 신라면을 리뉴얼하기로 한 것이다. 맛과 포장까지 바꾸기로 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농심의 높은 라면 의존도를 우려하고 있다. 농심 전체 매출에서 라면만 7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신 회장이 자신의 성을 따 직접 작명해 1986년 세상에 내놓은 신라면은 농심의 성장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최근 라면시장에서 경쟁사들의 마케팅에 밀리면서 농심 전체 실적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시장에서는 농심의 부진이 4분기에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신라면을 리뉴얼하면서 광고로 판감비를 많이 지출했을 것으로 보여 전체적으로는 수익성이 악화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농심의 영업이익과 라면 점유율이 전년보다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창립 50주년 앞두고…입지 흔들려
다급해진 탓? 대리점에 갑질 도마

이처럼 라면 시장 점유율을 빼앗기면서 농심은 갈수록 다급해진 모습이다. 지난해부터 농심의 대리점주를 향한 ‘갑질’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갑의 횡포’를 부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최근 <JTBC>는 농심의 행태를 보도했다.


방송에 따르면 농심은 라면 대리점에 사실상 판매 목표를 강제 할당했다. 이를 지키지 못하면 손해를 보면서까지 팔도록 압박했다. 보도 내용은 이렇다. 지난 5월 27일 농심 본사는 라면 대리점에 월 판매목표 100%를 맞추라며 남은 기간 동안 라면 2800만원어치를 더 팔라고 강요했다. 농심 영업사원은 대리점주에게 이를 강제로 할당하고 받은 물량을 매입가보다 10%가량 더 싸게 팔라고 지시했다.

팔아야 할 라면은 대리점에 사실상 강제 할당됐다. 이렇게 받은 물량은 매입가보다 10% 더 싸게 팔아 없애라는 압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본사 측은 대리점 손실분 10% 중 6%는 따로 보전해 주겠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본사가 전산 서류상에 결제한 보전액은 599만원이지만 실제 이 돈을 대리점에 지급한 영업부의 결제서류에는 544만원으로 적혀 있었다. 55만원이 줄어든 것이다.

게다가 농심은 대리점주들 명의로 개설된 ‘마이너스 통장’을 통해 물건대금을 빼갔다는 의혹도 사고 있다. 대리점주가 계좌개설 당시 은행에 가지도 않았는데 농심 직원이 대신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한 정황이 포착됐다. 농심이 처음 대리점 계약을 맺는 점주들에게 마이너스 통장개설을 권하고 매월 떼가는 물품대금을 이 통장에서 가져갔다는 게 농심특약점협의회의 주장이다.

지난해에도 ‘마이너스 통장’은 논란이 됐다. 물건이 제때 팔리지 않아도 물건 값이 마이너스 통장으로 꼬박꼬박 결제됐고, 과도한 매출목표로 어려움을 겪어 빚더미를 떠안은 대리점주도 있었다.

농심은 강하게 반박했다. <JTBC> 보도에 왜곡된 부분이 많다는 입장이다. 농심 관계자는 “한 대리점주의 왜곡된 주장일 뿐”이라며 “판매목표제를 폐지하고 나서 대리점주들과의 관계가 상당히 호전됐는데 한 대리점주의 주장만 부각됐다”고 억울해했다. 지난해 농심은 특약점에 대한 물량 밀어내기로 사회적 비난이 일자 인센티브제와 매출목표제를 폐지하고 특약점(대리점)과 ‘공정거래 및 동반성장 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이어 “전산 서류상에 결제한 보전액과 대리점에 지급한 영업부의 결제서류 금액에 차이가 있다고 나왔는데 모두 전산처리 되기 때문에 절대로 조작할 수가 없다”며 “서류에는 여러 가지 항목이 있는데 추가된 항목을 보지 못하고 마치 (농심이) 금액을 속인 것처럼 보도됐다”고 반발했다.

