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떠나 월북한 사람들

그들은 왜 북으로 갔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최근 남북관계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평화모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반도는 분단국가. 월북과 탈북이라는 단어에 사회가 술렁이는 것은 여전하다. 지난 6일 한 인사가 월북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일요시사>가 월북 인사들을 조명해봤다.
 

남한판 황장엽으로 불렸던 최덕신 전 외무장관의 차남 최인국씨가 월북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북한 선전매체 <우리 민족끼리>는 지난 7일 류미영 전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의 아들 최인국 선생이 공화국에 영주하기 위해 6일 평양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최덕신과 류미영은 부부 관계로 지난 1986년 월북했다.

부모 따라?
갑자기 왜?

최씨는 평양국제비행장서 발표한 도착 소감을 통해 민족의 정통성이 살아 있는 진정한 조국, 공화국의 품에 안기게 된 지금 저의 심정을 무슨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전했다.

이어 가문이 대대로 안겨 사는 품, 고마운 조국을 따르는 길이 곧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언을 지켜드리는 길이고 그것이 자식으로서의 마땅한 도리기에 늦게나마 공화국에 영주할 결심을 내리게 됐다고 밝혔다.


최씨의 부친 최덕신은 박정희정권서 외무장관과 서독 주재 대사로 활동했으나 박 전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류미영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한 뒤 월북했다. 최덕신은 북한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천도교청우당 위원장 등으로 활동했고, 류미영도 남편 사망 후 천도교청우당 위원장직을 이어받았다.

류미영이 사망한 후 천도교청우당 위원장직은 비어 있는 상태다.

최씨는 2001년 이후 가족 상봉과 성묘 등의 목적으로 총 12회에 걸쳐 북한을 방문했다. 이전 방북 때는 정부 승인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방북 신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부 관계자는 최씨의 방북 경과, 가족 동행 여부 등 구체적인 경위에 대해 “현재 관계기관서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최씨는 천도교 교인이다. 천도교 최고지도자인 송범두 교령은 지난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최씨는 교단서 큰 직책을 맡지도 않았고 열심히 교회 활동을 하지 않은 교인이었지만 대한민국 법을 어겼다는 점에서는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최씨의 아버지나 그의 처가를 보면 북한에 갈 수 있는 바탕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최씨 “북한서 살겠다”
부모님도 1986년 넘어가

기자간담회에 동석한 임형진 천도교 종학대학원 원장은 최인국 선생은 천도교 산하기관인 동학민족통일회 대외협력위원장을 맡으며 누구보다 북쪽과 많이 접촉했다”며 우리 추측으로는 (청우당) 위원장을 맡을 것이다. (북한이) 위원장 자리를 주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고 추측했다.

임 원장은 북한에선 대를 이어 자리를 맡는데 청우당 위원장 자리가 최씨 집안 자리라며 류미영씨가 사망한 이후로 위원장 자리는 공석으로 뒀다고 그 근거를 들었다.
 

▲ 최덕신 류미영 부부 ⓒSBS

통일부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월북자에 대한 통계는 따로 없다. 지난 8일 이상민 통일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서 최씨와 같은 월북자 통계를 파악하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 대변인은 현실적으로 정부가 개별 국민의 소재지를 다 파악해서 일일이 확인한다거나 그러지는 않고 있다고 전햇다.

이어 헌법상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는 우리나라의 체제 특성에 따라 국민들의 행적을 추적해서 월북 여부를 확인한다든지, 통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실제로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작년 같은 경우에는 북측서 두 차례에 걸쳐 불법 입북한 우리 국민 2명을 송환한 적은 있다인도주의 차원서 돌려보낸다는 취지의 언급은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이런 상황 때문에 월북 인사의 면면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최근 독립유공자 서훈 문제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약산 김원봉 선생이 대표적인 월북 인사로 꼽힌다. 영화 <암살>서 배우 조승우가 김원봉 역할을 맡아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1898년 경남 밀양서 태어난 김원봉은 19193·1운동이 시작될 무렵 만주로 넘어가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했고, 이후 의열단을 만들어 단장이 됐다. 당시 의열단은 친일파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밀양경찰서 투탄사건, 조선총독부 투탄사건 등 굵직한 거사가 의열단의 작품이었다.

