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경찰이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의 정보 수집·분석 부서를 흡수하기 위해 태스크포스(TF)를 가동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원이 ‘특수활동비’ 문제로 해체까지 거론되는 상황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경찰청이 TF를 미리 가동하고 나선 것은 권한과 역할을 확대하고자 하는 경찰 스스로의 의지를 담은 조치로 해석된다. 일각에선 경찰 조직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면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 국정원이 어느 기관으로 업무를 이관할지는 확정하지 않는 상태. 그 귀추가 주목된다.
검찰은 이재만 전 대통령 총무비서관과 안봉근 전 대통령 제2부속비서관이 국가정보원으로부터 1억원이 든 가방을 매달 청와대 인근서 건네받은 단서를 포착해 지난달 31일 이들을 체포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서관이 국정원으로부터 받은 돈이 40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수비 논란
국정원 몰락
또 박근혜정부 청와대가 국정원의 특수활동비를 상납받는 과정에 박 전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이 전 비서관의 진술을 검찰이 확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 전 대통령의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대목이다.
박 전 대통령은 2005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국회 운영위서 “국정원이 쓰는 예산 중 불투명한 것이 많다. 베일에 싸여 있는 국정원 예산에 대한 국회의 견제가 강화돼야 한다”고 지적했었다.
또 “각 부처에 국정원이 계상한 특수활동비가 대표적인 불투명 예산”이라며 “국정원 예산이면 국정원 예산으로 편입해서 써야지, 각 부처에 숨어 있는 예산은 안 된다”고도 한 바 있다.
국정원 특수활동비가 새로운 뇌관으로 떠오르면서 돈의 실체에 대해 관심이 쏠린다. 국정원의 특수활동비는 영수증을 첨부할 필요도 없고 사용 내역에 대한 검증 없이 총액 결산 정도만 이뤄진다.
사실상 견제의 사각지대에 있는 셈이다. 또 투명하지 않은 집행 절차 때문에 언제든 ‘검은돈’으로 전락할 여지가 있다.
지난해 국정원은 4862억원의 특수활동비를 배정받았다. 정부 특수활동비(8870억원)의 약 55%에 해당하는 액수다. 올해 국정원 특수활동비는 4930억원이다. 국정원 예산은 모두 특수활동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정부 부처에 정보비 명목으로 책정된 예산까지 합하면 1조원이 넘는다는 얘기도 나온다.
정부 부처 특수활동비 중 상당액은 국정원이 관리하고 있다. 가령 2015년 경찰청 특수활동비의 68%가 국정원 정보비라는 것이 국정감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특수활동비 둘러싼 ‘눈먼 나랏돈’ 비판
국감서 “차라리 해체하는 게 낫지 않냐”
경찰 전체 특수활동비 1289억여원 중 약 876억원을 국정원으로부터 지원받은 것이다. 하지만 정부와 국정원은 그간 국기기밀이라며 특수활동비 사용 내역을 공개하지 않고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다.
이 때문에 이전 정권서 청와대가 국정원으로부터 얼마의 특수활동비를 받아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또 청와대가 일회성으로 특수활동비를 받아왔는지, 지금처럼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는지도 궁금증으로 남아 있다.
당시의 검찰수사 결과와 관련 보도들로 당시 정황을 미루어 종합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의혹만 무성했을 뿐 실체가 밝혀진 적은 없다.
국정원의 특수활동비를 둘러싼 ‘눈먼 나랏돈’ 비판이 거세게 제기되는 가운데 국정원 기관 국정감사 현장서 “국정원 존립이 어려울 정도의 일탈이 일어났는데 차라리 국정원을 해체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질타가 나왔다.
여야 정보위원회 간사는 지난 2일 오후 국정원에 대한 비공개 기관 국정감사가 진행되는 도중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번 국정농단과 관련해 국정원이 개입된 것에 대해 통렬한 반성을 요구했고 이 반성 위에 새로운 정보기관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강력히 주문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해체하라”
조직개편 단행
서훈 국정원장은 이에 대해 “현 상황을 무겁고 참담히 받아들인다”며 “적폐를 청산하고 국정원을 정권과 상관없이 철저히 조사하고 개혁하겠다”고 밝혔다.
서 원장은 “이제까지 드러난 문제들은 국민들 앞에 공개하고 국민들로부터 질타를 받은 후 다시 태어나는 수순이 필요하다”며 “앞으로는 정치적인 모든 행위와 절연하고, 정권의 비호 기관이 아니라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기관으로 재탄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 원장은 국민의당 의원을 중심으로 “차라리 국정원을 폐지하는 게 낫지 않느냐” “국정원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게 낫지 않느냐” 등의 지적이 제기된 데 대해 “현재 국정원법을 폐지하는 것보다는 개정하는 게 좋다”고 답했다.
