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공명지조’ 2019 정치판

단 한 번도…협치는 없었다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올해의 사자성어로 ‘공명지조(共命之鳥)’가 선정됐다. 상대방을 죽이면 결국 함께 죽는다는 뜻으로 극한 대립 끝에는 모두가 공멸하게 된다는 의미다. 2019년은 어떤 해보다 계층·이념·세대의 대립이 선명했던 해다. 많은 이들에게 생채기를 남겼던 한 해의 사건들을 <일요시사>가 톺아봤다.
 

<교수신문>은 한 해의 사회상을 담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공명지조(共命之鳥)’를 선정했다. 정치권이 양극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도 모자라 국민들까지 분열돼버린 우리나라의 현주소를 지적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당정치의 탄생은 유권자들의 분열에 기반한다. 다만 분열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이해관계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통합과 협치가 필요하다. 정치인이 갈등을 봉합하지 못하면 민심은 요동치고 다름에 대한 혐오만 확산될 뿐이다.

조국 정국
세대 갈등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지났다. 촛불정국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후 문정부가 출범하면서 ‘촛불 세력’으로 정치권은 채워졌다.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 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좌파정권’ ‘광주일고 정권’과 같은 용어로 이념몰이, 지역감정 등을 조장하는 정치가 일상이 됐다.

2019년에 국민들이 분열된 발화지는 크게 ▲패스트트랙 지정 법안 ▲지소미아 파기 ▲조국 정국으로 나뉜다. 최근에는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검찰 개혁안과 선거제 개정안을 둘러싸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정치권과 민심이 갈라졌다. 또 공정과 평등을 내세우는 진보세력의 대표주자였던 조국 전 법무부장관 자녀의 입시비리 의혹은 ‘586세대’(5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와 2030청년들의 세대간 갈등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은 최근 극우 세력인 태극기 부대를 등에 업고 강경한 대여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6일 여의도 국회 본청 앞은 극우 세력인 우리공화당 지지자들의 침탈로 아비규환이 됐다. 당초 한국당은 이날 국회 본청 로텐더홀서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선거법, 2대 악법 날치기 저지’ 규탄대회를 열 계획이었다.

태극기부대는 국회 앞에서 북과 꽹과리를 치며 “좌파 독재 막아내자”며 연일 구호를 외쳐댔다. 국회 사무처는 오전 10시쯤부터 국회 출입구를 봉쇄했지만 집회 참가자들을 경내로 들어오게 해달라는 한국당의 항의로 인해 이들의 경내 진입을 허용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집회 참가자들이 국회 앞마당에 쏟아지면서 본청 계단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이들은 “날치기 공수처법 사법장악 저지하자” “날치기 선거법 좌파 의회 막아내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온갖 불법행위를 자행했다.

극우세력 등에 업고 대립 부추기는 꼴
지소미아 파기, 친·반일 프레임 전쟁

정의당은 규탄대회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선거제 개정안의 통과를 촉구하며 농성 중이던 정의당 당직자들은 집회 참가자들에 둘러싸여 폭행을 당하거나 “빨갱이 X” 과 같은 인격 모독적인 발언들을 들어야 했다.

정의당 박예휘 부대표는 “무방비 상태였던 40분 동안 당원들과 당직자들이 무차별적인 폭언과 폭력에 노출됐다”며 “정의당 배너를 무너트리고 물건을 탈취하고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고 던지고 상스러운 욕설을 서슴지 않았다. 경찰들이 에워싼 이후에도 장장 8시간 동안 경찰분들 다리 사이, 얼굴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들을 계속 퍼부었다”고 말했다.
 

