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성범죄 전과 의혹 황석희

믿고 보던 번역가의 어두운 과거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스타 번역가’ 황석희가 성범죄 전과 의혹이 드러나며 곤욕을 겪고 있다. 평소 보여주던 가족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소신 있는 발언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아온 만큼, 이를 접한 대중 사이에서는 그에게 배신감이 크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황석희는 1979년생으로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영화 번역가다. 자막의 뉘앙스를 살려내는 감각과 캐릭터의 말맛을 살리는 번역으로 입소문을 타며, 이른바 ‘스타 번역가’로 자리 잡았다. 대학 시절 그는 영어교육학을 전공했지만, 주변 동기들처럼 교원 임용시험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 시험에 매달릴 자신이 없었고, 교사라는 직업이 자신에게 맞는지에 대한 확신도 부족했다. 대신 그가 선택한 방향은 ‘번역’이었다.

길고 긴
무명 시절

특히 책 번역가를 꿈꾸며 진로를 설정했지만, 초보 번역가에게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현실적인 선택으로 시작한 것은 계약서, 매뉴얼, 서신 등을 다루는 이른바 ‘단순 번역’ 작업이었다.

대학 4학년 시절부터 각종 아르바이트 형태의 번역을 맡으며 생계를 이어갔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실무 경험을 쌓았다. 당시만 해도 영화 번역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황석희는 미국 토크 프로그램 <닥터 필 쇼> 번역 작업을 맡으면서 영상 번역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됐다. 그때까지 그는 영상 번역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도, 제대로 된 작업 환경을 갖춘 적도 없었다. 단지 “영상 자막은 두 줄로 쓴다”는 정도의 기본적인 정보만 알고 시작한 수준이었다.

작업 환경 역시 지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영상 파일이 아닌 비디오테이프로 작업이 이뤄졌다.

그는 중고 매장에서 비디오 재생 장비를 직접 구입한 뒤, 리모컨을 이용해 영상을 ‘돌리고, 멈추고’를 반복하며 번역을 진행했다. 한 문장을 확인하기 위해 수차례 되감기를 반복하는 방식은 시간과 체력을 동시에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황석희는 이 시기를 두고 “아마 이 바닥에서 나만큼 밑바닥부터 시작한 번역가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현장에서 하나씩 체득해 온 경험에 대한 자부심인 것이다.

이후 그는 다큐멘터리와 방송 번역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을 비롯한 다큐멘터리 번역을 약 1년 반가량 맡으며 영상 번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고, 이어 미국 드라마 번역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

그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 <24> <왕좌의 게임> <뉴스룸> <더 퍼시픽> <로앤오더> 등 다수의 인기 미드(미국 드라마)를 번역했다. 장르와 분위기가 각기 다른 작품들을 번역하면서 축적한 경험은 상황과 감정을 살려내는 번역 스타일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특히 드라마 번역은 영화와는 또 다른 방식의 엄격함을 요구하는 분야였다. 케이블 채널의 경우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사전 수준으로 맞춰야 할 정도로 검수가 까다로웠고, 표현 수위 역시 강한 제한을 받았다. 번역 과정에서 제작사나 채널이 직접 개입하는 경우도 많아, 번역가의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제한되는 구조였다.

이처럼 오랜 기간 드라마 번역으로 경력을 쌓았지만, 그의 목표는 분명히 영화였다. 그는 “많은 영상 번역가들이 영화 번역을 하고 싶어 한다”며 “극장에서 내가 번역한 작품을 관객과 함께 보는 경험은 큰 의미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영화 번역 시장은 이미 기존 번역가들이 자리 잡고 있는 폐쇄적인 구조였다. 실제로 그는 첫 영화 번역 기회를 얻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나에게 실망할 날 온다”
의미심장 발언 재조명

처음 맡은 영화는 2009년 개봉한 <선샤인 크리닝>으로, 비교적 규모가 작은 작품이었다. 운 좋게 기회를 얻었지만, 그 이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첫 작품 이후 약 4년간 추가적인 영화 번역 작업을 맡지 못하는 공백기를 겪어야 했다.

