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노릇’ 돈놀이하는 재벌들 백태

'짭짤한’ 사채놀이에 푹 빠진 회장님

[일요시사 경제2팀] 박효선 기자 = 국내 내로라하는 굵직한 재벌기업 회장들이 대부업으로 돈놀이를 하고 있다. 저소득· 저신용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대부업체에 진출해 쏠쏠한 수익을 챙기는 모습이다. 현대그룹, 동양그룹, 부영그룹, 신안그룹, 청호나이스 등의 기업이 대부업체를 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기업들은 사채업을 위해 만든 게 아니라고 선 긋고 있지만, 업계의 시선은 싸늘하다. 그룹 간판 뒤에 숨어 돈놀이를 한 회장들을 조명해보았다.

재벌기업의 대부업 진출에는 비판적인 시각이 많다. 지금껏 영세 서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는커녕 고금리 대출을 통해 오너들의 배만 불린 사례가 파다했기 때문이다.

수익 대부분
오너 주머니로

최근에는 정휘동 청호나이스 회장의 개인회사가 도마에 올랐다. 대부업체 동그라미대부 이야기다. 금융권에 따르면 정 회장은 동그라미대부를 끼고 4년간 27억원에 달하는 돈을 벌었다. 대부업 등록을 하지 않고 동그라미대부에 약 99억원을 대여해 약 3억1414만원의 이자를 받는 등 대부업체 뒤에서 숨은 ‘전주’ 노릇을 해온 것이다.

동그라미대부는 사실상 정 회장의 개인회사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동그라미대부는 지난해 말 기준 정 회장이 지분 99.26%(40만주)를 보유하고 있다. 동그라미대부는 지난해 처음으로 배당을 실시했다. 1주당 2000원씩 총 8억600만원(배당성향 33.9%)을 주주들에게 배당했다. 이 중 8억원이 정 회장 주머니로 들어갔다.

실적은 매년 늘어났다. 2011년 35억원에서 2012년 70억원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각각 -3억원, 3억원에서 15억원, 13억원으로 올랐다. 지난해에는 84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영업이익은 30억원, 순이익은 24억원을 기록했다.


정 회장은 동그라미대부로부터 약 19억원의 이자수익을 챙겼다. 자신의 개인자금을 동그라미대부에 빌려주고 이자를 받은 것이다. 지난해 말 기준 동그라미대부의 대출채권 규모는 약 280억원에 달한다. 이 중 214억원은 차입금이다. 124억원은 청호나이스에서, 90억원은 동그라미2대부에서 빌린 자금이다. 여기서 동그라미2대부는 정 회장을 지칭한다.

정 회장은 지난해 1년 만기, 연리 6.9% 조건으로 90억원을 동그라미대부에 빌려주고 6억1600만원의 이자를 받아갔다. 2011년과 2012년에도 각각 89억원을 빌려준 대가로 6억2800만원, 6억5000만원의 이자수익을 올렸다.

오너일가 개인 대부업체 운영
계열에 대출해주고 이자 받아

부영그룹 오너도 대부업체를 통해 제 주머니를 채웠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은 부영대부파이낸스를 통해 배당금 5억원을 챙겼다. 부영대부파이낸스는 배당 성향만 239.04%를 기록해 업계 4위에 오른 반면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2억5000만원에 불과했다. 순이익의 두 배를 배당한 셈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이 회장은 부영의 계열사 중 친인척 명의로 돼 있던 계열사 주식을 본인의 이름으로 바꾸는 식으로 지분율을 높였다. 내부거래로 문제가 될 여지가 있는 이 회장 가족 소유의 회사는 부영의 주력 계열사가 인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거액의 세금이 발생해 이를 메우기 위해 무리한 배당을 실시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재계에서는 부영 계열사가 지난해 이 회장 일가의 주식을 사들이거나 자금 대여를 한 게 500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비상장 계열사가 총수 일가의 지배권 확보를 위해 사금고처럼 운영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부실계열사 지원
회장님 사금고


대부업체는 오너의 사금고로 전락해왔다. 그룹의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는 자금줄 수단으로 이용되곤 했다. 동양파이낸셜대부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우선 동양증권의 100% 자회사인 대부업체 동양파이낸셜대부는 1년 반 동안 다른 동양 계열사들에 1조5621억원에 달하는 금액을 빌려줬다. 이는 같은 기간 동양그룹 계열사 간 차입된 전체 금액의 91.2%에 해당된다. 심지어 완전 자본잠식 상태인 동양레저와 동양인터내셔널 등에게는 저리로 자금을 빌려준 혐의도 받았다.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의 사금고 역할을 한 것이다.

구속 수감된 상황에 현 회장은 개인재산을 지키기 위해 옥중소송을 내기도 했다. 덕분에 현 회장은 ‘정신 못 차린 회장님’이란 오명을 얻었다.
 

