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U20 월드컵 ‘4강 신화’ 김은중과 아이들

‘골짜기 세대’ 건너 ‘황금 세대’로

[일요시사 취재1팀] 옥지훈 기자 = 김은중호는 첫 항해부터 순탄치 않았다. 이강인 같은 스타 선수 부재와 무명 선수가 주를 이뤘던 데다, 실전경험이 부족한 선수가 절반 이상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도네시아서 열리기로 한 대회가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로 개최지가 변경되면서 시차 적응이 필요했다. 그러나 ‘선수비 후역습’ 전략을 통해 세계 강호들을 제압했다. 이는 강한 조직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전략이다. 김은중호는 열악한 환경서도 ‘실리 축구’로 빛났다. 김은중호는 대회 끝이 아닌 한국 축구의 시작을 알렸다.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한국대표팀이 두 대회 연속 4강 진출이라는 성적표를 안고 귀국했다. 출국 전 무관심 속에서 출국한 김은중호는 수많은 환대 속에 금의환향했다. 기대 이상의 성적을 냈다는 기쁨도 잠시, 김은중은 “대회는 끝이 났지만 선수들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국가대표까지 성장해 한국 축구의 미래를 이끌어가길 바란다”고 제자들에 조언과 격려를 전했다.

U20 월드컵
세계가 깜짝

김은중은 1998년 아시아축구연맹(AFC) U19 축구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태극마크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이동국과 투톱 공격수 체재로 공격진을 이끌어 한국에 대회 2연패와 통산 9회 우승을 선사했다. 국내에서는 이들을 한국 축구 르네상스를 이룬 주축으로 평가하며 이듬해 나이지리아서 열린 1999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당시 방송3사(KBS·MBC·SBS)는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국내 독점 중계방송권을 두고 앞다퉜다. 국내 언론은 ‘멕시코 4강 신화’를 다시 이뤄낼 것이라며 김은중이 소속된 대표팀에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한국은 멕시코서 열린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U20 월드컵 전신)서 처음으로 4강에 진출한 경험을 두고 16년 만에 최상의 전력을 가졌다고 평가받았지만 세계의 벽을 체감하며 지난 대회에 이어 2연속 16강 진출 실패라는 성적을 내는 데 그쳤다.


반면 ‘영원한 숙적’ 일본은 같은 대회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기록하면서 국내 분위기는 더 참담했다.

김은중은 이후 세계 무대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국내 리그에서는 대전 시티즌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로 군림했지만, 왼쪽 눈 실명 상태라는 꼬리표로 국가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했다.

김은중은 중학교 시절 공에 맞아 왼쪽 눈이 실명됐다. 그럼에도 그는 축구선수에게는 큰 결함이 될 수도 있는 장애를 극복해 K리그 통산 444경기 123골을 터뜨렸다. 통산 A 매치 기록은 15경기 출전 5골이다. 

김은중은 이후 2014년 은퇴를 선언하고 지도자로서 제2의 전성기를 시작했다. 대전 시티즌 플레잉 코치와 벨기에리그 AFC튀비즈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김학범 전 23세 이하(U23) 한국대표팀 감독을 보좌하며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코치를 맡아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금메달, AFC U23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김은중은 코치 생활을 끝으로 2021년 12월 U20 대표팀 첫 사령탑 자리에 올랐다.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코로나 시기와 겹치면서 대표팀 운영에 차질이 생겼고, 이렇다 할 평가전도 치를 수 없었다. 대표팀 소집에도, 국내 유능한 선수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실전 경험 부족한 김은중호
‘실리 축구’로 똘똘 뭉쳤다

1년 동안 K리그 2군과 대학팀을 중심으로 어린 선수를 발굴했다. 이외에도 ‘유럽파’ 이현주(바이에른 뮌헨), 아시안컵 팀 최다 득점인 성진영(고려대)이 U23 월드컵 대표팀 기대주였으나, 부상으로 낙마해 최종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김은중은 지도자로서 첫 무대에 섰다. 지난 3월 우즈베키스탄서 열린 2023 AFC U20 아시안컵이다. 한국은 U20 아시안컵 최다 우승 국가다. 김은중호는 같은 해에 있을 U20 월드컵 본선 티켓과 11년 만의 우승을 노렸다.