그러던 와중 두 번째 영화 번역을 맡으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황석희는 영화 <웜 바디스> 번역을 통해 다시 영화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그는 당시 “첫 작품을 맡았던 회사였지만 나를 기억하지 못했고, 미드 번역 이력을 본 실무자가 추천해 기회를 얻게 됐다”고 설명했다.

<웜바디스>는 예상 외로 흥행했고, 번역에 대한 좋은 평가도 받게 되면서 이후 영화 번역 작업이 꾸준히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황석희는 본격적인 영화 번역가로 활동하게 됐다.

황석희는 지금까지 500편이 넘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번역했다. 그가 참여한 작품은 <스포트라이트> <사울의 아들> 등 해외 주요 영화제 수상작이 많다. <스포트라이트>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사울의 아들>은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황석희라는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 영화는 히어로물 <데드풀>이었다. 국내에서 약 290만 관객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기존 히어로 영화와 달리 19금 유머와 비속어, 은어가 다수 포함된 이른바 ‘B급 정서’가 특징이다. 번역 난도 역시 상당히 높은 작품이었다.

황석희는 당시 작업을 마친 뒤 “개봉하면 욕을 많이 먹을 것 같아 잠수를 고민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개봉 이후 반응은 정반대였다. 관객들은 그의 번역을 두고 ‘약 빤 번역’이라는 표현을 쓰며 호평을 보냈고, 기존 자막과는 다른 방식의 표현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면서 ‘초월 번역’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번역 과정에서 그는 캐릭터의 성격을 기준으로 표현을 선택한다고 설명했다. 오프닝 크레디트 번역에는 원문 표현을 단순히 직역하는 대신, 캐릭터의 성격을 반영해 ‘호구들’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이에 대해 그는 “데드풀이 직접 썼다면 어떤 표현이 어울릴지를 기준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특히 <데드풀>처럼 대사의 비중이 큰 작품의 경우, 말의 리듬과 뉘앙스를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황석희는 <스파이더맨: 홈커밍>과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번역 과정에서도 시리즈의 설정과 캐릭터 톤을 고려해 작업을 진행했다. 특히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자막에서 등장한 ‘피터 찌리릿’이라는 표현은 원문 ‘Peter tingle’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약 3주간 표현을 검토했으며, “유치한 느낌과 의미 전달을 동시에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데드풀>로
초월 번역

표현 수위 조정 역시 번역 과정의 일부다. 예를 들어 ‘male escort’라는 표현은 ‘애인 대행 알바’로 순화해 번역했다. 그는 해당 사례에 대해 “장면의 분위기를 고려해 표현을 조정했다”고 밝혔다.

황석희의 번역에 대한 철학은 남다르다. 여러 인터뷰에서 번역의 역할을 “연출자의 의도와 대사의 의미를 관객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왔다. 그가 말하는 좋은 자막은 ‘들리는 자막’이다. 관객이 자막을 읽는다는 느낌이 아니라, 마치 인물이 한국어로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단순히 영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캐릭터의 말투나 상황, 장면의 흐름까지 함께 고려해 문장을 다듬는다. 작업 방식도 이런 기준에 맞춰져 있다.

원작이 있는 작품은 사전에 관련 자료를 충분히 찾아본다. <데드풀>이나 <로건>을 번역할 때는 코믹스 세계관을 따로 공부했고, <알리타: 배틀 엔젤>을 맡았을 때도 원작 만화를 직접 찾아봤다. 팬들이 낯설지 않게 느끼도록 하기 위한 과정이다.

전문적인 내용이 나오는 작품에서는 더 꼼꼼해진다. 전쟁 영화라면 군사 용어를 따로 확인하고, 언론이나 법조 분야를 다룬 영화는 실제 종사자에게 자문을 구한다.

<더 퍼시픽>이나 <스포트라이트> 같은 작품에서 이런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는 “관련 분야 사람이 봤을 때 어색하지 않은 게 중요하다”고 말해왔다. 표현 선택에도 나름의 기준이 있다. 특정 단어나 욕설이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되면 다른 표현으로 바꾼다.

