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훼손’에 숨은 불법 금융 백태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2.20 13:38:20
  • 호수 14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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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단계 끄나풀’ 뒤봐주는 변호사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불법 금융사기가 판치는 세상이다. 이런 사기에 당한 피해자가 인터넷에 글을 올려도 소용이 없다. 바로 ‘명예훼손죄’로 걸려 게시글이 사라지기 일쑤기 때문이다. 불법 금융사기와 피해자의 싸움은 온라인에서도 지속되지만, 보통은 명예훼손으로 피해자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실정이다. 

명예훼손이란 ▲이름 ▲신분 ▲사회적 지위 ▲인격 등에 해를 끼쳐 손해를 가하는 것을 말한다. 명예를 법적으로 말하면 사람의 인격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평가다. 즉, 외부적 명예를 가르킨다. 결국 명예훼손은 사람의 ▲품성 ▲덕행 ▲명성 ▲신용 등에 대한 객관적인 사회적 평가를 위법하게 저하하는 행위다. 단순히 주관적으로 명예 감정이 침해됐다는 건 명예훼손이 성립되지 않는다.

주관적이냐
객관적이냐

형법상 명예훼손은 형법 307조에 ‘공연히 사실이나 허위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명예의 주체는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도 포함된다. 또 ‘공연히’라는 말은 불특정 또는 다수를 인식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해, ‘훼손’은 개인 또는 단체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할 수 있는 상태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명예훼손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장선우 선수 사건이 있다. 2015년 10월9일 KT wiz인 장 선수의 전 여자친구가 장 선수가 사석에서 프로야구 관계자와 팬을 비하했다며 장 선수의 상반신 나체 사진을 개인 SNS에 올렸다.

이 사건은 선수 개인의 연애사로 시작해서 동료 뒷담화, 팬들 성적 모욕, 감독 뒷담화, KT 회장 뒷담화 등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인터뷰어를 인신공격하거나 롯데 치어리더와 KT 치어리더를 욕하는 등 사생활도 함께 폭로했다. 이 글에는 치어리더 박기량에 대한 노골적인 성적 비하가 담겨 있어 더 큰 충격을 안겼다.


이 같은 사생활 폭로는 4탄까지 이어졌고, 결국 구단은 “사실 확인 중”이라고 대응했다.

결국 장 선수와 전 여자친구는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명예훼손)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2016년 1월25일 수원지법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장 선수는 징역 8개월, 전 여자친구는 징역 10개월에 구형됐으며 같은 해 2월24일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았다.

2016년 5월26일 열린 항소심 첫 공판서 검찰은 1심 때와 같은 형량을 구형했다. 해당 사건에서 대법원은 형법상 명예훼손의 공연성에 대해 “개별적으로 한 사람에게 사실을 유포했다고 해도 불특정 또는 다수에게 전파될 가능성이 있다면 요건을 충족하게 된다”고 판시했다. 

정보통신망법 판례서도 SNS는 개인과 개인의 대화로 기록이 남을 수 있고 쉽게 전달될 수 있어 사적 비밀이 아닌 외부로 전파될 위험성이 항상 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명예훼손은 개인과 단체의 명예를 지키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7월14일 오픈넷(opennet)은 명예훼손·모욕의 형사 고소·고발 건수가 시간이 지날수록 급증하고 있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실 요청으로 법무부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명예훼손‧모욕으로 접수된 사건은 2010년 2만2777건에서 2020년 7만9910건으로 약 4배가량 급증했다. 

