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U20 월드컵 ‘4강 신화’ 김은중과 아이들

‘골짜기 세대’ 건너 ‘황금 세대’로

[일요시사 취재1팀] 옥지훈 기자 = 김은중호는 첫 항해부터 순탄치 않았다. 이강인 같은 스타 선수 부재와 무명 선수가 주를 이뤘던 데다, 실전경험이 부족한 선수가 절반 이상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도네시아서 열리기로 한 대회가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로 개최지가 변경되면서 시차 적응이 필요했다. 그러나 ‘선수비 후역습’ 전략을 통해 세계 강호들을 제압했다. 이는 강한 조직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전략이다. 김은중호는 열악한 환경서도 ‘실리 축구’로 빛났다. 김은중호는 대회 끝이 아닌 한국 축구의 시작을 알렸다.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한국대표팀이 두 대회 연속 4강 진출이라는 성적표를 안고 귀국했다. 출국 전 무관심 속에서 출국한 김은중호는 수많은 환대 속에 금의환향했다. 기대 이상의 성적을 냈다는 기쁨도 잠시, 김은중은 “대회는 끝이 났지만 선수들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국가대표까지 성장해 한국 축구의 미래를 이끌어가길 바란다”고 제자들에 조언과 격려를 전했다.

U20 월드컵
세계가 깜짝

김은중은 1998년 아시아축구연맹(AFC) U19 축구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태극마크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이동국과 투톱 공격수 체재로 공격진을 이끌어 한국에 대회 2연패와 통산 9회 우승을 선사했다. 국내에서는 이들을 한국 축구 르네상스를 이룬 주축으로 평가하며 이듬해 나이지리아서 열린 1999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당시 방송3사(KBS·MBC·SBS)는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국내 독점 중계방송권을 두고 앞다퉜다. 국내 언론은 ‘멕시코 4강 신화’를 다시 이뤄낼 것이라며 김은중이 소속된 대표팀에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한국은 멕시코서 열린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U20 월드컵 전신)서 처음으로 4강에 진출한 경험을 두고 16년 만에 최상의 전력을 가졌다고 평가받았지만 세계의 벽을 체감하며 지난 대회에 이어 2연속 16강 진출 실패라는 성적을 내는 데 그쳤다.


반면 ‘영원한 숙적’ 일본은 같은 대회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기록하면서 국내 분위기는 더 참담했다.

김은중은 이후 세계 무대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국내 리그에서는 대전 시티즌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로 군림했지만, 왼쪽 눈 실명 상태라는 꼬리표로 국가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했다.

김은중은 중학교 시절 공에 맞아 왼쪽 눈이 실명됐다. 그럼에도 그는 축구선수에게는 큰 결함이 될 수도 있는 장애를 극복해 K리그 통산 444경기 123골을 터뜨렸다. 통산 A 매치 기록은 15경기 출전 5골이다. 

김은중은 이후 2014년 은퇴를 선언하고 지도자로서 제2의 전성기를 시작했다. 대전 시티즌 플레잉 코치와 벨기에리그 AFC튀비즈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김학범 전 23세 이하(U23) 한국대표팀 감독을 보좌하며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코치를 맡아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금메달, AFC U23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김은중은 코치 생활을 끝으로 2021년 12월 U20 대표팀 첫 사령탑 자리에 올랐다.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코로나 시기와 겹치면서 대표팀 운영에 차질이 생겼고, 이렇다 할 평가전도 치를 수 없었다. 대표팀 소집에도, 국내 유능한 선수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실전 경험 부족한 김은중호
‘실리 축구’로 똘똘 뭉쳤다

1년 동안 K리그 2군과 대학팀을 중심으로 어린 선수를 발굴했다. 이외에도 ‘유럽파’ 이현주(바이에른 뮌헨), 아시안컵 팀 최다 득점인 성진영(고려대)이 U23 월드컵 대표팀 기대주였으나, 부상으로 낙마해 최종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김은중은 지도자로서 첫 무대에 섰다. 지난 3월 우즈베키스탄서 열린 2023 AFC U20 아시안컵이다. 한국은 U20 아시안컵 최다 우승 국가다. 김은중호는 같은 해에 있을 U20 월드컵 본선 티켓과 11년 만의 우승을 노렸다.

