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비 채권자가 말하는 '양육비이행원'의 민낯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02.15 08:18:11
  • 호수 13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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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부모 가구는 154만 이행원 직원은 50여명

[일요시사 취재 1팀] 김민주 기자 = 통계청 결과에 따르면, 2018년 국내 한부모 가구 수는 153만9362명으로 매해 늘어나는 추세다. 한부모 가구가 늘어남에 따라 자녀 양육비 미지급 문제가 대두되고 있지만, 지난해 양육비 이행률은 36.1%다. 양육비 미지급을 아동학대로 규정하고 있는 미국의 양육비 이행률 72%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치다. 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양육비 미지급을 아동학대로 규정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원활한 양육비 지급을 목적으로 양육비이행관리원(이하 이행원)이 2015년 개설됐다. 하지만 비양육자 쪽에 양육비를 받아내야 하는 양육자들은 이행원이 탁상공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양육비는 미성년 자녀를 보호·양육하는 데 필요한 비용으로, 미성년 자녀 의식주에 드는 비용과 교육비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2009년 민법과 가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협의이혼 시 양육비에 대한 합의서를 제출하게 됐다. 이로써 이혼한 비 양육자라도 양육의 의무를 다하게 됐다.

여전한 
버티기

하지만 국내의 양육비 이행률은 높지 않다. 양육비 채무자들은 재산은닉, 해외 출국, 위장전입 등의 방법으로 양육비 의무를 피하고 있다. 결국 양육비 채권자들은 자녀 양육비를 받기 위해 채무자에게 소송을 건다.

이때 다수의 채무자가 위장전입을 하고 있어서 실거주지를 확인하려면 직접 발로 뛰어야 하는 현실이다. 양육비 채권자들이 겪는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양육비이행관리원(이하 이행원)은 대상자들에게 ▲소송 관련 상담인 법률 지원 ▲원만한 합의 진행과 민사 집행법상의 강제집행 ▲가사소송법상의 양육비 이행확보 소송 등 양육비 추심을 위한 법적 절차를 진행한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양육비 채무자들에 대해 명단 공개, 출국금지, 운전면허 정지 처분 제도가 시행됐다. 올해 6월부터는 형사처벌도 가능하다. 이 밖에도 면접 교섭을 위한 상담, 양육 지원, 조사정보를 지원 등을 제공한다. 


이 같은 절차들 중 이행원의 조사정보 지원은 소송 및 채권 추심에 필요한 비양육 부모 또는 양육비 채권자의 거주지나 회사, 소득재산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 꼭 필요한 제도다.

더욱이 명단 공개, 출국금지, 운전면허 정지를 위해서는 감치 처분이 필요하고, 감치를 위해서도 채무자의 실거주지 주소가 필요하다.

감치제도는 고의로 양육비 채무를 불이행할 경우 가하는 제재로 경찰서 유치장, 교도소나 구치소에서 머물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양육비 채권자들은 경제적 활동과 양육을 병행하고 있어서 이행원에 소송을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행원의 서비스에도 불구하고 양육비 채권자들이 이행원을 바라보는 시각은 곱지 않다. 받아야 하는 양육비가 5500만원인 한 양육비 채권자 A씨는 이행원을 이용하면서 겪은 상황을 대해 토로했다.

지급 도우미 역할? 매번 탁상공론만
“면접 교섭 전 아이들 보호 선행돼야”

A씨는 2012년에 이혼했고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이행원을 이용했다. 그는 이행원에서 모든 절차를 밟았지만, 이행원은 채무자가 위장전입과 재산은닉을 했기 때문에 ‘힘든 사례’라고 답할 뿐이었다며 답답해했다.

이행원은 A씨 사건을 법률구조공단으로 이관했다. A씨의 사례는 그곳에서도 ‘힘든 사례’일 뿐이었다. 양육비 채무자는 위장전입과 재산은닉으로 이미 법의 테두리 망을 빠져나간 후였다.


이행원은 A씨에게 면접교섭을 제안했다. 아이를 직접 보면 돈을 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A씨의 이혼 사유는 가정폭력이었고, 채권자인 전 남편은 폭력 전과가 있는 사람이었다. A씨는 이혼 전 남편에게 얼굴을 뺀 모든 부위에 구타를 당했고, 목이 꺾여서 혀가 마비됐다. 

이혼 후에는 A씨를 찾아와 행패를 부린 적도 있어 아이와 함께 4개월간 쉼터에서 숨어 지냈다. 이미 아이가 5살 때 면접 교섭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전 남편은 아이가 활발하다는 이유로 아이를 종일 박스에 넣어 놓거나 시장에 뒀다.