피해사실 SNS에 올리면 법으로 입막음
사실이라도 성립…악성 업체 보호 역할


이에 비해 동 기간 접수 사건 중 기소로 처리된 건수는 연간 7000건에서 약 1만2000건 사이로 평균 약 1만1000건 수준을 기록해 꾸준한 수치에 유지했다. 이는 대부분 명예훼손·모욕의 고소·고발이 심각한 수준의 인격권 침해가 아니어도 남발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명예훼손·모욕의 고소·고발로 불법·다단계업체가 관계될 수 있는 점이다. 또 현행 명예훼손죄는 친고죄가 아닌 ‘반의사불벌죄’로 규정돼있어 피해자가 아닌 제3자도 얼마든지 고발할 수 있다. 결국 공인에 대한 비판적 표현물에 대해 팬덤, 지지단체, 종교단체, 대리단체 등이 고발을 남발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은 불법 업체에서 금전적 피해에 빠져 있는 피해자를 두 번 힘들게 한다. 불법 금융(금융사기, 투자사기, 유사수신행위, 금융피라미드)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네이버 ‘백두산’ 카페에는 이런 상황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카페는 지난해부터 ‘명예훼손 게시물’로 지정돼 ‘게시 중단 요청’이 들어간 게시물이 늘어나고 있다. 네이버 게시 중단 요청 서비스는 네이버 서비스상에서 다른 회원의 게시물이 고객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생각되는 경우 그 게시물을 임시로 게시 중단 요청을 하는 서비스다.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44조에는 ‘정보통신 서비스 제공자는 자신이 운영·관리하는 정보통신망 제1항에 따른 정보가 유통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제44조의 2에는 ‘정보통신 서비스 제공자는 삭제 등을 요청받으면 바로 삭제·임시 조치 등의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즉시 신청인 및 정보 게재자에게 알려야 한다. 이 경우 정보통신 서비스 제공자는 필요한 조치를 한 사실을 해당 게시판에 공시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용자가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게재돼있다.

네이버 명예훼손 게시물 게시 중단 요청은 ▲카페 ▲블로그 ▲지식iN ▲예약 ▲쇼핑 ▲플레이스 ▲뉴스(댓글) ▲증권(댓글) 등에 신청할 수 있다. 게시물 게시 중단을 하면 작성자는 이의신청을 할 수 있고, 이때 게시중단 요청자에게 관련 내용이 통보된다. 이의신청 검토가 완료되면 게시 중단 조치 30일 뒤 복원된다.

복원된 게시물은 다시 중단할 수 없으나, 추가로 게시물 조치가 필요한 경우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 심의를 신청할 수 있다.

진실?
허위?

네이버 백두산 카페서 중단된 게시물도 이 같은 맥락으로 결정됐다. 물론, 모든 불법 업체가 게시 중단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특정 불법 업체가 상습적으로 게시물 중단을 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백두산 카페 대표 대마불사에 따르면, 게시물 중단을 신청하는 불법 업체는 4개다. A 업체는 백두산 카페를 고소했다며 피해자들이 작성한 관련 게시글 삭제를 요청했다. 황당한 것은 연락해 온 곳이 A 업체 대표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언론사 대표라고 지칭했고, 통화하면서 게시글을 삭제하라고 욕하기도 했다.

B 업체는 변호사를 선임해 ‘전문적으로’ 게시물 중단을 요청했다.

B 업체 변호사는 백두산 카페에 “대마불사님의 실명이나 주소를 알 수 없어 부득이 상담용으로 공개된 본 이메일로 보낸다. 귀하가 운영하는 카페의 게시판에 발신 의뢰인이 운영하는 B 업체가 사기업체 카테고리로 분류/등재되어 별도 게시판이 운영되고 있고, 위 게시판에는 B 업체를 비방하는 여러 게시글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중 대부분은 허위 정보를 기재해 B 업체를 비방한 글이거나, 기존 회원 중 일부가 빠른 출근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한 글 또는 경쟁업체 직원이 고객을 빼돌리기 위해 작성한 글이며, 명예훼손 또는 영업방해에 해당하는 불법 게시물이다. 이는 귀하가 카페를 운영하는 공익 목적과 부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메시지와 함께 해당 업체는 ▲네이버 본사에 게시물에 대한 삭제 청구 ▲게시자에 대한 형사 고소 경고 ▲자사 비방 유튜버를 강남경찰서에 형사 고소했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해당 카페의 피해자는 “B 업체는 전형적인 폰지사기다. 상식적으로 100만원을 투자해서 1년 내에 돌려받고 이후부터 순수익을 낸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이게 사실이라면 은행, 대부업에 받을 수 있는 만큼 대출을 받더라도 해야 하는 것이지 않냐. 투자는 본인이 선택해서 하는 것이지만, 이런데 속아서 피 같은 돈 날리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비판했다.

