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완박 시즌2’ 국민의힘 웃는 속사정

  • 박형준 기자 ctzxp@ilyosisa.co.kr
  • 등록 2025.06.30 15:52:04
  • 호수 15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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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사라진다
여야 모두 윈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더불어민주당의 검찰 해체 시도엔 “수사·기소 분리가 글로벌 스탠더드”란 주장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민주당이 검찰 해체에 집념을 불태우는 사이, 무형의 이익을 누릴 국민의힘은 남몰래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장경태·민형배·김용민·강준현·김문수 의원 등이 지난 11일 ‘검찰개혁’ 법안들을 발의했다. 이들이 발의한 법안들엔 ▲검찰청 폐지 ▲중대범죄수사청(이하 중수청)·공소청 설치 ▲국가수사위원회(이하 국수위) 설치 등 내용이 담겨있다.

검찰청 폐지
공소청 설치

이들 법안에 따르면, 검찰청은 완전히 사라진다. 검찰의 7대 중대범죄(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 사업·대형 참사·마약) 수사 기능과 내란·외환 수사는 행정안전부 산하 중수청이 맡는다. 기소·공소 유지·영장 청구 기능은 법무부 산하 공소청이 맡는다.

국무총리 직속 국가수사위원회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중수청·경찰 국가수사본부의 업무 조정 ▲관할권 정리 ▲관리·감독 ▲불기소 처분에 대한 이의신청 등을 맡는다.

민주당의 구상대로라면, 검사의 수사권은 완전히 박탈된다. 중수청에 배치되는 기존 검사의 신분은 수사관으로 바뀐다. 기존 검찰수사관도 수사관 신분으로 바뀌기 때문에, 검사와 휘하 수사관이 같은 신분으로 경쟁하는 관계가 된다.


검사의 수사지휘권은 이미 지난 2021년 형사소송법 개정 이후 폐지됐다. 따라서 국가수사위원회가 업무 조정 및 관리·감독 권한을 매개로 사실상의 수사 지휘를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가수사위원회가 수사 기관들을 통제하는 시스템은 미국의 정보공동체를 지휘하는 국가정보장(DNI)서 본뜬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1년 발생한 9·11 테러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위상에 결정타를 날렸다.

CIA의 각종 공작 실패 사례와 치부는 소련 해체 이후 냉전이 종식되면서 하나하나 만천하에 공개됐다. 아울러 9·11 테러는 CIA의 지나친 위상을 견제한 다른 정보기관의 비협조로 인해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 첩보마저도 제대로 공유되지 않았단 현실이 까발려지는 계기가 됐다.

이후 미국은 지난 2005년 DNI를 신설해 CIA가 맡았던 정보공동체의 좌장 역할을 맡겼다. DNI는 정보공동체를 지휘하면서 정보기관의 보고를 취합하고, 정보 교환 흐름을 감독한다.

민주당은 로스쿨 설치 등 사법개혁과 관련된 많은 부분을 미국식 시스템에서 도입하고 있다. “검사가 수사에 참여하지 않고, 기소·공소 유지만 담당한다”는 발상도 우리가 인식하는 미국의 수사·기소 시스템과 비슷하다.

민주당 일각에선 오래전부터 “수사·기소 분리는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다양한 반박이 제기된다.

신태훈 주제네바대표부 참사관은 지난 2018년 발표한 논문 ‘이른바 수사와 기소 분리론에 대한 비교법적 분석과 비판’에서 “수사·기소 분리는 세계적 흐름에 역행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5개국 중 독일·일본 등 29개국에선 검사의 수사권·수사지휘권을 헌법·법률로 명시한다.


다만 미국 연방검사의 수사권이 명시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 일각의 주장은 미국 연방검사의 직무 형태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연방검사가 아예 수사에서 배제되는 것도 아니다. 미국 연방검사는 각 수사기관에 수사를 의뢰하거나 협업하는 형태로 수사에 참여한다.

미국 검사가 수사 안 한다고?
협업·통제 형태로 수사 참여

이어 수사 과정을 법률적으로 통제·감시하며, 기소하거나 대배심에 넘기는 형태로 수사를 종결·총괄한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수사 지휘·기소 형태로 수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현실에선 검사와 수사관들이 TF를 구성해 수사하는 사례도 흔하다.

미국 법정 스릴러 장르 영화·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장면은 검사보가 수사기관의 수사 상황·증거 관련 보고를 들은 후 “이 정도로는 기소하거나 대배심에 넘길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수사관들이 “더는 수사하기 어렵다”는 등 경찰의 사정을 검사보에게 전하면서 하소연하거나 설득하는 장면도 흔히 나온다.

기소·대배심 회부 가능 여부를 수사 지휘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미국의 검사는 무죄가 선고된 제1심에 대해선 항소할 수 없다. 또 대배심에 넘겨지는 사건은 연방법 위반·살인 등 중범죄다. 대배심과 제1심은 배심원이 판단을 좌우한다. 검사로선 엄격하게 수사를 통제할 수밖에 없다. 검사의 엄격한 수사 통제는 곧 검사의 수사 참여이자 수사 지휘가 된다.

