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의 여성 ‘로비스트’ 린다김(59)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6년 문민정부 시절 무기 로비스트로 활동하던 린다김은 ‘백두사업’ 응찰업체의 로비스트로 활동하면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당시 국방부장관 등 국내 고위급 인사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 촉망받던 여성 로비스트는 섹스스캔들 주인공으로 전락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정권 실세들의 연서까지 받을 만큼 국제적으로 그 능력(?)을 인정받았던 린다김의 화려했지만 어두웠던 그때를 돌아봤다. 국방장관 비롯한 정·관계 고위인사들과 스캔들 한때 방송출연 하기도 해 눈길…최근 근황은? 린다김하면 떠오르는 단어 로비스트. 바로 이 로비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린다김을 치면 연관 검색어로 린다김 로비사건이 뜬다. 1996년 문민정보 시절 무기 로비스트 린다김이 백두사업 응찰업체의 로비스트로 활동하면서 입찰 과정에 의혹이 제기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린다김의 한국 이름은 김귀옥으로 성장과정이나 경력 등에 관해서는 기
1949년 6월,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다. 사건 당시 안두희는 "김구가 남북협상에 응함으로써 정치와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기 때문에 그를 죽였다"고 살해 동기를 진술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김구 암살사건은 안두희의 단독 범행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한국독립당의 비밀당원이었던 안두희가 당수인 김구를 찾아가 어떤 정치문제에 관해 언쟁을 벌이다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이라는 것. 하지만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안두희는 석 달 뒤 징역 15년으로 감형됐고, 이듬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바로 군에 복귀, 대령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다. 전역 후에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업자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4·19혁명 이후 김구 암살사건의 진상 규명과 안두희에 대한 재처벌 요구가 제기됐지만 안두희는 끝까지 전모를 밝히지 않았다. 제2공화국 정부 역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재처벌은 물론 사건의 진상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안두희의 부분진술이나 지금까지 벌인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김구 암살사건은 배후가 있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범행일 가능성이 크다.
1949년 6월26일 일요일 오전, 육군 소위 안두희는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 선생을 찾아가 45구경 권총으로 살해했다.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된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석 달 뒤 징역 15년형으로 감형됐고, 다음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현역으로 복귀, 대령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전역 후 안두희는 민족의 지도자로 존경받던 백범 김구 암살범이라는 이름하에 여러 사람들에게 피습위협을 받았지만, 암살 배후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은신과 도피를 되풀이하던 안두희의 마지막은 참담했다. 그는 백범 암살범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백주대로를 활보하는데 의분을 느낀 버스운전기사 박기서(당시 46세)씨에 의해 1996년 10월23일 처단됐다. 학창시절부터 백범 김구 선생 추앙, 안두희 살해 결심 정의봉으로 안씨 처단, 죗값 치른 뒤 평범한 일상으로 당시 79세였던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1996년 10월23일 오전 11시30분경 인천 중구 신흥동 3가 동영아파트 502호 자택에서 피습 사망했다. 안두희를 살해한 박기서씨는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했다. 부천 소신여객 버스운전기사로 일하던 박씨는 이날 오전 안두희를 찾아갔다. 마침 안씨의 부인인 김명희(당