통계 없어
추적 안 해

김원봉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사실은 명백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분단 이후의 월북 행적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는 1945년 귀국 이후 여운형 등과 좌우 합작을 위해 힘쓰다 1948년 북한으로 넘어간다.

김원봉의 월북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친일경찰이자 악질 고문자로 알려진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모멸감을 느껴 북으로 갔다는 말도 있다.

1948년 남북협상 당시 월북한 김원봉은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됐고, 9월에는 북한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6·25전쟁 당시에는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로 활동했다. 19525월에는 국가검열상서 노동상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6·25전쟁에서 공훈을 세웠다는 이유로 북한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에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한 정부서 고위직을 지냈으나 1958년 김일성의 옌안파 제거 때 숙청됐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돌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김원봉에 대한 논란은 지난달 6일 문재인 대통령의 추념사 때 불거졌다. 문 대통령은 추념사를 낭독하면서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며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고 언급했다.

이후 김원봉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주는 것이 맞느냐를 두고 정치권서 논란이 불거졌다.
 

▲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포상심사 기준에 따르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 및 적극 동조한 것으로 판단되거나 정부 수립 이후 반국가 활동을 한 경우 포상서 제외하고 있다. 청와대는 이 조항을 근거로 김원봉 선생은 서훈, 훈격 여부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잘 알려져 있는 박태원 선생도 한국전쟁 중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경위와 동기는 확실하지 않다. 프랑스 칸 영화제서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탄 봉준호 감독이 박태원의 외손자다.

190912월 서울서 태어난 박태원은 14세 보통학교 시절 소설 <입학>으로 주목을 받았다. 1933년에는 이태준, 김기림, 김유정 등과 함께 ‘9인회로 활동했다. 이때 쓴 작품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청춘송> <천변풍경> 등이다.

잊힌 작가들
다시 부활해

월북 이후에는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 3권 중 1권을 출판하는 등 주로 계급교양을 위주로 한 작품 활동에 주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태원은 19867월 세상을 떠났다. 남한의 가족들은 1964년 사망 신고를 냈지만 실제 삶은 22년 뒤에 끝난 것이다. 1988년 이후에야 그의 소설들이 복원됐다.


박태원과 함께 활동했던 상허 이태준 선생도 대표적인 월북 작가로 꼽힌다. 1904년 강원도 철원서 태어난 이태준은 박태원과 함께 9인회로 활동했다. 1947년 북한으로 넘어간 그는 1950년대 중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태준은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라고 불릴만큼 탁월한 문학적 성과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1930년대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태준은 월북 이력 때문에 남한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작가였다.

그러다 2000년대 초 상허학회가 결성되면서 그의 문학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해졌고, 2004년에는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가 열렸다. 올해 1월에는 이태준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는 평설이 발간되기도 했다.

영화인들 중에서도 해방 이후 북한으로 넘어간 인사들이 있다. 월북 영화인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은 문예봉 선생이다. 문예봉은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다. <춘향전> <인생항로> 등에서 주연을 맡아 한국적 미모와 연기력으로 해방 직전까지 ‘3000만의 연인이라는 예명으로 불렸다.

문예봉은 해방 후 극작가인 남편 임선규와 좌익연극계에 가담했다가 1948년 월북했다.
 

▲ 김원봉

월북 이후 문예봉은 남한에선 잊혔지만 북한에선 그를 체제선전에 적극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실제 문예봉은 1949년부터 북한의 첫 극영화 <내고향><빨치산 처녀> <금강산 처녀> 등 수십편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1952년 그는 북한 최초로 공훈배우가 됐다. 연극의 김선초, 무용의 최승희와 함께 북한 공연예술을 이끄는 트로이카로 이름을 날렸다. 문예봉 외에도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에 출연했던 주인규, 남궁운이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갔다.

해방 후 작가·영화인들 월북
해금 이후 남한서 조명받아

1949년 강태무, 표무원 등은 대대 병력의 부하를 데리고 월북했다. 당시 표무원은 소령 계급으로 강원도 지역 모 사단 예하 대대장으로 복무하다 소령 강태무 등과 함께 600명의 국군 장병을 이끌고 북한으로 갔다.