월가의 금융범죄 수사 과정을 다룬 드라마 <빌리언스>에선 주인공인 뉴욕 남부지검장이 뛰어난 능력과 카리스마로 금융범죄 수사를 맡은 FBI 요원들을 휘어잡아 수족처럼 부리는 과정이 묘사된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도 고담지검장 하비 덴트가 고담시의 부패한 경찰관들을 믿지 못하는 상황이 묘사된다.

검사와 수사기관이 함께 팀을 꾸려 각자의 역할을 소화하는 미국 수사기관의 수사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설정들이다.

현실의 미국 검사는 대통령의 측근도 수사한다. 제프리 버먼 전 뉴욕 남부지검장은 지난 2020년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 등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측근 수사를 지휘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과 윌리엄 바 당시 미국 법무부 장관은 버먼 전 지검장을 기습 해임했다.

한국계 법조인으로서 지난 2017년 뉴욕 남부지검장 대행을 맡았던 김준현 변호사도 지난 2022년 SBS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검사도 수사한다”며 “직접 수사를 할 때도 있고, 경찰·FBI의 수사를 감독·지휘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트럼프 대통령 관련 수사에 대해서도 “검찰이 먼저 수사를 시작했다”며 “검사의 개입 없이 그런 사건을 수사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수사 형태에 대해선 “검사가 지휘하는 것은 아니고, 같이 토론하면서 일한다”며 “의견 충돌 상황에선 기소·공소 유지를 하는 사람은 검사이기 때문에 검사의 지시를 따른다”고 답변했다.

미국은?
사례 보니…


김 변호사의 인터뷰 발언 중 주목해야 할 부분은 ‘수사 감독·지휘’라고 할 수 있다. 민주당의 구상대로라면, 경찰·중수청을 산하에 둔 행정안전부는 비대해진다. 행정안전부 견제 방법은 아직 국가수사위원회 설치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수사위원회가 수많은 사건을 일일이 조정하긴 어렵다.

이 때문에 검사의 수사 지휘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검사가 경찰의 잘못된 수사를 뒤집은 사례가 실제로 있어서 더욱 중요하다. 지난 1987년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던 신군부와 경찰에 맞서 박군의 부검을 강행한 사람은 최환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다.

그전까지 경찰은 수많은 고문을 자행했고,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당시엔 검찰이 경찰의 고문 은폐 뒤처리를 맡아야 했다. 당시엔 신군부의 비호하에 경찰이 지나치게 비대해 검찰이 제대로 견제하기 어려웠다.

지난 2016년 발생한 ‘정운호 게이트’ 사건에서도 검찰이 경찰의 잘못된 수사를 바로잡은 사례가 밝혀졌다. 사건에 연루됐던 법조 브로커 이동찬은 지난 2015년 송창수 이숨투자자문 대표의 지시를 받아 평소 호형호제하던 구모 당시 강남경찰서 지능범죄수사과장에게 13회에 걸쳐 뇌물 1억1000만원을 줬다.

이후 구 과장은 “송 대표에게 유사수신행위법을 적용해 기소하라”는 검찰의 수사 지휘를 어기고, 미인가 금융업에 대한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만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 유사수신행위법상 유사수신행위가 인정되면, 5년 이하의 징역이란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면, 3년 이하의 징역형으로 처벌된다.

집행유예는 3년 이하 징역형에 처할 때 적용될 수 있다. 즉, 송 대표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될 가능성이 더 큰 방향의 송치를 노렸다. 대법원은 지난 2017년 11월 구 경정의 뇌물수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면서 징역 5년형을 확정했다. 송 대표도 같은 해 여러 건의 유사수신 행위가 유죄로 인정돼 징역 13년 형을 선고받았다.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재심 청구를 주된 분야로 삼는 박준영 변호사도 민주당이 추진하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그가 다룬 사건 중 상당수는 경찰의 잘못된 수사 때문에 엉뚱한 사람이 누명을 쓴 사례들이다.

누명 설계
상호 견제

경찰은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수사 당시 엉뚱한 사람을 체포해 모텔과 경찰서 등에서 수시로 폭행하거나 잠을 재우지 않는 등 가혹행위를 했다. 제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 수사 과정서도 엉뚱한 사람에게 폭행과 가혹행위를 가해 자백을 받아냈다.

물론 이들 사건에선 검찰도 경찰의 잘못된 수사를 그대로 받아들여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전락시키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경찰이 누명을 설계했다는 것과 상호견제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발생할 비극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

박 변호사는 지난 2022년 4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민주당이 추진하는 검수완박으로부터 비롯되는 피해는 힘없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검수완박을 추진하는 일부 정치인들은 검찰 수사 때문에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는 게 두려운 것은 아닌지, 자신을 상대로 진행된 검찰 수사에 대한 반감이 있는 건 아닌지, 검찰개혁에 강경한 당원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라”는 게시글을 작성했다.