그 당시 면접교섭은 1년에 4, 5회로 끝났다. 전 남편이 개인적인 사유로 아이를 기다리게 한 것이다. 이행원은 A씨와 A씨의 자녀가 겪은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A씨는 “이행원은 전 남편에게 아이를 보여주면 양육비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또 상대방이 아이를 보러 오는 것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며 “면접교섭을 진행하면 단발성에서 그치면 안 된다. 전 남편이 아이에 대한 호기심으로 한번 보고 사라지면, 아이가 받는 상실감은 엄청나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은 이런 일을 겪으면 본인 때문에 아빠가 안 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행원에서는 전 남편에게 이런 권고조차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1월에 실시한 ‘양육비 미지급 문제 해결을 위한 심포지움’ 자료에 따르면, 면접교섭을 하고 있는 비양육자로부터 양육비를 제대로 받고 있다고 답변한 비율은 18.5%에 그쳤다. 또 다수의 양육자가 전 배우자의 협박으로 두려움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
소송 맡겨

이행원에서 양육비 소송을 진행했지만, 자녀가 성년이 돼서 이용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B씨가 받지 못한 양육비는 2억원이 넘는다.

그는 2008년 이혼 후 이행원에서 양육비 소송을 진행했지만 위장전입 등의 문제로 진행되지 않았고 사건이 종결됐다.

B씨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거 양육비라고 해서 양육비 납부 의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내 실정은 위장전입‧재산은닉 등의 방법으로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버티면 양육비를 내지 않을 수 있다.

이행원에 ‘법률지원 중단 결정’을 받은 사례도 있다. 미지급된 양육비가 1억3000만원인 C씨의 경우다. C씨는 이혼 전 가정주부였고 둘째가 태어난 지 30개월 때 이혼했기 때문에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이혼 당시 그의 통장에는 20만원밖에 없었다. 양육비를 받았다면 아이는 엄마와 시간을 보냈겠지만, 양육비가 들어오지 않아 C씨는 돈을 벌었고 아이들을 챙길 시간이 없었다. 이혼 후 전 남편은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 남편이 죽은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C씨가 소송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아이들의 성본 변경을 위한 재판 때문이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전 남편이 나타나서 아이들의 성본 변경을 거절했다.

그때부터 C씨의 양육비 소송 재판이 시작됐다. C씨는 2015년 이행원을 통해 양육비 소송을 진행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서 개인소송으로 변경해 진행했다.

그가 진행한 소송은 총 20번이고, 지난해 전 남편은 출국금지 조치를 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 남편의 재혼 상대가 중국인이어서 공소시효가 풀린 뒤 현재 배우자를 따라 중국에 거주하면 양육비 받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지난해 시행된 출국금지는 올해 4월이면 만료된다. C씨는 다시 소송을 진행해야 했지만, 전 남편은 이미 거주불명 상태였다. 

있으나 마나 
미온적 지원

C씨는 지난해 이행원에 연락해 전 남편의 거주지와 회사 이름을 물었지만, 돌아온 답변은 2월에 예산이 풀리니 그때 진행해보자는 것이었다. 답답함을 느낀 C씨는 여성가족부에 연락해 “왜 예산이 부족하냐. 지금 이 시간에도 아이들은 크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A씨도 같은 의견이다. A씨는 이행원이 재정상의 이유로 연말과 연초인 3~4개월간은 운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2017년 양육비 소송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확인하니 내년까지 기다리라고 한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이행원은 국가기관인데 일하는 사람이 터무니 없이 적다. 언제까지 예산과 인력이 없다고만 할 건지 모르겠다. 주민센터가 돈이 없다고 문을 닫지 않는다”며 “법적으로 한 부모가 아니어도 대부분 위장전입이나 재산은닉으로 양육비 소송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다수를 위한 이행원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후 C씨가 받은 것은 양육비이행관리원장의 이름이 적힌 ‘법률지원 중단 결정 통지서(이하 통지서)’였다.

이 통지서에는 “2021년 12월23일자로 법률지원 업무처리지침 제10조 제2항 제1호(개별사건 진행), 제6호(부당한 민원 제기 및 폭언), 제7호(지원 실익 없음), 모니터링 업무처리지침 제10조 제2항 제3조(무리한 요구 등 부당한 대우) 사유로 법률지원 중단이 결정됐다”고 적혀있다.

이행원 권한 확대 필수
양육비 소송 간소화도

C씨는 “이 통지서를 받고 너무 충격받았다. 나는 거주지 확인이나 직장 조회를 왜 못하냐, 예산이 왜 없냐고 이의를 제기한 거다. 이행원은 무조건 기다리라고만 한다. 양육자들이 이런 통지서를 받으면 어떨지 생각해봤나. 양육비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없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양성욱 법무법인 진성 변호사는 “양육비이행법 제18조에는 ‘이행관리원의 장은 양육비 이행 지원을 위해 필요한 경우 양육비 채권자가 가사소송법 및 민사집행법에 따른 필요한 법률 지원을 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며 “혹여 민원인이 무리한 요구를 했다면 그 요구를 제외하고 들어주면 된다. 아마 이행원 내부 규칙이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대외적인 구속력은 없다”고 밝혔다.