표무원은 월북 후 북한군 연대장과 재북의거자 정치학교 소장,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현역 중장(남한의 소장 계급에 해당)으로 6.25전쟁 역사관 격인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로 활동해왔다. 그는 2006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북풍 논란을 불렀던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도 대표적인 월북 인사로 꼽힌다. 1929년생인 오씨는 1989년부터 1994년까지 24대 천도교 교령을 지냈다. 오씨는 19952월 이미 월북한 류미영 천도교 중앙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북한에 있는 본처와 딸을 만나려고 했지만 방북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19976월에도 방북 허가를 받으려 했지만 무산됐다.
 

▲ 영화 암살 포스터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발기인으로 정치권에 몸담았던 오씨는 19977월 민주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으로 위촉됐지만 한 달 후 돌연 월북했다. 당시 부인에게 바람이나 쐬고 오겠다. 동해안인데 며칠 더 있다가 갈 테니 그렇게 알라고 말한 뒤다. 그는 19978월 김포공항서 미국 LA로 나가 북측의 안내를 받아 중국 베이징을 거쳐 열차 편으로 평양에 도착했다.

199712월 대선을 앞두고 오씨는 당시 새정치국민회 김대중 후보에게 대선 필승을 바라며 대통령이 되면 금세기 내 통일이 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또 대선 6일 전에는 북한 방송에 출연해 김 후보의 통일 방안이 북한의 고려연방제와 유사하다고 말하면서 북풍 논란이 불기도 했다.

집단 월북
북풍 논란

북한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고문, 북한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으로 활동한 오씨는 201291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소식을 전한 조선중앙통신은 오씨가 평안남도 회창군 대곡리서 태어났고, 해방 후 천도교 종리원 교화부장을 지냈다고 소개했다. 이어 오익제는 (남조선)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적극 투쟁했고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이 무참히 유린당하고 파쇼 독재가 살판치는 썩고 병든 남조선 사회에 환별을 느끼고 19978월 공화국의 품에 안겼다고 전했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탈북했다 다시 북한에… 납치 논란 불거져

탈북자가 재입북한 사례도 있다. 20141월 탈북한 임지현씨다. 임씨는 201612TV조선 <모란봉 클럽> 등에 출연하면서 얼굴을 알렸다. 특히 남한 남성과 북한 여성의 가상결혼 생활을 다룬 <남남북녀>에서는 배우 김진과 가상 부부로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그런데 20177월 북한 선전매체 <우리 민족끼리> 영상에 임씨가 전혜성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영상에는 한복 차림의 전혜성과 남성 1, 여성 1명이 함께 나왔다.

북한 체제 비판하다가 돌연

전혜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은 “20141월 탈북했고 지난달 돌아왔다. 평안남도 안주시서 부모님과 살고 있다한국서 임지현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종편 등 국내 방송에 출연해 북한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해오던 임씨가 돌연 재입북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러 논란이 불거졌다.

납치인지 자의적인 재입북 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당시 경찰은 임씨의 재입북이 자의적인 것으로 판단했다. <>

 

<기사 속 기사> ‘대 이어 월북’ 할아버지가 김일성 스승

최근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최인국의 할아버지이자 최덕신 전 외무장관의 아버지인 최동오는 만주 독립운동 시절 김일성 북한 주석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최동오는 해방 이후 월북했고, 최덕신의 북한 망명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전해졌다.

최덕신이 월북했을 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는 등 고위직을 보장받고, 사망했을 때도 북한 당국이 국가장을 치러준 배경에는 아버지 최동오의 영향이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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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표 계승?’ 이재명정부 태양광 로드맵

