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지난달 ‘김영란법’이 본격 시행되면서 공직사회가 잔뜩 움츠린 모습이다. ‘일단 소나기는 피해가자’란 인식 때문이다. 외부인사들과의 만남을 취소하거나 자제하는 등 극도로 몸을 사리는 분위기다. 김영란법이 깨끗하고 건강한 사회로 가는 과정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정(情)에 의존해왔던 우리나라의 오랜 관습조차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되는 것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시청 감사부서에는 김영란법 저촉 여부를 문의하는 각 부서의 문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막 시행돼 판례도 없는 데다 워낙 다방면에 적용되는 까닭에 혼란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모임을 하려는데 법에 저촉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비롯해 행사개최 시 저촉 여부, 경·조사를 둘러싼 적법성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제시한 사례를 찾아 해답을 제시하느라 일상 업무를 수행하지 못할 정도다. 한 직원은 “적용 사례가 너무 광범위하다 보니 실무자 입장서도 헷갈릴 때가 있다. 저도 모르겠다”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감사 떡 보냈다…
김영란법 1호 수사
경찰에게 감사의 인사로 떡을 선물한 민원인의 사례가 김영란법의 1호가 됐다. 춘천경찰서의 A경찰관은 4만5000원짜리 떡 한 박스를 배달받았다. A경찰관은 이 떡을 바로 돌려보낸 뒤 청문감사실에 자진신고했다. 떡을 보낸 시민 B씨는 “자신의 고소 사건을 맡은 경찰관에게 개인 사정을 고려해 조사 시간을 조정해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며 선물 이유를 설명했다.
경찰은 해당 선물이 직무 연관성이 있는 수사관에게 떡을 보내 김영란법 위반으로 판단해 사건을 법원에 넘겼다. 경찰관 A씨는 자진신고 했기 때문에 처벌 받지는 않지만 법원이 위법이라 판단할 경우 B씨는 금품 가액의 적게는 2배에서 많게는 5배까지 과태료를 내야 한다.
커피 2잔도…
놀라 자진신고
수원지검 형사부 소속 수사관 C씨는 자신의 사무실 책상에 4000원 상당의 테이크아웃 커피 2잔이 올려져 있던 것을 발견, 청탁방지 담당관에 자진 신고했다. 이 커피는 C씨에게 조사를 받은 한 사건 피해자 D씨가 조사를 끝낸 뒤 놓고 간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조사에서 D씨는 통상적인 고마움의 표시로 커피를 놓고 갔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과태료 대상이긴 하지만 사회적 상규 상 처벌해야 할 대상인지 법률 검토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담뱃값 1만원
2∼5배 과태료
서울서도 경찰관에게 1만원을 건네려던 70대 남성이 재판에 넘겨졌다. 박모(73)씨는 폭행혐의로 영등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친절하게 조사해줘 고맙다”며 담당 경찰관에게 1만원을 건넸다. 해당 경찰관은 곧바로 돈을 돌려줬지만 박씨는 몰래 사무실 바닥에 돈을 떨어뜨리고 갔다.
뒤늦게 이를 발견한 경찰관은 경찰서 내부망인 ‘클린선물신고센터'에 신고한 뒤 이날 오전 박씨의 집을 찾아가 돈을 돌려줬다. 경찰은 조사를 거쳐 박씨가 직무 관련성이 있는 경찰관에게 몰래 돈을 준 것이 청탁금지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봤다.
고마움 담긴 선물 잇따라 신고
시골 인심마저 ‘법으로’ 심판
박씨의 혐의가 인정되면 박씨는 제공한 금품의 2∼5배에 해당하는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위반 사실의 소명이 불충분하면 보완을 요구하거나 처벌을 내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학부모들 선물
징계로 돌아와
대구 달서구 모 초등학교에선 한 교사가 상담 중 학부모에게 받은 선물로 징계 위기에 놓였다. 대구시교육청에 따르면 한 초등학교 담임교사가 지난달 학부모 상담주간에 세 명의 학부모로부터 각각 조각 케이크, 화과자 세트, 수제 비누를 받아 학생들과 함께 먹은 일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최근 익명의 제보를 받은 교육청은 선물을 받은 시기가 김영란법 시행 이전이지만 사실 확인을 거쳐 공무원 행동강령 위반 여부가 확인되면 교육청 징계위원회에 회부할 방침이다.