이행원 관계자는 “C씨는 2015년부터 소송이 여러 차례 진행됐는데 개인적으로 계속 취소했다. 이런 경우 개인소송과 중복되니 지원하기 어렵다고 이미 안내한 적 있다. 또, 폭언과 무리한 요구를 지속해서 했기 때문에 민원심의회 상정한 결과 2년 법률 지원 중단 결정을 내렸다”고 답했다.

정희경 한국여성변호사회 기획이사는 “양육비이행관리원의 권한을 강화하고, 징수 및 제재 절차를 일원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양육비이행관리원에 채무자 소재 탐지, 재산 및 소득 조회 권한을 부여하고, 운전면허 정지 등 행정적 제재 처분 요청 권한도 실효적으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무엇보다 양육비 미지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육비에 대한 인식을 교정하고, 양육비 지급을 결정하는 환경‧문화적 요소를 개선해야 한다. 현행 이혼법제를 유책주의에서 파탄주의로 변경하고, 부모 교육에 양육비 지급 내용을 보강하는 한편 면접교섭에 대한 모칭과 양육비이행관리원의 적극적 관리 및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산 없고
인원 부족

이영 양육비해결연합 대표는 “이행원의 예산 부족으로 소송이 계속 멈춘다. 인력과 예산을 대폭적으로 늘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라면, 현행 양육비 소송의 절차를 간소화시키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고 전했다.


<alsw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양육비 나 몰라’ 김동성 버티다…

서울가정법원이 쇼트트랙 전 국가대표 김동성씨에게 ‘감치 30일’을 지난 9일 선고했다.

두 자녀의 양육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가정법원은 2019년 1월 이혼 이후 지난해 2월까지 김씨가 미지급한 양육비 총 3000만원에 대해 “15개월 동안 매월 200만원씩 나눠서 양육자에게 지급하라”고 지난해 4월 판시한 바 있다.

하지만 김씨는 법원의 양육비 이행명령을 이달까지 단 한 차례도 따르지 않았다.

김씨는 지난 9일 열린 첫 감치재판에 출석하지 않아 법정 구속은 면했다.

김씨의 전 부인 이소미씨(가명, 41세)를 법률 대리하는 남성욱 법무법인 진성 변호사는 “김씨처럼 양육비 채무자가 재판에 출석하지 않으면 보통 한 번 더 재판 기일을 잡는 편인데, 이번 재판에선 바로 감치 결정이 내려졌다”며 “양육비 이행강화 법안이 실효성 있는 구제 수단 역할을 할 수 있게끔 재판부가 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남 변호사는 감치 30일이 결정된 부분에 대해 “양육비 채무자가 법원의 이행 명령을 단 한 차례도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라고 재판부가 본 듯하다”고 덧붙였다.

전 부인 이씨는 지난 9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첫 번째 재판 날 법원이 감치 결정을 내릴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였다”며 “최근 청소년기에 들어간 아이들 양육비 때문에 힘들었는데, 법원의 결정에 따라 전 남편이 양육비를 꼭 지급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감치 결정에 따라 법원은 감치 집행장, 감치 결정등본 등을 김씨가 거주하는 지역 관할 경찰서에 보낼 예정이다.

관할 경찰서는 집행장의 유효기간인 6개월 이내에 김씨를 구인해야 한다.

이씨가 전남편 김씨의 감치 결정을 이끌어내기까지의 여정은 매우 어려웠다.

김씨는 이혼 조정조서에 따라 2019년 1월부터 아이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아이 당 양육비를 월 150만원, 매달 300만원을 이씨에게 지급해야 한다. 

하지만 김씨는 이달까지 양육비를 전혀 지급하지 않았다.

지난달 기준, 김씨가 지급하지 않은 양육비는 약 5880만원에 이른다.

‘양육비 이행확보 및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작년 7월부터 시행됨에 따라,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에 대한 형사처벌·신상 공개·출국금지·운전면허 정지가 가능하다. 

양육비 미지급자는 가정법원의 감치명령 결정에도 정당한 사유 없이 1년 이내에 양육비를 주지 않으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의 형사처벌을 받는다.

여성가족부는 법원의 감치명령에도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으면 미지급자의 신상을 여성가족부 온라인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남 변호사는 “법원의 감치 결정에도 김씨가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다면, 운전면허 정지, 출국금지 등의 강력한 압박 조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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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