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특집>기쁨보다 더 진한 슬픔 ‘영혼결혼식’ 이모저모

  • 김설아 sasa7088@ilyosisa.co.kr
  • 등록 2012.06.29 14:29:45
  • 댓글 0개

“처녀영혼 없어 200여 총각영혼 장가 못 간다”

[일요시사=김설아 기자]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 죽었거나 미혼인 채로 죽은 처녀, 총각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행해지는 영혼결혼식. 이는 일반인들에게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교통사고나 자살 등으로 꽃다운 나이에 사망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면서 영혼결혼식을 원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약 500여 쌍의 영혼결혼식을 성사시킨 ‘설산스님’을 서울 서대문구 홍은3동에 위치한 백련사에서 직접 만나 얽히고설킨 애절한 사연들을 들어봤다. 

“동생의 사진을 안은 형과 신부가 마주보고 섰다. 동생의 사진을 안고 있는 형의 두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신랑 신부 맞절.’ 두 사람은 서로 허리를 깊이 숙여 맞절을 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영혼결혼식’
질긴 인연의 끈

산 사람의 결혼식이 아닌 ‘영혼결혼식’의 한 장면인 이 문구는 설산스님이 펴낸 <알몸>이란 책 내용의 일부분이다.

1981년부터 결혼식을 못 올리고 사는 동거부부들을 위해 무료 합동결혼식을 주관한 설산스님은 1년 뒤 이승에서 못 다한 인연을 맺어주는 영혼결혼식을 시작해 지금까지 1000여 쌍의 합동결혼식과 500여 쌍의 영혼결혼식을 성사시켰다. 스님이 가난한 이들과 죽은 이들의 결혼식을 고집해 온 이유는 무엇일까.

“81년 어느 신도가 남의 결혼식사진에 자기 부부 얼굴을 오려붙인 결혼사진을 보고 그들을 위한 무료결혼식을 마련해주겠다고 결심했지요. 영혼결혼식의 경우 이승에서 못 다한 인연을 맺어주는 일이니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KAL기 추락사건, 산사태로 죽은 젊은 군인들,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기타의 수해사건 등으로 아깝게 목숨을 잃은 선남선녀들의 영혼을 맺어서 죽어서나마 부부의 인연을 맺게 해주는 일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설산 스님의 말에 따르면 원래 우리나라에서 영혼결혼식이란 문화는 없었다고 한다. 다만 결혼 못하고 요절한 이들의 영혼끼리 맺어주는 관습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다.

백련사 설산 스님, 500여 쌍의 무료 영혼결혼식 성사
사돈될 집안의 가정환경…신체적 조건도 맘에 들어야

총각, 처녀가 죽으면 저승에 가지 못하고 구천에 떠돈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옛날에는 총각, 처녀가 죽으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 몰래 십자로 암매장을 했다고 한다. 그 자리를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면 이승에 맺힌 한을 떨군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풍습이 언젠가부터 무속인들에 의해 볏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고운 한복을 입혀 영혼결혼식을 올리고 첫날밤을 치르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후 몇몇 절에서 스님들이 영혼결혼식을 치러주면서 영혼결혼식이 자주 행해지게 됐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비용 때문에 엄두를 못 내는 이들을 위해 설산스님이 무료 영혼결혼식을 해주기 시작하면서 백련사가 영혼결혼식 장소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즘은 신부가 없어서 영혼결혼식 성사가 힘들다고 설산스님이 다시 입을 뗀다. 20년 전쯤만 해도 총각 영혼이 부족해서 처녀영혼이 결혼을 못했는데, 현재는 처녀영혼이 없어 200여명의 총각영혼이 장가를 못 가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까다로운
신랑·신부 맞선


영혼결혼식을 올리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결혼을 하지 못한 채 죽은 처녀, 총각들을 맺어주는 일이 가장 많고 두 번째는 경제적 형편 등의 이유로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살다가 한 쪽이 먼저 세상을 등진 경우이다. 이 외에 혼인 날짜를 잡았으나 불의의 사고를 당해 한쪽이 죽어 식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가장 많은 경우인 죽은 처녀 총각들의 영혼결혼식은 서로 모르는 남녀가 저승의 객이 되어 올리는 것이지만 배우자를 선택하는 조건은 꽤 까다롭다.

사주와 궁합, 나이, 집안은 물론, 외모, 성격, 신체적 조건, 학력까지 꼼꼼하게 맞선을 본다. 서로 사주와 궁합이 잘 맞는 상대방을 구해서 짝까지 맺어주니, 스님은 ‘중매’ 역할까지 하는 셈이다.

“죽은 이유도 중요하죠. 자살해서 죽은 사람은 꺼리는 터라 보통 자살은 자살한 사람끼리 결혼식이 치러지죠. 교통사고는 교통사고, 병사는 병사끼리 맞추는 등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도 중요한 조건 중에 하나에요.”

