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있는' 재계 사정 막전막후

검찰 캐비닛에 불량 기업들 ‘빼곡’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검찰의 대규모 비리 사정이 본격화되면서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잇따라 수사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비자금 등 ‘비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내막에는 경기 불황에 따른 투자압박용이 아니냐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다. 재계를 바짝 긴장하게 하는 정부의 진짜 노림수는 무엇일까.


검찰의 기업 사정이 포스코건설 비자금 의혹으로 시작해 역외탈세, 자원개발 비리 혐의 등 사정 칼날이 그룹 전체로 번지는 형국이다. 포스코건설에 이어 SK건설, 신세계, 롯데 금호아시아나, 동부그룹, 동아원이 검찰 수사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여기에 동국제강도 비자금 의혹을 받고 있다. 

기업 덮친 칼바람
어디까지 털리나
 
SK건설의 새만금 방수제 건설공사 담합의혹이 과징금 선에서 마무리될 것처럼 보였지만 검찰은 이례적으로 공정거래위원회 측에 고발요청권을 행사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정거래조세조사부(부장검사 한동훈)는 지난 17일 새만금 방수제 공사입찰 담합혐의로 SK건설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2009년 12월, 한국농어촌공사는 새만금 방수제 건설공사를 공고했다. SK건설을 비롯한 12개 건설사가 응찰에 참여했다. 그러나 SK건설은 다른 경쟁사들과 짜고 들러리 업체를 세우는 방식으로 1038억원 규모 ‘동진 3공구’ 공사를 따냈다. 이를 감지한 공정거래위원회는 SK건설에 22억원 가량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공정위 심의위원회 의결서를 검토한 검찰은 SK건설에 대한 기소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검찰은 2013년 개정된 ‘공정위는 검찰총장의 고발요청이 있으면 반드시 형사고발을 해야 한다’는 법 조항을 발동, 고발요청권을 행사했다.
 

신세계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임관혁)는 최근 이명희 회장과 정용진 부회장 등 그룹 총수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계좌를 추적하고 있다. 신세계는 법인 계좌에서 발행된 수표를 물품 거래 대신 현금화해 총수일가 계좌에 일부 입금, 비자금 목적으로 법인 재산을 빼돌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계열사 당좌계좌에서 발행된 60억∼70억원 상당의 수표의 향방을 쫓고 있다. 이 중 30억원 가량이 총수일가로 흘러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나머지 30억∼40억원의 용처도 불분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검찰은 해당 계좌를 통한 자금 거래 내역을 추적하면서 그룹 차원의 비자금 조성 행위인지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롯데도 마찬가지다.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2부(부장검사 김영기)는 2011∼2012년 롯데쇼핑 본사에서 롯데마트와 롯데백화점, 롯데시네마 등 사업본부로 사용처가 명확치 않은 수십억원대 돈이 흘러간 정황을 포착하고 자금 흐름을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19일 알려졌다. 검찰은 롯데쇼핑이 직원의 계좌를 거쳐 현금화한 후 비자금을 조성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칼 빼든 사정당국…대기업 노심초사
돌연 전방위 수사에 숨은 노림수는?
 
검찰은 이를 위해 롯데쇼핑 임직원들의 계좌내역을 추적하는 한편 예산담당 실무 직원 5명을 소환해 자금의 이동 경위와 사용처를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검찰은 신헌 전 롯데쇼핑 대표이사의 개인적 비리에 초점을 맞춰 수사를 벌인 바 있다.
   
동부그룹에도 먹구름이 꼈다.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세조사부(한동훈 부장검사)는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이 계열사들로부터 수백억원을 횡령한 정황을 잡고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19일 알려졌다. 검찰은 지난해 금융정보분석원(FIU)에서 관련 자료를 토대로 비자금으로 조성된 금액 중 상당액이 김 회장의 장남 김남호 동부팜한농 부장과 딸 김주원씨에게 흘러간 것으로 보고 자금의 흐름을 쫓고 있다.
 

