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산’ 이재명 선거법 재판 막전막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 하늘의 그물은 크고도 넓어서 성긴 듯하지만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격언이다. 최근 검찰총장이 검찰 간부 앞에서 이 격언을 인용했다. 검찰 수사에 맞서 ‘방탄’에 나선 야당 대표를 겨냥한 말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국회의원, 당 대표 등 겹겹이 입은 방탄조끼의 위력이 확인됐다. 검찰의 창은 방탄조끼를 뚫고 급소 바로 앞까지 밀려들어갔다. 내부 반란이 검찰의 창에 힘을 더했다. 대선 패배 이후 주변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탄조끼를 챙겨 입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사면초가’ 상태에 빠졌다. 

예상치 못한
반란표 당혹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진행된 이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초 ‘압도적 부결’을 예상했던 민주당 지도부는 ‘가결 같은 부결’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169석을 갖고도 당 대표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비판이 지지층에서 터져 나왔다. 

민주당에서만 31표의 이탈표가 나왔다. 기권과 무효표를 더하면 반란표 수는 더욱 늘어난다. 민주당 비명계(비 이재명)는 이 대표의 사퇴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번 표결에서 실력 행사를 한 만큼 다음 표결을 무기로 삼고 있다. 반면 이 대표와 친명계(친 이재명)는 ‘대표 사퇴는 없다’고 못 박았다. 

이 대표는 ‘진퇴양난’ 상태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이라 본인 의지로 내릴 수도 없다는 의견까지 나온다. 대표직을 사퇴한다는 것은 공천권을 내려놓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 대표로선 공천권이 가장 큰 무기나 다름없다. 하지만 검찰이 또 한 번의 구속영장 청구를 예고한 상황에서 이 대표의 입지는 이미 좁아질 대로 좁아진 상태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재명 3대 사법 리스크’인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로비 의혹 ▲성남FC 후원금 의혹 ▲변호사비 대납 의혹에 앞서 선거법 위반 혐의가 이 대표의 발목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기 때문. 검찰은 지난해 이 대표를 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한 바 있다. 이 대표는 지난 3일 재판에 출석했다.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2부는 지난해 9월8일 대선 과정에서 허위 발언을 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이 대표를 재판에 넘겼다. 공소시효 만료를 하루 앞둔 시점이었다. 이 대표는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2021년 12월22일 방송 인터뷰서 대장동 개발사업 관련자인 고 김문기 성남도시개발공사(이하 성남도개공) 개발1처장에 대해 “하위 직원이라 시장 재직 때는 알지 못했다”고 발언했다. 

2020년 대법원 판결로 ‘기사회생’
변호사비 대납·사법거래 의혹으로

김 전 처장은 검찰 조사를 받던 중 2021년 12월21일 성남도개공 사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 대표는 2018년 경기도지사 당선 후 선거법 소송이 시작된 뒤에야 김 전 처장을 소개받아 알게 됐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검찰은 김 전 처장의 휴대전화와 노트북, 유동규 전 성남도개공 기획본부장의 진술, 유가족이 공개한 사진 등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이 대표가 변호사 시절부터 김 전 처장을 알고 있었다고 봤다. 

검찰은 ▲2009년 김 전 처장의 휴대전화에 이 대표를 ‘이재명 변호사’로 저장한 점 ▲이 대표가 성남시장 시절인 2015년 호주·뉴질랜드 출장에 동행하면서 골프를 친 점 ▲이 대표가 김 전 처장에게 대장동 개발사업, 제1공단 공원화 사업 관련 대면보고를 여러 차례 받은 점 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대표의 백현동 특혜 의혹과 관련한 발언도 문제로 떠올랐다. 이 대표는 2021년 10월20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경기도 국정감사에서 백현동 한국식품연구원 부지 용도변경 특혜 의혹과 관련해 “국토부가 용도변경을 요청했고 공공기관 이전 특별법에 따라 저희가 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또 “용도변경을 해 수천억원의 수익을 취득하는 것은 성남시에서 수용할 수 없으므로 성남시가 일정 수익을 확보하고 업무시설을 유치하겠다고 했는데 국토부가 직무유기를 문제 삼겠다고 협박했다”고도 말했다.

검찰은 관련자 조사를 통해 성남시가 국토부로부터 4단계 종상향 용도변경 요청을 받은 사실 자체가 없다고 했다. 성남시의 자체 판단이었다는 것이다. 

모른다더니…
증거 나왔다

서울중앙지검과 수원지검 성남지청은 두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에 일괄 기소했다. 앞서 검찰은 이 대표의 소명을 듣기 위해 출석을 요구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이 대표의 선거법 위반 혐의와 관련한 재판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당이 연계돼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를 대선후보로 낸 민주당으로도 불똥이 튀게 되는 것.

당장 재판에서 1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이 확정되면 이 대표는 공직선거법과 국회법에 따라 의원직을 잃게 된다. 5년간 피선거권도 제한되기 때문에 차기 대선은 물 건너가는 셈이다. 민주당 역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보전받은 대선 선거비용 434억원(선거비용 431억원+기탁금 3억원)을 토해내야 한다. 

