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교사가 당한 교육청 시스템 허점

“검찰·법원이 차라리 공정했다”

[일요시사 정치팀] 차철우·박희영 기자 = 교권회복을 위해 현직 교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면서 숨겨져 있던 사건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야 국회는 대책 마련에 고심이다. 그사이 교사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중심에는 교육청이 있다. 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제대로 마련돼있지 않아서다. 

5년 전, 광주의 한 고등학교 A 교사는 직위해제를 당했다. 성비위 의혹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5년 동안 그를 내몬 것은 2명의 학생이 한 짧은 진술이었다. 오랜 기간 싸운 끝에 무죄를 선고받고, 간신히 다시 교단에 설 수 있었지만, 억울함을 풀기 위한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긴 시간 학교와 교육청은 교사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죄를 물었다. 교사를 보호하는 장치가 부족한 시스템상의 문제였다. 

전수조사
그 이후…

기말고사가 막 끝난 2018년 7월 말, 광주의 한 고등학교서 임시 교무회의가 열렸다. 부장 교사들과 교장이 회의하고 난 뒤 오후에 교직원 전체회의가 이뤄졌다. 성비위 정보가 들어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했는데 ‘교사들이 도대체 학생들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는 말이 나왔다. 학교 측은 즉시 경찰에 정식 수사 의뢰했고, 교육청서 2차 전수조사도 나온다고 했다. 

제보 과정도 수상했다. 사건 초기 학교 측이 교육청에 보고한 서류에는 학생회 학생들이 찾아와 신고했다고 돼 있지만, 시의회에 보고한 내용에는 최초 신고자가 여교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교감 역시 경찰의 조사 과정서 여교사가 이야기했다고 진술했다. 

경찰 신고 후 교육청은 특별조사단을 꾸렸다. 이후 정책기획관서 감사관실에 감사를 요청했고, 감사관실은 16명의 교사를 대상으로 수사를 요청했다. 이후 이사회는 관련 교사 16명을 직위해제하는 건을 의결해버렸다. 


“전수조사를 학교 자체서 먼저 한 게 문제라고 본다. 매뉴얼상으로도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교사를 즉각 신고하는 게 맞다. 교육청의 전수조사도 매뉴얼과 규정에 없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담당 장학사가 교장에게 전수조사해야 한다고 했다. 수상한 부분은 전수조사 이후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광주교육청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광주광역시교육청 학생 성폭력 사안 처리 방법 문건을 살펴보면 어디에도 전수조사한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학교 성폭력 발생 시 신고 방법은 상담 후 피해 학생 또는 보호자가 사건 수사를 원하는 경우와 원하지 않는 경우를 나눠 신고 절차를 준수해야 한다. 또 학교 측에서 학교폭력 사안 접수 보고서를 작성한 후 해바라기 센터에 공문을 제출하도록 명시돼있다. 

전수조사 이후 전체 남자 교사 중 절반이 넘는 교사가 성비위 교사로 분류됐다. 이 중 19명은 직위해제가 이뤄졌고, 경찰 수사까지 받았다. A 교사도 마찬가지였다. 과정도, 결과 처리 방식도 불투명했던 전수조사가 낳은 결과였다.

B 학생과 C 학생의 진술이 효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교육청도 해당 사안에 대해 당장 분리하는 건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광주시교육청 성희롱·성폭력 근절추진단 운영회의의 발언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성비위 의혹…바로 직위해제
5년 긴 소송 끝 무죄에도 징계

원칙대로 분리해야 하지만, 의혹이 발생한 33명에 달하는 인원을 분리 조치하기에는 무리라는 의견과 구체적인 혐의가 확인되지 않았고 학교 운영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직위해제 역시 수사 개시 이후에 통보돼야 한다는 것. 


결국 A 교사를 포함에 16명만 분리 조치가 됐고, 여교사 4명을 포함한 17명은 분리 조치되지 않았다. 그러나 2번의 전수조사 이후 A 교사를 비롯한 다른 교사들은 곧바로 사실 확인, 소명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채 분리 조치, 직위해제, 수사 의뢰로 이어졌다. 그때부터 A 교사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 펼쳐졌다. 

분리 조치는 교육청의 감사관실서 진행된 사안인데도 교육청의 매뉴얼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해당 사안을 담당한 체육복지건강과 장학사가 작성하고 교육청 홈페이지에도 게시해 광주의 거의 모든 학교에 공문으로 보냈던 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셈이다. 

“절차를 무시하고 자기들 임의대로 신속하게 처리한 것 자체가 시스템의 문제다. 이것까지 양보한다고 해도 당시 분위기 때문에 무혐의가 나온 교사들을 몽땅 징계한 경우는 아마 우리나라 어느 기관을 찾아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자체가 교육청 스스로 부적절했다고 인정하는 반증인 셈이다.”

이른바 스쿨 미투가 터지면 교육청서 사안을 확인한 뒤, 제대로 된 소명 기회를 주고, 사안을 따져 직위해제를 하는 게 절차다. 그러나 해당 사건에서는 순서가 뒤바뀌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하고 무기력하게 당했다. A 교사는 장학사의 입김이 센 구조도 손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학교가 전수조사를 교육청서 실시한 이유도 장학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범인
지옥 같은 시간

통상 장학사는 교육 전문직이지만, 학교의 행정 지휘, 직접적인 명령권은 없다. 다만 학교를 시찰하고 평가하는 권한을 가진다. 단순히 시찰·평가의 권한을 가진 것을 생각했을 때만 놓고 보면 전수조사를 지시하는 게 온당치 않다고 보인다. 장학사는 행정적인 면에서 최상위 포지션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장학사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파워가 결정된다. 직급이 높은데도 행정 출신 팀장이 장학사에게 꼼짝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시스템 정비가 필요하다. 민원이 들어왔을 때도 제대로 처리해줄 수 있는 시스템이 제대로 구비돼있지 않다.”