단순히 원문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상황에 맞고 자연스럽게 들리는 쪽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번역가들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오역에 대한 태도도 비교적 분명한 편이다. 문제가 제기되면 인정하고 사과하는 쪽을 택한다. 이후 수정이 가능한 경우에는 자막을 다시 손보기도 한다.

과거에는 비판을 반박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인정하고 고치는 게 가장 빠른 해결”이라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번역 기준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달라졌다.

초기에는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번역’에 더 무게를 뒀다면, 지금은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더 중요하게 본다. 관객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선택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뀐 셈이다.

그렇다고 기준이 느슨해진 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에 대한 기준은 더 엄격해졌다. 그는 지금까지 번역한 작품 중에서도 “100% 만족한 대사는 없다”고 말한다. 개봉 이후에도 더 나은 표현이 떠오른다고 할 정도로, 작업에 대한 아쉬움을 계속 남겨두는 편이다. 이처럼 완벽주의적인 작업 때문에 황석희는 흔히 ‘초월 번역가’로 불린다.

남다른
철학으로

하지만 최근 황석희의 성범죄 전과에 대한 의혹이 보도되면서 ‘스타 번역가’의 명예가 땅으로 떨어졌다. 지난달 30일 <디스패치> 보도를 통해 황석희의 과거 성범죄 전력 의혹이 공개됐다.

매체 보도에 따르면 황석희는 2005년과 2014년 두 시기에 걸쳐 총 3차례 사건에 연루됐으며,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총 5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황석희는 2005년 강원 춘천 일대에서 길을 가던 여성들을 상대로 연달아 범행을 저질렀다. 한 여성에게는 뒤에서 접근해 신체를 만지며 넘어뜨린 뒤 추행을 이어갔고, 이를 제지하던 피해자의 지인을 폭행해 상해를 입힌 것으로 보도됐다.

같은 날 인근에서 또 다른 여성을 상대로 유사한 방식의 추행을 시도했고, 이를 말리던 동행인을 폭행하는 등 추가 피해가 발생했다. 해당 사건으로 황석희는 강제추행치상 및 상해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014년에는 당시 자신이 강의를 맡고 있던 문화센터 수강생을 상대로 술자리를 가진 뒤 만취 상태의 수강생을 숙박업소로 데려가 유사강간을 시도하고, 피해자의 신체를 촬영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 사건에 대해 재판부는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판단해 준유사강간 및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를 인정했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이와 함께 성폭력 치료 강의 수강과 사회봉사 명령도 내려졌다.

재판 과정에서는 황석희의 반성 여부와 함께 가족의 생계 등이 양형에 고려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2014년 사건에서는 아내의 선처 호소가 재판부 판단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징역형이 선고됐지만 법정 구속은 이뤄지지 않고 집행유예가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사실이 보도되자 황석희는 자신의 SNS를 통해 입장을 밝혔다. 그는 “현재 관련 사항에 대해 변호사와 검토를 진행 중”이라며 “보도 내용 중 사실과 다른 부분이나 확인되지 않은 내용, 법적 판단 범위를 벗어난 표현이 포함될 경우 정정 및 대응을 검토하겠다”고 짧은 입장문을 남겼다.

다만 해당 입장문에서는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대한 설명이나 피해자에 대한 언급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후 황석희는 기존 게시물 대부분을 삭제하거나 비공개 처리하면서 SNS 활동도 사실상 중단한 상태다.

논란이 확산되면서 방송가와 출판계, 광고업계 전반에서 관련 콘텐츠를 정리하는 움직임도 빠르게 이어졌다. 먼저 방송가에서는 황석희가 출연했던 <유 퀴즈 온 더 블럭>과 <전지적 참견 시점> 회차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비공개 처리됐다.

해당 방송의 하이라이트 영상과 유튜브 클립 역시 대부분 삭제되거나 접근이 제한된 상태다. 라디오 프로그램과 인터뷰 콘텐츠 등에서도 그의 출연분이 잇따라 정리되며 사실상 노출이 중단됐다.

‘3차례’ 성범죄 전력 알려져 논란
방송·출판·광고 ‘전방위 손절’

출판계에서도 비슷한 조치가 이어졌다. 황석희가 펴낸 에세이 <번역: 황석희>와 <오역하는 말들>은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 등 주요 온라인 서점에서 판매가 중단되거나 품절 처리됐다. 일부 서점에서는 “출판사 유통 중단” 사유가 안내되며 사실상 유통이 멈춘 상태다.

