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력 대선주자 검증> ②정치입문

  • 신승훈 기자 shs@ilyosisa.co.kr
  • 등록 2017.03.27 09:57:53
  • 호수 11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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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 vs 흙수저…과연 용수저는?

[일요시사 정치팀] 신승훈 기자 = 대선 정국의 막이 올랐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대통령 궐위 후 60일 이내 대선 실시를 규정하고 있다. 이에 정부는 오는 5월9일을 19대 대선일로 공표했다. 대선일까지 두 달이 채 남지 않은 상황. <일요시사>는 숨 가쁘게 흘러갈 대선 정국서 후보 검증을 갖는 시간을 준비했다. 그 두 번째 항목은 유력 대선주자들의 정치입문이다.

연일 강공 발언을 쏟아내며 지지율 끌어올리기에 한창인 대선주자들의 정치 초년병 시절에 국민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선주자 중 누군가는 금수저로, 누군가는 흙수저로 젊은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 한 링에서 오직 대권을 위해 싸우고 있다. 

[문재인]
노무현 그림자

문 의원은 대학시절 유신반대 투쟁에 앞장섰다 구류에 처했다. 이듬해에는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사법고시 합격통지서를 유치장에서 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학생운동 전력으로 인해 판사 임용에 실패했다.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서 당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변호사의 길에 나섰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당시 청와대에 들어갈 때 노 전 대통령에게 ‘민정수석으로 끝내겠다’ ‘정치하라고 하지 말아 달라’는 두 가지 조건을 내건 것으로 알려진다.

청와대에 들어온 지 1년 만에 돌연 사퇴하고 아내와 함께 히말라야로 트레킹을 떠났다. 히말라야 체류 중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들었다. 그는 노 전 대통령 탄핵 대리인을 맡아 활동했다. 이후 청와대에 재입성해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재단법인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이후 19대 총선,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되면서 정치권에 발을 내디뎠다. 그는 2012년 당시 초선임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대선주자로 발돋움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양자대결구도를 만들었다.

당시 대선에서는 100만표 차이로 낙선했다. 이후 5년이 흐른 현재 30% 이상의 고공 지지율 행진을 이어가며 ‘문재인 대세론’을 이어나가고 있다.

[안희정]
김덕룡 비서부터

학창시절 학생운동을 위해 자퇴한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검정고시 합격 후 1983년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4학년때 고려대 내의 운동권 서클 14개를 통합해 애국학생회를 조직했다. 1988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안기부에 체포돼 10개월 동안 수감됐다. 전과 기록은 취업을 하려던 그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안 지사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학교 2년 선배 김영춘(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다. 김 의원은 1989년 1월, 안 지사에게 국회의원 비서 자리를 소개해줬다. 안 지사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비서실장직을 수행했던 김덕룡 의원의 의원실로 출근했다. 하지만 이듬해 3당 합당이 이뤄지면서 안 지사는 김영삼 총재를 따르지 않았다.

대신 ‘꼬마민주당(통일민주당)’서 당직자 생활을 이어나갔다. 1991년에는 사직서를 내고 창원 노동복지회관을 짓는 공사장서 2달간 건설 일용직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1992년 정계를 떠난 뒤 그는 출판사 영업부장으로 일하면서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복학해 학업을 마쳤다.

이후 14대 총선서 낙선한 노 전 대통령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2002년 대선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 캠프의 행정팀장, 정무팀장을 맡으면서 참여정부 출범에 공신역할을 했다.


문, 참여정부 황태자…초선부터 잠룡으로
보좌진 출신 안희정, 한때 부침 겪다 성장

하지만 불법대선자금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하면서 그는 부침을 겪었다. 참여정부의 출범에는 일조했지만 공직은 사양했다. 노 전 대통령은 생전에 안 지사에 대해 “나 대신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 했다”며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안 지사는 2008년 7월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면서 본격적인 정치를 시작했다.