이후 A 교사는 5년간 싸움에 휘말려왔다. 자비를 들여 힘들게 소송을 이어온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그를 위해 120여장의 탄원서를 써준 제자와 학부모들도 힘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학교 및 교육청과의 싸움이 남아 있었다. 1심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학교에 복직했으나 이듬해 1월 징계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징계가 부당하다며 교원소청심사위원회(이하 소청위)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죄를 받은 상태서 징계가 내려졌기 때문에 소청위에 가면 쉽게 끝날 줄 알았다. 소청위는 각급 학교 교원의 징계처분과 그 밖에 그 의사에 반하는 불리한 처분에 관한 소청심사를 담당하는 곳으로 교육부 소속기관이다.

하지만 소청위 역시 소명 기회를 충분히 부여하지 않았다. A 교사를 포함한 4명의 교사들이 소청위를 찾아갔지만 한 사람당 주어진 소명 시간은 고작 15분이었다. 원래는 개인당 10분인데,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교육청 압박
소청위 외면

“순진했다. 억울한 교사의 말을 더 들어주고 위원들도 교사 출신이 많다고 해서 믿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하면 대법원 주심처럼 담당이 그만하라고 했다. 전국의 여러 건을 모아서 하니까 얼마나 대충했겠느냐. 누구 한 명의 말을 들어주면 전체를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소청위는 결국 교사들의 징계 건에 기각 처분을 내렸다. A 교사는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다시 재판에 돌입할 준비를 갖췄다. 징계 취소를 위한 행정소송을 냈고 법원은 학교 측의 징계가 부당하다며 그의 손을 들어줬다.

조사 과정, 재판 과정서 진술이 번복된 학생 2명의 말로 시작한 사건이 해결되기까지 5년이 걸렸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학교나 교육청, 소청위서 들어줄 것으로 생각했다. 법정까지, 행정소송까지 갈 사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경험은 반대다. 우리는 법원의 결과, 검찰의 수사를 비판한다. 내 경우에는 법원이 제일 공정했고, 다음은 검찰이 공정했다.”

A 교사는 학교와 임금과 관련해서도 민사소송을 벌였다. 학교서 징계받았던 기간 동안 임금을 지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지급하라는 확정 판결을 받았지만, 여전히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무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청과 학교는 A 교사와 몇몇 교사를 여전히 죄인 취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일요시사>는 전수조사를 지시했다는 당시 D 장학사에게 경위를 물었다. D 장학사는 전수조사를 지시한 게 본인임을 인정했다. 그는 “교육청 보고가 와 교장 선생님께 전수조사를 하라고 말씀드렸다. 그래서 학교 자체적으로 일단 조사를 해보시라”고 말했다. 

혐의 확인 없이 학생 진술만
매뉴얼 따르지 않고 ‘맘대로’
“학교에 선생님 편은 없다”

이어 “신고가 들어옴과 동시에 학교서 사안이 발생하면 교육청과 경찰에 신고한다. 학교서 교육청으로 보고가 들어오면 어떤 사안인지 알아보기 위해 교육청서 학교에 먼저 나가 보는데, 학교 담당자와 관리자를 만나고 나서 사안이 전수조사가 필요한 경우 교육청서 사안 처리 컨설팅단이 학교로 가서 조사한다”고 설명했다.

당시 광주교육청에는 성인식팀이 없었고 사건 이후 생겼다. 따라서 해당 사안이 발생했을 때는 사학팀서 성비위 관련 사안을 주관했다. D 장학사는 2018년 3월 전수조사 매뉴얼이 이미 있던 상태라고 주장하고 있다.

소명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대다수의 많은 교사가 연루돼있어 분리 조치가 당장 필요했다. 피해 학생 보호가 중요하기 때문”이라며 “당시 분리해야 한다는 여성가족부 지침도 있었다. 또 다수 교사들이 관련돼있었기 때문에 성고충심의위원회를 학교서 개최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교사들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에게 소명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해명이다. 교육청과 학교 관리자가 수사기관에 신고할 수 있도록 규정돼있기 때문이다. 결국 의심 신고만으로도 실질적인 처벌이 가능한 셈인데 신고 남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회 역시 교권을 보호할 제도 및 장치를 만들기 위해 관련 법안을 발의 중이다. 교육부도 물리적 제제가 가능하도록 규정을 고치는 등 대책을 내놨다. 또 최근 교권회복 및 보호 입법화 지원을 위한 여·야·정·시도교육감 4자 협의체가 처음으로 열렸다.

지난 14일에는 교육부와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이태규 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박물관서 ‘교권회복 및 보호 강화를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서도 교사의 처벌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이날 전제상 공주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실제 억울한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헌법상 엄격한 처벌 근거를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며 “정당한 교육활동을 침해했을 때 법적 심판을 받는다는 시그널을 분명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직위해제 시 신중성 제고를 위한 절차적 규정이 마련돼야 하고, 아동학대처벌상의 조사 및 수사에 앞서 교육청 등 교육 전문가 의견 청취가 의무화돼야 한다”고 부연했다. 

내몰린
교사들

국민의힘 허은아 의원은 <일요시사>에 “교사들이 근본적인 대안으로 지적하는 게 교원의 직위해제 요건을 개정하는 부분”이라며 “묻지마 민원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 아동복지법을 중심으로 장학사의 권한, 소청위의 시스템 등 심도 있게 근본적 대안을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ckcjfdo@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