할머니의 호박
다시 돌려보내
전북 고창군의 한 초등학교 교사 E(38·여)씨는 최근 방과 후 학교를 방문한 F(77) 할머니를 되돌려 보낸 뒤 미안함에 한참이나 교실을 떠날 수 없었다. 조손가정이 많은 시골 특성상 손주를 가르쳐준 보답으로 약간의 농작물을 가져오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예전엔 마지못해 받았지만 이날은 김영란법 때문에 F할머니가 보자기에 싸온 늙은 호박 한 개를 한사코 사양했다. E씨는 “법에 걸리니 큰일난다. 대신 아이는 제가 더 잘 챙기겠다”고 말했지만 “호박이 무슨 뇌물도 아닌데…”라며 서운해하며 쓸쓸히 돌아선 F할머니의 뒷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무거웠다고 했다.
운영비 마련하려고
고육지책 일일찻집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름의 자구책을 내놓기도 한다. 강원도 춘천서 30년간 맥을 이어온 예맥야간학교는 학교 강의실서 일일찻집을 열었다. 예년에 없었던 행사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기부문화가 위축된 탓에 운영비 마련을 위한 ‘고육지책’이다.
예맥야간학교 관계자는 “매년 지방자치단체 지원금도 줄고 있는데 김영란법으로 부정기 후원금도 줄어드는 분위기라 그 대안으로 어렵게 일일찻집을 열게 됐다”고 설명했다.
손녀 같아 준
음료수까지 NO
옥천군 군북면의 한 할아버지(85)는 지병인 고혈압과 당뇨 상태를 체크하고 한 달 동안 먹을 약을 받기 위해 매월 한 차례 옆 마을에 있는 보건지소를 찾는다. 그곳에 갈 때마다 자신을 반겨주는 직원들이 고맙고 언제나 챙겨주는 게 마음에 걸려 이달 초 약을 받으러 가면서 1만원짜리 비타민 음료를 샀다.
손녀뻘 되는 직원들을 위해 감사의 선물로 음료 상자를 전해주려다 직원들이 김영란법을 문제 삼아 한사코 받기를 거절하는 바람에 승강이 끝에 하는 수 없이 가져갔던 음료를 다시 들고 나왔다. 그는 할아버지뻘 되는 촌로의 순수한 성의까지 받아주지 않는 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그동안 보건지소에서 건넨 음료만 해도 내가 들고 간 것보다 많다”며 “좋은 취지는 이해하지만 시골 늙은이의 고마운 마음을 전할 수 없게 하는 건 너무한 것 아니냐”고 푸념했다.
호형호제하다
남남처럼 식사
옥천군의 한 면사무소에선 이장단 회의 뒤 이장과 면사무소 직원들이 따로 식사하는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이 지역 이장들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면사무소에 모여 회의를 한다. 군정 현안을 설명 듣고 건의사항 등을 내놓는 자리인데, 당연히 면장 등 공무원이 배석하고, 회의 뒤에는 자연스럽게 식사자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면의 이장단협의회장은 “회의가 끝나면 으레 국밥이나 칼국수 한 그릇 하는 자리가 마련되는데, 면 직원들이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 식사는 우리끼리 했다”며 “평소 호형호제하는 사이인데도 갑자기 삭막해진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의사 만나기가…
제약회사도 타격
환자나 보호자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의료진에게 선물하는 음료수나 과일 등도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의료계에 따르면 김영란법 시행 이후 그동안 ‘정’으로 생각하고 오가던 소정의 선물 등이 차츰 없어지는 분위기다. 제약회사들과 의사들의 만남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특히 대형 제약회사들은 영업에 큰 타격을 받고 있다. 공립 대학병원에 재직하고 있는 직원들은 공무원에 준하는 적용을 받게 되고 사립 대학병원에 재직하는 직원들은 교직원에 준하는 적용을 받기 때문이다. 청탁금지법이 시행된 후 입원 병동의 모습도 바뀌고 있다.
