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⑯전쟁 고아 1000명

  • 김영권 작가
  • 등록 2024.08.19 04:00:00
  • 호수 14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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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있는 아이도

“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해방 이후 ‘선감학원’으로 개칭하고 전쟁 고아들을 수용하는 사회복지 시설로 그 역할이 바뀌었는데, 말이 학원이지 사실은 강제노동수용소와 마찬가지였다. 

수용소는 다섯 개의 사동과 여러 개의 부속 건물로 되어 있었다. 충심사를 비롯해 각심사, 세심사, 일심사, 정심사 등의 숙사와 사무실, 양호실, 식당, 창고, 축사, 목공실 따위였다.

염전 작업

총 원생 수는 1000여 명에 가까웠다. 전쟁고아 출신의 부랑아가 많았지만, 그중에는 가난하나마 단란하고 따스한 가족이 있는 아이들도 섞인 상태였다.

그들은 경찰의 실적 올리기 식 일제단속에 붙잡혀 억울하게 끌려온 피해자였다. 또한 소년원 등에서 이감시킨 범법자도 얼마쯤 섞여 있었다. 


원장의 훈시가 끝나자 부원장이 올라서서 작업 지시를 내렸다. 작업 분담, 목표량, 주의사항 따위였다. 염전 작업에 나가는 인원을 제외한 원생들에게 내려진 임무는 나무 심기와 영농장의 똥오줌 뿌리기 작업이었다.

어제 들어오면서 본 그 염전은 수용소가 운영하는 것인 모양이었다. 작업 지시가 끝나자 주임 선생의 구령에 따라 선감원의 원가(院歌)를 불렀다.

신선이 노닐던 선감도 청산 기슭에
새 삶의 학원이 자리잡았네
푸른 물결에 해맑게 씻긴
바닷가 조약돌 같은 우리 선감 형제들 
푸른 하늘 별들도 우리하고 놀지요 
아~ 선감학원~
참된 갱생의 요람이 되리

원가를 부른 다음 그 길로 모두 작업장으로 향했다.

충심사는 영농장 쪽이었다. 변소에서 인분을 퍼서 넓은 채소밭에 날라다 뿌리는 일이었다. 사장의 통솔로 작업이 개시되었다. 

생전 처음 져보는 똥지게가 용운에겐 벅차기만 했다. 옥사의 변소에서부터 채소밭에 이르는 수백 미터는 곧 분뇨통을 짊어진 원생들의 행렬도 메워졌다.

길 여기저기에는 반장들이 몽둥이를 들고 서서 오가는 원생들을 다그쳐댔다.


“너희들의 똥이니 더럽다고 생각마라. 야, 빨랑빨랑 움직여!”

정신없이 닦달을 받으며 울퉁불퉁한 길을 한참 왕복하자 휴식 명령이 내렸다. 용운은 기진맥진하여 밭둑 위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았다. 때마침 시원한 한 줄기 바닷바람이 불어와 땀 밴 이마를 훔치고 지나갔다.

눈앞에 펼쳐진 짙푸른 해면에 투명한 햇살이 내려 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물결을 타고 수천 수백 마리의 은빛 고기떼처럼 눈부시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바다 멀리 육지의 꼬리인 마산포가 아슴푸레 눈에 들어왔다. 용운은 저도 모르게 눈초리가 붉어졌다. 

“아아! 언제쯤 저 바다를 건너 다시 저 땅을 밟게 될까? 과연 살아 생전에 밟게 될 날이 오기나 할 것인가?”

불현듯 멀리 바라보이는 마산포에서 어머니의 모시 적삼과 젖가슴 냄새 같은 게 맡아진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찾아 헤매어도 만날 수 없던 엄마가 왠지 저기 마산포 어귀에 와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해방 이후 사회복지 시설로 변신
참된 갱생의 요람? 실제 상황은…

그대로 마산포를 향해 목청껏 불러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가슴이 싸하게 시려 오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용운은 생각했다.

이곳에서 내 편이 돼 줄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을, 나를 지킬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눈물부터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용운은 애써 마산포를 외면하며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동작일 뿐 솟아나는 눈물을 참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엄마…….”

용운은 입속으로 살며시 불러보았다. 


급히 옷소매로 눈물을 찍어내는데 누군가가 슬그머니 다가와 붙어 앉았다. 피에로였다.

“형!”

힘든 곳에서 만난 유일하게 친한 사람이어서 반가웠다. 그는 용운보다 세 살 위였다.

“구름아, 정말 힘들구나.”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언제부턴가 용운을 ‘구름’이라고 불렀다. 용운(龍雲)의 뜻을 풀면 ‘구름을 헤치고 승천하는 용’이라면서 씩 웃었다.

그러면서 “용처럼 잘났다고 나서지 말고 구름 속에 숨어서 때를 기다려야 해.” 하고 도사 같은 표정으로 일러 주었다.


“형, 힘들지?”

“신세 망쳤다. 고아원이라도 감사하며 그냥 있어야 하는 건데, 괜히 채플린 흉내나 내다가…….”

피에로는 후회막급한 듯 한숨을 토해냈다.

“형, 우린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되는 거야? 언제고 내보내주기는 할까?”

“아무래도 희망이 절벽 같다. 그러나 절벽엔 희망이 있지. 그러니까 탈출을 하다 죽고 그러지.”

“탈출?…… 아니, 무슨 수로 탈출을 해?”

“몰라. 하여간 저쪽 너머에 민간인 마을이 있는데, 거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공동묘지가 있대더라.”

“공동묘지?”

“응. 꺾인 소망의 잔해가 묻혀 있겠지.”

