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입수> '김학의 성접대' 고소장 공개

"대기업 임원 등 고위층 여럿 더 있다"

[일요시사=사회팀] 강현석 기자 = 지난 대선 직후 검찰총장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실세'는 뜻밖의 사건으로 공직을 사퇴했다. 성접대 스캔들에 휘말리며 임명 8일 만에 옷을 벗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그러나 김 전 차관이 옷을 벗은 건 그때만이 아니었다. 서울에서도 원주에서도 김 전 차관은 '옷을 벗었다'고 했다. 최근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한 이모(37·여)씨는 "김 전 차관이 건설업자 윤중천씨와 공모해 성접대 동영상을 촬영했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문제의 성접대 동영상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지난주 <일요시사>는 이씨의 고소장을 입수했다.


김학의 전 법무부차관이 사표를 제출한 날짜는 2013년 3월21일이다. 당시 김 전 차관은 성접대 동영상 의혹에 휩싸이며 스스로 옷을 벗었다. 청와대는 인사 검증 과정에서 문제의 동영상이 실재하는지를 김 전 차관에게 물었다. 김 전 차관은 의혹을 부인했다.

하지만 경찰은 몇 달 전부터 김 전 차관이 등장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성접대 동영상을 확보하고 있었다. 김 전 차관은 검찰총장 후보로까지 하마평에 올랐던 '실세'였다. 성접대 사건을 컨트롤했던 경찰 관계자는 김 전 차관이 총장 후보가 되면 이 동영상을 터뜨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사회지도층
성접대 있었다

문제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김 전 차관은 검찰총장이 아닌 정부 내각의 일원이 됐다. 성접대 의혹이 일자 비난의 화살은 청와대로 향했다. 검찰을 겨냥했던 극비작전은 인사 실패라는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 김기용 당시 경찰청장은 '수사 진행상황을 제때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경질됐다는 게 정설이다. 검찰을 의식했다가 낭패를 본 셈이다.

성접대 수사와 관련한 이후 과정은 본지를 포함한 수많은 언론에 보도됐다. 김 전 차관은 사퇴의 변에서 "자연인으로 돌아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했다. 경찰은 특수강간 등의 혐의를 적용하며 "성접대가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김 전 차관의 친정인 검찰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혐의라는 면죄부를 줬다. 김 전 차관이 말했던 진실은 끝내 규명되지 않았다.


'별장 동영상' 등장 피해여성 이모씨
김학의·윤중천 성폭행 혐의로 고소

해가 바뀌어 김 차관은 변호사 개업을 준비했다. 이달 초 슬그머니 서울지방변호사회(회장 나승철)에 변호사 등록을 신청했다. 김 전 차관에 대한 고소장이 접수된 것도 이즈음이다. 피해여성 이모(37·여)씨는 자신이 성접대 동영상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며 검찰에 재수사를 요청했다. 김 전 차관과 건설업자 윤중천씨가 공모해 성관계 장면을 촬영했다는 주장이다.

이씨는 지난해 검찰 조사에서 동영상 속 인물이 '본인이 아니'라고 했다. 검찰은 이씨의 진술을 근거로 "동영상 속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할 수 없다"고 했다. 김 전 차관이 무혐의를 받게 된 이유다.

하지만 이씨는 입장을 바꿨다. 동영상 속 인물이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이씨는 "여성으로서 성관계 동영상 속 인물이 나라고 밝히기 쉽지 않았다"고 언론에 해명했다. 본지가 입수한 고소장에는 더욱 상세한 이유가 적혀 있다.

이제는 진실을
말할 수 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이씨는 성접대 동영상 '사본'을 봤다. 화질이 좋지 않아 젊은 여성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이씨는 평소 건설업자 윤씨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동영상을 촬영당한 A씨가 영상 속 여성일 거라 생각했다. 이씨는 피해여성이 A씨라고 진술했다.

그런데 며칠 뒤 이어진 조사에서 이씨는 자신의 진술이 잘못됐음을 알았다. 동영상 '원본'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영상 속 피해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구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씨는 진술을 번복할 수 없었다. 겁이 났기 때문이다. "언론을 떠들썩하게 한 화제의 동영상 속 인물이 나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씨의 진술은 다른 피해여성의 진술과 일치하고 있었다. 이씨 입장에선 낯부끄러운 일에 굳이 본인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피해자가 많았기 때문에 김 전 차관과 윤씨가 당연히 처벌당할 것이라 생각하여 조사에 소극적으로 임했었다"고 적은 이씨다.

김 전 차관은 조사 과정에서 "이씨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이씨와 성관계를 갖거나 동영상을 촬영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씨는 고소장에서 "김 전 차관이 별장은 물론 서울 인근에서도 성접대를 받았고, 윤씨와 공모해 자신의 신체를 강제로 촬영한 사실이 있다"고 반박했다.

