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완박 시즌2’ 국민의힘 웃는 속사정

  • 박형준 기자 ctzxp@ilyosisa.co.kr
  • 등록 2025.06.30 15:52:04
  • 호수 15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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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사라진다
여야 모두 윈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더불어민주당의 검찰 해체 시도엔 “수사·기소 분리가 글로벌 스탠더드”란 주장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민주당이 검찰 해체에 집념을 불태우는 사이, 무형의 이익을 누릴 국민의힘은 남몰래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장경태·민형배·김용민·강준현·김문수 의원 등이 지난 11일 ‘검찰개혁’ 법안들을 발의했다. 이들이 발의한 법안들엔 ▲검찰청 폐지 ▲중대범죄수사청(이하 중수청)·공소청 설치 ▲국가수사위원회(이하 국수위) 설치 등 내용이 담겨있다.

검찰청 폐지
공소청 설치

이들 법안에 따르면, 검찰청은 완전히 사라진다. 검찰의 7대 중대범죄(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 사업·대형 참사·마약) 수사 기능과 내란·외환 수사는 행정안전부 산하 중수청이 맡는다. 기소·공소 유지·영장 청구 기능은 법무부 산하 공소청이 맡는다.

국무총리 직속 국가수사위원회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중수청·경찰 국가수사본부의 업무 조정 ▲관할권 정리 ▲관리·감독 ▲불기소 처분에 대한 이의신청 등을 맡는다.

민주당의 구상대로라면, 검사의 수사권은 완전히 박탈된다. 중수청에 배치되는 기존 검사의 신분은 수사관으로 바뀐다. 기존 검찰수사관도 수사관 신분으로 바뀌기 때문에, 검사와 휘하 수사관이 같은 신분으로 경쟁하는 관계가 된다.


검사의 수사지휘권은 이미 지난 2021년 형사소송법 개정 이후 폐지됐다. 따라서 국가수사위원회가 업무 조정 및 관리·감독 권한을 매개로 사실상의 수사 지휘를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가수사위원회가 수사 기관들을 통제하는 시스템은 미국의 정보공동체를 지휘하는 국가정보장(DNI)서 본뜬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1년 발생한 9·11 테러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위상에 결정타를 날렸다.

CIA의 각종 공작 실패 사례와 치부는 소련 해체 이후 냉전이 종식되면서 하나하나 만천하에 공개됐다. 아울러 9·11 테러는 CIA의 지나친 위상을 견제한 다른 정보기관의 비협조로 인해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 첩보마저도 제대로 공유되지 않았단 현실이 까발려지는 계기가 됐다.

이후 미국은 지난 2005년 DNI를 신설해 CIA가 맡았던 정보공동체의 좌장 역할을 맡겼다. DNI는 정보공동체를 지휘하면서 정보기관의 보고를 취합하고, 정보 교환 흐름을 감독한다.

민주당은 로스쿨 설치 등 사법개혁과 관련된 많은 부분을 미국식 시스템에서 도입하고 있다. “검사가 수사에 참여하지 않고, 기소·공소 유지만 담당한다”는 발상도 우리가 인식하는 미국의 수사·기소 시스템과 비슷하다.

민주당 일각에선 오래전부터 “수사·기소 분리는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다양한 반박이 제기된다.

신태훈 주제네바대표부 참사관은 지난 2018년 발표한 논문 ‘이른바 수사와 기소 분리론에 대한 비교법적 분석과 비판’에서 “수사·기소 분리는 세계적 흐름에 역행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5개국 중 독일·일본 등 29개국에선 검사의 수사권·수사지휘권을 헌법·법률로 명시한다.


다만 미국 연방검사의 수사권이 명시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 일각의 주장은 미국 연방검사의 직무 형태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연방검사가 아예 수사에서 배제되는 것도 아니다. 미국 연방검사는 각 수사기관에 수사를 의뢰하거나 협업하는 형태로 수사에 참여한다.

미국 검사가 수사 안 한다고?
협업·통제 형태로 수사 참여

이어 수사 과정을 법률적으로 통제·감시하며, 기소하거나 대배심에 넘기는 형태로 수사를 종결·총괄한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수사 지휘·기소 형태로 수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현실에선 검사와 수사관들이 TF를 구성해 수사하는 사례도 흔하다.

미국 법정 스릴러 장르 영화·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장면은 검사보가 수사기관의 수사 상황·증거 관련 보고를 들은 후 “이 정도로는 기소하거나 대배심에 넘길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수사관들이 “더는 수사하기 어렵다”는 등 경찰의 사정을 검사보에게 전하면서 하소연하거나 설득하는 장면도 흔히 나온다.

