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인증서 폐지> 오락가락 정책 논란

뒷말에 휩쓸려 ‘이랬다 저랬다 요랬다’

[일요시사=경제2부] 앞으로 외국인뿐 아니라 내국인도 공인인증서 없이 인터넷 쇼핑몰에서 직접 구입할 수 있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언급한 사항에 따라 정부가 공인인증서를 없애기로 결정한 것이다. 처음에는 외국인에게만 해당됐지만 내국인 역차별이라는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정부는 내국인도 공인인증서 없이 쇼핑할 수 있도록 시정했다. 정부의 속전속결 결정에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부가 대책 없이 여론에 휩쓸려 오락가락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후속 대책 마련에 정부는 분주한 분위기다.

정부의 공인인증서 폐지는 ‘천송이 코트’에서 불거졌다. 국내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이하 별그대)>가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배우들이 입었던 의상을 구입하려는 외국인 수요자가 늘어났다.

배우 전지현이 입었던 ‘천송이 코트’를 구입하기 위해 외국인들은 국내 쇼핑몰을 찾았다. 그러나 대부분 까다로운 공인인증 절차에 걸려 ‘천송이 코트’를 구입하지 못했다.국내 인터넷 쇼핑몰에서 30만원 이상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인인증서와 액티브X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 공인인증서를 발급받을 방법이 없는 외국인이나 해외 쇼핑객은 이용이 불가능하다.

줏대없는 정부

이 같은 소식은 박근혜 대통령의 귀에도 들어갔다. 지난 20일 박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규제개혁 회의에서는 드라마 <별그대>의 ‘천송이 코트’가 화제로 떠올랐다.

박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 “최근 방영된 우리나라 드라마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들었는데 이 드라마를 본 수많은 중국 시청자가 극중 주인공들이 입고 나온 의상과 패션잡화 등을 사기 위해 한국 쇼핑몰에 접속했지만 결제하기 위해 요구하는 공인인증서 때문에 결국 구매에 실패했다고 한다”며 “우리나라에서만 요구하고 있는 공인인증서가 국내 쇼핑몰의 해외진출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도 “한류 열풍으로 인기 절정인 ‘천송이 코트’를 중국에서 사고 싶어도 못 사는 이유는 바로 액티브X 때문”이라며 “액티브X는 본인확인, 결제 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설치해야 하는 한국만 사용하는 특이한 규제”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주문에 따라 정부는 외국인이 한국 사이트에서 의류 등 각종 제품을 공인인증서 없이 살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다. 이후 내국인들은 역차별 논란이라며 크게 반발했다. “천송이 코트를 사러 이민이라도 가야겠다”, “차라리 외국인으로 태어날 걸 한국에 잘못 태어났다” 등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

여론의 몰매에 정부는 즉각 내국인에게도 공인인증서 없이 쇼핑몰을 이용할 수 있도록 결정을 번복했다.
그러나 파장은 끝나지 않을 분위기다. 내국인들은 정부의 방침에 “근본부터 바로 잡을 생각은 안하고 대통령 말 한마디에 공인인증서를 폐지했다”며 “보안성 떨어지는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외국인 인증 없이 인터넷 구매 제도화
내국인 역차별 비난 여론에 즉각 시정

오래전부터 공인인증서와 액티브X는 개혁 대상으로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그동안 공인인증서 관련법 개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지난해 5월에도 공인인증서를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관련 법률개정안이 제출됐다. 당시 국회에서는 공인인증서 존폐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이종걸 민주당 의원은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에 대한 국회 정무위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에 “(공인인증서 의무화를 폐지하자는) 개정안의 취지는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이 주장하는 공인인증서 제도의 문제점으로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강제성이다. 한국은 대표적인 공인인증 의무사용 국가다. 전자금융감독규정에 따라 30만원 이상 결제 시 반드시 공인인증서를 사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 보안 프로그램인 액티브X 프로그램을 깔아야 하는 등 불편함이 크다.

액티브X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기술로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특정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 한국은 MS윈도우와 익스플로러 의존도가 80% 수준에 달할 정도로 높다. 따라서 대부분 온라인 사이트에는 금융 결제 시 보안을 위해 액티브X 설치를 요구한다. 액티브X를 설치한 후에는 공인인증서를 다운 받아야 한다. 구글 ‘크롬’, '파이어폭스' 등의 브라우저에서는 액티브X를 설치할 수 없어 국내 온라인 사이트에서 결제가 불가능하다.
 


보안 취약성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공인인증서는 저장 매체가 제한되지 않아 개인용 컴퓨터나 이동식 메모리(USB) 장치 등 다양한 매체에 저장·복사를 할 수 있다. 해킹에 따른 유출이나 분실의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액티브X를 개발한 마이크로소프트도 스스로 보안 취약 등의 이유로 제한적 사용을 권고하고 있다.

이런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제기됐지만 그동안 공인인증서 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외면 받아왔다. 그런데 외국인들이 ‘천송이 코트’를 살 수 없다는 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공인인증서 폐지가 속전속결로 진행된 것이다.

한 네티즌은 “그동안 공인인증서를 폐지하라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됐는데 듣지도 않더니 대통령이 중국인들 천송이 코트 사게 하자고 한 마디 하니까 바로 폐지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다”며 “이렇게 급하게 폐지하고 대안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정부의 빠른 결정에 우려하는 분위기다. 규제완화에 급급해 대안이 약하다는 평가다.

오희국 한국정보보호학회 회장은 보안부터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오 회장은 “대안 없이 무작정 공인인증서부터 폐지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라며 “외국은 공인인증서를 요구하지 않지만 부정방지 시스템이 강력하다”고 제시했다.

외국은 온라인 쇼핑몰에 엑티브X나 공인인증서를 깔지 않더라도 쉽게 결제가 가능하다. 미국은 전자자금이체법(EFTA)에 따라 금융사고는 전적으로 기업이 책임지기 때문이다. 회사 돈이 걸려있기 때문에 그만큼 보안에 투자를 많이 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미국에서 금융사고가 적게 일어나는 이유다.

그는 “근본적인 원인은 복잡한 액티브X에 있는데 공인인증서부터 폐지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며 “공인인증서 자체 폐지 여부가 아닌 개인만의 고유 서명 역할을 할 수 있는 대체수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공인인증서 자체의 폐지가 아닌 ‘공인인증서 강제사용 규정의 폐지’가 필요하다는 부연이다.

이러한 우려에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기관인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은 올 하반기를 목표로 액티브X가 필요없는 공인인증서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정부의 개선책이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사단법인 오픈넷은 성명을 통해 “액티브X 없이 공인인증서를 사용하는 기술 개발을 정부가 주도하는 것은 정부가 보안업체와 경쟁하는 것인가"라며 “정부의 공인인증서 개선책은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오픈넷은 “정부는 공인인증서 문제의 본질을 이해할 때까지 대책 마련을 중단하라”고 지적했다.

“급조된 미봉책”

금융당국은 이번 공인인증서 폐지 결정에 대해 대안 없이 급하게 이뤄진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오래전부터 공인인증서에 대한 개선안을 검토해왔다”며 “미래창조과학부에서 공인인증서 대체 수단을 찾고 있다”고 짧게 답했다.

다만 정부는 비자 마스터 카드처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신용카드 번호 등을 입력하면 물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할 전망이다. 카드번호와 유효기간으로 결제한 뒤 자동응답(ARS)으로 인증하는 등 보안 문제를 해결할 방침이다.

 


박효선 기자 <dklo216@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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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