검찰에 따르면 현 회장과 부인 이혜경씨는 지난해 대부업체 티와이머니대부 주식 16만주(지분율 80%)를 담보로 제공하고 동양파이낸셜로부터 78억8000만원을 빌렸다. 현 회장 명의로 39억8000만원, 부인 이씨 명의로 39억원을 각각 대출했다.

하지만 현 회장 부부는 정해진 기간에 차입금을 갚지 못했다. 동양파이낸셜은 이들이 맡긴 티와이머니 주식을 전량 인수했다. 동양파이낸셜의 티와이머니 지분율은 10%에서 90%로 뛰었다. 이에 현 회장 부부는 동양파이낸셜이 보유한 티와이머니 주식을 처분해선 안 된다며 가처분 신청을 냈다. 두 회사는 기존 동양그룹 출자 구조상 지주사 역할을 한 핵심계열사였기 때문이다. 현 회장 측은 소송에서 티와이머니 주식 가액이 200억원에 달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재판부는 현 회장 부부에게 공탁금 4억원과 보증보험 36억원 등 총 40억원의 담보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현 회장 부부는 재판부의 요구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가처분 신청은 각하됐다. 다만 동양파이낸셜은 티와이머니 주식을 당장 처분하기 어렵게 됐다. 채권자인 농협은행이 “티와이머니 주식을 처분하지 말라”며 동양파이낸셜을 상대로 낸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대부업 설립하려
편법 등록 추진

거꾸로 내부거래를 통해 매출을 끌어 올린 기업도 있다. 건설업과 레저업, 철강업을 주력으로 하고 있는 신안그룹의 경우가 그렇다. 자생력이 약한 신안그룹의 대부업체 ‘그린씨앤에프대부’과 캐피탈업체 ‘신안캐피탈’은 그룹 계열사에 의존해 매출을 올렸다. 그린씨앤에프대부와 신안캐피탈은 박순석 신안그룹 회장 오너일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금융감독원 공시에 따르면 그린씨앤에프대부는 박 회장이 지분 47%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2대 주주는 41%를 갖고 있는 ㈜신안이다. 박 회장이 100% 소유한 회사다. 그린씨앤에프대부 지분 88%가 박 회장의 손 안에 있는 셈이다. 신안캐피탈도 박 회장 지분(61%)과 ㈜신안 지분(39%)을 합치면 사실상 그의 개인회사다.

그린씨앤에프대부의 2011년 매출은 135억원 중 132억원(98%)을 계열사들과의 거래로 채웠다. 일거리를 준 곳은 ㈜신안(49억원)과 코지하우스(24억원), 인스빌(20억원), 신안레져(11억원), 신안관광(10억원), 신안관광개발(10억원), 네오어드바이져(7억원) 등이다.

여기에는 박순석 회장의 장남 박훈(5900만원), 차남 박상훈(4800만원)씨 등과의 거래도 매출로 잡혔다. 장남 훈씨는 신안그룹 총괄 부사장, 차남 상훈씨는 신안상호저축은행 이사로 재직 중이다. 형제는 그룹 내 유일한 상장사인 휴스틸 사내이사도 맡고 있다.

그린씨앤에프대부는 계열사들을 등에 업고 거둔 안정된 매출을 기반으로 몸집을 키웠다. 설립 후 적자에서 허우적거리다 2006년부터 흑자로 완전 전환해 매년 20억∼80억원의 영업이익과 30억∼130억원의 순이익을 거뒀다. 총자산은 2000년 269억원에서 지난해 2372억원으로 9배 가까이 늘었다. 같은 기간 153억원이던 총자본은 667억원으로 4배 이상 불었다.


신안캐피탈도 마찬가지다. 신영천 그린씨앤에프대부 대표가 신안캐피탈의 대표직을 겸하고 있다. 매출이 발생하지 않던 신안캐피탈은 2008년부터 실적을 올리기 시작했다. 90% 이상이 계열사 내부거래로 채워졌다.

아울러 신안저축은행의 전 대표이자 박순석 회장의 차남 상훈씨는 대부업체를 통해 수십억원대의 이자놀음을 한 사실이 적발됐다.