백산수 팔려고
장백산 표기

특히 마이너스통장에 대해서는 강제성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농심 관계자는 “마이너스 통장은 대리점주의 선택사항이지 강제사항이 아니다”라며 “해당은행과 대리점주와의 거래일 뿐”이라고 못 박았다. 그는 “절대로 본사 측에서 마이너스 통장을 요구할 수 없다”며 “대출 이자도 8%에서 6%로 줄여 오히려 어떤 대리점주들은 이를 활용하기도 하는데 (농심이) 마이너스 통장을 통해 대리점주들의 물건대금을 빼갔다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특약점주협의회의 주장은 달랐다. 형식적으로는 선택사항이지만 실제로는 ‘마이너스 통장’ 개설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농심 측 직원들이 대리점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어 쉽게 불만사항을 이야기하거나 요구사항을 거부하기가 힘들다는 입장이다. 특약점주협의회 측은 불법 대출과 관련해 문제가 된 거래은행을 불법대출로 고발할 예정이다.

라면시장 뿐만이 아니다. 생수시장에서도 농심은 고군분투하고 있다. 농심은 삼다수를 보면 마음이 쓰리다. 회사의 효자노릇을 했던 삼다수를 제약사 광동제약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농심은 1998년부터 2012년까지 제주도개발공사의 삼다수 판매를 도맡아왔다. 삼다수는 과거 150억에 불과하던 농심의 매출을 1888억까지 늘렸다. 하지만 삼다수는 2012년 3월 광동제약에 넘어갔다. 삼다수를 품은 광동제약은 단숨에 10위권 제약사로 우뚝 올라섰다. 반면 삼다수를 빼앗긴 농심은 매출액에 큰 타격을 받았다.
 

농심은 이를 갈았다. 2012년 국내시장에 ‘백산수’를 내세워 물시장의 패권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이다. 여기에는 신 회장의 맏딸 신현주 농심기획 부회장까지 가세했다. 신 부회장은 지난 2월 신한금융투자와 군인공제회가 보유한 농심백산수 28만3647주(10.15%)를 사들였다. 인수대금은 92억5600만원으로 추산된다. 이에 따라 신 부회장은 백산수를 개발한 김병순 농심백산수 각자 대표이사를 제치고 2대주주에 올랐다. 1대 주주는 농심(80.43%)이다. 신 부회장은 지난해 지분 매각대금 100억원을 활용해 농심백산수에 투자한 것으로 보인다.


신현주 부회장이 농심백산수 2대 주주에 오르면서 농심의 대대적인 투자가 시작됐다. 지난 4월 사명부터 상선워터스에서 농심백산수로 바꿨다. 특히 지난 6월 농심은 백두산에 위치한 백산수 공장 설립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다.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인 2000억원을 투자한 것이다.

농심은 이러한 투자로 백산수 생산 물량을 25만톤에서 125만톤으로 늘리기로 했다. 이는 연간 133만톤의 생산능력을 갖춘 삼다수에 버금가는 규모다. 게다가 백두산 신공장은 향후 200만톤 규모로 즉각 증설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이는 프랑스의 세계적인 생수 기업 에비앙의 연간 생산량 180만톤을 능가하는 수치다. 농심의 투자 소식에 백산수는 자연스레 광고효과를 누리게 됐고 성장세를 탔다. 하지만 연매출은 250억원 수준으로 간신히 생수시장 4위를 지키고 있다. 사실상 투자에 비하면 기대에 미치지 못한 수준이다.

