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법조인 1호 물류학 박사’ 김천수 효성그룹 법무실장

한번 꽂히면 끝장…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법조인, 물류학 박사, 로스쿨 교수, 기업의 법무실장까지. 김천수 효성그룹 법무실장을 소개하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일생 동안 제대로 된 직업 하나 갖기도 어려운 시대에 김 실장은 또 다시 새로운 도전에 몸을 맡겼다. <일요시사>가 그의 족적을 따라가봤다.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효성그룹 본사서 김천수 법무실장을 만났다. 그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건 창가 한편을 빼곡히 메운 서류 더미. 김 실장의 개인 책상은 물론 회의용 대형 탁자에까지 A4용지 뭉치가 가득했다. 노타이 차림의 김 실장은 점심 먹다 옷에 뭐가 묻었다며 사진기자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 방에는 라디오 방송의 클래식 음악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

법조인이자
물류학 박사

“학교서 교수실을 배정받았는데 먼저 그 방을 썼던 분이 음악을 정말 좋아하셨나 봐요. 방음시설이 엄청 잘돼있더라고요. 그냥 썩히면 아깝다고 생각해 저도 음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만난 것처럼 김 실장의 도전은 우연한 계기서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 눈앞에 닥친 일에 어렵지 않게 순응하는 김 실장의 태도가 만든 변화였다. 그 덕에 법조인이자 물류인, 대학원 교수면서 기업의 법무실장을 맡는 등 인생의 생소한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다.

전주 해성고와 서울대 법대를 거쳐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그는 1992년 부산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법관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서울, 수원, 울산, 인천 등에서 판사로 재직했다.


그러다 2010년 2월 ‘물류 전문 변호사’라는 타이틀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2012년부터는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로 일했다. 6년간 학교에 몸담았던 그는 최근 효성그룹 법무실장으로 선임돼 기업에 들어갔다. 

법원과 변호사 사무실, 학교와 기업을 오간 숨 가쁜 25년이었다. 동시에 지난달에는 법조인 최초로 물류학 박사가 됐다.

김 실장이 물류를 처음 접한 건 연수 중이던 2000년 일본에서다. 도쿄 히토쓰바시 대학교의 이노베이션 센터라는 연구소에서 2주에 한 번씩 진행하는 세미나에 참석한 게 계기가 됐다. 히토쓰바시 대학교의 전신인 도쿄 상업학교는 비즈니스맨, 이른바 실무가를 키우는 곳이다.

“지인이 법을 공부한 제게도 꽤 재미있을 거라면서 세미나 참석을 권유했어요. 교수들만 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재계, 관계, 정계 사람들이 많이 보여 놀랐습니다.”

2000년 한국에선 벤처 붐이 크게 일었다. IT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때와도 맞물린다. 하지만 김 실장이 경험한 일본은 벤처나 IT 산업보다는 다른 일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상황이 궁금했던 그가 세미나 관계자에게 묻자 ‘온라인의 끝은 오프라인’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일본은 세계가 온라인에 완벽하게 물든 이후 오프라인 경쟁이 시작될 거라고 보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자신들은 그때를 준비하고 있다고, 그게 ‘물류’라고 하더군요.”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온라인으로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물건을 받아보는 건 오프라인에서다. 


온라인 유통 공룡으로 불리는 아마존닷컴이 최근 오프라인으로 시장을 확대하는 등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는 구조적 변화가 발 빠르게 일어나는 것도 그 증거다. 2000년대는 물론 현재까지 물류의 개념조차 자리 잡지 못한 한국으로선 상당히 뒤처져 있는 셈이다. 김 실장도 당시에는 물류의 중요성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2000년 일본서 물류 처음 접해
2005년 공부 시작해 교수까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김 실장이 본격적으로 물류학에 빠지게 된 것은 “친구를 잘못 만난 덕”이다. 여기서 말하는 친구는 하헌구 인하대 국제물류전문대학원 교수. 