광고 및 브랜드 협업 콘텐츠 역시 빠르게 정리됐다. 그가 참여했던 광고 영상과 홍보 콘텐츠가 잇따라 삭제되면서, 상업 활동 영역에서도 그와 거리 두기가 이어지고 있다.

개인 SNS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논란 직후 입장문을 제외한 기존 게시물이 대부분 삭제되거나 비공개 처리됐고, 하루 사이 팔로워 수가 약 1만명가량 감소하는 등 대중 반응도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이번 논란은 그동안 대중에게 알려졌던 그의 이미지와도 괴리가 있어 더 큰 파장을 낳고 있다. 황석희는 방송과 SNS를 통해 가족, 특히 딸에 대한 애정을 자주 드러내며 이른바 ‘딸 바보’ 이미지로 굳어졌다.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을 당시 그는 “32개월 된 딸이 하는 말을 전부 번역해보고 싶다”며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말하는 등 자녀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또 다른 인터뷰와 방송에서도 그는 딸과 관련된 일상을 언급하며 “아이를 볼 때마다 하루가 영화 같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거나, 놀이터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떠올리며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는 등 가족 중심적인 모습을 강조해 왔다.

SNS에서도 육아와 관련된 고민이나 일상을 꾸준히 공유하며 대중과 소통해 왔고, 논란이 불거지기 불과 이틀 전에도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을 언급하며 “새로운 시작을 앞둔 아이를 응원한다”는 글과 함께 자신이 번역한 그림책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그의 과거 발언과 글들도 온라인을 중심으로 다시 확산되고 있다. 황석희는 과거 SNS와 인터뷰를 통해 “롤모델이나 멘토로 생각하지 말라. 언젠가 반드시 실망할 날이 온다”는 취지의 글을 남긴 바 있다. 또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유해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스스로를 완전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자신의 과거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영웅화나 낭만화를 경계한다”며 “기억에 살을 덧붙이고 각색하다 보면 결국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여러 차례 해왔다. 당시에는 현실적인 조언으로 받아들여지며 공감을 얻기도 했다.

이대로
나락행

하지만 이번 논란 이후 해당 발언들이 다시 조명되면서, 온라인에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일부 누리꾼들은 “본인의 성범죄 전과가 알려질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고, 또 한편에서는 “과거 발언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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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부는 ‘김부겸 바람’ 해부