기소·대배심 회부 가능 여부를 수사 지휘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미국의 검사는 무죄가 선고된 제1심에 대해선 항소할 수 없다. 또 대배심에 넘겨지는 사건은 연방법 위반·살인 등 중범죄다. 대배심과 제1심은 배심원이 판단을 좌우한다. 검사로선 엄격하게 수사를 통제할 수밖에 없다. 검사의 엄격한 수사 통제는 곧 검사의 수사 참여이자 수사 지휘가 된다.

월가의 금융범죄 수사 과정을 다룬 드라마 <빌리언스>에선 주인공인 뉴욕 남부지검장이 뛰어난 능력과 카리스마로 금융범죄 수사를 맡은 FBI 요원들을 휘어잡아 수족처럼 부리는 과정이 묘사된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도 고담지검장 하비 덴트가 고담시의 부패한 경찰관들을 믿지 못하는 상황이 묘사된다.

검사와 수사기관이 함께 팀을 꾸려 각자의 역할을 소화하는 미국 수사기관의 수사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설정들이다.

현실의 미국 검사는 대통령의 측근도 수사한다. 제프리 버먼 전 뉴욕 남부지검장은 지난 2020년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 등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측근 수사를 지휘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과 윌리엄 바 당시 미국 법무부 장관은 버먼 전 지검장을 기습 해임했다.

한국계 법조인으로서 지난 2017년 뉴욕 남부지검장 대행을 맡았던 김준현 변호사도 지난 2022년 SBS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검사도 수사한다”며 “직접 수사를 할 때도 있고, 경찰·FBI의 수사를 감독·지휘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트럼프 대통령 관련 수사에 대해서도 “검찰이 먼저 수사를 시작했다”며 “검사의 개입 없이 그런 사건을 수사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수사 형태에 대해선 “검사가 지휘하는 것은 아니고, 같이 토론하면서 일한다”며 “의견 충돌 상황에선 기소·공소 유지를 하는 사람은 검사이기 때문에 검사의 지시를 따른다”고 답변했다.

미국은?
사례 보니…


김 변호사의 인터뷰 발언 중 주목해야 할 부분은 ‘수사 감독·지휘’라고 할 수 있다. 민주당의 구상대로라면, 경찰·중수청을 산하에 둔 행정안전부는 비대해진다. 행정안전부 견제 방법은 아직 국가수사위원회 설치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수사위원회가 수많은 사건을 일일이 조정하긴 어렵다.

이 때문에 검사의 수사 지휘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검사가 경찰의 잘못된 수사를 뒤집은 사례가 실제로 있어서 더욱 중요하다. 지난 1987년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던 신군부와 경찰에 맞서 박군의 부검을 강행한 사람은 최환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다.

그전까지 경찰은 수많은 고문을 자행했고,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당시엔 검찰이 경찰의 고문 은폐 뒤처리를 맡아야 했다. 당시엔 신군부의 비호하에 경찰이 지나치게 비대해 검찰이 제대로 견제하기 어려웠다.

지난 2016년 발생한 ‘정운호 게이트’ 사건에서도 검찰이 경찰의 잘못된 수사를 바로잡은 사례가 밝혀졌다. 사건에 연루됐던 법조 브로커 이동찬은 지난 2015년 송창수 이숨투자자문 대표의 지시를 받아 평소 호형호제하던 구모 당시 강남경찰서 지능범죄수사과장에게 13회에 걸쳐 뇌물 1억1000만원을 줬다.

이후 구 과장은 “송 대표에게 유사수신행위법을 적용해 기소하라”는 검찰의 수사 지휘를 어기고, 미인가 금융업에 대한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만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 유사수신행위법상 유사수신행위가 인정되면, 5년 이하의 징역이란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면, 3년 이하의 징역형으로 처벌된다.

집행유예는 3년 이하 징역형에 처할 때 적용될 수 있다. 즉, 송 대표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될 가능성이 더 큰 방향의 송치를 노렸다. 대법원은 지난 2017년 11월 구 경정의 뇌물수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면서 징역 5년형을 확정했다. 송 대표도 같은 해 여러 건의 유사수신 행위가 유죄로 인정돼 징역 13년 형을 선고받았다.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재심 청구를 주된 분야로 삼는 박준영 변호사도 민주당이 추진하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그가 다룬 사건 중 상당수는 경찰의 잘못된 수사 때문에 엉뚱한 사람이 누명을 쓴 사례들이다.