하 교수는 2004년 글로벌 물류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설립된 인하대 아태물류학부를 만든 초기 멤버다. 김 실장은 하 교수의 권유에 따라 2005년 가을 물류 비즈니스 최고경영자과정을 수강하면서 물류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최고경영자과정을 마친 그는 같은 대학 물류 MBA 과정에 등록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박사 과정을 시작한 지 9년 만에 법조인 1호 물류학 박사라는 타이틀을 따냈다. 친구를 잘못 만나서 들어온 길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스스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영어 공부나 하라’며 살살 꼬드기는 친구 말에 넘어갔죠. 그런데 대학원서 첫 수업을 듣는데 ‘아, 이거 장난 아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힘들었어요.”

외국서 교수를 초빙해 진행한 수업은 4주 단위로 이뤄졌다. 2주간 30시간의 강의, 1주는 그룹 프레젠테이션, 마지막 주는 테스트로, 한 달이 지나면 한 과목이 끝나 있었다. 

2008년 판사로 재직 중이던 그는 판결문과 씨름하랴, 수업에 출석하랴 정신없는 한때를 보냈다. 게다가 국고를 지원 받았기 때문에 성적을 B+이상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상당했다.
 

30시간 강의 중 3분의 2가 넘는 시간을 세계지도와 함께 했다는 그는 ‘꿈에도 지도가 나올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갖고 있던 물류에 대한 개념이 수업을 들으면서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그가 접한 물류는 단순히 물건을 주문하고 받아보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나아가 경제 흐름 그 자체였다.

예를 들어 왜 기업서 중국에 공장을 만드는지, 중국에 공장을 세우려면 정부와 어떤 협상을 해야 하는지, 공장부지 사용료는 어떻게 하면 보호받을 수 있는지 등 그가 만난 물류학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문제는 한국이 물류에 대한 기초 공사가 전혀 돼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각 대학에도 물류법 관련 전문가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친구 권유로 시작
9년 만에 박사학위


인하대 로스쿨 인가 과정서 역할을 한 하 교수의 러브콜이 또 다시 이어졌다. 이번에는 교수로서였다. 법과 물류를 함께 공부한 사람이 생소하다 못해 없는 상황서 김 실장은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물류인이면서 법조인, 법조인이자 물류인이라는 독특한 조합의 경력은 그를 학교로 이끌었다. 

물류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물류 전문 변호사로 발을 디딘지 2년 만이었다.

“제가 국고, 국민 세금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걸 되돌려 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런데 대학원에 가봤더니 정말 아무 것도 없더라고요. 하나씩 전부 만들어야 했어요.”

1950∼1960년대 물류를 바라보는 시각은 일본인이 번역한 그대로 ‘물적 유통’이었다. 그러다 1970∼1980년대 원료준비, 생산, 보관, 판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서 물적 유통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종합적 시스템을 뜻하는 로지스틱스라는 개념이 나왔다.

2005년에 이르러서야 소비자를 위한 기업 간 긴밀한 관계를 말하는 SCM(Supply Chain Management) 개념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경영상의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게 불과 10년 남짓이니 제도적 기반을 세우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외국의 제도를 그대로 가져오는 일은 서로 다른 공동체의 특성상 어려웠다. 누구에게 주도권을 주고 법제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했다. 


기업과 기업의 관계를 시스템화하는 것이기에 누구를 중심으로 하느냐에 따라 많은 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한국서 물류법이 발달하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나눠 갖는 부분에 대한 법제화가 소극적이기 때문입니다. 정부 차원서 ‘제발 좀 나눠 가져라, 상생해라’라고 상생협력법 같은 걸 만들지만 정책적으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어요. 자발적으로 나눠 가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최근 프랜차이즈 기업을 둘러싸고 ‘갑질’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고 있다. 처음부터 가맹본부를 중심으로 모든 게 이뤄졌기 때문에 가맹점에겐 불리한 조건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게 갑질이라는 형태로 분출된다는 것. 