4강에 진출해 월드컵 본선 티켓을 확보한 김은중호는 준결승전서 만난 우즈베키스탄과 연장 접전 끝에 승부차기서 패했다. 경기 내용이 다소 실망스러웠다. 120분 동안 유효 슈팅 2개를 기록하며 분전했고, 우즈베키스탄의 홈어드벤티지가 있었지만 경기력이 기대 이하였다. 

당시 FIFA 랭킹 25위인 한국과 77위인 우즈베키스탄은 20세 이하 대표팀 상대 전적서 6전 5승1무로 한국이 앞섰다. 대회 우승자는 개최국인 우즈베키스탄이 차지했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공동 3위를 기록했다.

김은중호는 U20 월드컵 무대를 앞두고 직전 대회 준우승과 아시안컵 준결승서 보여준 경기력 열세로 부담감을 안았다. 월드컵 무대 두 달을 남긴 시점이었다.  

이번 U20 월드컵은 인도네시아에 열릴 예정이었다. 아시안컵이 끝난 후 김 감독은 현지 답사를 통해 인도네시아 기후 환경을 고려한 훈련 계획을 준비했다. 그러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당초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던 인도네시아가 지난 3월 말 개최권을 박탈당한 것이다.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의 강성 이슬람 단체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탄압한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선수단 입국을 반대했다. 한 이슬람 단체는 이스라엘 선수단이 입국하면 납치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에 FIFA는 선수단 보호 차원서 인도네시아의 개최권을 박탈하고 대체 개최국으로 아르헨티나를 선정했다.

대회 한 달을 앞둔 시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로 플랜을 변경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개최 준비에 아르헨티나 숙박시설과 훈련시설 수요가 높아졌다. 김은중은 아르헨티나와 시차 차이가 나지 않는 브라질로 향했다. 

태극마크 
압박감
 

김 감독은 기존 계획보다 일찍 출국해 브라질 상파울루에 캠프를 차리고 선수단 컨디션 조절에 나섰다. 김은중호는 최종 엔트리 21명을 발표한 이후 파주 축구대표팀트레이닝센터에 소집한 다음 날 출국했다.

개최지 변경에 대해 김은중은 “브라질서 보낼 열흘간 시간이 중요하다. 좋은 컨디션으로 대회에 임할 수 있게 준비하겠다”며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팀들도 같은 상황이다. 누가 더 빨리 좋은 컨디션을 만드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0일간 상파울루 전지훈련을 마친 김은중호는 결전의 땅 아르헨티나 멘도사에 입성했다. 이어 첫 조별리그 1차전인 강호 프랑스를 2-1로 승리했다. FIFA 주관 대회 사상 처음이었다. 프랑스를 상대로 U20 대표팀 역대 전적은 1승3무4패로 열세였다. 이후 멘도사서 열린 조별리그 3경기를 마친 김은중호는 2승1무를 기록하며 조별리그 무패로 16강 진출에 달성했다. 

16강전서 만난 에콰도르는 2019년 전 대회에 이어 2연속 토너먼트 대결 상대였다. 김은중호에는 제일 해볼만한 팀으로 평가됐다. 16강전 격전지는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였다. 에콰도르는 조별리그를 같은 지역서 치러 이동이 없는 반면 멘도사서 이동해야 하는 김은중호 피로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김은중호는 화끈한 공격쇼를 펼쳤다. 이번에도 승자는 한국 대표팀이었다. 결과는 3-2로 펠레 스코어 끝에 명경기를 펼쳤다.

나이지리아와 겨룬 8강전에서는 김은중호 특유의 실리 축구를 선보였다. 볼 점유율은 압도적으로 밀렸다. 전체 슈팅 4번 중 단 1번의 유효슈팅이 골망을 갈랐고 결과는 1-0 승리로 4강 진출에 성공했다. 

김은중호는 늘 훈련을 시작할 때 “원 팀(One team)”을 외친다. ‘원팀’으로 뭉친 강한 조직력이 실리 축구의 핵심이다. 이번 대회 전체 8골 중 세트피스만 4골을 기록할 정도였다. 선수들은 “감독님이 우릴 믿고 우리도 감독님을 믿어서 이뤄낸 성과”라고 입을 모았다.