C 업체는 2020년 2월과 2021년 3월에 본사 메일로 자신들은 절대 사기 업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백두산 카페 내 게시글을 삭제하지 않으면 고소, 소송 등의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운영자를 협박했다.

불법 업체
방어 수단

운영자 대마불사도 “C 업체의 사업설명회서 교육받고 이미 투자했다”는 등의 비방과 모함을 일삼았다.


지난해 6월17일 서울 강남경찰서에 따르면, 해당 업체는 사기 등 혐의로 고소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업체 피해자는 “C 업체가 비트코인처럼 가격이 오른다는 상위 사업자 말을 듣고 1억원 이상을 투자했다. 그런데 코인 가격이 너무 떨어져서 피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D 업체는 피해자가 게시글을 올리면 바로 게시 중단 처리하곤 했는데 게시판 전체가 게시 중단 글로 채워질 정도였다.

D 업체 피해자는 “이곳은 매월 8~10% 배당금을 지급하는 고수익 투자상품이라는 홍보를 한다. 이에 60대 이상 장년층이 노후자금을 전부 투자한 경우가 많다. 특히 해지나 환불을 원하는 가입자에게 인감도장을 요구하는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탈퇴를 막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마불사는 <일요시사>에 “지난해 11월 게시글 300개가 사라졌다. 글이 많이 올라오면 하루에 100개 정도인데, 3일 치 글이 다 사라진 것이다. 네이버 정책이 그러니 방법이 없다”며 “언론중재위원회에 민원을 넣어도 방법이 없다. 네이버도 게시글이 많으니 진위 여부를 다 확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 이의신청을 하면 한 달 만에 글이 복구된다. 백두산 카페를 만든 이유가 사기 피해를 알려서 예방하려고 하는 건데, 이런 식으로 하니 의욕이 떨어진다”며 “그렇다고 네이버 정책을 없앨 순 없지 않냐. 반대로 정말 명예훼손이 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다만 게시글 복구기간을 더 빠르게 하고, 당사자들이 법적으로 싸우면 좋겠다. 이런 업체들의 뒤엔 변호사들이 있는데, 돈을 받고 일을 하는 거겠지만 꼭 이런 식으로 돈을 벌어야 하나 싶다”고 안타까워했다.

이 같은 사례는 ‘표현의 자유와 알권리’라는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하게 된다는 문제의식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심각한 문제는 명예훼손이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의 입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무더기로 사라지는 게시글 알고 보니…
폰지사기 피해자들도 ‘벙어리 냉가슴’

해당 문제에 대해 박주민·김용민·정필모·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및 사단법인 두루, 사단법인 오픈넷 주취로 2021년 12월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3간담회의실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이대로 괜찮은가? 사례를 중심으로 보는 사실적시 명예훼손 죄의 문제점’ 토론회가 열렸다. 

당시 토론회서 공개된 사례들은 아래와 같다.

삼촌은 미성년인 조카의 몸을 마음대로 만진 성폭력 가해자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인 조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괴롭혔다. 결국 조카는 성인이 된 후 심한 우울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를 앓았다.

삼촌은 도청 고위공직자로 일했다. 조카는 30년이 지났지만, 늦게나마 삼촌의 잘못을 묻고 싶었다. 2008년 9월 조카는 삼촌이 근무 중인 도청 인터넷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삼촌의 과거를 남겼다.

