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여럿 목줄 쥔 이영복

570억, 누구 입에 털어 넣었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최순실 게이트’로 사면초가 상황에 놓인 박근혜 대통령이 엘시티 사업 비리 의혹과 관련해 연루자들을 엄단하라고 지시했다. 비선 실세 국정농단 의혹으로 운신의 폭이 좁아진 박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지시에 정치권은 크게 술렁였다.

이를 두고 성난 민심의 칼끝을 돌리기 위한 국면 전환용이라는 말이 야권을 중심으로 흘러나왔다. 일각에선 박 대통령이 띄운 승부수가 자칫 본인과 여권 전체의 공멸을 야기하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부산 해운대 초고층 주상복합단지 엘시티(LCT) 사업 비리 핵심 피의자로 지목된 이영복 회장이 지난 10일 자수 형식으로 경찰에 붙잡혔다. 이 회장은 지난 8월 초 검찰수사 도중 잠적, 석달 넘게 도피생활을 해왔다. 검찰은 회사 돈 570억원을 횡령했거나 가로챈 혐의로 이 회장을 공개수배한 바 있다. 이 회장은 이 돈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정관계 유력 인사들에게 전방위적인 로비 의혹을 받고 있다.

제발로 경찰에
향후 파급력은?

도주 기간 동안 그의 근황을 둘러싸고 해외출국설, 중국 밀항설, 신변 이상설, 자살설 등 갖가지 설이 난무했다. 하지만 이 회장이 경찰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면서 그 배경을 비롯해 이후 몰아칠 후폭풍에 정치권과 공직사회의 촉각이 곤두선 상태다.


박 대통령은 지난 16일, 엘시티 사업에 측근 인사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강하게 부인하면서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 관련자들을 엄단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가 엘시티 사업에 대통령 측근 인사가 개입돼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박 원내대표의 의혹 제기는 근거 없는 정치공세라고 강조했다.

앞서 박 위원장은 이날 오전 국회 비대위서 건설사가 수주할 때에는 시장조사와 타당성을 조사해 결정한다그런데 포스코건설서 10일 만에 보증채무가 이뤄져 전광석화처럼 작업이 진행됐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박 위원장은 포스코에 그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대통령과 가장 가깝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정치인이라며 이 정치인이 개입했다는 제보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엘시티 사업 비리 의혹은 또 하나의 최순실 게이트라고도 했다.

엘시티 사업은 16개 금융기관서 2조원에 가까운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을 받아 정권 실세가 관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프로젝트 파이낸싱은 대형 부동산 개발 등 위험이 큰 대규모 사업에 주로 사용되는 자금 조달 방법으로, 금융사가 업주의 신용이나 담보물의 가치보다는 사업 자체의 경제성을 믿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말한다.

해운대 엘시티 특혜 의혹 게이트로?
부산 고위관료·정치인들 좌불안석

야권은 즉각 반발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더민주) 박경미 대변인은 국회 브리핑서 “(엘시티 사업 비리 의혹에 대해) 당연히 철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하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서도 박 대통령에 대한 퇴진 요구가 거센 상황에서 철저한 수사와 연루자 엄단을 지시한 것은 어불성설이자 가당치 않다고 비판했다.

전대미문의 국정농단 사태로 검찰조사에 응해야 할 대통령이 누구를 엄단한단 말인가라며 정치적 저의가 매우 의심스럽다고 했다.

국민의당 손금주 수석대변인은 전형적인 물타기이자 공안정국을 조장, 퇴진 국면을 전환하려는 꼼수라며 박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거슬러 공작 정치를 발동하려 하지 말고 겸허히 검찰 수사를 받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박 대통령의 엘시티 수사 지시가 ‘최순실 게이트 물타기’라고 주장하는 야권의 비판에 청와대는 근거 없는 의혹 제기에 대한 혼란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재차 주장했다.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엘시티 사업 비리 의혹에 야권과 청와대가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대권주자 두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와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다.

김 전 대표는 지난 17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서 현 시점에서 엘시티 비리 의혹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박 대통령과 대척점에 섰다.

그는 엘시티 비리 의혹과 관련해 청와대가 개입돼 있다는 주장을 두고 관여가 없다는 걸 강조하다 보니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압박받을 사람은 받는 것이고 압박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은 받을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김 전 대표는 엘시티 사업 비리 의혹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자 허위사실 유포·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루머 유포자들을 고소했다.

문 전 대표 역시 엘시티 연루설을 퍼트린 유포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문 전 대표는 지난 대선 당시 십알단(십자가 알바단)이나 댓글부대와 같은 일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이런 식의 흑색선전이 더 이상 대한민국 정치와 선거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대응하고 발본색원해 나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문 전 대표의 엘시티 사업 비리 연루설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이하 박사모)’이 개입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었다.