개성 강한 어린 선수들을 한 데 모을 수 있었던 건 김은중 리더십 덕분이었다. 묵묵하고 말수가 적은 성격으로 알려진 김은중은 젊은 선수들과 주고 받는 소통 능력이 강점이다. 코치로 지낸 지난 9년간 U23 대표팀과 각국 유망주가 모이는 벨기에 리그에서 젊은 선수들과 지내면서 소통 능력을 키웠다.

U23 대표팀을 함께 이끈 김학범 감독도 젊은 선수들과 소통능력을 최고로 꼽았다.

김학범 감독은 “김은중 감독은 화내거나 소리지르지 않고 자신이 준비하고 계획한 것을 명확하게 전달한다”며 “개성이 강한 어린 선수들에게 최고의 지도자”라며 극찬했다. 김은중은 만 44세다. 최근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 선수에게는 젊은 감독이 대세라는 말을 실감하게 했다.


이번 대회 선수들은 직전 대회와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선수가 없었다. 실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린 선수들이 막 프로리그에 입성하면서 프로무대 출전 기회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순탄치 않았던
1년6개월 여정
 

김은중호는 앞서 골짜기 세대라고 불렸다. 골짜기 세대는 주변 세대와 비교해서 스타 선수나 실력이 떨어진다는 뜻을 담은 단어로 황금 세대와 반대말이다.

2017년 한국서 열린 U20 월드컵에서는 당시 스페인 명문 FC바르셀로나B서 뛰며 초특급 유망주로 평가받던 이승우와 백승호가 대표팀에 승선했다. 이후 2019년 폴란드서 열린 대회에서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서 뛰던 이강인이 주목받으면서 기대감을 높였다. 이강인은 U20 월드컵 준우승과 골든볼을 수상했다. 

김은중호는 비교적 주목받는 선수가 없어 무관심 속에서 대회를 준비했는데 김 감독은 이 분위기를 잘 이용했다. 선수들이 처져 있거나 심리적으로 불안해하면 먼저 다가가 기운을 북돋았다. 조별리그 1차전인 프랑스전 당시 오심으로 논란이 일었던 패널티킥(PK) 때도 선수들과 코치진이 흔들릴 때 김은중은 오히려 중심을 잡고 경기에 집중했다.

강한 조직력이 골짜기 세대서 황금 세대로 탈바꿈했다. 김은중의 리더십과 선수들의 끈끈한 팀워크가 2연속 대회 4강 진출을 이뤄내며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어린 선수들은 대회 도중 부상으로 떠난 박승호(인천 유나이티드)를 위해 각종 토너먼트에 나서기 전 기념촬영서 박승호의 유니폼 18번을 들어 올렸다.

1년6개월간 동거동락한 선수단 21명은 늘 하나로 뭉쳐 있었다.

이번 대회를 통해 무명서 스타로 발돋움한 대표적인 선수는 미드필더 이승원(강원FC)이다. 그는 이전까지 연령별 대표팀에 뽑힌 적이 없었다. 김은중은 당시 단국대 소속이던 이승원을 첫 소집에 올린 후 꾸준히 기용했다. 김은중이 주목한 이승원의 강점은 기본기가 탄탄하고 넓은 시야와 패스 능력을 꼽았다.

이승원은 첫 대표팀 승선 이후부터 주장으로 임명됐다. 이승원은 평소 사려 깊은 성격과 묵묵한 스타일로 선수들을 도왔다. 과묵한 리더십은 스승인 김 감독을 빼닮았다. 

스타 없어도 세계 4위
“끝 아닌 이제 시작”

이승원은 한국 남자 선수 중 FIFA 주관대회서 가장 많은 공격포인트를 올린 선수가 됐다. 3골4도움으로 7개 공격포인트를 올렸다. 직전 대회 이강인이 기록한 2골4도움인 6개 공격포인트를 넘어섰다. 그는 7개 공격포인트 기록으로 대회서 세 번째로 좋은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주는 브론즈볼을 받았다.

