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누가 그런댔어?”
“하긴 뭐, 중요한 건 해골이니까…….”
피에로가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뭐?”
표정이 다소 굳어 있던 피에로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귀신 들린 박씨
“너가 좋아하는 사람의 해골을 한번쯤 생각해 봐. 난 이따금 채플린의 해골을 생각한단다. 그나저나 참, 복도 담당도 못할 노릇이야.”
“형, 참 이상하지? 복도에다 누가 똥을 싸놓는다는 게 정말일까?”
“그렇잖아도 누가 얘기해 주더라. 지금은 별로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일이 많았대.”
“아니 왜?”
“귀신 소문 때문이래.”
“뭐, 귀신?”
“얼마 전부터 이 섬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는 거야. 그래서 밤에 변소 가기 무서워서 그냥 복도에다 싸고 토끼는 거래. 히히…….”
“무서워. 어, 어떤 얘긴데?”
“석 달 전, 바람이 무척 심한 날이었댄다. 마을 사람 박씨가 잠이 안 와서 방파제로 나갔는데 말이지, 가까운 데서 애끓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려오더란다. 이상하다 싶어 사방을 둘러봤더니 흰 소복을 걸친 여자 하나가 방파제 위에서 고개를 파묻고 슬피 울더래지 뭐야.”
“동화 같애.”
“아냐, 직접 겪었대. 생각해 봐. 으스스한 늦가을 밤에 소복 차림으로 찬바람을 맞으면서 울고 있으니 좀 기분 나쁘겠냐? 그런데 미련한 박씨는 작은 섬이라 분명 아는 사람일 거라 생각하고 다가갔댄다.”
“응?”
“다가가서 누구냐고 몇 번을 물었나 봐.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여자는 계속 울기만 하면서 무릎 새에 파묻은 얼굴을 들지 않더랜다. 할 수 없이 바짝 다가가서 어깨를 흔들자 여자가 울음을 뚝 그치고 천천히 고개를 들더래. 근데 어쨌는지 아냐?”
“응?”
“혼비백산한 박씨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는데, 그 뒤로도 헛소리만 하면서 송장처럼 앓아누워 있었대더라. 죽지 않은 게 다행이래.”
용운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사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형, 그런데 요새는 어째서 그런 애들이 뜸하다는 거야?”
“지금은 불침번들이 수시로 감시한다는데 쉽겠냐? 또 시작할래나 보다.”
그의 말에 맞춰 큰 소리가 들려왔다.
악종들만 모아…무시무시한 감화원
억제할 수 없는 강렬한 음식 욕망
“휴식 끝!”
피에로가 일어서며 재빨리 말했다.
“몸조심해야 해. 여러 번 찍히면 감화원으로 보낸다잖어.”
전라도 목포에서 멀리 떨어진 고하도(高下島)라는 외딴 섬에 지독한 악종들만 끌어모아 수용하는 무시무시한 감화원이 있다고 했다.
이틀째 비가 내렸다. 작업도 없어서 비교적 시간 여유가 많았다.
틈날 때마다 시커멓게 때에 전 수첩을 꺼내 보며 손가락 셈을 하던 반장 백곰이 열 시쯤 되자 용운을 불렀다.
“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냐?”
“잘 모르겠는데요.”
“임마, 오늘이 바로 이장네 옆집 잔치 있는 날 아니냐?”
백곰이 둥근 얼굴에 박힌 작은 갈색 눈으로 노려보며 수첩을 펴서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려 보였다. 그곳에는 마을 사람들의 애경사 날짜로 보이는 숫자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가서 목구멍 청소할 것 좀 얻어 와라. 너 사회에서 각설이 노릇 했으니 물론 잘 하겠지?”
그러더니 백곰 반장은 시선을 돌렸다.
“야, 채플린, 너 같이 갔다 와. 괜히 지랄 떨지 말고 잘해.”
반장이 천장을 보고 누운 채로 지시했다.
명령을 등 뒤로 들으며 용운은 밖으로 나섰다. 그때 백곰 반장이 일어나 슬며시 따라나오더니 용운의 손에 뭔가 쥐어 주며 속삭였다.
“야, 내가 얘기하던 년 알지? 잘 찾아가서 제대로 전하라구.”
그는 빙긋 웃었다. 뭉툭한 코 밑의 입이 검붉었다. 용운이 안마 담당을 맡아 해줄 때 백곰은 조용한 틈을 타서 흥흥거리며 어떤 여자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마을의 어느 골목에 살며, 웃으면 보조개와 덧니가 예쁘다는 것이었다. 함부로 부락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선감학원의 구역권을 벗어나는 그 자체부터가 위법이었다.
그럼에도 모험을 하면서까지 보내는 것은 그만큼 음식물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억제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었다.
숙사를 나온 용운은 손바닥을 펴 보았다. 그건 파르스름한 빛깔이 도는 옥반지였다.
“그게 뭐야?”
피에로가 물었다.
“응, 반장 심부름.”
사랑의 배달
“흠, 그러니까 큐피드가 되어 사랑의 배달을 한다는 얘기로군. 흐흐…….”
둘은 길을 버리고 해발 1백여 미터의 뒤쪽 당산을 탔다. 산허리를 타고 상삿골(相思谷)까지 돈 다음 논두렁을 가로질러 언덕에 올랐다. 직선거리로 얼마 되지 않는 마을은 바로 언덕 너머에 있었다.
별로 크진 않았으나 50여 채의 가옥들이 방파제를 한쪽에 끼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초입의 남새밭은 상추와 쑥갓의 싱그러움이 한창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