“오히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 맺어주기가 더 힘들다”는 게 스님의 말이다. 살아있을 때 성격이 괴팍하거나, 대인관계가 좋지 않으면 성사가 어렵다. 양가의 가족들이 참여해 처음 선을 보는 날 스님의 신상파악 정보를 듣고 서로 궁금한 점을 묻고 사진을 교환한 뒤에 합의가 안 된 경우도 있다. 사돈끼리 성격이 맞지 않아서다.

맞선을 전후로 거의 대부분 영혼들이 부모나 형제·자매의 꿈에 나타난다고 한다. 원하는 짝이면 ‘고맙다’고 인사를 하거나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하고, 원하지 않는 짝이면 대성통곡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20년 전 연탄가스로 죽은 이화여대생이 있었어요. 좋은 신랑감이 있으면 연을 맺어달라는 부모의 부탁을 받고 상대를 찾아봤으나 한 달이 넘도록 적합한 대상을 찾지 못한 상태였죠.  기다리다 지친 부모들이 급하게 짝을 구해서 맺어줬는데 그날 밤 부모의 꿈에 나타나 ‘속았다’며 대성통곡을 하더라는 거예요. 자초지종을 듣고 다시 다른 총각의 영혼과 인연을 맺어줬더니 그날 밤에 딸이 나타나 ‘고맙다’며 큰절을 올리더라는 거예요.”

조건이 맞으면 결혼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좋은 날을 잡아 절에서 병풍을 치고 처녀, 총각을 깨끗이 목욕재계(실제로 목욕을 시킬 수 없으나 부처님의 법력으로)시킨 후, 병풍 안에 위패(지방)를 모셔놓고 첫날밤을 치르도록 한다.

이후에는 극락왕생을 비는 천도제가 진행된다. 양가는 이러한 인연을 시작으로 매년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엔 한 자리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등 대부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장례식장으로
변한 ‘결혼식’

기쁜 결혼식이 아닌 만큼 가슴 아픈 기억도 많다. 20년 전 설산스님은 한 병원 장례식장에서 급하게 와달라는 연락을 받고 갔는데 분위기가 너무 어두웠다. 붐비는 하객들의 표정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고 신랑의 모친으로 보이는 사라은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알고 보니 결혼식을 3일 앞두고 신랑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으면서 행복할 결혼식 날이 장례식 날이 된 것이었다. 스님은 장례식장에서 죽은 신랑과 산 신부의 결혼식을 치러주었다. 주례사를 하는 도중 신부가 울기 시작했고 스님도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메어와 말문이 터지지가 않았다고 회고한다.


우연히 맞은 장례 날짜가 맺어준 영혼결혼식도 있었다. 화물차 운전사였던 신랑은 짐을 가득 싣고 바를 매느라고 당기고 있는데 지나가는 차에 치이면서 유명을 달리했다.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려다 보니, 한날한시에 같이 장례를 치르는 처녀가 있었던 것이다. 처녀는 연탄중독으로 고인이 됐다. 이를 안 병원 관리사무소에서 중매에 나섰고, 영혼결혼식 전문가인 스님을 부르면서 결혼식을 치르게 된 것이다.

영혼결혼식에 얽힌 애절하고 슬픈 사연들 ‘가슴 먹먹’
“애틋하고 눈물겨운 고인에 대한 마지막 애도의식”

가장 최근에 영혼결혼식을 올린 사례도 스님의 기억에 생생하다고 한다. 33살, 동갑내기 부부가 결혼식을 못 올린 채 사랑하며 살아가다 부인이 그만 병으로 세상을 등지고 만 것이다.

부탁을 받고 인천에 영혼결혼식을 올리러 간 스님에게 남편은 ‘다음 생에 태어나도 당신과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설산스님은 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을 주례사에 넣어서 들려준다. 대부분 젊은 나이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죽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모든 집착과 원결을 풀어버리고 미련과 한도 다 버리고 이 세상에서 못다 받은 명과 복을 극락세계에서 듬뿍 받으라고 일러준다.


스님은 또 많은 죽음들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이치를 산 사람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우리가 마지막 가는 길에 정말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지 새롭게 인식하는 일이죠. 육체며, 명예며, 재물 등은 한낱 티끌에 지나지 않아요. 세상을 마치고 마지막 떠나는 길 위에서 그것은 더욱 분명해지죠. 내게 남는 거라곤 오직 알몸 뿐, 돌아갈 때 벌거벗은 알몸으로 업만 두르고 떠나는 길, 남아있는 인생이라도 남을 생각하며 좋은 인연을 많이 만들면 좋겠어요.”

알몸으로 왔다
알몸으로 가는

물론 영혼결혼식이 좋은 의도에서 시작됐다 하더라도 맹목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영혼결혼식은 자식을 잃은 부모님이 가슴에 맺힌 평생의 한을 푸는, 애틋하고 눈물겨운 고인에 대한 마지막 애도의식의 하나임은 분명해 보인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