그는 8강전까지 4도움을 기록했는데, 모두 약속된 세트피스 상황서 올렸다. 

이승원은 이강인에 대해 “감히 얘기할 수 없지만 많이 보고 배우고 있는 선수”라며 “좋은 기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따라가겠다”고 존경심을 나타냈다. 이어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걱정과 우려가 컸는데 팬들의 열띤 응원 덕에 4강 진출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며 “결과 외에도 많은 걸 얻었다. 소속팀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 더 발전하겠다”고 다짐했다.

미드필더 배준호(대전 하나 시티즌)는 빼어난 개인기와 침착한 마무리로 에이스 등번호 10번의 탄생을 알렸다. 대회 중간 해외 외신들도 배준호에 대한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

프랑스 리그2 소쇼에 속한 스카우터 알렉시스 버지니우스는 “배준호는 이번 대회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선수 중 하나”라며 “배준호는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깨우친 것 같았다”고 극찬했다. 외신 기자 에마뉘엘 트루머가 선정한 ‘2023 U20 월드컵이 끝난 후에도 발달 과정을 유심히 지켜봐야 할 선수 20인’에 꼽힌 한국 선수는 배준호가 유일하다. 트루머는 프랑스 리그1 중계방송사 카날 플뤼의 기자다.

이번 대회 이탈리아를 결승까지 이끈 카르미네 눈치아타 감독은 한국과 치른 경기서 2-1로 승리 후 이례적으로 상대 선수인 배준호를 칭찬했다. 눈치아타 감독은 “한국의 10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는 매우 훌륭한 선수”라며 높은 평가를 내렸다.

대표팀 귀국길에 공항을 찾은 대전 팬들은 배준호에게 팀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그는 “유럽 이적설에 대해서는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아직 결정된 건 없다”며 “난 현재 소속팀이 좋고 대전을 찾아주시는 팬들도 좋다. 항상 응원해주시는 팬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이영준(김천 상무)도 이번 대회서 주목할만한 활약상을 펼쳤다. 공격수인 박승호가 부상으로 이탈한 후 홀로 공격진 선봉장에 섰다. 7경기 중 3~4위전인 이스라엘전을 제외하고 풀타임으로 출전한 이유다. 무려 630분을 뛰며 투혼을 보여줬다.

그는 전 경기를 뛰며 2골1도움을 기록했다. 그는 김은중호 출범 이후 가장 많은 득점인 20경기 10골을 기록했다. 192cm, 87kg의 큰 체구를 가진 그는 연계 플레이와 뛰어난 드리블 돌파 능력이 강점이다. 이른바 ‘육각형 공격수’의 등장이다.

박승호는 김은중호 귀국길에 목발을 짚고 마중했다. 박승호는 당시 동료들을 기다리며 “우선 애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가장 앞섰다”며 “애들이 충분히 잘해줬기 때문에 4위라는 좋은 성적을 가지고 온 것 같다”고 전했다. 

강한 조직
강호 제패
 

박승호의 합류로 완전체가 된 선수단은 귀국 후 사진촬영과 공식행사를 진행했다. 이영준은 “승호가 온두라스전서 동점골을 넣어 상황이 좋게 흘러갔다”며 “서운하기보다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며 우정을 과시했다.

김은중은 이번 대회를 끝으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는 4강 진출에 성공한 뒤 기자회견서 “조별리그서 광탈(광속 탈락)할 거란 얘기가 어린 선수들 귀에 들어가는 게 가장 마음 아팠다”며 눈물을 보였다. 김은중호는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냈다. 그는 “월드컵서 본인들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낸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이 선수들이 감독으로서 첫 제자인데 1년6개월간 성장한 모습을 보니 뿌듯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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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르고 보는 정청래 두 번째 카드