대구에 부는 ‘김부겸 바람’ 해부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김부겸 전 국무총리가 등장하자 보수의 심장인 대구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광폭 행보에 나선 김 전 총리를 바라보는 대구 시민들도 양가감정이 교차하는 모양새다. 더불어민주당은 1995년 민선 시장 선출 이래 대구에서 단 한 번도 시장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구 민심이 심상치 않은 만큼 최초의 진보 대구시장이 탄생할지 이목이 쏠린다. 대구는 보수 정당 지지세가 가장 강한 광역자치단체이다. 지난 6·3 조기 대선 당시 이재명 대통령 후보는 대구에서 23.22%(37만9130표)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반면 국민의힘 대선주자였던 김문수 후보는 67.62%(110만3913표)를 기록했다. 이처럼 대구는 윤석열정부 퇴진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조차도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약세를 보이는 지역이었다. 적절한 타이밍 그런 대구에서 최근 국민의힘이 힘을 못 쓰고 있다. 지도부를 중심으로 당이 지리멸렬하는 사이 김부겸 전 국무총리가 대구시장에 출사표를 던졌고, 민주당이 빠르게 치고 나가면서 우위를 선점했다. 지난달 30일 김부겸 후보는 “지역주의 극복과 지역 균형발전, 그것이 저의 마지막 소명”이라며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 김 후보는 대구에 당선된 경험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2012년과 2014년 각각 제19대 총선·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대구광역시장)에서 낙선했으나 2016년 제20대 총선을 통해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에서 당선됐다. 이후 제21대 총선에서 또다시 낙선하면서 고배를 마셨다. 당시 김 후보는 캠프 해단식에서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면목이 없다”면서도 “포기하지 않겠다. 새로운 날들을 향해 걸어가겠다”고 다짐했던 바 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김 후보가 다시 대구 전면에 등장했다. 김 후보는 대구시장 출마 기자회견을 통해 “대구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며 “굳이 이런저런 수치를 열거하지 않겠다. 대구의 정치, 한 당이 독식하는 구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김 후보는 “정치인이 일을 안 한다. 일 안 해도 서울에서 공천만 받으면 또 된다. 대구 시민을 표 찍어주는 기계로 취급한다”며 “요즈음 시장 공천 과정을 보면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냐는 생각이 든다. 지금 국민의힘이 보여주는 모습은 제대로 된 보수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어 “대구 시민과 함께 대구의 미래 희망을 찾겠다”는 포부를 밝히면서 “지금 대구에 필요한 사람, 김부겸이다. 나를 잘 써달라. 김부겸과 함께 대구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이날 김 후보는 자신의 개인 전화번호도 공개했다. 김 후보는 “대구시장에 출마하는 김부겸으로서 시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겠다”며 “경기도 군포 초선 시절부터 해왔던 대로 제 전화번호를 공개하겠다. 대구를 위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 달라”고 말했다. 아울러 “국민의힘을 버려야 진짜 건강한 보수가 살아난다”며 “이번 선거는 대구가 다시 숨 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지역주의 극복과 지역 균형 발전이 제 마지막 소명이다. 대구 시민과 함께 대구의 미래 희망을 찾겠다”고 강조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보수 심장’ ‘민주당’ 없는 민주당 동진 전략 지난 3일 민주당 공천관리위원회는 중앙당의 만장일치로 김 후보를 대구광역시장 후보자에 선정했다. 이를 시작으로 김 후보는 광폭 행보를 보였는데, 특히 김 후보는 ‘민주당’이라는 여당 프리미엄을 전면에 세우는 대신 “김부겸을 도구로 써달라”는 실용주의를 내세웠다. 김 후보는 대구·경북(TK)의 상징인 박근혜·박정희 마케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있고 대구 시민들이 자부심을 느꼈다면 과오 논쟁을 넘어 대구의 미래를 향한 논쟁으로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포용의 정치를 강조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예방 가능성을 열어둔 데 이어 ‘박정희컨벤션센터’ 공약을 언급하기도 했다. 다만 민주당 한병도 원내대표는 KBS에서 김 후보의 박 전 대통령 예방에 대해 “대구 현실에 대한 판단으로 존중한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 측근인 국민의힘 유영하 의원이 회동의 전제 조건으로 ‘박 전 대통령의 실질적인 명예회복 방안’을 언급한 데 대해서는 “당 차원의 명예회복 조치는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최요한 정치평론가는 김 후보의 선거 전략을 조명했다. 