조카는 “그런 놈이 우리나라 고위공무원으로 살아도 되는 걸까요? 불쌍한 고아 조카를 6년 동안이나 철저히 유린하고 가족들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죄인으로 살게 만든 사람”이라고 폭로했다.

그러자 삼촌은 조카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법원은 조카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1심 판결문에는 “피고인(조카)이 이 사건 범행에 이르게 된 동기에 참작할 바가 없는 것은 아니나,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에 이르기 전에 가족들과 대화나 확인 절차를 거치는 등 다른 해결 수단이나 방법이 있음에도 이런 절차가 없었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인터넷 사이트와 삼촌이 근무하는 도청 홈페이지에 글을 바로 게시했다. 공무원인 삼촌이 이 사건으로 겪었을 사회적 평가절하와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김성돈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명예훼손죄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주장한다. 명예훼손이 사실적시 그 자체를 금지하기 때문에 ‘명예가 훼손될 가능성 사전 차단’을 방법으로 ‘명예 보호를 도모’하는 동시에 사실을 적시하는 행위를 형벌로 금지해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명예훼손죄는 허위의 사실을 적시할 경우에 비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추구하는 목적의 정당성 및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필요성 측면서 볼 때 과잉금지에 해당할 소지가 다분하다”며 “진실한 사실의 적시는 사회적으로 명예를 재조정하는 기능을 해서 사회적 의미 차원에서 불법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저울대 오른
두 가지 가치

이어 “이 같은 차원의 사실적시 금지는 추구되는 목적이 과장된 명예나 허명의 보호이지, 진정한 의미의 명예의 보호가 아니다. 과장된 명예, 허명, 체면, 위신을 보호하기 위해 헌법적으로 국가에 의미 지워진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 보장을 후퇴시키는 태도는 헌법상 과잉금지 원칙에 반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허위 사실을 적시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구성요건의 경우가 아닌, 진실한 사실을 적시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구성요건의 경우에까지 균형성 심사의 저울대에 ‘명예’와 ‘표현의 자유’라는 두 가치를 올려놓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alsw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다단계 IDS홀딩스 고문변호사 기소, 왜?

1조원대 다단계 투자사기 사건을 벌인 IDS홀딩스의 고문변호사가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해 12월28일,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신대경 부장검사)는 현직 변호사 A씨를 사기방조죄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A씨는 IDS홀딩스 김성훈 전 대표의 변호인이자 회사 고문변호사로 일했다.

검찰은 A씨가 2016년 4~8월 불특정 다수의 투자자와 지점장 등을 상대로 김성훈 대표를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고 IDS홀딩스가 정상적으로 운영돼 상당한 수익이 기대된다고 여러 차례 강연해 사기 범행을 방조했다고 보고 있다.

‘제2의 조희팔’로 불린 김 전 대표는 2011년 11월∼2016년 8월 고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속여 피해자 1만여명에게 1조원 넘는 투자금을 가로챈 혐의로 징역 15년이 확정돼 복역 중이다.