지르고 보는 정청래 두 번째 카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스스로 리더십 도마 위에 올라섰다. 1인1표제 재추진과 조국혁신당과의 합당이라는 두 개의 승부수를 동시에 던지면서다. 양쪽에서 후폭풍이 몰아치는 형국이다. ‘자기 정치’ VS ‘당원의 뜻’이라는 명분과 명분이 거칠게 붙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의 합당 논의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지난달 22일 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혁신당을 향해 “지방선거를 따로 치를 이유가 없다”며 손을 내밀었지만, 민주당의 반발과 ‘흡수 합당은 싫다’는 혁신당의 주장이 부딪히면서 합당 테이블조차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중구난방 가쁜 숨만 합당 논의 초반부터 혁신당 측의 반발이 이어졌다. 혁신당 서왕진 원내대표는 최고위원회의서 “본격적인 통합 논의가 시작되기 전에 오해가 형성되는 것에 강력한 유감을 표한다. 통합은 뻔한 몸집 불리기가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는 가치 연합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앞서 민주당 조승래 사무총장이 합당과 관련해 “민주당이라는 큰 생명체 내에서 혁신당의 DNA도 잘 섞이게 될 것”이라고 밝히자 이를 ‘흡수 합당’이라고 받아들인 것에 대한 유감 표명으로 풀이된다. 혁신당이 합당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도 전했다. 서 원내대표는 MBC 라디오를 통해 “이미 민주당은 162명 거대 정당이고 (여기에) 혁신당 12명이 합쳐지는 것은 단순한 몸집 불리기”라며 “그 이상 의미는 없다”고 평가했다. 이어 “합당 논의 자체를 본격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 제안 방식이나 준비된 내용 자체가 없고, 오히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지방선거에 상당히 악영향이 있으니 당장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합당 논의라는 것 자체가 불가피한데 우리 원칙과 기준에 맞게, 질서 있게 논의는 진행할 필요는 있다는 긍정적 입장도 상당히 있었다”고 설명했다. 민주당에서도 합당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지도부에서 친명(친 이재명)계로 불리는 이언주·황명선·강득구 최고위원은 합당 발표 다음 날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대로 된 통합을 위해서라도 정청래식 독단은 이제 끝나야 한다”며 정 대표를 겨냥하고 나섰다. 이들은 “이번 합당 제안에 앞서 정 대표와 이재명 대통령 간 교감이 있었던 것처럼 언론 보도가 됐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어 “당무는 당의 책임이고, 당이 결정해야 한다. 마치 대통령이 관여하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며 합당 논의에 이 대통령을 끌어들인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들은 기자회견 말미에 ▲정 대표의 공식 사과 ▲독선적 당 운영에 대한 재발 방지 대책 마련 ▲합당 제안을 언제, 누구와, 어디까지, 어떻게 논의하였는지 등을 밝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합당·1인1표제, 쏟아지는 안건 “뭐부터 해결해야…” 여당도 혼란 이런 상황서 정 대표의 대표 공약인 ‘1인1표제’가 최종 관문인 당 중앙위원회(이하 중앙위) 표결에 다시 부쳐지면서 논란이 재점화할 전망이다. 당 대표 및 최고위원 선출 시 대의원과 권리당원의 표 행사 가치 비율을 현행 20대 1 이하에서 1대 1로 변경하는 것을 골자로 지난해 중앙위원회에서 재적위원 과반수를 채우지 못해 부결됐다. 정 대표가 압도적 당심으로 당선된 만큼 정치권 일각에서는 1인1표제 통과로 인한 권력 재편을 견제해왔으나 두 달 만에 또다시 날 선 공방이 예고된 것이다. 지난달 19일 당무위원회는 해당 안건 상정을 중앙위서 결정한 뒤 같은 달 22~24일 권리당원 투표 절차를 마무리했다. 1인1표제 안건에 대한 투표 결과 ▲찬성 85.3%(31만5827명) ▲반대 14.7%(5만4295명)로 집계됐다. 당은 이달 2일 중앙위원회를 개최해 당헌·당규 개정에 대한 안건을 투표로 부칠 예정이며 중앙위원 온라인 투표는 3일까지 진행된다. 권리당원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정 대표는 “당원들의 압도적 다수의 뜻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1인1표제 굳히기에 나섰다. 정 대표는 “당원들의 뜻을 받들어 민주당을 더 좋은 민주주의 정당으로 만들겠다”며 “당의 모든 의사와 진로는 당원들이 가라는 대로 가고 당원들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설명했다. 민주당 조승래 사무총장도 페이스북에 “참여율은 지난번 16.81%에 비해 15% 가까이 높아졌고, 찬성률은 비슷하다. 압도적인 찬성 여론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힘을 실었다. 1인1표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질 때마다 정 대표는 이 대통령을 방패처럼 소환했다. 