하지만 가맹본부가 없다면 가맹점은 아이디어를 사용할 수 없고 가맹점이 없다면 가맹본부는 유지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지만 가맹본부와 가맹점은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관계다.
 

노동자와 자본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기업에선 노동자를 비용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그들을 정리하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한다. 사실 기업의 이런 방식의 일처리는 다른 기업에 대한 착취나 다름없다. 

생소한 개념
법제화 난항

노동자들은 기업에 고용돼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물건을 구매하는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계약의 개념 자체를 바꿔야 해요. 우리는 계약을 ‘대립하는 두 당사자의 의사표시의 합치’라고 합니다. 결국 한쪽이 손해를 보면 다른 한쪽은 이익을 얻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거죠.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가맹본부와 가맹점은 손해와 이익을 공유하죠. 서로 같은 방향을 보는 것도 계약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해요. 그래야 갑을 논쟁, 기업 구조 등에서 변화가 생길 거예요.”

개념도 생소한데 법제화까지는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게 김 실장의 생각이었다. 물류를 둘러싼 제도적 기반을 법제화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면서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효성그룹의 법무실장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 연장선이다.

한바탕 법률 전쟁을 치르고 있는 효성그룹은 최근 법무실장 자리를 상무서 부사장으로 높여 김 실장을 영입했다. 기업과 정부, 기업과 권력 간 관계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겐 좋은 기회였다. 그럼에도 그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며 언젠가는 학교로 돌아갈 것이라고 못박았다.

“저는 교수의 소명이 ‘빈둥거리기’라고 생각해요. 1년에 교수가 의무적으로 강의해야 하는 시간이 15시간입니다. 논문 한 ㄹ편, 학교서 요청하는 시험 감독이나 출제 등의 일이 교수가 한 해 동안 하는 일이죠. 그런데도 학교에서는 교수의 신분을 보장해줘요. 왜 그럴까요?”

그는 교수 집단이 사회의 소금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수에게 부와 권력을 주지 않는 대신 시간과 명예를 준 이유를 곱씹어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2014년 4월 세월호 사고가 터졌을 무렵 심한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하는지, 실제 자신이 세월호에 타고 있었다면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했을지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세월호처럼 침몰하는 배인지, 방송서 흘러나오는 말이 우리를 죽이는 말인지 살리는 말인지 누군가는 판단하고 평가해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실장은 사회가 교수 집단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고 보고 있었다. 사회에 쓴소리를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직업군에 속해있다는 자부심과 고민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말을 나누는 내내 그는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어떤 판단을 했을까’라는 말을 거듭 반복했다. 판사로 재직하면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사이 체화된 습관인 듯 했다. 

‘나라면 어땠을까’ 고민의 습관
‘이번엔 무슨 공부’ 배움의 연속

그에게 ‘고민의 습관’을 준 건 부산지방법원에 갓 부임했을 당시 맡았던 사건이다. 1992년 부산에서는 총알택시를 타고 전국을 돌며 단독주택에 침입, 여자들을 강간하고 금품을 훔친 일당에 대한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부임 다음 날 이 재판에 들어가 결심 공판을 진행했다. 그리고 2주 후 6명의 범인 가운데 2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서울을 제외한 전국서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자백한 것만 70여건이었다. 

그중 실제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진술한 건 36건이었다. 시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며느리를 강간하고, 딸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범하는 등 가해 일당이 저지른 몹쓸 짓의 수위는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런 범죄자들 때문에 사형제도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판사 일을 하면 할수록 그 사건이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똑같은 결론이 나오더라도 좀 더 고민해야 했다고 말입니다.”

이 사건은 2008년 그가 내린 국내 첫 존엄사 인정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인간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정권이 있는지에 대한 사건이었다. 