김 전 대표는 IDS홀딩스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관에게 뇌물 6390만원을 준 혐의로도 기소돼 1·2심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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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독주가 이어지고 있다. 당원의 명령인 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질주다. 당의 ‘아웃사이더’였던 그가 당을 휘어잡기까지 수많은 당원이 등을 밀어줬다. 비주류에서 주류 ‘인싸’로 자리 잡기 위한 정 대표의 다음 스텝이 주목된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행보가 매섭다. 윤석열정부에서 막힌 과제를 해치우는 동시에 공약이었던 각종 개혁을 빠르게 완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 대표는 같은 당 박찬대 의원보다 덜 알려졌다는 평이 나오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위원장으로서 보여준 ‘사이다’ 면모가 주목받으면서 강성 지지층의 환호를 받았다. 정청래가 걸어온 길 비주류였던 그가 당 대표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21대 국회 때는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수석 최고위원을 지냈고, 22대 국회에선 법사위원장으로서 국민의힘에 호통을 치며 유튜브 단골 주제가 됐다. 당시 정 대표는 국민의힘이 반대하는 쟁점 법안을 밀어붙이고 상대편 의원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다. 그동안 정 대표는 언론 대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튜브 등 SNS를 통해 지지자와 직접 소통해 왔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보다 주목도가 떨어진다는 평이 나오지만 팬덤 정치에 최적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정 대표는 최근에도 자신을 둘러싼 의혹과 청-명 프레임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혔다. 그는 SNS에 ‘언론의 자유와 횡포 그리고 언론의 게으름의 관성’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조국 전 대표의 사면·복권을 놓고 일부 언론에서 ‘정청래 견제론’을 말한다.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근거 없는 주장일뿐더러 사실도 아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바로 반박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어 “정청래는 김어준이 밀고, 박찬대는 이재명 대통령이 밀었다는 식의 가짜 뉴스가 이 논리의 출발”이라며 “어심이 명심을 이겼다는 황당한 주장, 그러니 정청래가 이재명 대통령과 싸울 것이란 가짜 뉴스에 속지 말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통령과 각을 세울 일이 1도 없다. 당정대가 한 몸처럼 움직여 반드시 이재명정부를 성공시킬 생각이 100(이다)”이라고 덧붙였다. 계파 갈등 프레임이 씌워질 조짐이 보이자 이를 사전에 차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 대표의 정치적 뿌리를 따지자면 친노(친 노무현)에 가깝다. 그러나 문재인 전 정부서는 친문(친 문재인),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는 친명(친 이재명)으로 분류되는 등 계파색이 비교적 옅은 편이다. 1989년 미국 대사관저 점거 농성을 주도한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은 등 학생 운동권 출신이지만, 대표 운동권인 민주당 86 그룹과의 친분을 공개적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 대표는 당의 주류보다 비주류에 가깝다는 게 여의도에 떠도는 평이다. 친문? 친명? 오히려 ‘계파 청산파’ “잘못된 586 문화 배운 97도 청산” 전당대회가 한참이던 당시 한 민주당 의원은 “사석에서 만난 정 의원은 아주 뚝심 있는 사람이었다. 박찬대 의원은 특유의 재치로 호감을 얻는 편이라면 정 의원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할 말은 제대로 하는 캐릭터”라며 “그래서 계파를 분류하기 어려운 것 같다. 나만의 길을 가는 것 같으면서도 한번 정한 길은 꺾지 않고 걷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정 대표는 ‘계파 청산’을 외치는 인물이다. 그는 당 대표 후보이던 당시 “국민께서 비판하시는 586의 운동권 문화는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라디오에 출연해서는 “계파는 당을 좀먹는 독약”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정파와 노선은 필요하지만, 계파는 없어져야 한다. 저 스스로 계파에 가입하지 않고, 그런 데서도 저는 안 불러준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586의 질서, 운동권의 수직적 관계가 싫었다. 