국회 내에 있던 의원들이 다치는 사고도 발생했다. 집회 참가자들이 욕을 하고 밀치는 과정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설훈 의원의 안경이 날아갔다. 민주당 홍영표 의원도 시위대가 폭언을 퍼붓는 가운데 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이동해야 했다. 정의당 이정미 의원은 SNS를 통해 ‘본청서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여러 명의 사람들이 제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며 달려왔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현재 민주당과 정의당은 한국당 지도부와 폭력을 행사한 집회 지지자들에 대해 고발조치한 상태다. 민주당 홍익표 의원은 “국회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다”며 "폭력이 자유로 둔갑하고, 폭력배들의 집회가 정당행사로 포장되고, 집단폭력이 당원집회로 용인되는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불법 폭력집회를 주최·선동하고, 집회 참가자의 폭력을 수수방관한 황교안 대표, 폭력에 동원된 무리들이 국회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의원들에게 지시한 심재철 원내대표, 극우 보수단체들을 동원해 폭력사태를 유도, 방조한 우리공화당 조원진 대표 등을 공모·공동정범 혐의 등으로 영등포경찰서에 고발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뜯어 말려도
모자랄 판에…

보수매체로 불리는 언론사마저 이들에게 등을 돌렸다. <조선일보>는 ‘시위대 수천명 난입, 국회 온종일 아수라장’이란 제목으로, <중앙일보>는 ‘문희상 잡으러 가자, 한국당 지지자에 국회 정문 뚫렸다’는 극우 지지자들을 비판했다.

현행법상 국회에서는 집회 및 시위를 할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국회의원이 참여하는 정당 행사나 정당 주최 행사는 의정활동 보장 차원서 국회 사무처가 관행적으로 묵인해왔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국회 내 벌어진 사상 초유의 폭력집회라는 역사적 오명이 남겼다.

한일갈등도 국민을 분열시키는 매개가 됐다. 문정부는 지난 8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 파기를 전격 발표했다. 아베정부가 지난해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성을 띈 한국의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 제외 방침을 발표한 후 문정부의 초강경 반격이었다.

지소미아 파기 발표 전후로 정치권에선 파기 찬반을 두고 친일·반일 프레임 전쟁이 계속됐다.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지소미아 파기 반대를 주장했다. 여당과 정부를 지지하는 국민들은 집회를 열어 ‘친일매국정당 한국당 해체하라’는 피켓을 들고 집회를 열었다.
 

▲ 서울 광화문광장서 조국 전 장관 퇴진 요구를 주장하며 집회 갖는 보수단체 회원들

정치권서도 지엽적인 공방에 매몰되는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으로 민주당 이해찬 대표의 ‘사케 논란’이 있다. 보수 야당은 이 대표가 일식당서 일본 술을 마셨다며 공격에 나섰고, 민주당은 사케가 아닌 국내산 청주인 '백화수복'이라고 반박했다.

당시 한국당 나경원 전 원내대표는 “우리 당에 감히 매국이라고 했고, 국민을 친일과 반일로 나누며 반일 감정을 부추겼던 이 대표가 일식당으로 달려가 사케를 마셨다고 한다”며 “국민은 가급적 일본산 맥주조차 찾지 않고 있는 이 와중에 헛웃음이 나온다”고 했다.

정치권 내부서조차 지금 한가롭게 ‘사케냐 청주냐’를 놓고 싸울 때가 아니라는 비판이 나왔다.

대립·분열…
언제까지?

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의 보고서가 밝혀지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일본 수출규제로 불거진 한일 갈등이 내년 총선서 민주당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민주연구원은 민주국익이 달린 사안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여론의 몰매를 피하지 못했다.


‘노재팬 운동’(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도 크게 일었다. 친일과 매국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일본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선택권을 부정해선 안 된다는 불매운동 반대의 목소리도 계속 제기됐다. 노재팬 운동이 계속됨에 따라 결국 애꿎은 국내 기업과 소상공인들이 피해를 보는 결과가 나타났다. 최근 경기도시장상권진흥원은 제1호 사업으로 노재팬 간접 피해 소상공인 지원에 나선 상태다.

올해 민심이 가장 크게 갈렸던 발화점은 단연 ‘조국 정국’이었다. 조 전 장관의 후보자 지명부터 사퇴까지 66일간 정치권은 ‘조국 공방’으로 완전 마비된 상태였다.

