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닫은' 영등포교도소 '구구절절' 히스토리

육중한 철문 사이로 사연도 가지가지

[일요시사=사회팀] 영등포교도소(현 서울남부구치소)가 65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서울 구로구 천왕동에 새 교정시설이 들어서면서 빈 건물로 남아있던 영등포교도소는 빠르면 이번 달 내로 철거가 진행될 예정이다. 한때 '민주화의 상징'으로 불리며 현대사의 영욕을 지켜봤던 영등포교도소. 우리 사회 한 단면을 거울처럼 비췄던 영등포교도소의 남다른 이력을 살펴봤다.

불의한 사회에 맞서 민주화를 외쳤던 운동가도, 불의한 정권에 빌붙어 사욕을 챙겼던 부역자도, 불의한 시대상에 분노하며 인질극을 벌였던 탈주범도 그곳에선 모두 수의를 입었다.

역사 뒤안길로

영등포교도소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1941년 '부천형무소'로 문을 연 영등포교도소는 1961년 '부천교도소'로 시설명이 바뀌었다가 1968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영등포교도소란 이름을 갖게 됐다. 1969년 영등포교도소 옆에는 영등포구치소가 들어왔다.

1980년 영등포교도소가 자리한 서울 고척동은 영등포구에서 구로구로 행정 관할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영등포교도소란 명칭은 변함없었다. 2011년 5월 서울남부교도소로 개칭된 영등포교도소는 같은 해 10월 모든 수감자가 떠나면서 빈 시설이 됐다.

영등포교도소에 있던 수감자들은 구로구 천왕동에 새로 만들어진 교정시설(서울남부교도소)로 몸을 옮겼다. 규모 6만7696㎡ 부지에 수용동, 작업장 등을 갖췄던 영등포교도소는 지난날의 영욕을 뒤로하며 쓸쓸한 퇴장을 준비 중이다. 


높은 감시탑과 두꺼운 담장을 지나 교도소 내부로 진입하면 차가운 콘크리트 벽이 황량한 분위기를 더한다. 2011년까지 영등포교도소 내에는 교도소 14개 동과 구치소 42개 동이 있었는데 이중 교도소는 800여명을 구치소는 1500여명을 각각 수용했다고 한다. 또 감옥에 들어온 이들은 혼거실 또는 독거실에 배치됐는데 혼거실의 경우는 14m²의 방을 6∼16명이 같이 썼고, 독거실의 경우는 2m²의 방을 혼자 이용했다.

이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죄목으로 육중한 철문 속에 갇혔다. 원칙적으로 철문 밖의 세상은 이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꺼운 쇳덩이를 뚫고 나온 메시지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횃불이 되기도 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영등포교도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이다. 1987년 1월14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당시 치안본부 대공분실 소속 수사관들에 의해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수사관들은 박종철의 선배인 박종운의 소재를 추궁하며 10시간 넘게 폭행·고문을 자행했다. 박종철은 전기고문에 이어 물고문을 받다가 끝내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스물 셋이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한 대학생의 억울한 죽음을 은폐하려 했다.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해명으로 공분을 일으켰다. 또 사건 진상은 축소 발표됐다. 5명이던 범인이 2명으로 왜곡됐다. 그러나 진실은 숨길 수 없는 법. 남은 3명의 범인을 처음 알린 곳이 바로 영등포교도소다.

당시 시국사건으로 투옥 중이던 이부영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은 박종철을 숨지게 한 수사관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는 영등포교도소에 근무하고 있던 한 교도관이 일러 준 것이다. 충격적인 사실에 이 고문은 급히 메모도구를 찾았다.

이때 말없이 펜을 건넨 이가 이 고문을 감시했던 교도관이다. 이 고문이 작성한 메모는 재야 민주화 인사인 김정남(후일 청와대 비서관)씨에게 넘어갔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이 고문의 메모를 담장 밖으로 넘긴 '밀사'도 있었으니 그 역시 전직 교도관이었다.

이처럼 교도관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은 아직까지 미제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의의 편이었고, 5월18일 역사적인 추모 미사에서 전두환정권의 맨 얼굴이 드러났다. 성난 여론은 들불처럼 번져 거리를 가득 매웠다. 전두환정권은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이후 영등포교도소는 민주화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가 됐다. 앞서 유신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쳤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긴급조치 1호 위반 사건의 첫 피고인으로 영등포교도소에 갇혔다. 김지하 시인과 함세웅 신부,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도 영등포교도소를 거쳐 갔다. 1986년 민청련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 받은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은 영등포교도소에 투옥됐다.

서울구치소에서 영등포교도소로 이송된 김 전 고문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문으로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치아가 흔들려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으며,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김 전 고문을 악랄하게 고문했던 이근안은 2000년 10월 김 전 고문이 투옥됐던 영등포교도소로 이송돼 7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근안은 수감생활 중 교도소 내 두부공장에서 일했는데 자신에게 중형이 내려진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부공장에서 그의 특기인 '관절뽑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89년 6월 머리가 벗겨진 한 사내가 영등포교도소로 들어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경환씨였다. 그는 새마을운동본부 회장으로 있으면서 공금 70억원을 횡령하는 등 부정부패를 저질러 이른바 '범털'이 됐다. 경환씨는 교도소에서 화초에 물을 뿌리는 편한 일만 하다가 3년여 만에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경환씨가 받은 징역은 7년이었다.
 

비슷한 시기 경환씨처럼 징역 7년을 선고 받은 한 사내가 있었다. 그에게는 보호감호 10년까지 더해졌다. 탈주범 지강헌. 그는 556만원을 절도한 혐의로 경환씨와 같은 징역형을 받았다. 1988년 10월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송되던 지강헌은 다른 재소자와 함께 탈주를 감행했다.

하지만 지강헌이 꿈꾸던 '할리데이'는 그리 길지 못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절규가 전파를 타고 대한민국 전역에 생중계됐다. 몇 발의 총성, 지강헌은 숨을 거뒀지만 그가 남긴 세기의 명언은 온 국민의 가슴을 울렸다. 안타깝게도 지강헌의 절규는 영등포교도소가 사라지고 있는 지금 시점에도 제법 유효한 듯 보인다.

민주화의 상징

영등포교도소 인근에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다. 봄이면 살랑살랑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곧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영등포교도소. 그 터에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작은 비문 하나 남겨두면 어떨까. 여기 정의가 있었노라고.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영등포구치소 거친 범털은?

형이 확정된 수형자가 머무는 곳은 교도소,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가 머무는 곳은 구치소다. 영등포구치소에는 정치인부터 연예인까지 다양한 인물이 오고 갔다.

먼저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른바 '서울대 522' 사건에 연루,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된 전력이 있다. 또 이광재 당시 민주당 의원은 2009년 정치자금법 위반 등 혐의로 영등포구치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세기의 스캔들로 화제를 뿌린 신정아씨와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 역시 영등포구치소로 나란히 수감돼 이목을 집중시켰다.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도 영등포구치소 출신이며, 방송인 신정환, 이성진 등도 각각 위법 행위로 영등포구치소에 갇힌 경험이 있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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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