‘라면·커피·생수’
3대 주력사업 굴욕

농심은 삼다수의 ‘청정 이미지’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백산수의 수원지 백두산을 내세우고 있다. 농심은 백산수가 ‘세계 3대 청정지역’인 백두산의 물이라는 점을 알리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농심은 백산수 취수원 표기 논란으로 국내 소비자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사고 있다. 국내에서는 백산수가 ‘백두산’ 물이라는 점을 내세우면서, 중국에서는 ‘장백산’물이라고 표기하기 때문이다. 장백산(長白山·창바이산)은 중국인들이 백두산을 부를 때 쓰는 명칭이다. 국내에선 이를 동북공정과 연관 짓는다. 애국과 맞닿아 있는 민감한 사안이라 국내 소비자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로 인기를 끌었던 배우 김수현과 전지현의 경우 취수원 ‘장백산’으로 표기된 중국기업 ‘헝다생수’ 광고 모델로 나서 많은 국내 팬들이 등을 돌렸다. 그런데 중국기업도 아닌 국내기업 농심이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표기한 만큼 비난여론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아직까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를 알고 있는 국내 소비자들 사이에서 이미 농심은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농심은 해당 국가 공식표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농심 관계자는 “기업의 문제와 애국심의 문제는 다르다고 생각한다”며 “사실상 중국인들은 백두산 자체를 모른다”고 해명했다. 그는 “우리도 (백산수 취수원을) 백두산이라고 표기하고 싶었다”면서도 “장백산은 중국의 공식 지명이라서 그 나라 정부 지침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회장님 야심작
커피사업 굴욕

신 회장이 직접 이름까지 짓고 야심차게 진두지휘한 ‘강글리오’마저 커피시장에서 기를 못 펴고 있다. 농심의 커피브랜드 강글리오는 시장 점유율을 집계하기 힘들 정도다. 롯데마트가 2분기 ‘강글리오 커피’ 판매 현황을 집계한 결과 판매 비중이 전체의 0.4%에 그쳤다. 이마트와 홈플러스에서도 농심 커피는 통계로 잡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농심은 녹용(사슴 뿔)성분을 함유한 커피믹스 강글리오를 비롯해 꿀사과맛 커피 등을 출시했다. 커피에 ‘건강’이라는 새로운 콘셉트를 내세웠지만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자사 계열사인 농심미분이 생산하고 농심이 유통을 맡은 우리쌀 프리믹스(부침·튀김가루)도 시장에서 외면받고 있다. 기존 업체들의 지배력이 워낙 커 시장진입이 쉽지 않은 상태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커피시장은 기존 업체들이 탄탄한 기반을 다진 상태여서 소비자들의 입맛을 바꾸기는 쉽지 않은 구조”라며 “신 회장이 특별히 신경 쓴 것으로 알고 있는데 커피에 건강이라는 콘셉트는 사실상 소비자들에게 너무나 생소하고 이상한 조합이라 이목을 끄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강글리오의 실패로 최근 농심이 새로운 커피브랜드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농심은 “알려진 ‘코리아노’라는 명칭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아직까지 개발 중이라서 공개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선 그었다.

내년 창립 50주년을 맞는 신 회장. 라면, 생수, 커피 등 세 가지 고민을 어떻게 풀어낼지 식품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dklo216@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농심 ‘과대포장’ 딜레마

농심은 제과시장에서도 내수 성장 침체라는 벽에 부딪혔다. 양도 많고 값도 싼 수입과자의 등장에 소비자들이 국산 과자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국산과자의 과대포장과 가격거품 논란에 ‘국산과자 불매운동’ 조짐까지 불거지고 있다.

농심은 지난 2월 새우깡 10% 등 스낵, 즉석밥 가격을 평균 7.5% 인상했다. 하지만 제품 가격인상 이후 실적이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될 전망이다. 국산과자를 외면하고 있는 분위기 탓이다. 아직까지 농심의 타격은 크지 않지만 국내 제과업계는 전체적으로 2분기 국내 실적이 부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내수성장 정체에 직면한 농심은 타개책 마련에 분주하다. 국산과자에 대한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농심은 올해 초 ‘업계 최초 수출 100개국 돌파’라는 글로벌 경영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이미 본사에 해외시장개척팀을 신설해 아프리카와 남아시아 등의 신시장을 발굴, 개척하고 있다. 아울러 해외시장개척팀을 중심으로 지난 5월 아프리카 니제르에 판매망을 갖췄다. 방글라데시와 소말리아 등으로도 수출을 확대하기 위해 현재 현지 조사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양 적고 과다 포장된 수미칩, 입친구 등 농심과자가 해외시장에서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 대다수다.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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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