이와 함께 김 회장의 동서인 윤대근 동부CNI 회장이 10억원 안팎의 회삿돈을 빼돌린 정황에 대해서도 확인 중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수사로 인해 동부그룹의 구조조정에도 차질이 생길 것으로 보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돈기업으로 알려진 동아원도 검찰의 수사망에 올랐다. 서울 남부지검 금융조사1부(박찬호 부장검사)는 동아원 자사주 매각과 관련해 주가를 조작한 혐의로 브로커 김모씨를 구속했다고 17일 밝혔다. 동아원은 전 전 대통령의 3남 재만씨의 장인 이희상 회장이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일회성? 기획설?
다음 타깃은…
 
검찰에 따르면 브로커 김씨는 2010∼2011년 동아원이 자사주를 성공적으로 매각하도록 돕기 위해 주가를 조작한 혐의를 받고 있다. 동아원은 지난 2013년 검찰의 '전두환 일가 미납 추징금' 특별환수팀의 대대적인 비자금 추적 조사 때 비자금 유입처로 의심돼 수사를 받기도 했다. 당시 이 회장은 전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1672억원 중 275억원을 부담하기로 한 바 있다. 검찰은 김씨와 함께 고발된 동아원 관련자 등에 대해서도 소환 조사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코건설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검사 조상준)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한 수사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검찰은 계열사 간 내부 거래를 통해 수백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보고 그룹 내 자금 흐름을 추적해 왔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동생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으로부터 4000억원대 배임 혐의로 고소도 당한 상황이다.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세조사부는 동국제강 장세주 회장이 미국법인을 통해 약 1000만 달러(약 110억 원)를 미국으로 빼돌리고 그중 일부를 도박에 사용한 정황도 포착해 사실관계를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18일 알려졌다. 장 회장이 현지 납품업체로부터 이 회사 미국법인 계좌로 약 1000만 달러를 받은 뒤 그중 수십억원을 손실 처리하고 빼돌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검찰은 장 회장이 미국의 여러 도박장에서 거액을 도박자금으로 사용하면서 여러 차례 돈을 따 총 50억원 가량의 도박 수익을 얻었다는 자료를 미국 금융·수사 당국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장 회장에게 횡령 혐의와 함께 해외 재산도피 및 외화 밀반출 혐의 등을 적용할 수 있을지 검토하고 있다.
  
국세청은 지난해부터 동국제강에 대한 특별세무조사를 벌였고 조사 자료를 최근 검찰에 넘겼다. 관세청도 국내외에서 장 회장 관련 자료를 입수해 상당 부분 조사를 마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국세청, 관세청 조사 결과와 그동안 내사해 온 내용을 정리해 본격적인 수사를 벌일 예정이다. 동국제강이 당진제철소 건립 과정에서 건설비를 과다 계상했다는 의혹, 부산에서 진행한 사업 과정에서 홍콩법인에 보낸 거액의 회사자금의 용처를 둘러싼 의혹 등도 살펴볼 방침이다.
 
사정당국의 몰아치기식 수사 배경에는 금융정보분석원의 자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재계는 이번 검찰 수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금융정보분석원을 주목하고 있다. 2001년 설립된 금융정보분석원은 금융기관을 이용한 범죄자금 이동을 막고 외화 불법유출을 방지하고 있다. 금융권은 2000만원 이상 현금을 넣거나 뺄 경우 거래자의 신원과 거래금액 등을 전산으로 금융정보분석원에 자동 보고해야 한다. 불법 재산이라고 의심되는 뭉칫돈 거래가 있을 때에도 정보가 제공된다.
 
금융정보분석원은 검찰, 경찰, 국세청, 선거관리위원회, 금융위, 국민안전처 등 7개 법 집행기관이 요건에 맞춰 요청할 때 자료를 제공한다. 그간 논란이 됐던 비자금 사건 대부분이 금융정보분석원 자료에서 검찰 수사로 이어졌다. 2013년 CJ그룹 비자금 수사가 대표적이다. 사실 지금 거론되는 대기업 비리는 금융정보분석원이 1∼2년 전에 발견해 검찰에 넘겼으나 묵혀져 온 것들이다. 재계는 금융정보분석원 자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혀 있을까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다.
 
이 같은 상황은 예견될 수 있었던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7일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비리의 뿌리를 찾아내 그 뿌리가 움켜쥐고 있는 비리의 덩어리를 들어내야 한다”며 “국방 분야뿐 아니라 우리 사회 각 부문에서 켜켜이 쌓여온 고질적인 부정부패에 대해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사회에 만연된 이런(부정부패) 관행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우리 경제를 살려냈다 하더라도 제자리걸음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앞서 12일 이완구 국무총리가 대국민담화를 통해 ‘부정부패와의 전면전’을 선언한 것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보인다.