사회에 불만을 품어 온 김기환(당시 26세)은 1993년 4월경 학교 후배 강동은, 교도소 동기 문상록 등과 함께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에서 대학입시 부정사건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가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나타내자는데 뜻을 함께하고 지존파를 결성했다. 야타족과 부유층을 대상으로 살인을 계획한 이들은 현대백화점의 고객 명단을 입수하고 이를 범행대상으로 삼았다. 살인 예행연습을 위해 7월 길 가던 20대 여성을 납치해 성폭행하고 살해, 암매장했고 8월에는 조직을 이탈한 조직원을 살해했다. 조직원 포함 총 5명 잔혹 살해 시체 암매장 사체 토막 내 불에 태우거나 일부 먹기도 해 이들은 그들의 아지트에 창살 감옥과 사체 은닉을 위한 사체 소각시설을 갖춰놓고 본격적인 살인을 벌였다. 같은 해 9월 이종원-이경숙(당시 27세·여) 커플과 중소기업 사업가 소윤오 부부를 납치해 돈을 갈취하고 이경숙씨를 제외한 3명을 모두 살해, 토막 내고 불에 태웠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피해자들의 신체 일부를 조리해서 먹는 충격적인 행위까지 저질렀던 것으로 밝혀졌다. 납치됐던 이 경숙씨는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 2명을 죽이고 지존파 일원으로
1996년 10월 말경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사업가 부부를 납치 살해하고 배신한 조직원 1명 등 총 5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뒤 사체를 암매장 하거나 불에 태운 지존파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지존파를 모방한 막가파가 등장한 이유에서다. 20세 젊은피로 구성된 막가파 조직원 5명은 40대 여성을 승용차로 잡치, 금품을 빼앗고 구덩이에 산채로 넣어 살해했다.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른 막가파의 중심에 두목 최정수(35)가 있었다. 40대 술집 여주인 납치 돈 뺏고 구덩이에 생매장 살해 사형확정수 복역 14년째, 종교에 눈 떠 참회의 삶 영위 두목 최정수를 필두로한 막가파 조직원들은 유흥가 등지에서 만나 1996년 9월 중순께 20세의 어린 나이로 지존파를 모방한 막가파를 결성했다. 조직을 결성한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범행에 돌입했다. 같은 해 10월5일 오전 2시께 최씨 등 조직원 3명은 서울 강남구 포이동 모 빌라 앞에 잠복해 있다가 일제 혼다 어코드 승용차를 타고 귀가하던 김모(당시 41·여)를 납치했다. 그들은 김씨의 눈을 가리고 청테이프로 손을 묶어 승용차 뒷좌석에 태운 뒤 김씨가 갖고 있던 현금 4
1996년 당시 피살된 최덕근 재러시아 영사는 외무직 부이사관으로 국장급이면서 외무부서 내에서 몇 안 되는 러시아 정보통으로 꼽혔다.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 공직생활 내내 러시아 관련 업무에 종사했다. 최 영사는 지난 1995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 부임하기 전에도 우크라이나 대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한 바 있다. 사장 전까지 총영사관에서 주로 맡은 업무는 대북정보수집이었으나 이 지역에 탈북자들이 많아 이 일도 담당했다. 무술에도 일가견 “쉽게 당할 사람 아닌데” 성격은 업무에 맞게 조용하면서도 매사에 흐트러짐 없이 치밀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면서도 성격이 모나지 않고 원만해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다는 후문이다. 또 어릴 적부터 운동으로 단련돼 비교적 건강한 체질이며 무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피살소식을 접해들은 주변 사람들이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닌데”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가족은 부인 김영자씨와 슬하에 1남1녀를 뒀다. 부인 김씨는 현지에서 최 영사와 함께 거주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지난 1996년, 세간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벌어졌다. ‘재러 영사 피살사건’이 바로 그것. 당시 북한의 마약밀매 동향을 추적하던 최덕근 영사는 괴한의 습격에 싸늘한 주검으로 남았다. 수사초점은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에 맞춰졌다. 모든 정황이 북한을 지목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사건은 유야무야가 됐다. 외교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러시아 형법상 살인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 올해가 끝이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해 일했던 한 외교관의 죽음이 결국 영구 미제로 남게 된 것이다. 머지않아 한·러 외교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충격적인 사건, 그 전말을 따라가 봤다.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하는 독극물 검출돼 러 무성의, 한국 소극적인 태도에 유야무야 지난 1996년 10월1일 러시아로부터 끔찍한 소식이 들려왔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 총영사관 소속 최덕근 영사가 자택 아파트 계단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 최 영사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한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뒤 귀가하던 중 괴한의 습격을 받고 피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외교관이 해외에서 살해된 것은 이 사건이 처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외에도 잠수함을 이용한 북한의 대남 간첩 침투는 여러 차례 있었다. 