4강에 진출해 월드컵 본선 티켓을 확보한 김은중호는 준결승전서 만난 우즈베키스탄과 연장 접전 끝에 승부차기서 패했다. 경기 내용이 다소 실망스러웠다. 120분 동안 유효 슈팅 2개를 기록하며 분전했고, 우즈베키스탄의 홈어드벤티지가 있었지만 경기력이 기대 이하였다. 

당시 FIFA 랭킹 25위인 한국과 77위인 우즈베키스탄은 20세 이하 대표팀 상대 전적서 6전 5승1무로 한국이 앞섰다. 대회 우승자는 개최국인 우즈베키스탄이 차지했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공동 3위를 기록했다.

김은중호는 U20 월드컵 무대를 앞두고 직전 대회 준우승과 아시안컵 준결승서 보여준 경기력 열세로 부담감을 안았다. 월드컵 무대 두 달을 남긴 시점이었다.  

이번 U20 월드컵은 인도네시아에 열릴 예정이었다. 아시안컵이 끝난 후 김 감독은 현지 답사를 통해 인도네시아 기후 환경을 고려한 훈련 계획을 준비했다. 그러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당초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던 인도네시아가 지난 3월 말 개최권을 박탈당한 것이다.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의 강성 이슬람 단체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탄압한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선수단 입국을 반대했다. 한 이슬람 단체는 이스라엘 선수단이 입국하면 납치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에 FIFA는 선수단 보호 차원서 인도네시아의 개최권을 박탈하고 대체 개최국으로 아르헨티나를 선정했다.

대회 한 달을 앞둔 시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로 플랜을 변경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개최 준비에 아르헨티나 숙박시설과 훈련시설 수요가 높아졌다. 김은중은 아르헨티나와 시차 차이가 나지 않는 브라질로 향했다. 

태극마크 
압박감
 

김 감독은 기존 계획보다 일찍 출국해 브라질 상파울루에 캠프를 차리고 선수단 컨디션 조절에 나섰다. 김은중호는 최종 엔트리 21명을 발표한 이후 파주 축구대표팀트레이닝센터에 소집한 다음 날 출국했다.

개최지 변경에 대해 김은중은 “브라질서 보낼 열흘간 시간이 중요하다. 좋은 컨디션으로 대회에 임할 수 있게 준비하겠다”며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팀들도 같은 상황이다. 누가 더 빨리 좋은 컨디션을 만드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0일간 상파울루 전지훈련을 마친 김은중호는 결전의 땅 아르헨티나 멘도사에 입성했다. 이어 첫 조별리그 1차전인 강호 프랑스를 2-1로 승리했다. FIFA 주관 대회 사상 처음이었다. 프랑스를 상대로 U20 대표팀 역대 전적은 1승3무4패로 열세였다. 이후 멘도사서 열린 조별리그 3경기를 마친 김은중호는 2승1무를 기록하며 조별리그 무패로 16강 진출에 달성했다. 

16강전서 만난 에콰도르는 2019년 전 대회에 이어 2연속 토너먼트 대결 상대였다. 김은중호에는 제일 해볼만한 팀으로 평가됐다. 16강전 격전지는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였다. 에콰도르는 조별리그를 같은 지역서 치러 이동이 없는 반면 멘도사서 이동해야 하는 김은중호 피로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김은중호는 화끈한 공격쇼를 펼쳤다. 이번에도 승자는 한국 대표팀이었다. 결과는 3-2로 펠레 스코어 끝에 명경기를 펼쳤다.

나이지리아와 겨룬 8강전에서는 김은중호 특유의 실리 축구를 선보였다. 볼 점유율은 압도적으로 밀렸다. 전체 슈팅 4번 중 단 1번의 유효슈팅이 골망을 갈랐고 결과는 1-0 승리로 4강 진출에 성공했다. 