더민주 조한기 의원은 SNS십알단이 부활하고 박사모가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박사모가) ‘엘시티 문재인실검(실시간 검색) 2위까지 올리고 1위로 올리겠다고 자랑한다고 적었다. 조 의원은 박사모의 한 회원이 홈페이지에 이제 검색어에 엘시티 문재인 같이 연결돼서 순위 오르고 있읍니다라고 쓴 인터넷 화면 캡처를 함께 게재했다.


화면 캡처에는 더 검색하세요. 댓글도 다시고 엘시티로 보수는 집결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박사모 측은 제기된 논란에 강경 대응하겠다고 나선 상태다. 박사모 정광용 중앙회장은 대한민국 박사모 회장으로서 경고한다박사모 지도부는 루머와 관련해 조직적으로 움직인 바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관련 허위사실 유포자들을 법적 조치하겠다고 경고했다.

문·김 화들짝
강경한 대응

대권주자인 여야 전직 대표가 형사고발 등 허위사실 유포에 강경 대응하는 것은 엘시티 사업 비리 의혹이 게이트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엘시티 사업 비리 의혹은 공무원, 정치인, 국정원 전현직 간부까지 연루됐다는 말이 나오는 등 현재 거론되는 인물만 수십명에 달하는 대형 사건이다.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이 회장의 입에 눈과 귀가 쏠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엘시티 사업은 사업비만 27000억원 규모에 이른다. 해운대 해수욕장을 앞마당으로 하는 65394부지에 101층 랜드마크 1개동과 85층 주거 타워 2개동이 선다. 6성급 레지던스 호텔, 워터파크 등도 들어간다. 포스코건설이 시공을 맡아 2019년 완공 예정에 있다.


엘시티 사업은 특혜 범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곳곳에 의혹이 가득하다. 가장 크게 대두되는 의혹은 인허가 특혜 논란이다. 부산시, 해운대구, 부산도시공사 등이 사업 과정서 도시계획 변경과 주거시설 허용 등 사업계획 변경, 환경영향평가, 교통영향평가 등에서 각종 특혜를 몰아줬다는 의혹이다.

부산시는 2006년 엘시티 입지를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하고 2007년 주상복합 아파트를 포함한 공동주택과 오피스텔만 금지, 호텔·콘도를 비롯한 위락시설만 짓는 조건으로 민간투자자 모집에 나섰다. 부산도시공사는 이 회장이 대표로 있던 청안건설 등 20개 기업이 참여한 트리플스퀘어 컨소시엄(현 엘시티PFV)을 선정했다.

선정 과정서도 의문점은 있었다. 당시 3개 컨소시엄이 신청서를 냈는데 다른 두 개 컨소시엄이 70층 규모의 건축물을 설계한 것에 반해 엘시티는 117층 높이로 개발안을 내놨다. 일반 상업 시설만으로 구성된 100층 이상 랜드마크 건물의 사업성 여부에 시민단체도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규제를 하나씩 풀리면서 엘시티 사업이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특혜 백화점’
수상한 박사모

200811월 해운대구의회가 옛 한국콘도 자리를 편입해 달라고 청원하자 부산시는 도시계획변경 절차를 밟아 승인했다. 이 덕분에 엘시티 입지는 510에서 6539431.8%가 늘어났다. 여기에 시행사 엘시티는 사업성을 문제 삼아 부지에 아파트를 지을 수 있도록 용도 변경을 요구했고, 부산시와 도시공사는 이 또한 들어줬다.

2009년 부산시 도시계획위원회는 해운대 해수욕장 인근 지역 난개발을 막기 위해 만든 해안경관 개선지침 규정을 변경했다. 원래는 중심미관지구와 일반미관지구로 지역을 이원화해 중심미관지구에는 건축물 높이를 최고 60m 이하로 규정하고 주거시설을 짓지 못하게 했다.

원래대로라면 엘시티 부지에 주거 타워는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시계획위원회는 해운대 해수욕장 인근을 일반미관지구로 일원화했다. 용도변경과 고도제한 완화로 엘시티 입지는 초고층 주거 타워가 들어설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환경영향평가도 면제받았다. 부산시는 도시개발사업은 사업면적 125000이상인 경우 환경영향평가를 받는다는 조례를 인용해 65394인 엘시티 사업의 환경영향평가를 면제했다. 그러나 엘시티의 연면적은 661134로 사업 면적에 비해 매우 넓다.