투자 위한 채찍?
고용 위한 매질?
 
이 같은 박 대통령의 쓴소리를 두고 재계에서는 전방위 고강도 사정을 예고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정부와 재계가 지난해부터 미묘한 갈등을 빚었던 ‘사내 유보금’에 관심이 쏠린다. 정부는 그동안 재계에 투자를 적극 요청했다. 하지만 재계는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내유보금을 풀지 않고 있다.
 
기업 경영성과 분석기관인 CEO스코어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10대 그룹의 83개 상장사 사내유보금은 총 537조8000억원에 달했다. 이는 6개월 전인 1분기의 508조7000억원에 비해 5.7% 증가한 규모다. 이 기간 유보율도 1679.1%에서 1733.6%로 54.5%포인트 상승했다.
 
기업들의 현금성자산 증가는 내수부진에 따른 대외 여건의 불확실성 상승에 수익성 있는 투자처를 찾지 못한 것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실제 국내 총설비투자는 2010년까지 상승세를 기록했으나 2010년 이후 4년째 120조원대에 머물러 있다. 오히려 2013년 설비투자액은 전년보다 5조원 감소했다.
 
 
이처럼 투자가 줄어들고 사내유보금이 증가하자 배당 등을 통해 주주에게 환원해 경기회복에 기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하여 정부는 국민의 소득확대를 통해 경기회복을 이루는 순환구조를 구축한다는 명분 하에 배당 확대 정책을 펼쳤다. 기업이 자금을 쌓아두고만 있을 경우 자금 순환이 되지 않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배당확대 정책은 정부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갔다. 총수일가와 외국인 투자자만 배당소득을 누리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정책목표와 어긋났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말 안 들으니 때릴 수밖에…길들이기?
기업이 두들겨 맞으면 경기 살아나나?
 
기업이 금고를 굳게 닫자 내수경기는 침체일로를 걷고 있다. 디플레이션 위기가 감지되는 상황에서 정부는 특단의 대책을 내렸다. 사내유보금 과세 방안을 꺼내든 것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해 7월 “가계 가처분 소득 증대 차원에서 기업의 과도한 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인센티브 등 여러가지 제도적인 장치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래 투자재원 확보 차원이라는 명분이었다. 투자를 활성화하겠다는 의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재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기업들이 사내유보금을 쌓아놓고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비판”이라고 지적했다. 재계의 거센 반발에 사내유보금 과세는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
정부와 재계의 엇박자는 근로자 임금 인상 문제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올해 임금을 동결한 삼성전자가 그렇다. 삼성전자를 시작으로 삼성SDS, 삼성전기, 삼성디스플레이 등 삼성의 주요 계열사들이 줄줄이 임금동결에 동참했다. 삼성SDI의 경우 1% 내외로 임금을 올렸지만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동결이나 마찬가지다.
 
삼성의 임금동결에 힘입은 재계는 임금동결을 이어갔다. SK이노베이션은 노조 투표를 통해 올해 임금을 동결하기로 했다. S-OIL도 올해 연봉계약서에 동결로 서명했다. 이처럼 재계는 내수진작을 강조한 정부의 방향과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최경환 부총리는 “적정 수준의 임금을 인상해 소비가 회복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달라”며 “대기업의 임금인상이 당장 어렵다면 협력업체에 적정 대가 지급 등을 통해 자금이 중소 협력업체에 흘러갈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재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오히려 최저임금 인상이 산업 경쟁력을 악화시킬 수 있다며 손사래를 쳤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임금은 한 번 올리면 잘 내려가지 않는 하방 경직성이 크기 때문에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면서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차원에서의 최저임금 인상이 실제로는 기업부문의 임금을 전반적으로 높여 산업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현실적으로 부작용을 없앨 수 있는 정책 수단이 동반돼야 한다”고 정부에 역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정부-재계 밀당
내수경기 물음표
 
최근 정부는 이례적으로 기준금리를 1%대로 낮췄다. 내수진작을 이끌겠다는 심산이지만 재계는 고요하다. 종전과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정부가 재계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 이를 두고 검찰 내부에서는 ‘정치적 고려는 없다’는 말이 나온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정치적 고려 없이 대대적인 사정 칼날을 들이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khle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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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