그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출마 선언문을 보면 김 후보는 민주당을 강조하는 대신 대구의 발전 방향만 이야기했다”며 “김 후보가 민주당 출신인 것을 모르는 대구 시민은 없다. 그럼에도 ‘내란’ ‘계엄’ 등 예민한 단어를 빼버림으로써 시민들은 김부겸이란 인물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대신 김 후보는 국민의힘을 비판한다. ‘지금까지 국민의힘이 대구시장을 해 왔는데 대구가 뭐가 바뀌었냐, 그건 국민의힘이 무능해서’라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준다. 절대 왼쪽으로 치우쳐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최 평론가는 “(현재 보수는) 박 전 대통령 탄핵 사태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분위기가 안 좋다. 그때는 TK를 제외하고 몽땅 내줬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처절하게 패배할 것”이라며 “국민의힘이 명확하게 ‘절윤’하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워낙 김 후보가 전략을 잘 세우고 있다”고 평가했다. ‘민주당’ 빼고 ‘경제’ 넣고 홍준표 전 대구시장도 참전했다. 홍 전 시장은 자신의 SNS를 통해 “대구에 도움이 된다면 당을 떠나 정치꾼이 아닌 역량 있는 행정가를 뽑아야 한다”며 김 후보를 추켜세웠다. 그는 “부산은 스윙 보터 지역이라 민주당이 가덕신공항도 해주고 해수부도 이전해 주지만, 대구는 막무가내식 투표를 하니까 민주당 정권이 도와주지도 않고 버린 자식 취급을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후임 대구시장이 능력 있고, 중앙정부와 타협이 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김부겸 전 총리를 언급한 것”이라며 “민주당을 지지한 게 아니라 김부겸을 지지했다고 봐주시면 한다”고 설명했다. 김 후보의 지지율이 연일 상승하면서 안정궤도에 돌입했다는 평이 나온다. TBC가 리얼미터에 의뢰해 지난달 28~29일 대구 시민 8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김 후보는 차기 대구시장 적합도 49.5%를 기록해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15.9%)을 큰 격차로 앞섰다. 김 후보와 국민의힘 후보 간의 1대1 가상 대결에서도 추 의원과 맞붙을 경우 52.3% 대 36.6%로 오차범위 밖 우세를 보였다. 해당 여론조사는 무선전화 자동응답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5%p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그동안 김 후보는 꾸준히 상위권을 차지했지만 정치권에서는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이하 방통위원장)과 국민의힘 주호영 의원이 컷오프되자 반발 차원에서 대구 시민이 역결집한 것으로 봤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오름세를 보이면서 이 같은 현상은 단순 역결집이 아니라 실제 보수 민심에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 민주당도 김 후보 지원사격에 나섰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 8일 대구에서 최고위원 회의를 열고 김 후보를 ‘제2의 노무현’ ‘제2의 이재명’이라고 평가했다. 정 대표는 “노무현이 종로 꽃길을 마다하고 부산 가시밭길에 도전했듯이 김부겸도 군포 꽃길을 마다하고 대구 가시밭길에 내려왔다”며 “김부겸도 이재명도 대구·경북 사람이고 민주당에서 비주류였다”고 말했다. 이날 정 대표는 당정 차원에서 지역 숙원사업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정 대표는 “이 대통령이 지난 대구 타운홀미팅에서 TK 신공항 건설, 취수원 문제 등 대구 숙원 사업 추진 의사를 밝혔다”며 “그 의지는 앞으로 예산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팍팍 깎이는 현지 민심 TK 통합에 대해선 “국민의힘이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바람에 통합이 멈춰 섰다”며 “김 전 총리와 힘을 합쳐 통합을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화답하듯 김 후보는 “이 대통령이 대구에 중요한 약속을 했고, 정 대표도 ‘무엇이든지 다해드림센터장’이 되겠다고 했다. 이 보증수표를 믿고 대구를 메딕시티, AI·로봇 수도, 미래 모빌리티 산업 선도 도시로 만들어 그 약속을 시민의 삶과 연결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 후보의 전략은 ‘민주당’을 빼고 대신 ‘대구 발전’ ‘민생’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해석된다. 지난 9일 김 후보는 후보 등록을 마친 뒤 취재진들과 만나 1호 공약을 소개하는 등 민생·경제 살리기에 집중하고 있다. 1호 공약으로 대구의 지역 경제 발전을 꼽으며 “지역의 주요 기관과 단체, 어른들께 조속히 인사를 올리는 것이 급선무다. 