그런 분들과 몰려 다니는 게 너무 비생산적”이라며 “586의 안 좋은 문화를 따라 배운, 너무 빨리 늙어버린 97 세대들의 그런 것도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원들의 요구를 파악해 발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8·2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는 당선 이후 “이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것은 민주당 주류가 바뀌었단 뜻이고, 민주당에서 정청래가 대표가 됐다는 것은 당의 주인인 당원들이 당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이날 전당대회를 “예전에는 당원들이 국회의원 눈치를 봤지만, 이제는 국회의원들이 당원 눈치를 봐야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민주당의 민주화’가 드디어 그 깃발을 높이 든 8·2 전당대회”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 대표를 탄탄히 받쳐주는 건 여의도 인맥이 아닌 당원이었다. 정 대표는 이들을 대주주 삼아 힘을 키워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당원권에 힘을 쏟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평당원 최고위원’ 선출을 시도하는가 하면 당원 주권 정당 실현을 강조하기 위해 ‘대의원 1인1표제’를 띄우기도 했다. 대의원 1인1표제는 당원들의 권한을 대폭 향상하는 방안이다. 정 대표는 지난 18일 열린 국회 당원주권 정당특위 출범식에서 “10년 넘게 당원주권정당, 1인1표를 주장해 왔지만, 아직까지도 열리지 않았다”며 “헌법에서 얘기하고 있는 평등 선거가 민주당에서도 구현이 될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3대 개혁 풀가동 이어 “대한민국 헌법에는 평등 선거가 명시돼있고, 많은 선거에서 1인1표가 행사되지만 유독 더불어민주당에선 누구는 1표, 누구는 17표를 행사한다”며 “헌법적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명정부가 국민주권시대를 강조하는 만큼 이에 발맞추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은 권리당원의 권리를 보장하고 상징적인 ‘1인1표’ 시대를 반드시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정 대표는 당헌·당규 개정을 비롯한 ▲평당원 선출 준비 지원 ▲연말 당원 콘서트 지원 등을 약속했다. 당원의 힘이 커질 수록 정 대표의 정치적 입지도 넓어진다. 정 대표는 연일 국민의힘 때리기에 집중하며 당원으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민주당의 목표로 3대 개혁 완수를 내걸었다. 이는 비주류였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으로도 읽힌다. 이 대통령이 ‘사이다’ 발언으로 당권까지 올랐다면 정 대표는 각종 특위를 띄우며 거침없는 개혁가의 모습을 굳히겠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강성 지지층의 요구에 따라 검찰개혁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검찰청을 폐지하는 대신 가칭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과 공소청을 신설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다음 달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 대표는 지난달 21일 의원총회에서 이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만찬 회동을 언급하며 “검찰청 폐지, 공소청·중수청 설립을 담은 정부조직법을 9월 내 본회의에서 처리하자고 당과 대통령실이 입장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약속드린대로 추석 귀향길 뉴스에서 ‘검찰청은 폐지됐다’ ‘검찰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는 기쁜 소식을 국민 여러분께 전해드릴 수 있도록 당에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임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추미애 의원 역시 “법사위원장 선출은 검찰과 언론, 사법개혁 과제를 완수하라는 국민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전폭적으로 힘을 실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위원회도 속속들이 들어섰다. 우선 민주당은 ‘국민주권 검찰정상화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정 대표는 출범식 및 1차 회의에 참석해 “지금의 시대적 과제는 내란 종식, 내란 척결, 이정부 성공에 있다”며 “가장 시급히 해야 할 개혁 중 개혁이 검찰개혁”이라며 “개혁도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저항이 거세져서 좌초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시기가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위의 주요 과제로는 ▲수사·기소 완전 분리 ▲국민 주권 실현 및 민생 뒷받침 등을 제시했다. 새로운 구심점 이어 언론개혁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언론 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추석 전까지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언론의 허위·조작 보도에 대해 피해자에게 손해액의 최대 5배 배상을 의무화하는 법적 장치다. 언론뿐만 아니라 ‘유튜버’도 포함하는 안이 논의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중심 사법개혁특별위원회’도 출범했다. 정 대표는 “대법관의 증원과 추천 방식을 변경하는 내용의 사법개혁안을 추석 전까지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구석구석 눈도장을 찍기 위한 지역별 공략에도 나섰다. 