김은중호는 늘 훈련을 시작할 때 “원 팀(One team)”을 외친다. ‘원팀’으로 뭉친 강한 조직력이 실리 축구의 핵심이다. 이번 대회 전체 8골 중 세트피스만 4골을 기록할 정도였다. 선수들은 “감독님이 우릴 믿고 우리도 감독님을 믿어서 이뤄낸 성과”라고 입을 모았다.

개성 강한 어린 선수들을 한 데 모을 수 있었던 건 김은중 리더십 덕분이었다. 묵묵하고 말수가 적은 성격으로 알려진 김은중은 젊은 선수들과 주고 받는 소통 능력이 강점이다. 코치로 지낸 지난 9년간 U23 대표팀과 각국 유망주가 모이는 벨기에 리그에서 젊은 선수들과 지내면서 소통 능력을 키웠다.

U23 대표팀을 함께 이끈 김학범 감독도 젊은 선수들과 소통능력을 최고로 꼽았다.

김학범 감독은 “김은중 감독은 화내거나 소리지르지 않고 자신이 준비하고 계획한 것을 명확하게 전달한다”며 “개성이 강한 어린 선수들에게 최고의 지도자”라며 극찬했다. 김은중은 만 44세다. 최근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 선수에게는 젊은 감독이 대세라는 말을 실감하게 했다.


이번 대회 선수들은 직전 대회와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선수가 없었다. 실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린 선수들이 막 프로리그에 입성하면서 프로무대 출전 기회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순탄치 않았던
1년6개월 여정
 

김은중호는 앞서 골짜기 세대라고 불렸다. 골짜기 세대는 주변 세대와 비교해서 스타 선수나 실력이 떨어진다는 뜻을 담은 단어로 황금 세대와 반대말이다.

2017년 한국서 열린 U20 월드컵에서는 당시 스페인 명문 FC바르셀로나B서 뛰며 초특급 유망주로 평가받던 이승우와 백승호가 대표팀에 승선했다. 이후 2019년 폴란드서 열린 대회에서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서 뛰던 이강인이 주목받으면서 기대감을 높였다. 이강인은 U20 월드컵 준우승과 골든볼을 수상했다. 

김은중호는 비교적 주목받는 선수가 없어 무관심 속에서 대회를 준비했는데 김 감독은 이 분위기를 잘 이용했다. 선수들이 처져 있거나 심리적으로 불안해하면 먼저 다가가 기운을 북돋았다. 조별리그 1차전인 프랑스전 당시 오심으로 논란이 일었던 패널티킥(PK) 때도 선수들과 코치진이 흔들릴 때 김은중은 오히려 중심을 잡고 경기에 집중했다.

강한 조직력이 골짜기 세대서 황금 세대로 탈바꿈했다. 김은중의 리더십과 선수들의 끈끈한 팀워크가 2연속 대회 4강 진출을 이뤄내며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어린 선수들은 대회 도중 부상으로 떠난 박승호(인천 유나이티드)를 위해 각종 토너먼트에 나서기 전 기념촬영서 박승호의 유니폼 18번을 들어 올렸다.

1년6개월간 동거동락한 선수단 21명은 늘 하나로 뭉쳐 있었다.

이번 대회를 통해 무명서 스타로 발돋움한 대표적인 선수는 미드필더 이승원(강원FC)이다. 그는 이전까지 연령별 대표팀에 뽑힌 적이 없었다. 김은중은 당시 단국대 소속이던 이승원을 첫 소집에 올린 후 꾸준히 기용했다. 김은중이 주목한 이승원의 강점은 기본기가 탄탄하고 넓은 시야와 패스 능력을 꼽았다.

이승원은 첫 대표팀 승선 이후부터 주장으로 임명됐다. 이승원은 평소 사려 깊은 성격과 묵묵한 스타일로 선수들을 도왔다. 과묵한 리더십은 스승인 김 감독을 빼닮았다. 

스타 없어도 세계 4위
“끝 아닌 이제 시작”

이승원은 한국 남자 선수 중 FIFA 주관대회서 가장 많은 공격포인트를 올린 선수가 됐다. 3골4도움으로 7개 공격포인트를 올렸다. 직전 대회 이강인이 기록한 2골4도움인 6개 공격포인트를 넘어섰다. 그는 7개 공격포인트 기록으로 대회서 세 번째로 좋은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주는 브론즈볼을 받았다.