대구 곳곳을 마주하며 지역의 어려움과 스스로의 부족함을 동시에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역 최대 현안인 인구 유출 문제를 언급하며 “젊은이들이 떠나는 것이 하나의 흐름으로 굳어져서는 안 되는데 이를 막지 못하는 현실에 시민들이 아픔을 느끼고 있다”며 “그만큼 책임감이 무겁다”고 강조했다. 그는 “청년 일자리 해결과 경제 도약에 집중할 것”이라며 “대구의 절실한 요구를 예산과 법률로 뒷받침하겠다는 것이 핵심 공약”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안방마저 내줄 상황에 몰렸다. 김 후보가 우후죽순 치고 나가고 있지만 국민의힘은 당내 교통 정리에서조차 애를 먹으면서 표가 갈릴 위험에 처한 것이다. 하루가 멀다고 싸움이 일어나는 만큼 여의도에서는 ‘김 후보의 러닝메이트가 장동혁 대표’라는 웃지 못할 농담도 나온다. 국민의힘을 향한 대구의 실망감은 숫자로도 나타났다. 지난 9일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 6일부터 8일까지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전국지표조사(NBS)에서 이번 지방선거에 ‘여당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의견은 54%, ‘야당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응답은 30%로 집계됐다. 특히 TK에서 여당 44%·야당 34%로 집계되면서 국민의힘에서도 위기감을 감지한 모양새다. 잘나가는 김 멍 때리는 장 대구 달서병을 지역구로 둔 국민의힘 권영진 의원은 “대구 여론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라며 “모두 기득권을 버리겠다는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사상 처음으로 민주당이 대구시장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권 의원은 MBC 라디오를 통해 최근 대구 민심에 대해 “그동안 국민의힘에 대한 불만으로 ‘이번에는 갈아보자’고 했지만 대안이 없어 ‘미워도 다시 한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저도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민심”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구에 반이재명 정서가 강했지만 요즘은 사람들이 많이 달라졌다. ‘윤석열보다는 이재명이 잘한다’, 심지어 ‘얄밉게 잘한다’는 사람도 있다”며 여기에 “김부겸이란 대안도 있어 대구 민심이 그 대안으로 옮겨가기 직전”이라고 지적했다. 권 의원은 국민의힘 지도부의 안일한 태도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상황인데도 당은 ‘무난히 여섯 명(예비 후보) 중 한 명을 뽑으면 된다고 하고 있다”며 “자칫 잘못하면 국민의힘에 대한 실망으로 ‘김부겸을 통해 이익이라도 챙기자’라고 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주호영, 이진숙을 다독거려서 될 문제가 아니다. 6명 중에서 뽑힌 후보가 김부겸을 이기기 힘들 만큼 대구 민심은 훨씬 더 나쁘다”며 “상황이 이렇기에 보수 기득권에 안주하는, 보수 결집으로 이기겠다라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현재 이진숙 전 방통위원장은 무소속 출마 쪽으로 마음을 굳혔으며, 가처분이 기각된 주호영 의원은 “항고심을 지켜본 뒤 거취를 판단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주 후보는 “이번 지방선거의 최대 장애물은 장동혁 대표 체제 그 자체”라며 국민의힘 지도부를 정면으로 비판하기까지 했다. 앞서 주 의원은 지난달 26일 법원에 컷오프 효력을 정지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제출했고 법원은 지난 3일 이를 기각했다. 이후 주 의원은 기자회견을 열고 장 대표를 향해 “민심을 붙잡을 대책도, 보수를 다시 세울 노선도, 국민 앞에 사과하고 변화를 약속하는 모습도 없다”며 “대신 곳곳에서 공천 작당만 벌였다는 비판만 커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대구 현장에서도 장 대표가 싫어 국민의힘을 못 찍겠다는 말이 적지 않다. 장 대표가 먼저 결단해야 한다”며 “비상대책위원회든 선거대책위원회든 새로운 책임 체제를 즉각 구성하라”라고 장 대표의 후퇴를 촉구했다. 이번 대구시장 선거의 변수는 시민들의 막판 결집력이다. “당장 내일 선거가 치러지면 김부겸을 찍겠다”는 이들조차 투표소에 들어가면 “그래도 보수를 찍어야지”라는 마음으로 돌아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삼진 아웃? 다만 한 정치권 관계자는 이런 ’습관성 투표‘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으로 봤다. 이 관계자는 “‘보수가 큰일 났다’ ‘대구가 위험하다’라는 위기의식이 있어야 이들이 똘똘 뭉쳐 결집하고 표가 된다”며 “지금은 장 대표가 위기 그 자체다. 그래서 ‘이번에는 김부겸 한번 믿어보자’는 기대감이 오히려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2014년 (박 전 대통령 탄핵 상황)과 지금은 다르다. 보수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어 가면서 보수 지역 민심도 그에 맞춰가는 것”이라며 “김 후보가 크게 실수하지 않는 이상 ‘이대로라면 대구가 민주당에 뺏긴다’라는 위기감보다 ‘그래도 보수를 먼저 살려야지’라는 여론이 형성될 것이라 본다”고 설명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