누명 설계
상호 견제

경찰은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수사 당시 엉뚱한 사람을 체포해 모텔과 경찰서 등에서 수시로 폭행하거나 잠을 재우지 않는 등 가혹행위를 했다. 제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 수사 과정서도 엉뚱한 사람에게 폭행과 가혹행위를 가해 자백을 받아냈다.

물론 이들 사건에선 검찰도 경찰의 잘못된 수사를 그대로 받아들여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전락시키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경찰이 누명을 설계했다는 것과 상호견제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발생할 비극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

박 변호사는 지난 2022년 4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민주당이 추진하는 검수완박으로부터 비롯되는 피해는 힘없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검수완박을 추진하는 일부 정치인들은 검찰 수사 때문에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는 게 두려운 것은 아닌지, 자신을 상대로 진행된 검찰 수사에 대한 반감이 있는 건 아닌지, 검찰개혁에 강경한 당원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라”는 게시글을 작성했다.

당시 스스로 “대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찍었다”고 공개했던 박 변호사는 간첩 조작 사건을 함께 변호했던 민주당 박주민 의원을 지목해 “의원님이 변한 건지, 제가 정신을 못 차리는 건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검수완박 법안 처리에 긍정적이었던 정의당에도 “정의당 의원들의 ‘정의’가 뭔지 똑똑히 지켜보겠다”는 쓴소리를 남겼다.

당시 박 변호사는 민주당의 검수완박을 비판하는 이유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이전엔 검사들이 미제 사건 처리를 위해 야근했지만,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칼퇴근한다”며 “사건이 경찰에 집중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경찰이 처리해야 할 사건은 많아졌지만, 검사는 상대적으로 일을 덜 한다. 더 잘하고 빨리할 수 있는 걸 제도로 막는 게 개혁 맞느냐”고 반박했다.

민주당이 검찰과의 싸움에 집중하는 이유는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으로부터 비롯됐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당시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선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측근들은 연이어 구속됐고, 자신도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대검찰청으로 소환되는 과정이 생중계되는 등 모멸감을 느낄 만한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지금까지도 검찰에 대한 강경한 반응을 보이는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오랜 비원 마무리하려는 민주
손해 없을 국힘의 약속 대련?

민주당은 현재 집권·여당이자 170석을 보유한 절대적인 원내 1당이다. 조국혁신당 등 범여권까지 합하면 189석이다. 민주당은 지난 2022년 집권여당이자 원내 1당의 기세를 타고 검수완박을 완수했다. 하지만 윤석열정부는 검찰청법의 시행령 개정을 통해 검사의 수사 개시 범위를 늘리는 방법으로 우회해 검수완박을 무력화했다.

우회 경로를 통한 검수완박 무력화를 막는 데는, 검찰 해체가 가장 확실하다. 아울러 제1야당이자 원내 제2당이 된 국민의힘에선 이재명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직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검찰 해체를 실현할 첫 관문은 국회 법사위다.

따라서 민주당으로선 국민의힘의 요구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제22대 국회 후반기엔 다시 원구성이 논의된다. 민주당으로선 1년 안에 오랜 비원인 ‘검찰 해체’를 마무리해야 한다.

물론 국민의힘도 검찰 해체에 반발하지 않는 건 아니다. 김용태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12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민주당의 검찰 해체 시도를 일컬어 “수사기관을 정권에 종속시키는 악법이니, 즉각 철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국수위에 대해선 “국수위 위원 11명 대부분은 대통령과 민주당이 임명하도록 규정돼있다”며 “수사기관을 명백히 정권에 종속시키는 악법”이라고 비판했다.

같은 당 조배숙 의원은 지난 17일 국회 법사위에 소속된 국민의힘 의원들과 보수 성향 법조인들을 초청해 ‘검수완박 시즌 2, 검찰청 폐지 및 수사·기소 분리의 문제점’이란 세미나를 개최했다. 발제를 맡은 김종민 변호사는 이날 “검찰은 해체하면서 공수처와 특검엔 왜 수사권·기소권을 모두 부여하느냐”고 주장했다.