당시 스스로 “대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찍었다”고 공개했던 박 변호사는 간첩 조작 사건을 함께 변호했던 민주당 박주민 의원을 지목해 “의원님이 변한 건지, 제가 정신을 못 차리는 건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검수완박 법안 처리에 긍정적이었던 정의당에도 “정의당 의원들의 ‘정의’가 뭔지 똑똑히 지켜보겠다”는 쓴소리를 남겼다.

당시 박 변호사는 민주당의 검수완박을 비판하는 이유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이전엔 검사들이 미제 사건 처리를 위해 야근했지만,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칼퇴근한다”며 “사건이 경찰에 집중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경찰이 처리해야 할 사건은 많아졌지만, 검사는 상대적으로 일을 덜 한다. 더 잘하고 빨리할 수 있는 걸 제도로 막는 게 개혁 맞느냐”고 반박했다.

민주당이 검찰과의 싸움에 집중하는 이유는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으로부터 비롯됐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당시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선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측근들은 연이어 구속됐고, 자신도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대검찰청으로 소환되는 과정이 생중계되는 등 모멸감을 느낄 만한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지금까지도 검찰에 대한 강경한 반응을 보이는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오랜 비원 마무리하려는 민주
손해 없을 국힘의 약속 대련?

민주당은 현재 집권·여당이자 170석을 보유한 절대적인 원내 1당이다. 조국혁신당 등 범여권까지 합하면 189석이다. 민주당은 지난 2022년 집권여당이자 원내 1당의 기세를 타고 검수완박을 완수했다. 하지만 윤석열정부는 검찰청법의 시행령 개정을 통해 검사의 수사 개시 범위를 늘리는 방법으로 우회해 검수완박을 무력화했다.

우회 경로를 통한 검수완박 무력화를 막는 데는, 검찰 해체가 가장 확실하다. 아울러 제1야당이자 원내 제2당이 된 국민의힘에선 이재명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직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검찰 해체를 실현할 첫 관문은 국회 법사위다.

따라서 민주당으로선 국민의힘의 요구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제22대 국회 후반기엔 다시 원구성이 논의된다. 민주당으로선 1년 안에 오랜 비원인 ‘검찰 해체’를 마무리해야 한다.

물론 국민의힘도 검찰 해체에 반발하지 않는 건 아니다. 김용태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12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민주당의 검찰 해체 시도를 일컬어 “수사기관을 정권에 종속시키는 악법이니, 즉각 철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국수위에 대해선 “국수위 위원 11명 대부분은 대통령과 민주당이 임명하도록 규정돼있다”며 “수사기관을 명백히 정권에 종속시키는 악법”이라고 비판했다.

같은 당 조배숙 의원은 지난 17일 국회 법사위에 소속된 국민의힘 의원들과 보수 성향 법조인들을 초청해 ‘검수완박 시즌 2, 검찰청 폐지 및 수사·기소 분리의 문제점’이란 세미나를 개최했다. 발제를 맡은 김종민 변호사는 이날 “검찰은 해체하면서 공수처와 특검엔 왜 수사권·기소권을 모두 부여하느냐”고 주장했다.

이어 “수사권·기소권을 완전히 분리한 국가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국수위와 비슷한 형태로 수사를 통제하는 국가는 중국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국수위 위원 11명 중 대통령과 민주당은 7명을 추천할 수 있고, 시민사회단체도 추천할 수 있다”는 그는 “공소청이 전국의 항고를 모두 도맡는다는 것도 비현실적이고, 재산범죄 사건에 대한 수사 지연이 뻔히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검찰 해체 시도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진 않는다. 민주당의 검찰 해체 시도는 국민의힘에도 눈에 띄지 않는 이익이 된다. 일단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과 대선 패배의 후유증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는 국민의힘에 대여 투쟁 계기로 작용해 분위기를 반전시킬 기회가 된다.

아울러 검찰 해체가 국민의힘에 큰 손해가 되진 않는다. 어차피 대부분의 민생 치안 사건은 경찰의 수사를 거쳐 이를 송치받은 검사가 기소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그동안 논의된 검찰개혁은 정치인 등이 연루되는 대형 사건 수사 방향과 연결돼 논의됐다.

큰 손해
아니다

결정적으로 의석수 107석에 불과한 국민의힘은 현실적으로 이를 막을 힘이 없다. 적당히 여론을 의식한 눈에 띄지 않는 약속 대련 형태의 반발을 이어가면서 지지층 결집에 주력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검찰 해체는 국민의힘에도 이익이 되면 됐지, 손해가 되진 않는다. 어차피 막기도 힘든데 무형의 이익이 있다면, 굳이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는 없다. 민주당의 검찰 해체 시도는 국민의힘도 남몰래 웃을 수 있는 ‘윈윈’ 게임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정치의 본질이다.

<ctzx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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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