2008년 2월 병원서 폐암 조직검사를 받던 중 저산소증에 의한 뇌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된 김 할머니의 연명 치료 중단 여부는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첫 재판을 하자마자 ‘연명 치료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정한 김 실장은 실제 김 할머니를 만나본 이후 깊은 고민에 빠졌다.

“김 할머니를 뵙기 전에는 그 분이 이미 돌아가신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보니까 할머니 몸이 너무 따뜻한 거예요. 눈도 깜빡이려고 하고 뭔가 전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의사들은 무의식적 반응이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제 눈에는 그분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때부터는 그분이 이 연명치료를 원할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죠.”

김 실장이 주범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사건과 김 할머니 사건은 그 결은 다르지만 판결에 의해 누군가의 생사가 좌우된다는 점에서는 같다. 
 

1992년 사건으로 죽음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를 갖게 된 그는 종교계를 포함, 주변 사람들에게 김 할머니 사건과 관련한 의견을 들으려 애썼다. 법리상으로 호흡기를 떼는 게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상황이었지만 김 할머니의 의사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김 할머니가 연명 치료 중단을 원할 거라고 답했어요. 아마 본인도 그 상황에 닥치면 호흡기를 떼 주길 바라기 때문인 거 같아요. 저도 그렇고요.”

2009년 5월 대법원은 김 할머니의 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확정 판결했다. 김 실장은 김 할머니의 호흡기가 제거되는 날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1992년 주범 두 사람의 사형 집행 당시 그들을 찾아가보지 못한 마음의 빚도 일부 털어냈다.

후회 없는 삶
매일 즐겁게∼

“어린 시절 할아버지나 동네 어르신들을 보면 그 시절에 어떻게 살았는지, 뭐하고 살았는지 늘 묻고 싶었어요. 그들의 삶을 통해 제가 가야할 방향을 귀동냥 하고 싶었죠. 그런데 어느덧 제가 아들이나 손자에게 그 대답을 해줄 나이가 됐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해야 그 애들이 열심히 살았다고 해줄지, ‘용서’해줄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창한 것보다는 딱 한 발이라도 나가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전할 수 있다면 후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jsjang@ilyosisa.co.kr>

 

[김천수는?]