상훈씨는 신안저축은행의 대표로 있던 지난 2010년 개인 돈을 대부업체에 빌려주고 이자를 챙긴 혐의를 받았다. 높은 이자를 노리고 저축은행과 거래 중인 우량 대부업체에 직접 자기 돈을 맡긴 것이다. 이들이 빌려준 돈은 30억∼4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금고 의심…배당까지 챙겨
1년에 수십∼수백억원 이익

해외에 진출하려고 국내에서 대부업 편법등록을 추진하다 딱 걸린 곳도 있다. 롯데쇼핑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 2009년 롯데쇼핑은 베트남 현지 법인인 ‘롯데베트남파이낸스’ 설립을 위해 국내에서 대부업 등록을 추진했다. 당시 롯데 측은 “실제 대부업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업계의 반응은 차가웠다. 국내 관련 규정을 자사 편의를 위해 편법적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당초 롯데쇼핑은 국내에서 금융업을 해야만 ‘롯데베트남파이낸스’ 설립 인가를 내주겠다는 베트남 당국의 인가 조건을 맞추기 위해 카드업 등록을 추진했다. 하지만 금융당국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국이 롯데쇼핑의 카드업 등록에 반대했던 이유는 롯데쇼핑이 국내에서 금융업을 하고 있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롯데쇼핑의 카드업 등록을 최종 심사하는 감독당국은 “실제 하지도 않을 카드사업 등록을 받아 줄 수 없다”며 롯데쇼핑의 카드사업 추진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이에 따라 롯데그룹은 당국의 반대 입장을 피해 지자체에 신고만 하면 되는 ‘대부업 등록 카드’를 꺼내들었다. 카드업과 달리 대부업은 금융당국이 아닌 해당 지자체에 설립 신고만 내면 됐기 때문이다.

금융권은 롯데쇼핑이 베트남 진출을 위해 기업 이미지도 외면한 채, 편법까지 동원하며 지나치게 ‘무리수’를 둔다고 비판했다. 연 45%가 넘는 고금리의 이자를 받는 대부업에 대기업인 롯데가 진출한다는 사실만으로 사업 여부를 떠나 등록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비판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규제 사각지대
대부 진출 막아야

동양파이낸셜대부처럼 기업 위주로 영업을 진행했던 업체는 현대기업금융대부와 하이캐피탈대부 등이다. 계열사 대상 대출은 없던 것으로 파악됐다.

하이캐피탈대부는 일반 대출이용자를 대상으로 대부업을 했다. 동양파이낸셜대부와 비슷한 구조다. 현재 하이캐피탈대부는 일본 금융지주회사인 J트러스트가 인수한 상태다.

차이가 있다면 동양파이낸셜대부가 주로 대출모집인 역할을 하고 있는 반면 하이캐피탈대부는 본연의 대부업을 했다는 점이다. 물론 동양파이낸셜대부도 일부 저신용자층을 대상으로 소액 신용대출을 하고 있기는 하다. 대출 잔액은 400억원가량이다.

다만 하이캐피탈대부는 382억원을 현대해상과 하이카다이렉트에서 빌렸을 뿐 계열사 대상 대출실적은 없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기업금융대부도 2000년 이후 계열사 간 거래는 없었다. 오너가 개인적으로 유용하지 않았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현재 대부업체에 대한 감독과 검사행태 등을 비춰볼 때 동양그룹과 같은 사태가 얼마든지 재발 가능하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특히 대부업체는 비리 제보가 접수되지 않는 이상 금감원의 감독권이 제대로 미치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불법적인 자금조달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난해 금감원이 동양파이낸셜대부를 검사했음에도 계열사 지원 여부를 파악하지 못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대주주입장에서는 대부업체를 금융계열사로 선호할 수밖에 없다.

금감원의 검사 초점이 소비자보호에 맞춰져 있을 뿐, 계열사 지원 여부는 대상이 아니다. 이에 따라 금융소비자단체는 재발 방지를 위해 여신전문업법과 같인 대부업법에도 대주주 규제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재벌기업 오너들은 그룹 간판 뒤에 숨어서 대부업과 캐피탈사로 고금리 신용대출 장사를 일삼고 자금조달을 통해 사금고처럼 쓰고 있다”며 “변칙통로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규제 사각지대에 있는 대기업 계열의 대부업체와 캐피탈사 등을 감시할 수 있도록 제도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조 대표는 “대기업의 대부업체들은 개인 소비자를 위한 것이 아닌 그룹 계열사의 우회지원 통로로 이용되고 있다”며 “기업들의 대부업 진출 자체를 차단하는 수단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dklo216@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6조 아주캐피탈 일본에 넘어가나

자산규모 6조원이 넘는 ‘알짜’ 매물 아주캐피탈 우선협상자 선정이 다가왔다. 아주캐피탈 인수전은 일본계 금융회사 2곳의 승부로 좁혀졌다.

금융권에 따르면 일본계 금융그룹 제이트러스트와 ‘러시앤캐시’로 유명한 아프로서비스그룹이 아주캐피탈 인수의향서를 제출했다. 두 업체는 비슷한 수준의 가격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최종 매각가는 6000억원 안팎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두 업체는 치열한 양강 구도를 펼칠 전망이다.

한편 아주캐피탈 전신은 대우캐피탈이다. 19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2005년 아주그룹에 매각됐다. 아주그룹은 이번 매각을 통해 들어온 자금을 바탕으로 대한전선 등 국내 M&A 매물 인수전에 뛰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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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