해군은 1983년 12월 부산 다대포에서 남파간첩을 내려놓고 귀환하던 북한의 반잠수정을 격침시켰다. 1985년 10월엔 부산 청사포 앞바다에 침투한 반잠수정을 격침시켰다. 1983년 이후 6차례 시도 교류 분위기 1998년 3건 금강산관광 등 남북교류협력 문제가 논의될 무렵인 1998년 3건의 침투 사건이 발생했다. 1996년 9월 ‘강릉 잠수함 침투’에 이어 1998년 6월 무장간첩 9명을 태운 북한 잠수정이 강원도 속초 해안으로 침투했다. 속초 해상에서 어망에 걸려 표류하다가 남한의 추격을 받자 9명 모두 집단 자살했다. 같은해 11월 강화도 부근 해상으로 침투한 북한 잠수정은 남한 해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북으로 도주했다. 12월엔 전남 여수 앞바다로 무장간첩 6∼8명을 태운 북한 반잠수정이 격침됐다. 당시 북한은 “북침전쟁 도발 구실을 찾기 위한 남한의 조작극”이라고 주장했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남북은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치열한 첩보전을 펼쳤다. 북한은 쉴 새 없이 간첩을 내려 보냈고, 정보를 캐는데 열을 올렸다. <일요시사>가 창간하고 4개월 뒤 터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혔다. 국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당시 무장공비들은 모두 사살되고 단 한명만 생존했다. 바로 이광수씨다. 그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강릉 잠수함 침투 무장공비 26명 중 유일 생포 군사시설 정보 캐러 남파…전향 후 해군서 근무 1996년 9월18일 새벽. 경찰에 한통의 신고 전화가 걸려왔다.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부근 해안도로를 운행 중이던 택시기사였다. “해안가에 정체가 불명한 선박이 둥둥 떠 있습니다. 거동이 수상한 자들도 왔다 갔다 하고요.” 비슷한 시간, 강동면 대포동에 위치한 해안초소에서도 이 지점에서 비치는 수상한 불빛과 연기를 감지해 상황실로 보고했다. 군경은 좌초된 선박이 북한 잠수함으로 확인, 공비들의 침투 사실을 인지했다. 결혼하고 학위 취득 무장공비는 모두 26명. 북한 대남공작기구중 하나인 인민무
‘한보 사태’당시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계와 관계, 금융계 등 핵심 인사 33명이 조사를 받았다. 국회에선 ‘한보 사태’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열려 58명의 증인과 4명의 참고인이 채택됐다. 정·관계 인사 33명 조사 김영삼 차남 현철씨 구속 그중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도 있었다. 문민정부 때 ‘소통령’으로 불린 현철씨는 검찰의 한보그룹 특혜비리 수사 과정에서 업체들로부터 이권청탁 명목으로 65억원을 받고 증여세 13억원을 포탈한 혐의가 드러나 1997년 구속, 2년을 복역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사건으로 대국민사과까지 했다. 현철씨는 1999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된 뒤 17대와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 2004년엔 불법 정치자금 20억원을 수수한 혐의로 다시 구속되는 수모를 겪었다. 현재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으로 있는 그는 “차기 총선에서 출마할 뜻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IMF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 1996년. 당시 암흑의 시대를 예고한 국내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의 줄도산 이어졌다. ‘대우그룹, 쌍용그룹, 동아그룹, 삼미그룹, 진로그룹, 해태그룹…’ 한국경제 파탄의 서곡을 알린 기업이 바로 한보그룹이다. 그 뒤엔 ‘로비의 귀재’ 정태수씨가 있었다. IMF 도화선 한보 부도 이어 금융스캔들 터져 15년형 선고 2002년 사면…4년째 도망자 신세 1996년 재계 서열 14위였던 한보그룹은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다 결국 이듬해 1월 부도가 났다. 이는 대기업들의 연쇄부도로 이어졌고, 한국경제의 파탄을 불러온 IMF 도화선이 됐다. 한보그룹의 부도액은 국내 부도사상 최대 금액인 1조원을 넘어 전 국민을 경악케 했다. 특히 부도 과정에서 5조7000억원에 달하는 특혜 대출 비리가 드러나 온 나라가 술렁거렸다. 권력형 금융 스캔들엔 정계와 관계, 금융계 등 핵심 인사들이 연루돼 충격을 더했다. 건국 이래 초유의 금융부정 사건으로 기록된 이른바 ‘한보 사태’의 주역이 바로 정태수씨다. 한보그룹 오너였던 정씨는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19