▲전주해성고, 서울대 법대(82학번)
▲사법연수원 제18기
▲부산, 울산, 수원 각 지법 판사
▲서울고법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원(행정)
▲인천(형사), 서울서부지법(민사) 각 부장판사
▲일본 히토츠바시대학, 미국 버클리대학 각 장기연수
▲대법원 UNCITRAL 국제규범연구반(운송, 담보, 전자상거래) 반장
▲GLMP 2기, 인하대학교 물류MBA(MGLM) 1기, 물류박사 과정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효성그룹 법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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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갈수록 증폭되는 평택 논란 이제야 공개된 소소한 흔적 쉽게 거두지 못하는 의심 의미심장 세력 교체 과정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소문이 어느덧 사실처럼 인식되고 있다. 명확한 물증이 없는 가운데 파편적인 의혹이 덧씌워진 양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으며, 흐름을 파악할 만한 유의미한 흔적이 이제야 겨우 나왔을 뿐이다. 증폭된 의혹 뒤편에서 여전히 진실은 빼꼼히 잘 보이지 않는다. 2010년 9월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황해경제자유구역에 자리 잡은 유일한 농산물 가공 업체로, 그간 심심치 않게 밀수 의혹을 받아왔다. 가공 목적으로 수입한 농산물을 가공 없이 시중에 유통시켜 엄청난 차익을 봤다는 꼬리표가 뒤따랐다. 의혹하는 눈초리 선라이즈에프앤티가 취급했던 대다수 농산물이 고관세 품목이라는 점은 이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간 선라이즈에프앤티는 ▲녹두 ▲콩나물콩 ▲다대기(혼합양념) ▲생강 ▲마늘 ▲참깨 ▲팥 ▲서리태 등 높은 세율이 붙는 고관세 품목을 주로 수입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 예로 콩나물콩의 경우 그대로 들여와 국내에 유통하면 487% 관세가 부과되지만, 콩나물 재배 목적으로 수입하면 27%만 반영된다. 평택세관에 몸담았던 다수의 전직 세관공무원이 기업 출범 및 운영에 관여했다는 점도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심지어 선라이즈에프앤티 이사진에 포함됐던 특정 세관 출신 임원이 한때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례도 존재한다. 수년 전부터는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선라이즈에프앤티의 밀수 의혹을 수차례에 걸쳐 제기했던 공익 제보자 이성열씨가 재판에 연루되는 과정에서 김건희씨의 모친인 최은순씨가 거론됐던 게 이 같은 흐름에 불을 지핀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정치평론가인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이 최근 ‘평택항’을 언급하자,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정도가 됐다. 장 소장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가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김건희씨 일가의 수상한 물건 수입 의혹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장 소장은 “최은순씨가 주인으로 있는 농수산물 수입업체에서 이상한 것을 들고 오려고 하다가 걸려서 (김건희) 오빠와 김건희씨가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며 “어떤 물건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부적절한 물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선라이즈에프앤티의 폐업이 알려지자, 의혹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양상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국세청 사업자 과세 유형 조회 결과 지난 10일자로 폐업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폐업자로 조회된 지난 10일은 김건희 특검법이 공포된 시기와 맞물린다. 물론 꾸준히 의혹이 제기된 것과 별개로,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단서는 없는 상황이다. 특히 주주명부가 지금껏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게 의혹과 진실을 구분 짓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시사>가 최초 입수한 주주명부는 간접적으로나마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할 여지를 남긴다. 의문 해소 첫 단추 2022년 10월 작성된 ‘카리나에프앤티(선라이즈에프앤티에서 2020년 9월 상호 변경) 주주명부’를 검토한 결과 주주는 총 17명, 발행주식은 91만8400주(1주당 5000원)로 확인됐다. 2010년 9월 자본금 5억원으로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수차례 증자를 거쳤고, 해당 시기에 자본금을 45억9200만원으로 늘린 상태였다. 일단 주주명부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경영권 교체 과정이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법인 등기와 주주명부를 교차 검증한 결과를 토대로 추정하면, 표면상 선라이즈에프앤티 지배 세력은 ‘전직 세관공무원(설립~2018년 중순)→지엔티에이치(~2020년 중순)→킴스에O엔O(~2022년 초순)→동OO앤에스(~2025년 6월)’ 순으로 변경된 흐름이다. 첫 번째 경영권 교체는 ‘펀딩하이 연체 사건’과 함께 발생했다. 펀딩하이는 중국·동남아시아에서 농산물을 수입하는 업체에 돈을 빌려 주고, 투자자들에게 15% 이상 수익을 보장하는 펀딩 상품으로 인기를 끌던 P2P 업체였다. 그러나 펀딩하이는 2018년 6월20일 ‘마늘 시즌2-17차(모집 금액 3억원, 차주 승리산업)’ 펀딩 상품의 연체를 시작으로 ▲세척 당근 시즌2-18차(모집금액 5억원, 차주 지엔티에이치) ▲김치 펀딩 2차(모집금액 1억2000만원, 차주 상아농산) ▲번데기 펀딩 1차(모집금액 1억8000만원, 차주 월량완코리아) 등에서 차주의 투자금 상환 실패를 알렸다. 