지난 8월 대표적인 친문인사인 조 전 장관은 검찰 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하지만 조 전 장관 가족의 사모펀드 투자 및 자녀 입시비리 의혹이 계속해 제기되면서 검찰은 그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를 이어갔다. 검찰과 정부여당의 대립이 날로 극심해지면서 국민들도 서초동과 광화문 둘로 갈려졌다. 서초동에서는 ‘내가 조국이다’ ‘윤석열 퇴진’ ‘검찰 개혁’을, 광화문에서는 ‘문재인 퇴진’과 ‘조국 구속’을 외쳤다.

조 장관은 “되돌릴 수 없는 검찰 개혁을 완수하겠다”며 정면 돌파 의지를 밝혔지만 법무부장관 취임 35일 만에 낙마했다. 조국 정국은 여당과 문정부의 지지도 하락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각종 비위 의혹으로 인해 조 전 장관의 임명을 반대하는 응답이 절반을 넘는 여론 결과가 계속해 나타났지만 여당과 문정부는 이에 대응하지 않았다.

“같이 죽자” 공멸로 가나
이분법에 매몰된 여의도

한국당은 이 기회를 틈타 두 달간 광화문서 장외집회를 이어가며 세를 불렸다. 특히 조 전 장관 자녀의 입시비리 의혹은 청년층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한국당은 ‘공정’을 앞세워 외연 확대에 힘을 쏟았다. 동시에 민주당은 ‘서초동 집회’를 발판 삼아 검찰 개혁을 전면에 앞세워 조국 정국 돌파에 나섰다.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보수와 진보 양측으로 쪼개지면서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지지층 결집에 몰두해 찬반 대립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계속됐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조 전 장관의 자진 사퇴까지 이를 이용하거나 묵인했다. 결국 정부여당과 검찰 및 야당의 대립구도가 심화되면서 민심이 사분오열돼고 국론이 갈래갈래 찢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됐다.
 

▲ 패스트트랙으로 대치 중인 여야 ⓒ사진공동취재단

특히 조국 정국은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세대갈등’을 끌어올렸다. 조국 정국서 제기된 세대 담론은 586 세대로 지칭된 특정 세대에 집중됐다. 조 전 장관은 진보진영의 대표주자다. 도덕적 구설과 논란에 휩싸인 그를 주도적으로 옹호한 것도 청년층이 아닌 대부분 같은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2016년의 촛불 집회 때와 달리 서초동 집회에선 청년보다 중장년층이 압도적으로 눈에 띈 점이 이를 방증한다.

학생운동을 직간접으로 경험하며 민주화운동을 했던 586세대는 조 전 장관에 대한 검찰 수사와 언론의 무차별적 공격을 민주화 성과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 2030세대가 조국 정국서 실감한 것은 불평등과 계급적 박탈감이었다. 586세대와 청년층의 세대별 감수성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해결되지 않은 간극이 드러난 셈이다.

제도적 민주화가 정립된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 이들로선 ‘개혁’이라는 추상적 의제보다 본인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국민 바라는
통합 정치는?

올해의 사자성어로 공명지조를 추천한 영남대 철학과 최재목 교수는 “한국의 현재 상황이 공명조와 비슷한 것 같다. 모두가 상대방을 이기고 자기만 살려고 하지만, 어느 한쪽이 사라지면 함께 죽게 되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우리 사회는 대단히 심각한 이념의 분열증세를 겪고 있다. 양극단의 진영을 토대로 다들 이분법적 원리주의자, 맹목적 이념 기계가 돼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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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빅텐트 타령 국민의힘, 왜?

