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인동초’는 졌지만 ‘행동하는 양심’은 살아있다

2009년 대한민국은 어느 해보다 슬프고 가슴 아픈 한 해가 아닐까 싶다. 한 명도 감당하기 힘든데 불과 몇 달 사이에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안타깝게 떠나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3개월여 만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DJ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격동의 대한민국 반세기 정치사에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족적을 남긴 김대중 전 대통령. 생전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언제나 뉴스의 중심이었고, 한마디 한마디는 대한민국의 역사 속 어록으로 길이 기록될 것이기에, 이제 다시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음에 국민들은 가슴이 시리고 아프다.

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상고를 졸업하고 일국의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르기까지 김 전 대통령의 삶은 참으로 고단하고 부침이 심했다. 오죽하면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고 꽃피우는 ‘인동초’에 비유되었을까. 특히 김 전 대통령 생전에 늘 지울 수 없는 꼬리표로 따라다녔던 지역갈등과 색깔 논쟁은 지금에 와서 돌이켜봐도 너무도 억울하고 어처구니없는 보수들의 음해였음이 자명하다.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절 ‘40대 기수론’을 들고 영구집권을 획책했던 박정희정권에 대항하다 대통령 낙선은 물론 망명·납치·투옥·가택연금을 당해야만 했고, 전두환 신군부정권 하에서도 어이없는 ‘내란음모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천신만고 끝에 무혐의로 풀려나 또다시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 땅에 진정한 의회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자 도전했던 국회의원선거에서 세 번의 낙선 끝에 6선 의원을 지냈고, 민족의 인권과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그렇게도 염원했던 대통령의 꿈 역시 3전4기 만에 이뤄냈으나 IMF(국제통화기금)사태로 초반부터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다.

하지만 국민의 처절한 고통분담과 탁월한 위기관리능력을 바탕으로 불과 1년 반 만에 IMF체제를 조기 졸업했음은 물론, 햇볕정책을 통해 꽁꽁 얼어붙었던 ‘동토의 땅’ 북한을 녹여 분단 반세기 만에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도 했던 민족의 지도자 김 전 대통령.


그 결과 그는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명함조차 내밀 수 없는 최고 권위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며 일약 세계의 인권민주지도자 반열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이쯤에서 필자와의 개인적인 인연도 조용히 되짚어 볼까 한다. 필자가 노태우정권 시절이던 1989년 처음 기자 생활을 시작했을 무렵, 김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에서 평민당 총재로 13대 국회를 이끌고 있었다.

그 전까진 단지 이름 석 자만 알고 있었을 뿐 관심조차 없었던 김 전 대통령과의 직접적인 인연은 특별대담 배석기자로 비롯돼, 나중에 한 번의 직격 인터뷰를 하면서 감히 내면세계에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20여년 기자 생활 가운데 수많은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얘기를 나눠봤지만 김 전 대통령만큼 해박한 식견과 투철한 민족관을 가진 이는 일찍이 찾아볼 수도 없었고 기억나지도 않는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모 잡지사 편집장으로 재직할 당시엔 김 전 대통령의 색깔론을 부각시킨 이른바 ‘DJ X파일’ 보도와 관련해 발행인과 대립하다 실직자가 되기도 했으며, 이후 타블로이드신문으로 전향해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 역사의 현장인 일산자택 좁은 주방에서 새우잠을 자던 기자들에게 고추장과 참기름 넣고 비벼준 비빔밥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던 날 대통령 취임식장은 물론 사상 처음 주간지 기자로서 청와대 대통령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 몇몇 주간지 기자들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주변의 몇몇 지인들은 ‘이제 DJ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자리 하나쯤 주지 않겠느냐’란 농을 건네기도 했으나, 그렇지도 않았을 뿐더러 혹여 그런 제의나 기회가 와도 솔잎을 먹는 송충이가 되겠다던 그 시절.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김 전 대통령이 순안공항에서 비행기 트랩을 내려올 땐 벅찬 감동에 이내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노벨평화상을 받을 땐 하염없이 기뻐 열띤 박수갈채를 보냈다. 당신은 기억도 못하는 서푼어치 친분을 지닌 기자로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민된 입장에서 느낀 당연한 감동과 기쁨이었다.

하지만 이제 국민들은 그런 그를 영원히 떠나보내야만 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했다.


특별히 어떤 역할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숨을 쉬고 곁에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존재의 가치와 의미가 충분한 그이기에 더욱 가슴이 허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느낌은 비단 필자의 느낌만은 아니리라. 이제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사려 깊은 ‘행동하는 양심’은 국민들 마음에 올곧게 뿌리박고 남았다. “민주주의는 절대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던 그의 ‘행동하는 양심’에 진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가 못다 이룬 뜻을 받들어 진정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일궈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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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