연체 금액은 ▲지엔티에이치 29억원 ▲승리산업 33억원 ▲상아농산 11억8000만원 ▲월량완코리아 1억8000만원 등 총 75억6000만원에 달했다. 급기야 펀딩하이는 연체율 100%를 찍은 채 영업을 중단했다. 상환 실패 이후 차주 사이에 관련성이 드러났다. 지엔티에이치와 승리산업에서 대표이사였던 윤석호씨는 두 회사 지분을 각각 60%, 100% 보유 중이었다. 또한 월량완코리아 사내이사로도 등재돼있었다. 연체가 발생한 직접적인 사유는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대상으로 한 지분 투자였다. 지엔티에이치는 펀딩받은 금액을 농산물을 들여오는 데 쓰지 않고,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매입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를 계기로 지엔티에이치는 2018년 6월경 주식 16만1400주를 확보한 선라이즈에프앤티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확보한 이후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명단에 변화가 목격됐다. 선라이즈에프앤티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사내이사와 부친에 이어 회사에 몸담았던 대표이사를 대신해 지엔티에이치가 끌어들인 얼굴들이 등기임원 자리를 꿰찼다. 정작 지엔티에이치는 연체 발생 넉 달 후인 2018년 10월 보유 중이던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에 넘겼다. 펀딩하이 투자자들과의 소송전이 불거지자 중국에 본거지를 둔 우군에 주식을 양도한 모양새였다. 거듭되는 교체 수순 두 번째 경영권 교체는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의 주체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권에 본적을 둔 킴스에O엔O는 2022년 10월 기준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10만8200주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의 친인척이 보유한 주식 13만2800주를 합산하면 우호 주식은 24만주 안팎이다. 기존 지엔티에이치 측 우호 세력(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 16만1400주+마송재 3만주)과 비교해 5만주 가까이 격차를 벌린 셈이다.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대량 매입한 시기는 2020년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선라이즈에프앤티 등기임원 구성이 크게 요동쳤다는 점을 통해 짐작 가능한 사안이다. 실제로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발휘하던 2018년 7월 대표이사에 선임됐던 김정일 대표는 2020년 3월 해임됐다. 2018년 9월 취임했던 또 다른 대표이사 역시 당해 10월을 넘기지 못한 채 사임했다. 공석이 된 주요 등기임원 자리는 킴스에O엔O 측 인물로 채워졌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가 2020년 10월 선라이즈에프앤티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해당 시기에 사외이사, 감사 등 등기임원 전원이 새 얼굴로 교체됐다. 킴스에O엔O에 이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곳은 식료품 제조업을 영위하는 동OO앤에스였다. 이 회사는 2022년 10월 기준 주주명부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지분율 44.64%)를 보유한 단일 최대주주로 등재돼있다. 여기에 우호 세력(글로O포O 1만주+김성수 2만주+김종봉 788주)의 주식을 합산하면 지분율은 50%에 육박한다. 동OO앤에스는 사실상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인수하고자 만든 업체로 비쳐질 여지를 남긴다. 2022년 2월 출범 당시 자본금 10억원짜리였던 동OO앤에스는 불과 두 달 만인 2022년 4월14일 자본금을 21억원으로 두 배 이상 키웠다. 공교롭게도 동OO앤에스가 설립 이후 8개월 사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금액은 총 20억5000만원이었다. 이는 동OO앤에스 자본금 21억원이 선라이즈 주식 41만주를 매입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게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기존 61만8400주였던 발행주식을 2022년 4월22일 91만8400주로 30만주 확대했다. 동OO앤에스가 자본금을 21억원으로 확충한 지 8일 만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가 발행주식을 30만주 늘린 덕분에 동OO앤에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주식 41만주를 확보한 형국이다. 동OO앤에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설 무렵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구성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동OO앤에스 대표이사가 사내이사, 글로O포O 대표이사가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김성수 대표이사가 신규 선임됐다. 이후 김성수 대표는 선라이즈에프앤티 폐업 전까지 자리를 지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되짚어보는 연결고리 한편 일각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는 지엔티에이치 측이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킴스에O엔O 혹은 동OO앤에스와의 연관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관여한 직접적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만약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를 2021년 이후로 특정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항간에 떠도는 마약 적발 여부는 2022년 근방으로 얘기가 오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heaty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