‘문재인표 계승?’ 이재명정부 태양광 로드맵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가 가시화되면서 에너지 정책은 범국가 차원에서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최근 환경부 장관 후보자의 발언으로 이재명정부의 에너지 정책 방향이 윤곽을 드러내는 모양새다. 일각에서는 문재인정부의 태양광 사업이 어른거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3일 대통령실은 “국회 기후위기특위에서 활동하는 등 미래 환경문제를 지속적으로 고민해온 3선 국회의원”이라고 소개하면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김성환 의원을 환경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김 후보자는 22대 국회 기후위기특별위원회(위원장 한정애, 민주당) 위원으로 활동하며 탈원전·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노력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대선공약 대통령실은 그가 “‘기후 위기는 모두의 생존 위기’라는 대통령의 문제의식을 잘 이해하고 그동안의 입법 경험을 바탕으로 환경문제에 적극 대응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실제 김 후보자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안’ ‘환경친화적 자동차의 개발 및 보급 촉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 등을 발의한 바 있다. 이번 김 후보자의 지명으로 이재명정부의 환경 정책이 구체화되고 있는 모양새다. 김 후보자는 지난 24일 오전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기자들을 만나 “재생에너지 기반으로 모든 에너지 체계를 바꾸고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재생에너지 중심의 체계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원전은 보조 에너지원으로 활용하겠다는 뜻도 비쳤다. 그는 ‘재생에너지를 늘리면 전기료가 오른다’는 우려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균등화발전비용(같은 양의 전력을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가장 싼 전원은 이미 풍력과 태양광”이라며 “다만 아직 한국에선 여러 기회 비용, 시간 비용, 금융 비용이 쌓여 상대적으로 비쌀 뿐이다. 실제 요금이 오를 일은 없다. 오히려 그런 식의 접근이 대한민국의 에너지 전환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탈원전에 대해서는 “각 나라 특성에 따라 원전을 쓰는 나라가 있는데 한국도 탈원전을 바로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주 에너지원으로 재생에너지를 쓰고 원전을 보조 에너지원으로 쓰는 것이 (이재명정부의) 탈탄소 정책 기조”라고 말했다. 김 후보자는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으로 신설 예정인 기후에너지부 장관으로도 거론되고 있다. 기후에너지부는 분리돼있는 기후와 에너지 관련 부처 업무를 통합한 조직이다. 그는 “기후에너지 문제를 어떻게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지 빠른 시일 내로 큰 방향을 잡겠다”며 “국정기획위원회에서 조직개편안을 검토하고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신재생에너지로 전환 필요” “원전은 보조 에너지원으로” 환경부 장관 후보자가 에너지 ‘전환’을 예고하면서 일각에서는 문재인정부의 태양광 사업이 떠오른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선공약으로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내세운 바 있다. 이를 세부적으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태양광 사업이 크게 대두돼 국가 예산이 투입됐다. 문정부는 출범하면서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20%까지 높이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정부는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늘리기 위해 설비를 확충하기로 했다. 태양광, 풍력발전소 등이다. 당시 내용대로면 총 110조원에 이르는 돈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정부는 국가 예산과 공기업, 민간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문정부 임기 내내 전국 단위로 태양광 사업을 위한 지원금이 뿌려졌다. 당시 문정부는 신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탈원전 로드맵을 동시에 진행했다. 일부 원전이 영구적으로 정지됐고 짓고 있던 원전 공사가 중단됐다. 단계적 원전 감축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하겠다는 취지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나온 잡음이다. 특히 태양광 사업을 둘러싼 각종 비리 의혹은 정권이 교체된 이후에도 문정부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국가 주력 사업이었던 만큼 정권이 바뀐 이후 새 정부의 표적이 된 상황에서 실제 문제가 드러난 것이다. 천문학적 예산 투입 윤석열정부는 신재생에너지 지원 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점검을 진행했다. 윤정부 국무조정실은 일부 표본만 조사했는데도 불구하고 2000억원이 넘는 돈이 불법으로 사용된 정황이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당시 국무조정실 정부합동 부패예방추진단은 전국 12개 지자체와 한국전력, 한국에너지공단을 대상으로 ‘전력산업 기반기금 사업’ 운영 실태에 대한 합동 점검을 벌인 결과 총 2267건(2616억원)의 위법·부당 사례를 적발했다고 밝혔다. 