또 빅텐트 타령 국민의힘, 왜?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이 당심 반영 비율을 늘린 지방선거 경선 규칙을 발표했다. 이어 장동혁 대표를 필두로 지방선거 전략으로 ‘반명 빅텐트론’을 지난 대선에 이어 또 거론했다. 국민의힘이 6년째 내리 실패한 전략을 또 끌고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의힘이 지난달 25일 지방선거 경선 규칙을 발표했다. 국민의힘 지방선거 총괄기획단 대변인을 맡은 조지연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진행된 기획단 회의 후 “내년 지방선거 경선에서 당원투표 비중을 기존 50%에서 70%로 늘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민심보다 당심으로? 국민의힘 지방선거 공천은 당원투표 70%와 국민 여론조사 결과 30%가 혼합돼 결정된다. 만 44세 이하 청년은 가점을 부여받고, 여성 신인은 만 45세 이상이어도 가산점이 부여된다. 광역의원 비례대표 후보자는 청년 인재 오디션을 거쳐 선출해 최우선 순위로 당선권에 배치할 예정이다. 지난 2022년 지방선거 당시 국민의힘 대표였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시행했던 공직 후보자 기초 자격 평가는 기초자치단체장·기초의원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국민의힘 지방선거 총괄기획단장은 5선 나경원 의원이 맡고 있다. 나 의원은 서울시장 출마 후보군 중 1명으로 거론된다. 현 시점에선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일각에선 “나 의원이 사심 때문에 경선 규칙을 정한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대중적 인기는 높지만, 당내 기반은 약하다”는 평가로부터 비롯되는 의심이다. 새로 정한 경선 규칙에 대해선 당내에서도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김용태 의원은 지난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내년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실질적인 수권 전략을 실현하려면, 공직선거 후보자 선출 규칙은 국민경선 100% 제도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도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비판했다. 윤 의원은 “민심이 곧 천심이고, 민심보다 앞서는 당심은 없다”며 “민의를 줄이고 당원 비율을 높이는 것은 민심과 거꾸로 가는 길이고, 폐쇄적 정당으로 비칠 수 있는 위험한 처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최근 사법부 압박 논란과 대장동 항소 포기 문제까지 있었는데도 우리 당 지지율은 떨어지고 여당 지지율이 오르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며 “여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성찰과 혁신 없이 표류하는 야당에 대한 국민적 실망이 더 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갤럽이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정당 지지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지지율은 43%였고, 국민의힘의 지지율은 24%였다. 지난 7월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만 18세 이상 100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전화 면접 여론조사 당시 국민의힘 지지율이 19%를 기록했던 것에 비하면 높지만, 두드러진다고 보긴 어렵다. 내부 비판 이어지는데 당심 비중↑ 비상계엄 사과 두고도 ‘옥신각신’ “국민의힘의 지지율이 당분간 크게 오르긴 어렵다”는 일각의 예측도 있다. 다음 달 3일은 비상계엄 1주년이라서 윤석열 전 대통령의 재임 중 실정과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불참 ▲윤 전 대통령 체포 저지 시도 ▲심야 대선후보 교체 시도 등 지난 1년 동안 국민의힘이 여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행보들이 다시 주목받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국민의힘 일부 소장파 의원들은 비상계엄 사과 등을 통한 윤 전 대통령과의 확실한 절연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의힘 박수민 의원은 지난 24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좀 더 명확한 메시지를 낼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당내에서도 나온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역사와 국민 앞에 누군가 사과해야 할 상황이고, 국민의힘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예측할 수 없었던 돌발적인 계엄이 있었고, 탄핵에 이어 정권을 잃은 후 국정의 주도권을 넘겨줬다”고 강조했다. 반면 같은 당 김재원 최고의원은 같은 달 26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일회성 사과로 과거의 잘못을 끊어내고 새로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사과를 자꾸 하는 것은 오히려 현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며 “사과하는 것보단 앞으로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는 게 더 낫다”고 역설했다. 장 대표도 부정적인 의견을 밝히고 있다. 