꺾인 소망

피에로가 멀리 마산포로 눈길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

“저렇게 빤히 보이는데도 갈 수가 없으니…….”

“형, 저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될까?”

“왜? 헤엄이라도 쳐서 건너게?”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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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만장일치로 윤석열 파면⋯헌정사상 두 번째

헌재, 만장일치로 윤석열 파면⋯헌정사상 두 번째

[일요시사 취재2팀] 박정원 기자 = 헌법재판소가 4일,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심판 사건을 인용하면서 대한민국은 또다시 정치적 격변기를 맞게 됐다. 헌법재판소는 이날 오전 11시22분께 서울 종로구 대심판정서 재판관 만장일치 의견으로 윤 전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했다. 이는 탄핵소추안 가결 111일 만이자, 탄핵 심판 변론 종결 38일 만에 내려진 결정이다. 이번 탄핵 심판은 지난해 12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따른 것이었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행위가 헌법과 법률에 위배된다고 명시했다. 이날 차분한 목소리로 주문을 낭독한 문형배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피청구인은 국회 권한 행사가 다수의 횡포라 판단했어도 헌법이 예정한 자구책을 통해 견제와 균형이 실현될 수 있게 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청구인이 취임한지 2년 후 이뤄진 총선서 국정을 주도하도록 국민을 설득할 기회가 있었다”며 “결과가 피청구인 의도에 부합하지 않아도 야당을 지지한 국민들의 의사를 배제하려는 시도를 했으면 안 됐다”고 판단했다. 문 권한대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청구인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고 계엄을 선포해 국가긴급권을 남용하는 역사를 재현해 국민들을 충격에 빠트리고, 사회·정치·경제 전반에 혼란을 야기했다”며 “국민 모두의 대통령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들을 초월해 사회 공동체를 통합시켜야 할 책무를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이날 헌재의 탄핵 인용 결정에 따라 윤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상실하고 일반인 신분이 됐다. 이에 따라 윤 전 대통령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 관저에서도 퇴거해야 한다. 다만, 사저 경호 문제 등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므로 즉시 관저를 비우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에도 헌재 파면 결정 이틀 뒤에 청와대 관저를 나와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저로 거처를 옮긴 바 있다. 이번 파면 결정으로 윤 전 대통령은 경호와 경비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도 대부분 박탈당했다. 대통령 등 경호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통상 최대 15년(10년+5년 연장)까지 경호를 받을 수 있으나, 임기만료 전 퇴임한 경우에는 최대 10년(5년+5년 연장)으로 줄어든다. 전직 대통령 예우 모두 박탈 정치권 ‘장미 대선’ 현실화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쳤다면 받았을 대통령 연금 수령 자격도 상실됐다.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친 전직 대통령은 대통령 보수연액(월급여의 8.85배)의 95%를 12개월로 나눠 받는다. 올해 윤 전 대통령 연봉은 약 2억6258만원(세전)이고, 이 기준에 따른 매월 연금액은 약 1533만원(연 기준 1억8397만원)이다. 이 밖에 기념사업 지원과 개인 사무실 및 보좌진 지원도 중단됐으며, 사후 국립묘지 안장 대상서도 제외된다. 공직 취임의 기회도 제한된다. 헌법재판소법 제54조 2항은 ‘탄핵 결정에 의해 파면된 사람은 결정 선고가 있은 날부터 5년이 지나지 아니하면 공무원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 결정이 선고된 날로부터 5년간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없다. 윤 전 대통령에게 남은 건 형사재판 절차 뿐이다. 형사재판은 탄핵 심판 결과와 별개로 그대로 진행되는데,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윤 전 대통령은 오는 14일 첫 정식 공판을 받는다. 윤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상실함에 따라 대한민국은 ‘장미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헌법 제68조는 대통령 궐위 시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4일을 기준으로 하면 60일째 되는 날은 오는 6월3일이므로 이날까지 대선을 치러야 한다. 이에 따라 ‘오말육초’(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에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조기 대선이 치러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실제로 박 전 대통령은 2017년 3월10일 탄핵 결정으로 파면됐고, 정확히 60일째인 5월9일에 조기 대선이 실시된 바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 같은 선례에 따라, 윤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치러질 조기 대선도 60일째 되는 날인 6월3일에 치러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다만, 대선 시점이 6월3일보다 앞당겨질 가능성도 있다. 일각에선 60일째 되는 날에서 가장 가까운 수요일인 5월28일이 조기 대선일로 유력하다는 예상도 나왔다. 어느 날짜에 선거가 치러지든, 정치권에서는 당분간 극심한 혼란이 예상된다. 헌재의 파면 결정으로 탄핵 정국이 조기 대선 정국으로 급변했고, 이제 차기 권력을 향한 대권 경쟁이 본격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미 여야 잠룡들은 탄핵 정국 속에서도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물밑 경쟁을 벌여왔다. 여권에서는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오세훈 서울시장, 홍준표 대구시장,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 등이 정권 재장출의 목표를 두고 출사표를 던질 것으로 보인다. 야권에서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앞서 이 대표는 지난달 26일 공직선거법 위반 항소심서 무죄를 선고받으며 사법 리스크를 덜어내며 독주 체제를 굳힌 바 있다. 이 외에도 김동연 경기도지사,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 등도 잠재적 대권주자로 꼽힌다. 조기 대선으로 선출되는 차기 대통령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구성없이 당선 즉시 임기를 시작하게 된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는 이날 “국가 안보와 외교에 공백이 없도록 굳건한 안보 태세를 유지하겠다”며 “주권자인 국민 여러분들의 뜻을 받들어 헌법과 법률에 따라 다음 정부가 차질없이 출범할 수 있도록 차기 대통령 선거 관리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jungwon933@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