정 대표는 “1인1표제는 당원이 주인 되는 정당, 당원주권정당, 당원주권시대 등 여러 가지 표현으로 이재명 당 대표 시절부터 3년여간 꾸준히 요구되고 논의했던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이리 튀고 저리 튀고 이어 “당원과 대의원 1대 20 미만을 결정할 때도 많은 반대와 저항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며 “1인1표제는 논의할 만큼 논의했고 영남권 등 전략 지역 원외위원장들께서도 그 당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양해했던 사안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1인1표제는 이 대통령이 추진했던 사안인 만큼 민주당이 이를 반대할 명분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민주당과 당원들은 정 대표가 충분한 논의 없이 중요한 사안을 본인 페이스대로 밀어붙인다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다. 지난해 27표 차이로 1인1표제가 처음 부결됐을 당시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과반에 가까운 상당수 최고위원이 우려를 표하고 숙의를 원했음에도 강행, 졸속 혹은 즉흥적으로 추진된 부분에 대해 유감”이라며 정 대표를 공개 지적하기도 했다. ‘자기 세력 강화’를 위해 합당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의심이 가라앉기도 전 1인1표제로 또다시 당을 흔들면서 반청(반 정청래) 정서가 퍼졌다. 이재명정부가 출범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여당이 흔들리자 정 대표의 진퇴를 물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합당 발표 이튿날 서울 여의도 민주당 당사 앞에선 당원들이 주도하는 합당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들은 ‘정청래 사퇴’ 등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합당 반대”를 외쳤다. 민주당 일각에도 정 대표의 ‘졸속 추진’ 행보가 이어진다면 사퇴 요구 가능성을 열어두겠다는 이들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 대표의 모든 행동이 ‘자기 정치’ 프레임으로 귀결되면서 승부수가 자충수가 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에 정 대표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 전문을 자신의 SNS에 공유했다. 자신의 선택을 두고 당내 반발이 이어지자 우회적으로 심경을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 겨냥한 듯 강득구 최고위원 역시 자신의 SNS에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당원의 뜻은 독단으로 결코 꺾을 수 없나니, 흔들리는 것은 뿌리 없는 꽃뿐”이라며 저격 글을 게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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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도 필요 여의도 안팎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민주당은 혁신당과의 합당과 1인1표제 추진에 큰 이견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는 사전 논의 없이 진행된 점 등 정 대표의 독단적인 행동이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민주당 김지호 대변인 역시 “당내 문제 제기는 합당 자체보다는 의견수렴 절차가 급작스럽게 진행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정 대표가 당권을 쥐었을 당시 잡음은 예상됐으나, 일단 지르고 수습하는 예측 불허한 행동이 반복되면서 신뢰를 잃은 게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정 대표 취임 이후 ‘명청 갈등’ ‘당정 불협화음’ 등으로 민주당은 계속해서 흔들렸다. 최고위원들의 반발 역시 당에서도 정청래 체제에 대한 위험성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근거로 해석된다. 당 대표 임기 종료까지 반년이 남았지만 정 대표의 연임 의혹은 여전한 만큼 갈등 역시 쉽게 봉합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정 대표는 당원주권시대를 거듭 강조했지만 막상 중요한 사안은 독단으로 결정하면서 당 안팎으로 불만이 제기된 것으로 전해진다. “1인1표제로 당원 중심 원칙을 강화하자”면서 합당 등 중요한 사안을 대표 혼자 결정하는 건 모순이라는 설명이다. 혁신당과의 합당 제안에 당내 반발이 이어지자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당원들이 이 문제를 최종 결정할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박 수석대변인은 “(합당이라는) 당 대표의 제안은 정무적 판단과 그에 따른 정치적 결단의 영역”이라며 “그렇기에 앞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 전 당원 토론, 투표 등 정해진 절차를 거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활발하게 당원의 의견을 묻는 그런 토론의 장을 마련하겠다”며 “당원주권시대에 걸맞게 당원의 뜻을 최종적으로 묻고,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거듭 강조했다. 