E1은 지난 2005년 10월부터 현재까지 축구 국가대표 공식 후원사다. 지난 2010년까지 총 64억원을 후원했다. 규모로는 나이키와 KT에 이은 세 번째다. E1은 국내 최초로 액화석유가스(LPG) 수입 사업을 시작한 대표적인 LPG 전문 기업이다. 지난 2001년부터 E1을 독자적으로 경영해 온 구 부회장은 회사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그가 건강하고 에너지 넘치는 기업의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축구 중심의 마케팅을 펼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톡톡한 홍보효과 거둬들여 LG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한 이후 구 부회장은 효과적인 브랜드 노출을 위한 파워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LPG라는 에너지 기업으로서 적절한 타깃은 중ㆍ장년층 남성. 그들이 선호하는 스포츠로 축구가 낙점됐던 것이다. 특히 아버지인 구평회 E1 명예회장이 2002년 한ㆍ일 월드컵 공동 유치를 이끌어낸 주역으로서 축구와 인연이 깊었던 점도 큰 배경으로 작용했다. E1은 현재 에너지 업계에서 유일하게 축구국가대표팀을 공식 후원하고 있다. E1은 공교롭게도 공식 후원사로 참여하면서 국가대표팀이 새로운 비상을 시작해 덩달아 E1의 홍보효과를 톡톡히 거두고 있다. E1 관계자는
서울 광화문을 가득 메운 붉은 물결과 뜨거운 함성. 2002년 한일월드컵의 풍경이다. 전에 없던 호사를 누렸기 때문일까. 그때 달궈진 우리 국민의 열정은 아직도 식을 줄 모른다.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물론 개최권을 따내는 게 쉽지는 않았다. 모두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구평회 E1 명예회장이다. 구 회장은 당시 월드컵유치위원장을 맡아 그야말로 ‘밑창이 닳도록’ 뛰었다. 일본 단독 개최로 굳어지던 초판 판세를 뒤집을 수 있던 것도 구 회장의 열정이 있어서였다. 구 회장 제출한 유치신청서에 집행부 ‘군침’ 국민 성원도 더해져 일본 단독개최 뒤집어 구평회 E1 명예회장의 이력은 화려하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구 회장은 1951년 락희화학 지배인으로 경영에 첫발을 내디뎠다. 1954년 뉴욕에서 ‘콜게이트사’ 주변에 머물며 치약 제조기법을 알아내 LG의 첫 해외주재원으로 기록됐다. 락희화학 전무시절인 1965년 GS칼텍스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84년에는 국내 최초의 LPG수입사인 여수에너지(현 E1)를 설립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구
건국 이래 최초로 감옥에 간 두 못난 대통령으로 불리는 ‘단짝친구’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1996년 8월 26일 법정에서 전 전 대통령은 ‘사형’을, 노 전 대통령은 ‘2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어 ‘DJ의 면죄부’로 둘은 같이 석방되었다. 지난달 27일, 노 전 대통령은 서울대병원에 재입원했다. 재입원의 원인은 폐에 한방에서 쓰는 침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지난달 18일 입원 당시 노 전 대통령 기관지에서 침이 발견됐으나, 이를 제거하지 않고 22일 오전 돌연 퇴원했다가, 침 제거를 위해 재입원한 것. 막대한 추징금 미납에도 호화경호 “이럴 수가…내 폐 속에 침이라니?” 노 전 대통령은 최근 건강이 더 악화되며 한방치료도 병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한한의사협회는 “노 전 대통령의 기관지에서 발견된 침의 종류와 모양, 협회 회원들을 상대로 벌인 조사 등을 종합해볼 때 무자격자에 의한 불법 시술일 가능성이 크다”며 “노 전 대통령의 기관지에서 발견된 침 시술자
전두환 전 대통령은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유혈진압한 점과 비자금 사건 등으로 병합 기소되어 법의 심판대 앞에 섰다. 1996년 8월 26일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전두환 사형’이라는 선고가 떨어진 것이다. “피고 전두환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땅땅땅! ‘면죄부’ 얻었지만 ‘대량 학살자’ 꼬리표는 유효 1996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드디어 법의 심판대 앞에 섰다. 그의 단짝 노태우 전 대통령과 두 손 꼭 잡은 채. 검찰은 1월 24일 전 전 대통령 및 관련자 16명을 ‘내란 및 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공판은 96년 3월부터 진행됐다.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은 전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대법원은 전 전 대통령 등이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
서울 종로는 흔히 ‘정치 1번지’로 불린다. 과거 국회, 중앙청사 등이 종로구에 자리 잡았던 역사와 전통 때문이다. 종로의 명성이 예전만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종로의 ‘정치적 상징성’은 여전하다. 총선 때면 가장 관심을 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종로 내 인구 구성이 ‘전국’ 평균과 비슷하다는 것이 한 요인이다. 종로의 중심지는 이른바 4대문 안인데, 대부분이 서울 토박이들로 중부지방을 대표한다. 평창동, 구기동 지역은 부촌으로 불린다. 지역적으로는 영남 사람들이 많다. 창신동, 숭인동, 이화동쪽은 반대로 호남 사람들이 많다. 이런 탓에 이 지역 선거는 전체 선거의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 전체 선거의 ‘바로미터’ 작용 출신 의원 중 대통령만 3명 종로의 정치적 상징성은 그간 이 지역을 거쳐 간 정치권 인사들만 봐도 확인된다. 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면 박사가 당선된 바 있고 군사독재 전까지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터전이었다. ‘주먹’으로 유명한 김두한씨