이어 “수사권·기소권을 완전히 분리한 국가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국수위와 비슷한 형태로 수사를 통제하는 국가는 중국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국수위 위원 11명 중 대통령과 민주당은 7명을 추천할 수 있고, 시민사회단체도 추천할 수 있다”는 그는 “공소청이 전국의 항고를 모두 도맡는다는 것도 비현실적이고, 재산범죄 사건에 대한 수사 지연이 뻔히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검찰 해체 시도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진 않는다. 민주당의 검찰 해체 시도는 국민의힘에도 눈에 띄지 않는 이익이 된다. 일단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과 대선 패배의 후유증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는 국민의힘에 대여 투쟁 계기로 작용해 분위기를 반전시킬 기회가 된다.

아울러 검찰 해체가 국민의힘에 큰 손해가 되진 않는다. 어차피 대부분의 민생 치안 사건은 경찰의 수사를 거쳐 이를 송치받은 검사가 기소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그동안 논의된 검찰개혁은 정치인 등이 연루되는 대형 사건 수사 방향과 연결돼 논의됐다.

큰 손해
아니다

결정적으로 의석수 107석에 불과한 국민의힘은 현실적으로 이를 막을 힘이 없다. 적당히 여론을 의식한 눈에 띄지 않는 약속 대련 형태의 반발을 이어가면서 지지층 결집에 주력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검찰 해체는 국민의힘에도 이익이 되면 됐지, 손해가 되진 않는다. 어차피 막기도 힘든데 무형의 이익이 있다면, 굳이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는 없다. 민주당의 검찰 해체 시도는 국민의힘도 남몰래 웃을 수 있는 ‘윈윈’ 게임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정치의 본질이다.

<ctzx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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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가 뭐죠?” MZ가 바꾼 추석 풍경