해당 기금은 산업자원통상부(이하 산업부)가 전기 요금의 3.7%를 징수해 조성한 돈으로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지원과 보급에 주로 사용됐다. 5년간 투입된 금액은 12조원에 이른다. 1차 조사에 따르면 신재생에너지 지원 사업에서 부적절한 대출과 보조금 부당 집행, 회계 부실 등이 적발됐다. 태양광 사업의 경우 점검 대상의 17%인 1129건에서 1847억원의 위법 대출 등이 확인됐다. 2차 점검에서는 적발 금액이 2배로 늘었다. 국무조정실은 2019~2021년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에 쓰인 금융지원사업(1조1325억원) 내역과 2017~2021년 보조금 지원 규모가 컸던 25개 지자체의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사업 등을 조사했다. 그 결과 금융지원 사업에서 4898억원,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 보조금 사업에서 574억원, 전력 분야 연구개발 지원사업에서 266억원, 기타 전력기금 사업에서 86억원의 부정 집행 사례가 나타났다. 당시 국무조정실 관계자는 “신재생에너지 지원금 대부분은 태양광 사업에 쓰였다”며 “가장 규모가 컸던 부정 금융지원 사업 사례 중 99%는 태양광 사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태양광 업자들은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행해 불법 대출을 받았고 가짜 세금계산서로 공사비를 부풀려 지원금을 타냈다. 감사원 조사로 검찰 수사까지 대출을 받은 뒤 세금계산서를 취소, 축소하는 등 탈루가 의심되는 정황도 드러났다. 가짜로 버섯 재배 시설이나 곤충 사육 시설, 축사 등 농림축산업 시설을 만들어 놓고 신재생 시설을 짓겠다고 대출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농지에 신재생 시설을 지을 때는 용도변경 등 인허가 절차가 필요하지 않고 생산한 전력을 팔 때 받을 수 있는 보조금 한도도 커진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한 마을회는 마을 창고를 짓겠다며 전력기금에서 돈을 받아 부지를 사들였지만 실제 창고는 짓지 않았고 부지는 마을회장이 6촌에게 되팔았다. 지방자치단체의 문제도 드러났다. 한 군은 타낸 보조금을 다 쓰지 못하고 약 24억원이 남자 이를 다른 계좌로 빼돌렸다가 적발됐다. 한 시는 보조금을 빼돌려 관용차를 사기도 했다. 감사원 조사도 이뤄졌다. 감사원은 2023년 11월 ‘신재생에너지 사업 추진 실태’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신재생에너지 사업의 목표와 이행, 인프라 구축, 관리 등 3개 분야로 나눠 추진 과정과 집행 전반을 들여다봤다. 감사원에 따르면 산업부는 2017년 신재생 발전 목표를 상향하면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검토했지만 막상 후속 조치 이행에는 소홀했다. 감사원은 “톱다운(하향식) 방식으로 내려온 목표에 따라 무리한 계획이라도 수립해야 했다는 이유로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는데도 면밀한 검토 없이 강행되고 짧은 기간 내 일관성 없이 변경됨으로써 정책 혼선과 신뢰성 저하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윤석열정부서 전반적 점검 8000억 넘는 예산 줄줄 샜다 대통령의 대표 공약이었던 만큼 정부 부처가 이를 맞추기 위해 과도하게 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문정부가 신재생에너지 확대로 야기될 수 있는 전기요금 인상 가능성을 감췄다는 지적도 나왔다. 감사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산업부는 문정부의 국정 과제대로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늘릴 경우 2030년까지 전기요금을 40% 가까이 올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시 청와대의 압박에 12년 동안 10.9%만 오를 것이라고 국민 부담을 축소했다. 태양광 사업의 여파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새만금 태양광 발전사업 비리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은 지난 1월 군산시청에 대한 추가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감사원 감사 결과 군산시 태양광 발전사업 수주 과정에서 뒷돈이 오간 정황이 포착됐고 이를 검찰에 수사 의뢰를 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당시 군산시장은 군산시가 1000억원 규모의 태양광 사업을 추진할 때 자신의 고교 동문이 대표로 있는 업체에 특혜를 준 혐의를 받고 있다. 해당 업체가 사업자금을 조달하는 금융사가 제시한 연대보증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는데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해 계약 체결을 지시했다는 게 감사원의 판단이다. 앞서 검찰은 새만금 태양광 사업을 주도한 회사 대표를 알선수재 혐의로 기소했다. 그는 태양광 발전사업 과정에서 정·관계 인사에게 로비를 해주겠다며 뒷돈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그의 진술로 비리 의혹은 정치권으로까지 번졌다. 핵심 수사 대상에 올랐던 건설사 대표가 실종됐다가 시신으로 발견되는 일도 일어났다. 관련 시장은 반응 오는 중 이 대통령이 기후, 에너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김 후보자가 재생에너지를 언급하면서 관련 시장이 다시 들썩이는 모양새다. 실제 태양광 관련 주가가 오르는 등 주식시장에는 벌써부터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윤정부는 문정부의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통째로 부정하다시피 했다. 반대로 문정부의 정책을 다시 끄집어낸 이정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