지난 21일 호남발전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다들 대한민국 민주화에 대해서 호남이 기여한 바가 지대하다는데, 국가는 ‘호남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답을 이제 할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꼬집었다. 정 대표는 “호남만 발전시키면 되겠느냐”며 영남발전특위도 띄웠다. 이는 내년 6월에 있을 지방선거를 대비해 대구·경북 등의 표밭을 다지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광폭 행보를 보이는 정 대표를 구심점으로 신흥 세력이 탄생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정 대표는 계파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고 거듭 밝혔지만, 권력자의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는 해석이다. 정 대표의 편에 선 동료 의원들에게도 시선이 쏠린다.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를 공식적으로 지지했거나 개혁 선봉에 함께 섰던 의원 등이다. 정 대표가 당권 도전을 선언한 국회 기자회견장에는 장경태·최기상·문정복·임오경·양문석 의원 등이 자리했다. 여의도 이야기를 종합하면, 정 대표는 ‘당원 중심 정당’ 철학에 부합하는 인사로 장 의원을 꼽았다. 현재 장 의원은 평단원 최고위원 선출 절차를 위한 특위위원장을 맡고 있다. 최민희 의원은 정 대표를 공개 지지한 인물이다. 당시 정 대표가 수박 논란에 휩싸였을 당시 최 의원은 “심하게 비난받는 정청래 후보를 지켜보면 짠하다”며 “비난에도 역비난하지 않고 여전히 유쾌·상쾌하게 선거운동하는 정 후보를 격하게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밖에도 한민수·김영환·이성윤 의원은 경선 유세 현장에 함께하며 힘을 실어줬다. 왼쪽으로 붙는 민주당…좁아지는 공간 강성 지지층 등에 업고 개혁가의 길로 개혁가의 길을 걷는 정 대표의 존재감이 커지자 일각에서는 조기 대선을 거치며 ‘중도 보수론’으로 넓혀놨던 민주당의 정치 공간이 다시 좁아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 대표의 강경한 태도가 민주당의 기조가 된다면 야당과의 협치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평이다. 실제 정 대표는 “악수는 사람하고만 한다”며 국민의힘을 척결 대상으로 대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6주기 추모식에서 정 대표는 국민의힘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이하 비대위원장)과 악수는커녕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송 비대위원장 역시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그야말로 ‘국회 빙하기’ 시대가 열렸다. 여당인 민주당은 좌우를 넓게 아우르는 정당이 돼야 앞으로 다가올 선거에서 유리한 구도를 유지할 수 있다. 지금처럼 국민의힘이 보수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왼쪽은 조국혁신당, 진보당 등에 맡겨둔 채 중도 보수를 자처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당원의 힘으로 대표가 된 만큼 그는 개혁을 완수하기까지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민주당 상임고문단도 “집권여당은 당원만 바라보고 정치를 해선 안 된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당 상임고문단 간담회에서 “정당의 주인은 당원이어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면서도 “우리 국민은 당원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도 “내란의 뿌리를 뽑기 위해 전광석화처럼, 폭풍처럼 몰아쳐 처리하겠다는 대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유불급이다. 의욕이 앞서 결과를 내는 게 지리멸렬한 것보다는 훨씬 나으나, 지나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또 다른 민주당으로 민주당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포스트 이재명’ ‘이재명 키즈’가 아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새로운 길을 열어야 당이 계속해서 순환하는 등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어 “민주당의 주류는 강성 지지층이다. 당원이 당을 좌지우지하는데 그들의 숫자가 얼마가 되든 목소리가 커 여론을 만드는 것”이라며 “이 주류의 흐름에 올라탄 사람이 정 대표다. 이 대통령이 대표이던 때와는 다른 모습의 민주당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아직 남은 정 견제 세력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SNS에 올렸다 곧바로 삭제한 게시글이 화제다. 민주당은 지난달 19~20일 양일간 경주를 찾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준비 상황을 점검했는데 정 대표가 마치 천마총 금관을 쓰고 있는 듯한 착시 사진이 문제가 된 것이다. 정 대표가 금관을 직접 착용한 것은 아니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시에 왕 노릇을 한다” “벌써 왕인 것처럼 군다” 등 거친 비판이 쏟아졌다. 현재 해당 사진은 삭제됐지만 8·2 전당대회 때 불거진 박찬대 의원과의 앙금이 아직 남은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온 이유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