서 원장은 “일탈 행위, 적폐 등의 발생 원인이 무엇이냐”는 정보위 질의에 대해 “대통령과 국정원장의 문제가 가장 크다”며 “정보기관을 권력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일탈 행위의 가장 큰 문제”라고 답했다.
서 원장은 “국정원 내 준법의식의 부재도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원장 취임 당시 국정원의 ‘국내 정보 수집 기능 폐지’를 약속한 서 원장은 “대공 수사 기능은 현재 국정원이 보유한 역량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다른 곳으로 이관하는 것이 맞다”며 “과거 국정원이 작성해 온 존안 카드의 경우도 국민 정보 수집 폐지로 현재 작성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서 원장은 “대북 정보활동과 방첩 분야 활동을 강화하고, 테러 위협 대응 등 국민 안전과 국익 보호에 만전을 기하되 국내 정보는 수집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기회 노리고…
내부 TF 구성
국정원은 국내정치와 절연하고 순수 안보기관으로 거듭나겠다며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국내 정보담당관(IO)을 폐지하고 그동안 국내정보를 담당했던 2차장을 방첩업무 등을 담당하는 3차장으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1차장은 ‘해외차장’ 2차장은 ‘북한차장’ 3차장은 ‘방첩차장’으로 조직편제를 바꿔 ‘국내차장’이란 명칭을 삭제했다. 그러나 아직 국정원이 어느 기관으로 국내 정보 수집과 대공 수사 업무를 이관할지는 확정하지 않는 상태다.
이에 발맞춰 경찰이 움직였다. 경찰이 국가정보원에서 폐지한 국내 정보 수집·분석 부서를 흡수할 ‘인수준비팀’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1일 이철성 경찰청장은 국회 정보위 국정감사에서 “국정원의 국내 정보파트를 실질적으로 경찰이 가져와야 한다”며 “현재 자체적으로 내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용표 정보국장을 팀장으로 하는 TF는 약 한달 전 출범했다. 과별 실무자들 5~6명이 참여해 외국사례 등에 대해 자료를 수집, 역량을 강화하고 부서 편재를 달리하는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TF에서는 부적절한 정치 개입 의혹에 휩싸인 국정원이 대공 수사 기능 등을 이관하겠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 인력 흡수를 감안한 조직 개편과 전문인력 양성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청이 TF를 미리 가동하고 나선 것은 권한과 역할을 확대하고자 하는 경찰 스스로의 의지를 담은 조치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번 경찰청 국감서도 이와 관련한 여야 의원들의 지적이 나왔다.
여당의 한 정보위원은 “경찰 조직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면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며 “TF에서 이에 대한 대비책도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발빠른 통합 움직임
이미 인수준비팀 운영?
다른 정보위원은 “경찰이 국정원서 하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만한 인력과 능력을 갖췄는지 잘 모르겠다”며 “일부 정보 업무를 이관받을 것으로 미리 상정하고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당의 한 정보위원은 “경찰이 국정원 대신 특정 업무를 맡을 경우 여전히 직무 범위서 벗어나는 정보를 수집하고 임의 가공해 독점할 가능성이 있다”며 “경찰 내부에 위법성을 검증하고 통제할 시스템을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이에 대해 이 청장은 “TF를 통해 국정원 개혁에 따른 경찰 체제 개편의 대안을 연구할 계획”이라며 “정보 업무에 공백이 없도록 철저히 대비하겠다”고 밝혔다.
국정원 대공 수사 파트 이관은 국정원법 등 관련 법령 정비와 기구 개편 등이 전제돼야 하는 것으로 일차적으로 국회 입법 절차를 거쳐야 하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경찰이 대통령 공약을 앞세워 지나치게 무리한 행보에 나서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국정원 대공 수사 분야의 조직 규모, 인력 배치, 수사 범위 등은 3급 이상의 비밀로 경찰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경찰은 일단 대공수사권이 이관되기만 하면 시행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이미 국정원과 별개로 경찰 보안과서 단독으로 대공 수사를 진행했고 필요할 때 국정원과 공조하는 식이었다”며 “검찰서 수사권을 가져오는 ‘수사권 분리’와는 성격이 달라 경찰과 국정원 사이에 갈등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회의 문턱을 넘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국정원 대공수사권 이관에 대해 야당의 반대를 넘어야 한다.
무리한 행보
힘든 여정이…
현재 국정원법 제3조에는 국정원의 직무로 ‘형법 중 내란의 죄, 외환의 죄, 군형법 중 반란의 죄, 암호 부정 사용의 죄, 군사기밀 보호법에 규정된 죄, 국가보안법에 규정된 죄에 대한 수사’가 명시돼있다.
한 변호사는 “법 개정이 필요하고 현 정부가 검찰 개혁에 집중하는 만큼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며 “먼저 국정원 대선 개입 등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꾸려 시민들에게 국정원 개혁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납득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