2010년 지방선거서 충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충남 역사상 최초의 민주당 출신 도지사였다. 지난 2014년 지방선거서 당시 새누리당 정진석 후보를 제치고 재선에 성공하면서 단숨에 대선주자로 발돋움했다. 정치권은 굴곡의 시간을 보낸 안 지사가 ‘대망’의 꿈을 이룰지 주목하고 있다.

[이재명]
시장님 파워

경북 안동 출신의 이재명 성남시장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1976년 성남으로 이사 온 그는 불과 14세의 나이에 상대원 공장의 목걸이 공장에 취업했다. 그는 저서에서 “납과 염산에 얼굴을 묻고 살았다. 납 같은 게 몸을 얼마나 상하게 하는지 알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 시장은 산업재해로 장애 6급 판정을 받아 병역이 면제됐다. 공장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한 뒤 사법고시까지 패스했다. 그는 판검사가 아닌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이 시장은 저서에서 “주변 동료들에게 인권변호사를 하겠다고 너무 설레발을 쳐놓았던 터라 성적을 떠나 판사도 검사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성남시에서 변호사로 개업한 그는 경기도 이천시와 광주시에서 노동상담소장으로 활동했다. 1994년에는 성남참여연대를 결성했고, 2000년에는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 변경’ 특혜 의혹을 제기해 주목을 받았다.

2004년 성남시립병원설립추진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은 그는 청원운동을 벌이다 시의회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정치판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은 지 14년 만의 일이다. 성남서 2번의 낙선을 경험한 그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51%의 지지율을 얻고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시장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지방정부 최초로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해 3년 만에 4500억여원의 빚을 갚았다. 청사를 시민들에게 돌려주고 무상급식과 ‘기본소득’의 일종인 청년배당을 시행했다.

그의 활동에 성남시의 마음도 움직였다. 지난 2014년 재선에 도전한 그는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해 연임에 성공했다. 그는 탄핵정국서 다른 대선 후보와 다르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주목받았다. 또한 선명성을 드러내면서 한때 대선주자 지지율 2위를 꿰차기도 했다. 현재는 지지율 정체 국면인 가운데 당내 경선에 집중하고 있는 모양새다.

[안철수]
지난 대선 때 데뷔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는 경남 밀양 출신으로 부산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는 1980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박사과정을 밟던 중 그는 컴퓨터 바이러스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낮에는 의사, 밤에는 백신 제작자로 7년여간 이중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안철수연구소(현 안랩)’를 세워 개인에는 백신을 무료로 보급하고, 기업에는 사용료를 받는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했다. 이후 안철수연구소에서 물러난 안 전 대표는 MB(이명박)정권 시절 대통령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정치권에 ‘안풍’이 분 것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 선거때였다. 당시 안 전 대표는 지지율 50%가 넘는 ‘안철수 현상’이라는 신드롬을 일으켰다. 출마를 망설이던 그는 결국 박원순 변호사에게 자리를 양보했고, 박 변호사는 서울시장에 올랐다.

이듬해 제18대 대선부터 안 전 대표는 대선주자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2012년 9월19일 안 전 대표는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안 전 대표는 박 전 대통령과의 가상 양자대결서 박 전 대통령을 압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에서 유력한 대선주자였지만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 과정서 여러 가지 마찰을 빚으면서 2012년 11월23일에 돌연 후보직 사퇴를 선언했다. 이듬해 노원병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서 60.5%라는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된 안 전 대표는 본격적으로 ‘자기 정치’를 시작했다.

