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모여사는' 수도권 차이나타운 지도

툭하면 칼부림 “낮 길도 무섭다”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장기 없는 토막시신 살인사건’ 피의자가 중국동포 박춘봉으로 밝혀지면서 중국동포(조선족)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하고 있다. 특히 사건이 발생한 지역 주민들은 추가 범죄를 우려하며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태다. 이러한 분위기에 중국동포들도 불편하긴 마찬가지. 서로 눈치를 보며 불편한 공존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불과 2년 전, 잔혹한 살인을 저질러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오원춘 사건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동일지역에서 끔찍한 사건이 재발해 지역주민들의 원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번 ‘장기 없는 토막시신 살인사건’ 피의자는 오원춘과 마찬가지로 중국동포였다. ‘제노포비아(xeno phobia:외국인혐오증)’이 확산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또 중국동포 짓?
불신 넘어 혐오
 
최근 들어 중국동포에 의한 강력범죄가 증가하면서 중국동포 밀집지역에는 냉기가 흐르고 있는 형국이다. 조선족은 동포가 아니라는 식의 극단적인 표현도 난무하고 있다. 강력범죄 발생 시 자동적으로 조선족을 떠올리는 것도 이제는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때문에 애꿏은 중국동포들은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중국동포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국내에 있는 중국동포들은 대부분 서울 가리봉동과 대림동, 경기 수원과 안산 등에서 집단거주하고 있다.
 
중국동포들의 대표적인 안식처인 가리봉은 서울 최대의 차이나타운으로 꼽힌다. 음식부터 놀이까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가리봉 연변거리는 마치 섬과 같다. 인근 가산동만 해도 각종 쇼핑몰과 고층 건물이 빽빽하지만 가리봉동은 오래된 3∼4층 건물들만 즐비하기 때문이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196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주로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일명 ‘벌집촌’의 상황을 보면 더욱 그렇다. 외벽 일부가 허물어진 건 기본, 우중충한 동네 분위기는 수십 년 째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동포가 몰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타 지역보다 월등히 싼 임대료 때문이다. 보통 월 15만∼20만원 선으로 서울에서 생활이 가능하다.
 
중국동포들의 문화거리인 연변거리에는 노래방이 즐비하다. 서울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에서 연변거리 끝까지 들어선 노래방만 총 25곳에 달한다. 중국어 간판이 내걸린 PC방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중국동포들은 PC방에서 인터넷전화로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거나 게임 등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가리봉동에 중국동포들이 몰리기 시작한 시점은 80년대 후반이다. 당시 산업구조조정으로 인해 구로공단 내 많은 업체들이 지방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가리봉동에 남아 있던 벌집 등에 극빈층이 유입됐다. 이후 90년대 말부터 조선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조선족 밀집지역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원인은 지금과 같은 낮은 임대료였다. 기존에 형성되었던 건설관련 일용직 인력시장과 교통 요건도 한몫했다.

70만 중국동포
“당혹스럽다”
 
‘가리봉’ 명칭의 유래는 주위의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마을이 되었다는 설, 어원이 ‘고을’과 같은 의미인 ‘갈’ 또는 ‘가리’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다. ‘가리’는 갈라졌다는 뜻으로 구로구의 전체적인 땅 모양이 바지가랑이처럼 갈라진 것과 연관된 것으로 풀이된다. 
 
가리봉동은 조선 말기까지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가리산리였다. 이후 가리봉리로 바뀌었고 63년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가리봉동의 ‘가’와 독산동의 ‘산’을 따서 가산동이 됐다. 75년 가산동은 다시 가리봉동과 독산동으로 나뉘었고, 80년 구로구 신설로 편입됐다. 가리봉동의 북쪽과 동쪽은 구로동과 접해 있고, 서쪽과 남쪽은 남부순환로를 경계로 금천구 가산동과 마주보고 있는 지역이다.
 

가리봉동은 ‘한강의 기적’이 태동한 곳이기도 하다. 과거 60만평 규모로 조성된 구로공단은 국내 공업단지 제1호였다. 70∼80년대까지는 그랬다. 이후 값싼 노동력을 발판으로 섬유나 봉제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제품을 주로 생산하다 보니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매가리가 빠졌다. 결국 구로공단은 해체됐고 원주민들은 하나둘 가리봉을 떠났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조선족들이 들어오면서 ‘연변타운’을 형성했다. 
 