아울러 “당원이 합당하라면 하는 것이고 하지 말라고 하면 못 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러나 정 대표가 논의를 띄우고 당원에게 ‘예’ ‘아니오’로만 의견을 묻는 행위가 당원주권정당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말로만 당원 주권 시대? “이제는 숙의 민주주의로” 이에 한 정치권 관계자는 “1인1표제의 경우 정 대표는 당원들의 찬성률이 압도적이었다고 말하지만 투표율은 저조했다. 이것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들여다 보지 못하고 숫자에만 매몰됐다”며 “이것을 당원주권정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현재 소수의 당원이 당의 여론을 이끌고 있다. 일반 국민의 시선에서 ‘나머지 당원들은 무책임하게 방관하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과정을 보면 당 대표가 논의를 띄우고 ‘자, 여기에 O, X로만 투표해!’ 하는 식이니 당과 당원 간의 간극이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1인1표제와 혁신당과의 합당 모두 찬성 여론이 높다. 그럼에도 정 대표를 향한 반발은 거칠다. 결국 민주당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니라 배의 키를 쥔 선장을 향한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합당 방식에 반발한 민주당 최고위원들 역시 “정 대표의 선택적 당원주권”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대통합을 가로막는 정 대표의 독선과 비민주성을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한다”며 “선출된 최고위원들이 의견조차 낼 수 없는 구조, 대표 결정에 동의만 강요하는 구조는 민주적 당 운영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가고자 하는 방향은 같지만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서 파열음이 나는 만큼 결국 정 대표의 리더십이 관건이다. 3대 개혁의 빠른 추진, 혁신당과의 합당을 통한 지방선거 승리, 이정부의 성공 등 각종 요구가 쏟아지면서 이를 한데 어우르는 ‘통합형 당 대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 대표의 자기 정치 프레임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동안 자기 정치 의혹이 숱하게 제기된 만큼 조 사무총장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당내 가장 큰 경쟁자인 한동훈 전 대표를 내치려고 하는 것은 당권을 계속 강화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그야말로 자기 정치 아닌가”라며 “반면 정 대표는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조국 대표와 함께하자고 하는 것인데 이걸 자기 정치라고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엄호에 나섰다. 민주당의 민주주의 체제에 경고등이 켜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모자이크 민주주의 평화 그룹 백왕순 대표는 <일요시사>를 통해 “숙의 민주주의의 부재”를 꼬집었다. 민주주의 제자리걸음 백 대표는 “1인 1표제가 맞냐 틀리냐 갑론을박이 이어지는데 당원주권시대에는 이 방법이 옳다. 다만 이득을 놓고 계파 간의 힘겨루기만 이어지니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이라며 “혁신당과의 합당도 마찬가지다. 통합하면 이기고 분열하면 진다. 그런데 이를 차기 당권 문제와 연결해 해석하니 복잡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대한민국은 숙의 민주주의가 아닌 절차 민주주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찬반이 극명한 사안에 대해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며 “당원이 직접 토론하고 의견을 내는 오프라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불안한 민주당 혁신당도 ‘흔들’ 합당이라는 중대한 사안을 놓고 조국혁신당이 자당 의원들 입단속에 나섰다. 혁신당 황운하 의원이 “민주당과 합당할 경우 혁신당 조국 대표가 통합한 당의 공동대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경고한 것과 더불어 입조심을 당부한 것이다. 혁신당은 조국 대표가 즉각 황 의원의 이날 발언에 경고했다고 밝혔다. 혁신당 대변인실은 입장문을 통해 “혁신당 최고위는 이 문제(황 의원 발언)에 대해 논의하고, 이 같은 논의를 전혀 한 바가 없으며 매우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지적했다”며 “조 대표 역시 강한 경고를 했음을 알린다”고 밝혔다. 이어 “혁신당은 공식적 기구를 통해 합당과 관련된 논의를 해왔으며 위와 같은 논의는 전혀 언급된 바가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조 대표를 비롯한 혁신당 구성원 누구도, 민주당과 합당과 관련된 실무 논의를 진행한 바가 없다”고 강조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