지역의 한 종합병원에는 정을 담은 사소한 선물이나 다과 등을 의료진에게 건네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게시물이 붙었고, 환자나 보호자의 성화에 선물을 받더라도 총무부 등에 신고하는 분위기다.
성의 무시한다
환자들은 무안
울산대병원은 최근 각 병동 게시판에 환자에게 받는 음식물은 무조건 받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고지했다. 하지만 이를 잘 모르고 빵 등을 건네는 노인 환자들을 설득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일부는 자신의 성의를 무시한다며 역정을 내기도 한다.
적용 사례 광범위…실무자도 헷갈려
권익위마저 뚜렷한 기준제시 못해
한 간호사는 “음식물을 받지 않으면 무안해 하는 환자들 때문에 난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라며 “똑같은 간호 업무인데 일반병원은 예외로 인정해주고 대학병원만 법 적용을 받는 등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전했다.
특별한 꽃 선물
찾아보기 힘들어
서대문구의 한 웨딩홀 복도는 화환 하나 없이 한산하다. 웨딩홀 관계자는 “오전 11시30분과 오후 12시30분 잇따라 예식이 있었지만 평소와 달리 화환은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화환업계에선 이미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화환 전문업체를 운영하는 김모씨는 “며칠 새 화환 주문이 20∼30% 줄었다”고 울상을 지었다.
동대문구서 꽃집을 운영하는 정모씨는 “아직 김영란법 영향은 크게 없었다”면서도 “졸업식이나 결혼식 등 특별한 날이 아니면 꽃을 주고받을 일이 없는데 법으로 한도를 정해버려 이마저도 부담스럽게 만들어버린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취업계 논란
졸업생 혼란
취업이 확정된 대학 예비졸업생들은 큰 혼란을 겪고 있다. 대전의 한 대학에 다니는 김모(24)는 최근 한 기업으로부터 입사가 확정됐다는 통지를 받았지만 김영란법 때문에 울상을 짓고 있다. 그는 “취업계를 내고 일을 하려고 했지만, 김영란법 때문에 계획이 다 틀어졌다”며 한숨을 쉬었다.
권익위는 이른바 ‘취업계’가 학점당 이수시간과 관련된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14조를 위반 조작하도록 하는 행위로 청탁금지법 제5조 제1항 제10호의 부정청탁 대상직무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만약 교수가 조기 취업생들의 취업계 부탁을 받아줄 경우 김영란법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게 된다.
어렵게 잡은 취업 기회를 잃을 처지에 놓인 대학 예비 졸업생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이랬다 저랬다
애매하게 해석
시민들은 법 적용 기준을 둘러싸고 국민권익위원회마저 뚜렷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데다 법 해석과정서 이런저런 고려사항을 무시할 경우 큰 혼란이 야기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포괄적 법 적용이라는 김영란법의 모호함 탓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특히 사회가 삭막해질 것을 우려했다.
상하 간, 동료 간 ‘호불호’ ‘개인적 감정’에 의해 누군가를 골탕 먹이기 위해 문제를 제기하는 등 조직 분란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벌써부터 내부고발자가 양산될 것이란 설득력 있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평소 자연스럽게 이뤄지던 발언조차도 자칫 오해받을 수 있으므로 경계심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계 출신 인사는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인 ‘나눔의 미덕’마저 모두 범죄시하는 이런 법이 인간관계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