아울러 이씨는 건설업자 윤씨가 해당 동영상을 캡처하여 자신과 가족을 협박했다고 주장했다. 윤씨의 강요로 성접대를 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입장이다. 이씨는 고소장에서 "윤씨가 자신을 강간하거나 폭행 또는 협박하여 심리적으로 억압한 후 상습적으로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밝혔다.

고소장에 따르면 성접대에 연루된 인물은 김 전 차관 외에 5명이 더 있다. 거론된 면면은 대기업 건설사 전직 대표, 전경련과 밀접한 중견그룹 회장, 유명병원 원장, 중소건설업체 대표, 화가 등이다. 이들 중 일부는 지난해 성접대 수사 과정에서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당시 검찰은 김 전 차관과 같은 이유로 이들 모두에게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피해여성(이씨)이 강간을 당한 직후 신고하지 않았고 ▲윤씨에게 (성접대의 대가로) 경제적인 도움을 받으려 했으며 ▲이씨의 진술이 오락가락 하는 등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윤중천, 김학의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이씨의 주장은 달랐다. '경제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 윤씨와 만났다'는 검찰 수사결과가 잘못됐다는 항변이다. 윤씨는 열다섯살 터울인 이씨를 먼저 꾀었다. 몇 번의 만남 끝에 윤씨는 이씨에게 성접대를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불법적인 폭력이 자행됐다.

고민하고 있던 이씨에게 다시 연락이 온 건 며칠 뒤였다. 윤씨는 사업을 미끼로 사과를 할 테니 별장에서 보자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면부지인 김 전 차관에게 몹쓸짓을 당했다. 이씨는 "누군가 약을 탄 술을 나에게 먹였고, 김 전 차관이 강제로 관계를 맺었으며, 윤씨가 이 장면을 촬영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씨는 "다음날 윤씨가 '어제 너랑 X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 법조인인데 엄청 무서운 분이야.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내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개가 되는 거야. 알았어?'라고 겁박했다"고 덧붙였다.

유력 검찰총장 후보 성접대 사건으로 낙마
윤중천 "학의 형만 아니면 너랑 가족은 죽었어"

이씨는 "윤씨의 폭행과 욕설, 그리고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는 게 두려웠다"고 했다. 2008년 3월께 이씨는 자신이 찍힌 동영상 캡처 사진이 친동생에게 전송된 것을 알고 뒤늦은 신고를 결심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씨는 윤씨로부터 "학의형만 아니었으면 너와 네 가족들은 묻어버렸을 것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살아라"라는 협박을 당했다고 알렸다.

2006년 말께 윤씨는 이씨를 "로비스트로 키워주겠다"며 서울 인근에 가게를 마련해 준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 과정에서 검찰은 이 대목을 문제 삼았다. 그렇지만 이씨는 "윤씨가 부린 술수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오히려 가게와 가까운 전셋집(일명 윤중천의 놀이터)이 성접대 장소로 제공돼 성노리개로 살았다는 설명이다.


성접대 동영상
목소린 일치했다

경찰 내사 단계에서 동영상을 실제로 봤던 한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성접대 동영상 속 피해여성은 속옷차림의 남성과 블루스를 추고 있다. 이 남성은 반라나 다름없는 여성과 엉겨 노래를 부르던 중 속옷을 벗고 성관계를 한다. 이때 부른 노래가 바로 '연'이다.

성접대 의혹이 불거졌을 당시 숭실대학교 소리공학연구소장 배명진 교수는 "동영상 속 남성의 목소리가 김 전 차관의 실제 목소리와 95% 유사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도 비슷한 의견을 냈다. 결국 영상 속 남성은 김 전 차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었다.

피해자 이씨는 김 전 차관과 윤씨를 고소하면서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등 혐의를 적시했다. 단순 성폭행이 아닌 카메라를 이용한 촬영 행위 유무가 피의자 처벌의 쟁점이 될 전망이다. 다시 말하면 영상 속 인물을 특정할 수 있느냐가 수사의 관건이 되는 상황이다.

현재 해당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강력부(강해운 부장검사)에 배당돼 있다. 지난해 강력부는 김 전 차관의 특수강간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때문에 검찰이 이씨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자신들의 수사 결과를 뒤집어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앞서 검찰은 형사부 등에 재수사를 맡기려다 강력부로 방향을 틀었다. 수사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지난 15일 서울지방변호사회는 "김 전 차관의 변호사 등록신청 철회를 권고했다"고 밝혔다. 김 전 차관도 이를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여전히 모든 의혹을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 전 차관. 그는 언론을 포함한 외부의 연락을 일절 받지 않고 있다. 억울함에 각혈까지 했다던 김 전 차관. 그가 말했던 '진실'은 언제쯤 가려질까.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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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