그는 같은 달 25일,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후 “사과 메시지를 내는 것은 지금 말씀드릴 단계는 아닌 것 같다”며 “국민의힘이 지금 싸워야 할 대상은 무도한 이재명정권과 의회 폭거를 이어가는 민주당”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구미역 광장에서 진행된 민생 회복·법치 수호 경북 국민대회에 참석해 “저들이 똘똘 뭉쳐 우리를 공격하고 손가락질할 때, 우리가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비판하는 게 부끄럽다”고 목소리 높였다. 그러면서 “대한민국과 자녀 세대를 위해 소리치는 우리가 아스팔트 세력이라고 손가락질당하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나라가 쓰러져가는데도 한마디도 못하는 게 부끄러운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당 발언은 “사과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풀이된다. 돌발적인 계엄이다? 이재명 대통령·민주당에 대한 투쟁을 강조하는 장 대표의 주장은 빅텐트론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나 의원도 지난 1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대통령과 민주당을 비판하면서 “국민의힘은 네 탓 공방을 벌이면서 분열에 빠져 있다”며 “정당의 뿌리를 흔드는 내부는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하나로 뭉쳐 민주당의 독재 완성 계략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힘에선 각종 선거와 정국에 대응할 때마다 빅텐트론이 거론됐다. 시작은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재임했던 지난 2019년이다. 이듬해엔 “각 정당·정파가 참여하는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모든 자유민주 세력과 손을 맞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 전 대표는 “통합 없이는 절대 이길 수 없단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며 “이 나라를 망치려는 사람들은 통합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황 전 대표가 주장했던 빅텐트론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란 헌법 가치를 공유한다면, 태극기 세력부터 중도 보수 인사까지 아우른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을 토대로 자유한국당은 미래통합당으로 바뀌었다. 황 전 대표는 제21대 총선 패배 후 물러났다. 이 대표는 빅텐트론에 일관적으로 반대하면서 세대 포위론을 토대로 지난 2022년 대선을 지휘했다. 지난 6월 대선에 출마했던 이 대표는 국민의힘 등 보수 각계로부터 후보 단일화 요구를 받았다. 이 대표는 당시에도 국민의힘 등에서 주장했던 ‘반명 빅텐트론’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대선을 완주했다. 일각에선 국민의힘의 빅텐트론을 놓고 “혁신 요구가 나올 때마다 제기되는 주장”이라고 비판한다. 빅텐트론의 핵심은 통합이다. 통합은 정치권에서 반대 계파·의견을 억압하는 수사로 활용되는 예가 잦다. 빅텐트의 핵심은 조정 능력이다. 여기엔 다양한 계파·의견을 조율해 갈등을 최소화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장 대표는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체제 전쟁 깃발 아래 모일 수 있는 모든 우파가 함께 모여서 이재명정권이 사회주의 독재체제로 가려는 걸 막기 위해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주장하는 ‘체제 전쟁’의 근거는 ▲검찰의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 ▲민주당의 배임죄 폐지·대법관 증원 시도 등이다. 장 대표는 공식적으로 국민의힘과 관계없는 황 전 대표가 지난 12일 내란 선동 혐의를 받아 내란 특검에 의해 체포되자 “우리가 황교안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어지는 재탕 삼탕 이어 “국민의힘만으로 이재명정부·민주당과 싸우긴 어렵다”며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주도하는 자유통일당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주도하는 자유민주당 ▲새누리당 조원진 전 의원이 주도하는 우리공화당 ▲황 전 대표가 주도하는 자유와혁신 등을 연대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들은 모두 부정선거론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에 반해 개혁신당과 이 대표는 부정선거론을 강하게 비판한다. 장 대표가 주장하는 빅텐트론은 김문수 전 대선후보 등이 주장했던 빅텐트론과 큰 차이가 없다. 당시 김 전 후보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이기기 위해선 어떤 경우든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덕수 전 총리 ▲황 전 대표 ▲이낙연 전 총리 ▲이 대표 등을 통합 대상으로 지명했다. 권성동 당시 원내대표는 김 전 후보·한 전 총리의 단일화를 지지하면서, 당시 당내 주류와 불화했던 국민의힘 김상욱 당시 의원(현 민주당 의원)에게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장 대표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에게 당원 게시판 의혹 관련 압박을 가한 것과 비슷하다. 당시 권 전 원내대표는 “당원 대부분은 민주당 이 후보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반명 빅텐트가 필요하단 의견을 갖고 있다”며 “지도부는 당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는 부정선거론을 주장하는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연대를 주장하면서, 개혁신당과의 연대설도 공개적으로 부정하진 않는다. 