“차례가 뭐죠?” MZ가 바꾼 추석 풍경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우리에게 추석은 차례를 지내거나 귀향을 하는 것이 익숙한 명절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명절을 보내는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 특히 차례를 지내는 비중은 줄어들고 MZ세대를 중심으로 긴 연휴를 활용한 여행, 단기 아르바이트, 자기계발 등을 하는 것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추석에 차례를 지내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40%대 초반에 그쳤다. 절반 이상은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 답한 것이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당연하게 여겨지던 차례와 제사가 더 이상 필수가 아니게 된 셈이다. 알바 우선 통계청 조사에서도 명절 의례를 간소화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가정이 해마다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차례를 지내는 대신 긴 연휴를 여행으로 보내려는 수요가 뚜렷하게 증가했다. 한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행 중개 플랫폼 스카이스캐너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약 77%가 이번 추석 연휴에 여행 계획을 세웠다고 응답했다. 특히 해외여행 비중이 크게 늘었다. 10년 전 대비 명절 여행에 긍정적인 인식이 37%에서 70%로 2배 가까이 상승했다. 검색 데이터에 따르면, 추석 연휴 기간 인기 여행지는 일본(43.1%)이 1위였고, 이어 베트남(13.2%), 중국(9.6%), 태국(7.5%), 대만(6.2%) 순이었다. 도시별로는 일본 후쿠오카(20.2%)가 가장 높은 검색 비율을 기록했으며, 오사카(18.3%), 도쿄(15.4%), 방콕(8.9%), 타이베이(8.0%)가 뒤를 이었다. 여행을 가지 않고 명절 연휴를 일터에서 보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긴 연휴를 활용해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이 늘면서 단기 아르바이트 수요도 급증했다. 당근마켓과 같은 알바 커뮤니티와 플랫폼에는 “추석 알바 구합니다”라는 글이 다수 올라왔다. 한 20대 청년은 “쉬는 날이 길어 잠깐이라도 일을 하려 한다”고 밝혔고, 한 대학생은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선물세트 포장 알바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특히 명절 기간에는 업무강도가 높아 평균 시급의 1.5배를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 평상시에 근무할 때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명절 시즌 알바를 노리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 맞춰 구인·구직 플랫폼들은 ‘추석 알바 채용관’을 운영하며 수요를 모으고 있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 도·소매점과 전통시장에서 단기 인력을 모집하고, 선물용 고기·과일 세트 포장, 택배 상·하차, 진열·판매 등의 일자리가 집중적으로 생겨났다. 절반 이상 “안 지내요” 77%가 여행 계획 세워 지난해 추석 구인 구직 사이트 알바천국 조사에서는 응답자 중 절반 이상(53.9%)이 단기 용돈 벌이를 위해, 22.2%는 고물가로 인한 지출 부담 때문에, 18.2%는 여행 경비나 등록금 등 목돈 마련을 위해 명절 알바를 계획했다고 답했다. 이는 명절을 단순히 휴식 시간으로 보내지 않고, 생계와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집에 머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계발하며 추석 나기’가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혼자 추석을 보내는 일명 ‘혼추족’ 중에는 독서나 온라인 강의, 어학 공부, 자격증 준비 등에 연휴를 투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스터디 카페와 도서관을 찾는 이용객이 증가했다는 조사도 나왔다. 일부 출판사나 문화 기획사에서는 명절 연휴에 맞춰 북콘서트 같은 행사를 열기도 했다. 명절이 휴식 기간만이 아닌 스스로를 계발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양상은 가족 모임에도 영향을 받았다. MZ세대는 가족·친척 모임을 스트레스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한 청년은 “친척들과 모이면 취업·결혼 얘기 등으로 잔소리를 들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자기계발을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했다. 과거처럼 친척 모임에 시간을 할애하기보다, 필요한 경우에만 가족을 만나고 나머지 시간에는 개인활동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연휴를 도심에서 보내는 ‘혼추족’을 겨냥해 유통·외식업계도 다양한 이벤트를 내놓고 있다. 수도권 맛집 가이드, 추석맞이 전시·공연, 집콕형 OTT·게임 프로모션 등이 대표적이다. 편의점과 HMR(가정 간편식) 업체는 명절 한정 도시락·한상 차림 제품을 늘리고, 명절 기간 반값·카드 제휴 할인 등 단기 판촉을 강화하고 있다. 추석 선물 시장도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예전에는 굴비·한우·고급 과일 세트 등 전통 품목이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실속형·소포장 선물세트가 늘었다. 대표적으로 대형마트에서는 고급 커피·차 세트, 수제 디저트처럼 가볍게 주고받을 수 있는 소포장 구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일과 자기계발이 더 유익해” 명절 스트레스 가족 모임 불참 온라인몰에서는 올리브 오일, 참기름, 견과류, 꿀 등 건강 지향 소품목 세트가 매출 상위에 오르기도 했다. 실속형·소포장 선물을 찾는 배경에는 고물가 부담과 1~2인 가구 증가가 있다. 소비자들은 예전처럼 고가 선물을 준비하기보다, 실용적이고 보관이 편리한 상품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 명절을 함께 보내는 가족 규모가 줄면서 필요한 양만큼만 담긴 선물세트가 ‘부담 없는 선택’으로 자리 잡았다. 가격 대비 효용을 중시하는 MZ세대 소비자층도 이 같은 흐름을 이끌고 있다. 모바일 선물하기 판매는 전년 추석 대비 두 배 이상 늘었고, 온라인몰도 같은 기간 선물세트 매출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편의점 앱을 통한 선물세트 매출은 연중 대비 100% 이상 신장세가 관측됐고, 패션·라이프스타일 플랫폼의 선물하기 거래액도 두 자릿수 증가를 이어가고 있다. 마켓컬리는 추석 기간 한시 선물하기 서비스를 운영하며 홍삼·화장품 등 선물 품목을 확장했다. 명절 식문화 자체도 간편화 된 흐름이 뚜렷하다. 1인 가구 1012만명, 2인 가구 600만명으로 소규모 가구가 크게 늘어난 가운데, 대형마트의 간편 차례상 매출은 최근 3년 연속 증가했다. 편의점의 냉장·냉동 HMR 매출은 두 자릿수 증가했고, 명절 한정 도시락은 1인 가구 밀집 상권에서 판매 비중이 높았다. 이번 추석에도 이런 흐름에 맞춰 대형 마트는 간편 차례상·냉동 밀키트 대형 할인전을, 편의점 4사는 명절 도시락 출시와 제휴 할인행사를 연달아 내놓고 있다. 밀키트와 같은 간편식의 수요가 증가한 데에는 물가 상승이 영향을 미쳤다. 소비자 설문에선 추석 전체 지출 예산이 평균 71만2000원으로 전년 대비 26%가량 늘었다는 응답이 나왔다. 지출 중에는 부모 용돈·선물 비중이 절반을 웃돌았고, 차례상 비용·내식 비용도 적지 않았다. 품목별로 과일·수산물·햅쌀·송편 등의 차례상 음식 가격 부담이 커지면서, 수입 축산물 고려 비율도 늘었다. 이 때문에 “차례상 형식을 간소화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선택의 시대 추석을 준비하는 한 30대 가정주부는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차례를 안 지내거나 설에 한 번만 지내는 집이 많다. 고물가 시대에 음식을 다 준비하는 것은 부담되는 것 같다. 그런 형식적인 것은 간소화하더라도 차례를 지내는 행위에 의미가 있으니 상관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