그는 8강전까지 4도움을 기록했는데, 모두 약속된 세트피스 상황서 올렸다. 

이승원은 이강인에 대해 “감히 얘기할 수 없지만 많이 보고 배우고 있는 선수”라며 “좋은 기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따라가겠다”고 존경심을 나타냈다. 이어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걱정과 우려가 컸는데 팬들의 열띤 응원 덕에 4강 진출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며 “결과 외에도 많은 걸 얻었다. 소속팀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 더 발전하겠다”고 다짐했다.

미드필더 배준호(대전 하나 시티즌)는 빼어난 개인기와 침착한 마무리로 에이스 등번호 10번의 탄생을 알렸다. 대회 중간 해외 외신들도 배준호에 대한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

프랑스 리그2 소쇼에 속한 스카우터 알렉시스 버지니우스는 “배준호는 이번 대회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선수 중 하나”라며 “배준호는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깨우친 것 같았다”고 극찬했다. 외신 기자 에마뉘엘 트루머가 선정한 ‘2023 U20 월드컵이 끝난 후에도 발달 과정을 유심히 지켜봐야 할 선수 20인’에 꼽힌 한국 선수는 배준호가 유일하다. 트루머는 프랑스 리그1 중계방송사 카날 플뤼의 기자다.

이번 대회 이탈리아를 결승까지 이끈 카르미네 눈치아타 감독은 한국과 치른 경기서 2-1로 승리 후 이례적으로 상대 선수인 배준호를 칭찬했다. 눈치아타 감독은 “한국의 10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는 매우 훌륭한 선수”라며 높은 평가를 내렸다.

대표팀 귀국길에 공항을 찾은 대전 팬들은 배준호에게 팀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그는 “유럽 이적설에 대해서는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아직 결정된 건 없다”며 “난 현재 소속팀이 좋고 대전을 찾아주시는 팬들도 좋다. 항상 응원해주시는 팬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이영준(김천 상무)도 이번 대회서 주목할만한 활약상을 펼쳤다. 공격수인 박승호가 부상으로 이탈한 후 홀로 공격진 선봉장에 섰다. 7경기 중 3~4위전인 이스라엘전을 제외하고 풀타임으로 출전한 이유다. 무려 630분을 뛰며 투혼을 보여줬다.

그는 전 경기를 뛰며 2골1도움을 기록했다. 그는 김은중호 출범 이후 가장 많은 득점인 20경기 10골을 기록했다. 192cm, 87kg의 큰 체구를 가진 그는 연계 플레이와 뛰어난 드리블 돌파 능력이 강점이다. 이른바 ‘육각형 공격수’의 등장이다.

박승호는 김은중호 귀국길에 목발을 짚고 마중했다. 박승호는 당시 동료들을 기다리며 “우선 애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가장 앞섰다”며 “애들이 충분히 잘해줬기 때문에 4위라는 좋은 성적을 가지고 온 것 같다”고 전했다. 

강한 조직
강호 제패
 

박승호의 합류로 완전체가 된 선수단은 귀국 후 사진촬영과 공식행사를 진행했다. 이영준은 “승호가 온두라스전서 동점골을 넣어 상황이 좋게 흘러갔다”며 “서운하기보다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며 우정을 과시했다.

김은중은 이번 대회를 끝으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는 4강 진출에 성공한 뒤 기자회견서 “조별리그서 광탈(광속 탈락)할 거란 얘기가 어린 선수들 귀에 들어가는 게 가장 마음 아팠다”며 눈물을 보였다. 김은중호는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냈다. 그는 “월드컵서 본인들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낸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이 선수들이 감독으로서 첫 제자인데 1년6개월간 성장한 모습을 보니 뿌듯하다”고 말했다.