일각에선 “오 시장이 장 대표·이 대표의 가교 역할을 한다”고 관측하고 있다. 오 시장은 지난 9월 “개혁신당과의 연대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 이후 꾸준히 개혁신당과의 연대를 주장하고 있다. 이후 정치권 일각에선 “오 시장이 서울시장으로 다시 출마하고, 이 대표가 경기도지사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하면 수도권에서 보수 진영이 선전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다. <미디어토마토>가 지난달 28일부터 이틀 동안 서울특별시 거주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무선·ARS 방식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오 시장은 보수 진영에서 민심 27.5%·당심 50.3%의 지지를 얻어 서울시장 후보 중 가장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민주당이 서울시장 후보를 선출한 후 ‘여당 프리미엄’을 앞세워 오 시장에 대한 공세를 이어간다면, 재선을 장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국민의힘이 중도층의 민심을 끝내 얻지 못하면, 오 시장으로선 힘겨운 선거가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체제 전쟁” 명분으로 사과 거부 홍 “국힘은 보수 참칭 사이비 레밍” 당내에서도 나 의원 등 막강한 경쟁자가 있어 본선행을 확실하게 장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지난달 23일 “국민의힘 내부에서 변화·쇄신 목소리가 전혀 안 나온다”며 “연대를 함께할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국민의힘은 지난 대선에 이어 1990년대식 ‘뭉치면 이긴다’ 구호만 내세운다”며 “그 전략으로 패배한 사람은 황 전 대표였는데, 같은 선택을 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길 기대하는 건 이해가 안 간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내부에도 연대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국민의힘 지도부에서 강경 보수의 주장을 가장 강하게 내세우는 김민수 최고위원은 같은 달 25일, 채널A 유튜브 채널 ‘정치시그널’에 출연해서 “이 대표는 당내 많은 분쟁을 가져온 사람이라서 화합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며 “개혁신당과의 연대는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김 최고위원의 주장은 오 시장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해석되고 있다. 김 최고위원은 “개혁신당은 보수 정당인지, 진보 정당인지 모르겠고, 그 사이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저는 최고위원이 되기 전부터 우측으로의 연대를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대선은 기동전·총력전 성격이 강한 반면, 지방선거는 진지전 성격이 강하다. 선거의 성격이 다르지만, 국민의힘에선 똑같이 ‘반명 빅텐트’라는 구호를 거론하고 있다. 역사엔 위기 상황에서 변화를 거부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맞이한 사례가 다수 기록돼있다.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이 그 집단을 주도할 때, 이 사례는 더욱 빈번하게 재현된다. 중국 청나라에선 수구파를 이끌던 서태후가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하던 광서제에게 반대해 정변을 일으켜 성공한 후 광서제를 유폐했다. 중국 정부가 지난 2008년 광서제의 능을 공식 발굴 조사한 결과, 광서제는 급성 비소 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어 3세 나이로 즉위한 청나라 황제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의 주인공인 선통제다. 선통제는 영화 제목 그대로 마지막 황제였다. 광서제의 개혁 시도는 청나라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취사 선택해 그 정보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불리한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성향을 확증편향이라고 한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지역구 관리에만 능하고, 기득권·이익 추구에만 관심을 두는 의원들이 당을 주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언더 찐윤’이란 집단이 거론된다. 확증편향 소탐대실 일각에선 국민의힘이 변화·혁신에 거부감을 느끼면서 같은 선택을 반복하는 핵심 이유로 언더 찐윤을 거론한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지난 6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은 이념도 없는, 보수를 참칭한 사이비 레밍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여러 번 선거에서 패배한 전략임에도 확증편향·소탐대실을 근거로 같은 선택을 고집한다면, 무리 지어 절벽에서 떨어지는 레밍과 비교되는 수모를 또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의힘에선 또 빅텐트론이 반복되고 있다. 빅텐트는 국민의힘 주변을 배회하는 유령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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