안철수, 사업가서 정치인으로
유승민, 좋은 집안서 잘 자라


이후 친문(친 문재인)패권주의에 반기를 들고 나온 안 전 대표는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창당 직후 국민의당은 지난 총선서 의석 38을 가져오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대선 풍향계’로 통하는 호남을 석권했다. 현재 안 전 대표는 지난 대선 때만큼의 지지율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안 전 대표가 주장하는 대로 결국 ‘문재인-안철수’ 양자대결 구도로 흐른다면 이번 대선은 예측불허의 승부가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홍준표]
YS의 권유로

경남 창녕서 태어난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대구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고려대학교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시절 울산에 내려가 일당 800원짜리 현대조선소 경비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를 보고 세상을 바꿀 결심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훗날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청주지검을 시작으로 부산지검, 광주지검, 서울지검서 검사로 재직한 홍 지사는 1988년 전두환 측근 비리를 척결했다. 1991년 광주지검 강력부 강력계 검사로 부임하고 나서부터는 조폭들의 저승사자가 됐다.

홍 지사는 지난 2013년 2월 그가 술을 끊게 된 계기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1991년 3월부터 여자가 있는 술집은 안 간다”며 “그 당시 광주엔 룸살롱을 거의 건달들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검사가 그런 곳 가서 술 마시고 무절제한 행동을 하면 건달들에게 약점을 잡힌다”고 말했다.

그가 검사로서 이름을 날리게 된 사건은 1993년 ‘슬롯머신 사건’이다. 그는 ‘6공의 황태자’로 불린 박철언 등 권력 실세들을 구속 기소해 명성을 얻었다. 이 사건은 드라마 <모래시계>의 모티브가 됐고, 그는 모래시계 검사라는 별명도 얻게 됐다.

1995년 10월 정계 진출을 시사하면서 검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가 됐다.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도 받아 정계에 입문했다. 1996년 신한국당에 입당해 제15대 총선서 금배지를 달았다. 이후 선거법 위반혐의로 국회의원직을 잃었지만 재보궐 선거를 통해 16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승승장구한 그는 17·1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2012년 11월27일 대선 후보로 출마한 김두관 경남도지사의 후임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권영길 후보를 누르고 경남도지사에 당선됐고, 2014년 지방 선거에도 이겨 연임에 성공했다.

도지사로 활동하던 중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터지면서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된 재판이 열린 지난달 16일 그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곧바로 홍 지사는 자유한국당의 유력 대선주자로 발돋움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불출마로 인한 반사이익도 얻었다. 현재 홍 지사는 보수진영 단일화에 나서면서 대권행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유승민]
이회창과 인연

1958년 대구서 출생한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은 초·중·고등학교를 대구서 마쳤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한 유 의원은 위스콘신대학교서 경제학 석·박사를 받았다. 이후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수석연구위원으로 12년간 일했다.

한국개발연구원서 연구위원 시절 당시 연구원이었던 바른정당 이혜훈 의원과의 인연은 익히 알려졌다. 현재도 두 사람은 정치적 행보를 같이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에 있던 유 의원을 정계로 끌어들인 사람은 2000년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였다.

이에 유 의원은 “정치권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법조계 출신 정치인이었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통해서였다”며 “이를 계기로 마흔두 살이던 2000년 2월 한나라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했다”고 말했다.

그는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캠프에서 정책개발, 메시지 담당, 연설 담당을 맡았다. 그때의 인연을 바탕으로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는 이번 대선서 유 의원 지지를 선언했다.

이 전 총재의 낙선 이후 유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났고, 17대 총선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2005년 1월 박근혜 당 대표 비서실장직을 맡았고 같은 해 10월 비례대표직을 던지고 대구 동구을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지역구 의원으로 거듭났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당내 경선서 박근혜 후보의 정책메시지 총괄단장을 맡았고,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저격수로 활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 의원을 대선주자급 정치인으로 만든 사람은 박 전 대통령이다.

박근혜정부서 유 의원은 친박서 배제됐다. 지난 2015년 2월 원내대표에 선출된 유 의원은 첫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박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을 비판했다.

이후 친박 공천 학살 과정서 유 의원은 탈당, 무소속으로 대구에 출마해 전국구 정치인이 됐다. 특히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서 유 의원은 전면에 나서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하면서 정치적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탄핵 이후 지지율 정체 국면은 유 의원이 대선 승리를 위해 해결해야 할 최대의 과제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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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