공직선거법 제265조(선거사무장 등의 선거범죄로 인한 당선무효), 제265조2(당선무효된 자 등의 비용 반환)에 따라 대선후보가 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당선무효에 해당하는 형(벌금 100만원 이상)을 확정받으면 중앙선관위로부터 보전받은 선거비용을 후보 추천 정당이 다시 돌려줘야 한다. 

이 대표는 과거 대선후보로 가는 길목에서도 ‘선거법 위반 혐의’라는 산을 만난 바 있다. 항소심까지 벌금 300만원으로 벼랑 끝에 섰던 이 대표는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을 결정하면서 기사회생했다. 대법원의 판단으로 이 대표는 민주당 대선후보로 결정돼 링 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 

문제는 그때와 지금 상황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이 대표(당시 경기도지사)는 성남시장 재임 시절인 2012년 6월 보건소장, 정신과 전문의 등에게 친형 이재선씨를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시키도록 지시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로 기소됐다.

또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린 TV 토론회에서 ‘친형을 강제입원시키려고 한 적이 없다’는 취지의 허위 발언을 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도 받았다.

대선후보
발판 됐다

쟁점이 된 건 선거법 위반 혐의였다. 1‧2심 모두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반면 선거법 위반 혐의는 1심과 2심의 판단이 엇갈렸다. 1심은 무죄, 2심은 유죄였다. 특히 2심은 당선무효형인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경기도지사로 재임하면서 대선을 준비하던 이 대표에겐 치명타인 결과였다. 


당시 이 대표는 TV 토론회서 “형님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하셨죠?”라는 상대방의 질문에 “그런 일 없다”며 모친 등 다른 가족이 진단을 의뢰한 것이고 자신이 “최종적으로 못 하게 했다”고 답변했다.

실제 이 대표의 가족이 2012년 이재선씨에 대한 조울증 치료를 의뢰하는 문서를 작성하고 서명한 사실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다만 이 대표가 이재선씨의 강제입원 절차 개시를 지시한 것도 재판 과정에서 사실로 밝혀졌다. TV 토론회 발언이 허위였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7대5로 무죄 취지에 손을 들었다.

이 대표의 발언이 “상대 후보자의 공격적 질문에 소극적으로 회피하거나 방어하는 취지의 답변 또는 일부 부정확하거나 다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표현”이라며 “적극적으로 반대 사실을 공표했다거나 전체 진술을 허위라고 평가할 수 없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당시 이 대표는 대선후보 지지율이 수직 상승하면서 이낙연 전 국무총리를 바짝 뒤쫓고 있던 때였다. 대법원서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을 결정한 이후 이 대표는 지지율이 상승곡선을 그린 끝에 민주당 최종 대선후보로 결정됐다. 대법원의 판단이 이 대표를 정치적 거물로 만들어준 셈이다. 

당선무효면 민주당도 폭망
선거비용 434억원 물어내야


흥미로운 대목은 당시 선거법 위반 재판과 관련해 ‘나비효과’가 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당 재판을 둘러싸고 변호사비 대납 의혹이 불거진 데 이어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참여한 권순일 전 대법관은 ‘사법거래’ 의혹을 받고 있다. 화천대유자산관리 대주주인 김만배씨가 재판 전후로 권 전 대법관을 만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또 대법원이 이 대표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을 하는 과정에서 권 전 대법관이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권 전 대법관은 퇴임 이후 화천대유 고문으로 일하면서 매월 1500만원을 받은 사실이 알려졌다.

대장동 개발사업에 도움을 주고 거액을 받았다는 ‘50억 클럽’의 멤버로도 지목된 상태다. 

쌍방울그룹이 연루된 변호사비 대납 의혹은 이 대표의 선거법 위반 혐의 재판을 맡은 변호사 수임료를 쌍방울이 전환사채 20억원, 현금 3억원 등으로 대신 지불했다는 내용이다. 이 대표는 ‘변호사비로 3억원가량 지급했다’고 밝혔는데, 이 발언이 허위라며 시민단체 ‘깨어있는 시민연대당’이 2021년 10월 이 대표를 고발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해당 사건에 대한 수사는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과 금고지기 김모씨가 구속 기소되면서 속도가 붙은 모양새다. 여기에 대북송금 의혹까지 함께 불거졌다. 김 전 회장이 검찰 조사에서 ‘이 대표의 방북을 위해 북한에 300만 달러를 보냈다’고 진술한 것이다. 선거법 위반 혐의 재판에서 비롯된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양새다. 

첩첩산중
벼랑 끝

이 대표는 지난 3일에 이어 격주로 금요일마다 선거법 위반 혐의 관련 재판을 받을 예정이다. 공판준비기일과 달리 정식 공판에는 피고인이 법정 출석을 해야 한다. 재판부는 오는 17일과 31일도 공판기일로 지정했다. 공직선거법 재판은 공소제기 후 6개월 안에 1심 선고를 권고하고 있다. 재판과 검찰 수사, 구속영장 청구 등 이 대표 앞에 놓인 산은 매우 험난해 보인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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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