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차별 없애기 위해 ‘김대중’에 평생 각오
DJ공적은 ‘화해와 용서’, 복지·문화에 대한 기여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동교동계 인사들이 주목받고 있다. 오랜 시간 김 전 대통령의 곁에 머물면서 그의 삶을 생생히 목도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세간에 알려진 ‘김대중’보다 더 따뜻했던, 눈물 많고 정 많은 김 전 대통령을 보았고 민주화를 위해 끝없이 투쟁한 인동초 삶의 곁에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의 유훈도 이들에게는 평소 들어오던 말일 뿐이다. 동교동계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의 숨겨진 일면들과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되새겨봤다.
‘새파랗다’고 할 만큼 젊은 나이에 ‘김대중’에 평생을 바치자고 각오했고 아내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더 좋다고 외친 이가 있다.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다.
김 전 대통령과 인생의 굴곡을 함께하면서 좋은 일보다는 궂은 일이 더 많았을 터이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을 모신 것이 내 인생의 가장 성공적인 일”이라며 “평생 존경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물고기가 바다를 떠나 존재할 수 없듯 김 전 대통령은 그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한 전 대표와의 일문일답.
- DJ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언제인가.
▲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나는 고향이 같다. 전라남도 신안이다. 대학 재학시절 고향 선배가 김 전 대통령을 찾아가는데 같이 가서 인사를 하자고 해서 찾아가게 된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 대학 재학시절부터면 상당히 오래된 인연이다. 그러나 DJ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
▲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나는 가정교사 등을 하며 고학했다.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구하던 중 경상도 분이 나는 전라도 사람이라 안 된다고 했다. 출신 지역 때문에 차별을 당한 것이다. 이러한 차별이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봤다. 차별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차별철폐’는 내 평생 과업이 됐다.
나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전라도 출신의 좋은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좋은 정치를 하고 국민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면 지역적 차별은 자연스레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할 수 있을까 생각했더니 김 전 대통령이 떠올랐다. ‘내 평생을 바치자’고 각오했다.
- 이후 계속 DJ 곁에 있었던 것인가.
▲ 1963년 김 전 대통령이 6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 선거 운동원으로 뛰었다. 1967년 6·8 선거 때도 선거운동을 하러 내려갔었다.
1971년 대선에서는 김 전 대통령을 후보로 세우기 위해 도별 조직책이 마련됐다. 각 도마다 담당자를 둬서 민심을 모으는 것이었는데 당시 나는 경상남도와 부산에서 지지자를 끌어 모았다. 중앙 정치인이 지방 정당 당원들을 포섭한 것은 정당 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결국 김 전 대통령이 1970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 후보를 이겼다.
- 이후 DJ는 박정희 정권의 정적으로 지목되면서 모진 고생을 하게 되지 않나.
▲ 1972년 유신 후 1987년 복권될 때까지 16년 동안 함께 고생했다. 감옥에 갇히고 미행당하고 연금되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감시당했다.
- DJ의 대권 도전을 위해 경상남도, 부산에서 활동했다고 했는데 당시 지역감정을 생각하면 힘든 시도였을 것 같다.
▲ 김 전 대통령은 신안군, 목포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각 도에 사람이 배치돼야 하는데) 경상도 사람이 없었다. 내가 경상남도에 갔다. “전라도 사람이라 못 믿겠다”던 사람들이 “한 동지는 경상도 사람 같다”고 할 정도가 됐다. 그때 맺은 인연이 상당하다. 경남이나 부산에 가면 광주에 가는 것보다 더 알아줄 정도다.
- 국민의 정부 5년 동안 청와대나 내각에서 일할 기회가 많았을 것 같은데 국회에만 있었다는 점도 의외다.
▲ 1992년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1997년 대선이 치러졌다. 당시 동교동계 7인이 성명을 발표했다. 청와대에 들어가거나 장관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성명을 발표한 이들 중 남궁진 전 의원이 청와대 정무수석을 하고 문화부장관을 한 것 외에는 다른 이들은 약속을 지켰다.