<ojh34522@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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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총질 ‘친명 전쟁’ 서막

내부 총질 ‘친명 전쟁’ 서막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당내 울려 퍼지던 비명(비 이재명)계 소리가 사라졌다. ‘내부 저격수’가 사라졌으니 이제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 중심으로 똘똘 뭉쳐 국회를 꽉 잡을 것이란 희망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다른 한쪽에서는 우려의 뜻을 내비친다. ‘이재명 독주’ 체제로 완성된 민주당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겠냐는 점에서다. 22대 총선서 압승을 거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큰 폭으로 물갈이에 나섰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주요 자리에 친명(친 이재명)계 인사들을 대거 투입했다. 친명 위주의 인선을 단행해 원팀 민주당을 꾸리겠다는 셈이다. 공천 파동을 딛고 살아남은 친명 의원들이 일제히 한 보 전진했다. 피바람 잦아드니… 지난 21일 이 대표는 사무총장에 김윤덕 의원을 임명했다. 김 의원은 이번 총선서 전략공천관리위원회 위원을 지낸 인물로 지난 20대 대선 경선 당시 이재명 후보의 열린캠프서 활동한 바 있다. 조직사무부총장은 황명선 당선인, 당 대표 정무조정실장에는 김우영 당선인, 전략기획위원장은 민형배 의원 등 친명계가 이름을 올렸다. 민주당의 정책을 이끌 민주연구원장에는 이 대표의 ‘정책 멘토’로 알려진 이한주 전 경기연구원장이 선임됐다. 이 원장은 이 대표의 ‘기본소득’을 설계한 인물로 민주당이 제시한 ‘25만원 지원금’에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법률위원장에는 이 대표의 대장동 변호를 맡은 박균택 당선인이 낙점됐다. 이 밖에도 당 대표 비서실장에는 천준호 의원, 당 대표 정무조정실장에는 김우영 당선인, 교육연수원장에는 김정호 의원, 수석대변인에는 박성준 의원, 대변인에는 한민수·황정아 당선인이 자리했다. 이날 한민수 대변인은 인사 소개를 마친 후 당직 개편에 대해 “4·10 총선의 민심을 반영한 개혁 과제 추진에 있어서 동력을 형성한다는 의미가 있다”며 “신진 인사들에게 기회를 부여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인선은 이 대표가 국회에 입성한 후 진행된 두 번째 물갈이다. 2022년 8월 이 대표가 취임 직후 단행한 인선을 두고 ‘친명 일색’이라는 거친 비판이 터져 나왔다. 곧바로 한병도·권칠승·고민정 등 대표적인 친문(친 문재인)계 인사를 등용하면서 논란을 잠재웠지만 이번 총선서 친명이 주류를 이루면서 이들을 당에 대거 투입한 것으로 풀이된다. 22대 국회 문턱을 넘은 친문 세력은 약 스무명 안팎인 것으로 전해진다. 한때 민주당 180석을 지탱하던 핵심축이었지만 총선을 거치면서 세력이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민주당 공천을 두고 ‘비명횡사 친명횡재’라는 말이 나오자 고민정 최고위원은 위원직을 사퇴했다가 다시 복귀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이처럼 공천 피바람이 당내를 휩쓸었지만 총선 이후 이 대표를 비판하던 목소리가 단숨에 잦아들었다. 총선 결과 이후 이 대표 체제는 더욱 견고해졌다. 이 대표를 거칠게 비판하며 당을 떠나거나 새로운 둥지를 꾸린 이들이 줄줄이 낙선하면서다. ‘친명’ 타이틀 달고 꽃밭 안착 둥지 떠난 탈당파 줄줄이 낙선 새로운미래 이낙연 공동대표는 이 대표와 대립각을 세운 뒤 탈당해 새로운 당을 꾸렸다. 이번 총선서 광주 광산을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민주당 민형배 당선인에게 62.25%p로 크게 밀려 패배했다. 이 공동대표가 야심 차게 창당한 새로운미래는 지역구 한 석에 그치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개혁신당과 손을 잡은 이원욱 공동선대위원장 역시 지역구서 낙선했다. 탈당 후 국민의힘으로 이적한 ‘5선 중진’ 이상민 의원과 김영주 의원(국회 부의장)도 고배를 마셨다. 홍영표·설훈 등 다른 비명계 의원 역시 줄줄이 낙선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당을 떠나면 춥다는 걸 몸소 보여줬다”며 “소위 비명계로 분류됐던 이들이 모두 당을 떠났으니 당내 파열음이 나오지 않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대부분 여의도를 떠나게 됐으니 당분간 ‘내부 저격수’로 불리는 이들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친명 체제에 화룡점정을 찍을 원내대표 선출 결과에도 눈길이 쏠린다. 내달 3일, 선출을 앞둔 차기 원내대표 선거가 사실상 친명인 박찬대 의원의 독무대인 만큼 ‘친명일색 민주당’이 완성될 것이란 해석이 우세하다. 박 의원은 지난 21일, 일찌감치 출마 기자회견을 열고 “이재명 대표와 강력한 투톱 체제로 개혁 국회, 민생 국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최고위원직을 사퇴한 박 의원이 신호탄을 쏘아 올리면서 자천타천으로 물망에 오른 의원들은 속속 불출마를 선언했다. 