환경영향평가는 사업 계획 수립 과정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미리 조사하고 예측, 평가해 해로운 환경영향을 피하거나 줄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을 말한다. 엘시티가 해운대 해수욕장을 앞마당으로 둘 정도로 가까운 곳에 세워지는 만큼 부산시에서 자체적으로라도 환경영향평가를 진행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대통령 언급 노림수는?
문재인·김무성 소문도

교통영향평가도 문제로 지적됐다. 교통영향평가는 교통의 수요를 예측하고 검토·분석해 교통 정책을 강구하는 것으로 건축물 신축 등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을 진행할 때 시행되는 제도다. 엘시티 부지에는 주거 시설, 호텔, 워터파크 등이 들어설 예정이었기에 교통량 증가는 당연했다.

하지만 부산시 건축위원회 산하 교통소위원회는 약식으로만 교통영향평가를 진행했다. 또 부산시는 온천사거리~마포 6거리 도로 폭을 15m에서 20m로 넓히는 공사를, 해운대구는 달맞이길 62번길 도로 폭을 12m20m로 넓히는 공사를 해주기로 했다.

입지 주변 도로 확장은 교통 유발 원인자가 부담하는 게 일반적인데 반해 시가 공사를 자처하고 나섰기에 이례적이라는 말이 나왔다.

게다가 군인공제회와 BNK금융그룹 부산은행이 이 회장에게 수천억원대의 특혜 대출을 해줬다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엘시티 시행사는 땅 매수비와 설계용역비 조달을 위해 2008년 군인공제회와 3200억원 규모의 대여 약정을 체결했다. 당시 엘시티 시행사는 대출금의 이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자금 사정이 나빴다.

군인공제회는 그런 사정을 배려해주듯 20115월로 예정돼 있던 대출기한을 여러 번 연장해줬고, 같은 해 12월에는 대출금을 250억원 늘려주기까지 했다. 3000억원이 넘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황에서 대출기한을 연장해주고 추가로 돈을 더 대출해주는 상식 밖의 일을 한 것이다.

군인공제회는 201410월에야 3550억원을 상환 받았다. 그나마도 대출이자 2379억 원은 면제해주고, 대출 원금에 100억 원만 더 얹어 받았다. 이자 2379억원은 고스란히 군인공제회의 손실이 됐다.

엘시티 시행사는 이 돈을 갚는 과정서 부산은행에 3800억원을 대출받았다. 문제는 이미 약 1800억원대 개인 채무가 있던 이 회장에게 부산은행이 뭘 믿고 4000억원에 가까운 돈을 대출해줬냐는 점이다. 부산은행은 담보도 없이 이 회장에게 돈을 빌려줬다.

의혹의 눈초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회장이 갖고 있던 약 1800억원의 빚은 과거 부산 다대·만덕 택지전환 의혹 사건으로 빌린 개인 및 법인 정산 채무다. 이 회장은 주택도시보증공사에서 빌린 자금 중 620억원과 이자 1200억원을 갚지 않았다.

부산판 수서사건으로 불리는 다대·만덕 택지전환 의혹사건은 이 회장이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사들인 부산 사하구 다대동 임야가 뚜렷한 이유없이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택지로 전환된 사건이다. 이 회장은 당시 최소 1000억원의 시세 차익을 챙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택지 전환 과정에서 정관계 로비설, 압력설 등이 난무했다.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가 다뤄졌고, 이 회장은 검찰 조사가 시작되자 잠적해 2년간이나 수사망을 피해 도피 행각을 벌였다. 부산시 최고위층, 정치권 인사 등이 비리에 연루됐다는 소문은 파다했지만 2년 만에 자수한 이 회장이 의혹을 부인하면서 횡령 등 일부 혐의만 인정돼 집행유예 판결이 떨어졌다. 검찰조사 때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던 이 회장은 입이 무거운 자물통이라는 평을 받았고 엘시티 사업권을 따내면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최근 정국을 달구고 있는 최순실 게이트에 엘시티 사업이 맞닿아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불씨가 크게 타오를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 회장이 최순실씨, 언니 최순득씨와 함께 계모임에 가입돼 있던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중앙일보>는 계모임 운영자와 총무에게서 가입한 시기는 차이가 있지만 이 회장, 최씨, 최씨의 언니가 계모임 계원인 것은 맞다고 했다. 이 회장과 최씨 간의 연결고리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이 회장은 일단 계모임 계원이었던 사실은 인정했지만 최씨는 모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지난 17일, 세 사람이 가입했던 계모임 계주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비자금 어디에?
정치권 바짝 긴장

검찰은 이 회장이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는 570억원의 흐름에 대해 쫓고 있다. ‘일사천리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술술 풀렸던 엘시티 사업에 고위급 인사가 개입됐다는 설이 흘러나오면서 그 돈이 로비 자금으로 쓰인 것은 아닌지 여부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한편 검찰은 이 회장이 조성한 비자금 중 절반가량은 사용처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자신과 가족의 부동산 취득, 개인 채무 변제, 생활비, 차명회사 운영비 등에 돈을 썼다고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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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