1998년 원내총무가 됐고 2000년 사무총장, 2002년 최고위원선거에서 1등을 했다. 국회, 당을 지키겠다고 다짐했고 끝까지 약속을 지켰다.
- 개인적으로 본 DJ는 어떤 사람이었나.
▲ ‘보통 사람’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희로애락을 다 가지고 있었다. 손자 손녀들과 놀 때는 평소의 근엄함은 찾을 수 없을 정도다. 웃고 안아주고 장난치는 모습이 천진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눈물이 많고 정에 약했다. 동정심이 많았다.
-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준비된’ 이미지였는데.
▲ 공적인 면에서는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페이스대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매사를 철저히 준비했고 그날 일은 그날 해야 했다. 검토해야 하는 서류가 쌓여있으면 새벽 2시가 되었든 3시가 되었든 다 처리를 했을 정도다.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았다.
- 한 전 대표에게 DJ는 어떤 의미인가.
▲ 김 전 대통령과는 1967년 이래 43년의 인연이다. 살아오면서 김 전 대통령의 생활과 생각, 사고의 전부를 함께하게 됐다. 심지어 아내가 ‘김 전 대통령을 택하겠소, 나를 택하겠소‘ 했을 때도 김 전 대통령을 선택했을 정도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강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고기가 바다를 떠나 존재할 수 없듯 그는 내 생활의 전부였고 우리(동교동계 인사들)의 모든 것이었다.
- DJ에 관한 일화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 1980년 신군부는 내란음모죄로 김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광주민주화운동도 김 전 대통령이 사주했다고 했다.
당시 신군부는 김 전 대통령에게 타협을 하자고 했다. “대통령이 되는 거 빼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주겠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하도 고통스러워서 ‘외국에서 여생을 보낼까’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군부가 읽어보라며 준 신문 한 부가 김 전 대통령을 결심하게 했다. 그 신문에는 광주사태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는데 김 전 대통령은 ‘광주의 수많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희생을 당했다.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 나도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죽기로 작정했다. 교수형을 당할 때 어떨까 해서 감방에서 목도 만져봤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대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내걸었고 타협해 본 적도 없다.
- 사석에서 동교동계 분들과는 어떻게 지냈나.
▲ 허물이 없었다. ‘동지’라고 불렀다. 김 전 대통령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총재님’이라고 호칭했다. ‘선생님’은 정계를 떠났다는 의미인 반면 ‘총재’는 현역 정치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992년 김 전 대통령이 정계은퇴를 선언할 때도 나는 믿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실 분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이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살아남은 것은 할 일이 있어서라고 생각했다. 그 할 일은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때문에 정계은퇴 선언에 다들 눈물을 흘릴 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 ‘왜 울어’라고 생각했다. 절대로 정치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 DJ의 공과를 꼽는다면.
▲ 이희호 여사가 김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서울 시청광장에 들러 한 연설이 있다. ‘많은 오해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인권과 남북의 화해 협력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 과정에서 권력의 회유와 압력도 있었으나 한 번도 굴한 일이 없다.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것이 남편의 유지다’라는 말이다.
김 전 대통령은 평생 ‘용서와 화해’, 남북의 평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노력했고 ‘행동하는 양심’이 되려고 했다. 납치를 당하고 사형 선고를 당하는 등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보복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피해자가 용서해야 진정한 화해가 이뤄지는 것인데 김 전 대통령은 피해자이면서 전부 용서하고 화해했다. 인간 김대중의 모습이다.
- 인간 ‘김대중’이 쌓은 공적도 있지만 그가 국가발전에 기여한 바도 크다.
▲ 대표적인 것은 노벨평화상,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간 교류와 협력에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또한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IT사업을 이끌었다.