서영교 최고위원은 지난 22일 원내대표 출마 선언을 위한 기자회견을 예고했지만 돌연 취소했다. 당 대표 ‘원픽’ 이와 관련해 서 최고위원은 “(박찬대 의원 포함)2명 다 최고위원직을 사퇴하면 제가 원내대표에 당선돼도 최고위원 두 자리가 비게 된다”며 “총선에 압도적으로 이긴 이 대표 체제에 문제가 된다는 게 처음부터 고민이었는데 사전에 조율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4선 김민석 의원도 “당원 주권의 화두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며 불출마를 시사했다. 인재위원회 간사였던 3선 김성환 의원과 원내수석부대표인 박주민 의원 역시 불출마 입장을 표했다. 민형배·진성준 의원도 하마평에 올랐지만 각각 전략기획위원장, 정책위의장에 임명되면서 자연스레 출마가 불발됐다. 이로써 원내대표 출마 후보군은 박 의원 한 명으로 압축됐다. 친명계 핵심인 만큼 이 대표의 의중인 ‘명심’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당초 10명 안팎의 후보군이 난립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물밑서 이 대표가 교통정리에 나섰다는 해석이다. 당 대표의 노골적인 선거개입이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당을 좌우하는 명심에 대항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친문 인사가 끼어들 틈도 없이 빠르게 상황이 흘러갔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의 설명이다. 민주당 원내대표 겸 의장단 선출 선거관리위원회 간사인 황희 의원은 지난 24일, 선거관리위원회 1차 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당규상 민주당서 원내대표 선거는 결선투표가 원칙으로 기본적으로 과반 득표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후보자가 1인일 경우 찬반 투표를 하기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원내대표 다음으로 주목받는 자리는 바로 차기 국회의장이다. 당내 우직한 이력을 가진 후보들이 기싸움이 이어가면서 명심이 누군의 손을 들어줄지 주목되는 상황이다. 민주당에서는 6선에 성공한 조정식·추미애 당선인과 5선인 정성호·우원식 의원이 22대 전반기 국회의장 출마를 밝혔다. 이들은 일제히 “기계적 중립은 없다”는 입장을 강조하며 강경 성향 의원의 표심을 얻기 위한 선명성 경쟁에 나섰다. 완벽한 시나리오 먼저 정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기계적 중립만 지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민주당 출신으로서 다음 선거의 승리를 위해 보이지 않게(그 토대를) 깔아줘야 된다”고 말했다. 여야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을 경우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서 다수당의 주장대로 갈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정 의원은 이 대표의 사법연수원 18기 동기로 알려졌다. 40년 가까이 알고 지낸 만큼 ‘원조 친명’이자 ‘친명계 좌장’으로 통한다. 이 대표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7인회’ 핵심 멤버기도 하다. 친명 후발주자인 추 당선인도 국회의장 도전에 대해 “주저하지 않겠다”며 “국회의장도 물론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그렇다고 중립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정치적 유불리를 계산하지 않고 유보된 언론개혁, 검찰개혁을 해내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히면서 강성 지지자의 호응을 유도했다. 민주당 조 전 사무총장도 “여야 합의가 될 때까지 무한정 기다릴 수 없다”며 “국회의장이 되면 긴급 현안에 대해서는 의장 직권으로 본회의를 열어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과반석을 차지한 만큼 당내 경쟁도 치열해진 양상을 띠고 있다. 국회의장 경선에 당원투표를 반영하자는 주장까지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강성 지지층의 힘이 크게 작용하는 만큼 후보들은 당심을 겨냥하기 위해 명심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당의 주요 인사들이 ‘이재명과의 호흡’을 강조하고 나선 만큼 이 대표의 의중인 ‘명심’은 당을 좌지우지하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를 앞세운 메시지가 앞다퉈 나오면서 입법 독주에 대한 우려 섞인 목소리도 커질 전망이다. 