선거에서는 항상 ‘변수’와 ‘이변’이 따라다닌다. 당선이 떼 놓은 당상처럼 여겨지던 후보와 낙선될 것이 불 보듯 뻔해 보였던 후보도 변수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15년 전 <일요시사>가 세상에 발을 내딛던 해 15대 총선에서는 ‘북풍’과 ‘세대교체’ 등 예상치 못한 사태가 선거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이변이 있었던 15대 총선 중 ‘정치의 1번지’라 불리는 종로에서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4선의 이종찬 의원이 정치 초년병 이명박 후보에게 일격을 당해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명박·이종찬 “엎치락뒤치락” 노무현 고군분투, 뒤집기 대망 15대 총선에서의 유권자들은 ‘정치파괴의 길’을 선택한 듯 보였다. 만년 야당의 도시였던 서울이 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지대로 탈바꿈 했는가 하면, 내로라하는 정치거물들은 정치신인 돌풍에 휘말려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15대 총선결과 집권당인 신한국당이 과반수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서울 등 수도권에서 승리를 거
‘IMF 문전’ 서민들 피눈물 뚝뚝…방방곡곡 곡소리 ‘충격’ 권력형 비리 등 초대형 사건·사고 잇달아 1996년 5월 첫 호를 발행한 종합시사주간신문 <일요시사>가 창간 15주년을 맞았다. <일요시사>는 세기말과 세기 초를 넘나든 격동의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단 한 번의 결호 없이 숨 가쁘게 달려온 <일요시사>는 우리 사회의 외진 곳과 높은 장벽을 쉼 없이 두드려 왔다. ‘감춰진 진실’을 보도함으로써 독자들의 성원과 격려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수많은 사건과 그 실상을 성역 없이 날카롭게 파헤쳤고, 그때마다 ‘부당한 압력’에 당당히 맞서 왔다. 때론 달콤한 회유를 받기도 했지만 ‘건강한 언론’으로서의 소명을 다하고자 했던 <일요시사>의 굳은 의지를 꺾지 못했다. 사실 <일요시사>가 갓 태어났을 때만 해도 국내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IMF 문전이었던 탓에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고 서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등 온 나라가
<일요시사> 창간 15주년을 1200만 경기도민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일요시사>는 신속·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발전적 비판과 제언을 통해 국내 언론 발전에 일조해왔습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성역 없는 비판을 보여주신 <일요시사> 임직원 여러분과, <일요시사>를 성원하고 격려해주신 애독자 여러분께 창간 축하인사를 드립니다. 경기도는 서울보다 17배나 넓고, 싱가포르 보다 15배나 넓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넓고도 좋은 기회의 땅입니다. 이러한 장점을 살려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끌 견인차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경기도가 제안한 세계 최첨단·최고속, 신개념의 광역급행철도, GTX가 정부의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포함되면서 현실화를 앞두게 됐습니다. 평택 고덕신도시에 세계 1등 첨단기업인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 규모인 120만평 투자를 결정, 이제 곧 착공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경기도가 3년 동안 현장에서 온몸으로 발전시켜온 ‘무한돌봄사업’이 지난 3년 연속 복지부문 대한민국 대표브랜드대상을 수상하며 경기도를 대표하는 복지정책으로 성
화제와 특종의 정통시사주간신문 <일요시사>의 창간 15주년을 전국의 모든 애독자와 함께 축하드립니다. 품격 있는 언론문화 창달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지난 15년간 쉼 없이 달려오신 이용범 발행인을 비롯한 모든 <일요시사> 가족들께 감사와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차별과 특권이 판을 치고, 중산층과 서민들의 꿈이 무너지는 현실을 탈피해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가 살아 숨쉬는 ‘모두가 잘사는 행복한 세상’으로 가고자 합니다. 4·27 재보선에 나타난 민심은 그러한 변화에 대한 국민들의 뜨거운 열망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새로운 미래를 설계해나가야 합니다. 정의와 진실의 파수꾼만이 가진 날카로운 비판의식으로 시대적 책임을 다해온 <일요시사>가 새로운 희망,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길에 앞장서 주십시오. 차별과 분열을 거부하는 정신, 거짓과 모순을 고발하는 용기에 민주당도 함께 동참하겠습니다. 다 함께 잘사는 행복한 사회,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갑시다. 앞으로도 <일요시사>가 사회적 부조리와 부당함에 끝까지 맞서 싸워 국민에게 희망과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