하지만 난 복지와 문화에 대한 부분을 빼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국민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다. 국민을 편안하게 하려면 부자에게는 간섭하지 않아야 하고 가난한 이들은 부자가 될 수 있게 이끌어야 한다. 때문에 정치의 대상은 가난한 사람, 약자들인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으로 최저가족생계를 보장했다.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등 4대 보험을 정착시켜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최근 홍사덕 한나라당 의원이 칼럼에서 미국의 복지 대통령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한국의 복지 대통령으로는 김 전 대통령을 꼽았다. 외환위기 속에서도 국민연금 적용대상을 전국민으로 확대하고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한 것,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확대, 장애수당과 저소득층 보육비 지원 및 경로연금의 증액, 사회복지 전문요원 증원 등 사회안전망을 본격적으로 구축했기 때문이다.
- DJ는 문화를 가까이한 대통령이기도 했는데.
▲ 김 전 대통령은 전체 국가예산에서 문화예산을 1% 확보했다. 파주에 출판단지를 조성해 400억 기금을 조성, 문화 창달에 기여했고 돈이 없어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이들에게 자금을 빌려줬다.
한류의 기틀을 세운 것도 김 전 대통령이다. 당시 문화를 개방하면 일본 문화에 잠식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지만 도리어 한류가 일본에 전해지는 계기가 됐다.
역사가 갈수록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은 두드러질 것이다. 지금은 내가 표를 줬느냐 안줬느냐, 내 지역의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하지만 다음 세대는 제대로 된 평가를 할 것이다.
- DJ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바가 있는가.
▲ 김대중 도서관과 김대중 평화센터가 있다. 이미 김 전 대통령의 유산은 이곳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념사업은 기금을 모으면 그만큼 정부에서 보조를 해준다. 목포시, 전라남도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사상과 철학은 온 국민이 이어갈 일이다. 김 전 대통령은 국민 속에 영원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 한두 명이 김 전 대통령을 계승하겠다는 건 욕심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DJ의 유언 중 하나가 민주개혁진영의 통합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민주당에서 구민주계의 복당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들었다. 어느 정도까지 진행됐나.
▲ 당 지도부와 복당에 대한 합의를 봤다. 절차상 문제만 남았다. 당에 들어가면 백의종군하겠다. 당에 협력할 것이다. 다만 민주당은 민주당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민주당에 바라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 동교동계가 계속해서 모임을 가질 것인지 궁금하다.
▲ 동교동계는 정치조직이 아니다. 친목을 위해 모일지는 몰라도 정치조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 49제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 주최로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의 만찬 회동을 준비돼 있는 걸로 안다. DJ와 YS의 화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 어른이 밥 한 끼 사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화해는 피해자가 용서해야 진정한 화해다. 가해자가 화해를 했다고 해서 화해가 된 것은 아니다. YS는 그동안 김 전 대통령을 많이 공격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를 받아친 적이 없다.
때문에 “화해를 했다”는 YS의 말을 ‘앞으로는 김 전 대통령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김 전 대통령을 모신 것은 일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일이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할 것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평가는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국장에서 세계 각국에서 조의를 표명하고 조문사절이 찾아왔다. 이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외국 원수들을 만났을 때 어떤 원수든 존경으로 대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대한민국이 큰 나라이고 두려운 나라여서가 아니다. 김 전 대통령이 살아온 정신, 민주주의 인권 평화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에 존경의 염으로 대한 것이다. 이는 국위선양이며 대외적으로 큰 공적을 남긴 것이라 할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세기적 인물이다. 그 같은 인물이 다시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분을 모신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존경의 염으로 모시며 평생 살아갈 것이다.
▲1939년 전남 신안 출생
▲1959년 목포고등학교 졸업
▲1963년 서울대학교 외교학 학사
▲1992년 제14대 국민회의 국회의원
▲1996년 제15대 국민회의 국회의원
▲1998년 국민회의 원내 총무
▲2000년 제16대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2001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한국기원 총재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 6·13지방선거대책위원장
▲2003년 재단법인 동서협력재단 이사장
▲2004년 새천년민주당 대표,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
▲2004년 제17대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2005년~2006년 민주당 대표
▲2006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2009년 현 동서협력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