국민의힘은 “너도나도 ‘명심팔이’를 하며 이 대표에 대한 충성심 경쟁을 하니 국회의장은커녕, 기본적인 공직자의 자질마저 의심스러울 정도”라며 “협치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버려야 한다는 망언을 빙자한 민주당의 속내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상임위를 독식하겠다는 위헌적 발상도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솔솔 올라오는 ‘대표 연임설’ 대세는 ‘명심’…친문계 주목 총선 승리 이후 일부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서 “협치는 없다”는 기류가 흐르자 이를 꼬집은 것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당내 주요직이 속속들이 친명으로 배치되는 가운데 친문에게 더 이상 핵심적인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여기에 이 대표의 연임설까지 불거지면서 ‘이재명호’ 민주당은 한층 견고해질 전망이다. 이 대표 임기는 오는 8월28일까지다. 이제까지 민주당서 당 대표가 연임한 역사는 없지만 당헌·당규상 이를 금지한 조항도 없다. 이 대표가 마음만 먹는다면 몇 번이고 당 대표를 연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 대표는 20대 대선 패배 직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와 전당대회에 연이어 출마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선례를 남기기도 했다. 총선 승리 직후부터 친명 의원 중심으로 “민주당에 압승을 가져다준 이 대표가 한번 더 당 대표를 맡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면서 친·비명 간의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정성호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국회가 본연의 역할을 하고 민주당이 윤석열정권의 무능과 폭주하는 이 상황을 막아야 된다는 측면서 당 대표가 강한 리더십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며 “그런 면에서 연임할 필요성도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총선이 끝나고 이 대표를 만나 “강한 당 대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도 덧붙였다. 해남·진도·완도에 승기를 꽂은 박지원 당선인 역시 “만약 이 대표가 계속 대표를 한다고 하면 당연히 해야 한다. 연임해야 맞다”며 “이번 총선을 통해 국민이 이 대표를 신임했다”고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줬다. 반면 친문계 핵심으로 꼽히는 윤건영 의원은 이 대표 연임에 대해 “전당대회가 넉 달이나 남은 상황서 민주당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이슈”라며 “지금은 총선서 나타난 민의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우려를 표했다. 이어 “당의 리더십에 관한 것은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의도 정가에 밝은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친명 체제를 두고 외부서 걱정하는 모양이지만 정작 당내에서는 후폭풍이 불 수 없는 상황”이라며 “비명 의원끼리 바람을 일으키려고 해도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폭풍 전야 잔잔한 미풍 일제히 이 대표의 의중만 바라보는 민주당은 친명과 찐명 그리고 ‘신명(새로운 친명)’만 존재하게 된다. 이런 상황서 “당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겠냐”는 비판이 물밑으로 조용히 들려온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애초에 이 대표의 목적은 자신만의 민주당을 만드는 거였고 이번 총선을 통해 결국 이뤄냈다”며 “친명 민주당이라는 날카로운 검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국 이 대표의 손에 달려 있다. 이 대표는 임기를 마치는 날까지 자신의 영향력 밑에 당을 두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속 타는 조국혁신당 교섭단체 구성에 난항을 겪는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이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앞서 조국당 조국 대표는 여러 차례 민주당 이재명 대표에게 ‘범야권 연석회의’를 제안했지만 이 대표는 만찬 회동으로 갈무리하는 데 그쳤다. 민주당 내에서는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다”라며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이 대표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조 대표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하지만 캐스팅보트 역할을 쥔 것 또한 조국당인 만큼 22대 국회 개원 이후 민주당과 협상 테이블에 앉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