오원춘·박춘봉 잇단 잔혹살인 공포
중국동포 두려움 확산…불편한 공존
 
그리고 2002년, 정부는 자진 신고하는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6개월∼1년의 출국준비 기간을 부여했다. 이때부터 조선족들은 본격적으로 가리봉동에 몰리기 시작했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것이다. 늘어난 조선족 때문에 원주민과의 마찰도 이따금씩 일어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도 했다.
 
서울시는 가리봉동 일대에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할 계획을 갖고 있다. 10년 넘게 방치된 가리봉동을 다문화 동네로 만든다는 것이다. 가리봉동 주민의 1/3 정도는 조선족이다. 재생사업은 가리봉동을 5개 구역으로 나눠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중국동포시장과 연변거리는 시설 현대화를 통해 인천 차이나타운처럼 관광 명소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가리봉동이 과거 구로공단과 함께 세월을 겪은 전통 차이나타운이라면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은 일자리를 잃은 조선족이 새롭게 모여드는 신흥 차이나타운이라 할 수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올해 9월 기준 한국계 중국인과 중국인의 숫자는 영등포구가 3만7106명으로 구로구 2만9132명보다 약 1만명가량 더 많다. 이에 따라 중국은행인 ‘중국공상은행’이 서울 중구의 본점 외에 대림지점을 따로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대림동 연변거리 주거지역 역시 벌집촌이 형성돼 있다. 다만 교통이 더 편리해 임대료는 좀 더 비싼 편이다. 직접계약이 일반적인 가리봉과 달리 대림동은 임대차 계약도 중개업소를 통해 이뤄진다. 대림동 연변거리는 ‘만남의 광장’으로 통하기도 한다. 주말이면 5만명 이상의 중국동포가 모여들 정도로 북새통을 이룬다. 
 
중국동포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안정적인 생활이다. 이를 위해서는 체류 연장과 영주권 획득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거리에는 출입국 해결사를 강조하는 문구를 내건 여행사만 50여곳에 달한다.
가리봉과 대림동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지만 수원역 인근과 고등동, 매교동, 교동 일대 등도 차이나타운으로 통한다.
 
타 지역에 비해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4000여명의 중국동포가 거주하고 있다. 경기 시흥과 안산의 경우 외국인 공단이 형성돼 있어 중국동포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노동자가 한 데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불법 체류자촌’까지 생겼을 정도다. 때문에 불법체류자 관련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다.

수십년 지킨
그들의 터
 

전문가들에 따르면 통상 시흥과 안산의 경우 각 나라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집중되는 반면, 가리봉과 대림동, 수원 등은 오로지 중국동포들이 밀집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수원의 경우 저렴한 집값 때문에 중국동포들이 우선 이곳에서 정착한 이후 가리봉, 대림동 등 서울로 진출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라고 알려진다. 
 
익히 알려진 중국동포 밀집지역 외에도 새로이 부상하는 지역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중국동포나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가리봉동이나 대림동 등에나 있을 법한 풍경들이 최근 들어 일부 대학 캠퍼스 주변에 스며든 것이다. 이는 ‘미니차이나타운’이라 불릴 정도로 결코 가볍지 않은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있는 중앙대 인근에는 ‘다중 자창차오차이(가정식 볶음요리)’라는 간판을 내건 식당이 인기를 끌고 있다. 중국동포와 중국인을 위한 전문 밥집인 셈이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대 인근에는 중국어 간판이 내걸린 노래방이 인기다. 일반 노래방에는 중국노래가 업데이트 돼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지만 이곳에는 최신곡이 자주 업데이트되기 때문에 많은 중국동포와 중국인 등 유학생들이 즐겨 찾는다는 것이다.
 
가리봉, 대림동, 신길동…
‘메카’ 우범지역 인식 확대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 10월 말 기준으로 장기체류 외국인은 136만7135명으로 외국인 등록자는 108만7512명이고 국내 거소를 신고한 외국 국적 동포는 27만9623명이다. 이 가운데 중국 국적은 74만5640으로 집계됐다.
 

새정치민주연합 김현 의원이 경찰청에서 입수한 ‘2014년도 국정감사자료(2008년 이후 외국인범죄 현황)’을 보면 2008년 7월을 기준으로 외국인 범죄는 총 16만1389건이었다. 연도별 범죄건수는 지난 2008년 2만623건에서 2012년 2만4379건, 지난해 2만663건, 올해 1만6922건(7월 기준)으로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외국인들의 강력범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7년간 발생한 지역별 범죄건수는 서울이 5만1832건으로 가장 많았고, 경기도 5만1332건, 경남 9100건, 인천 8976건, 부산 6915건 등의 순이었다. 국적별로는 중국동포가 9만3503명으로 가장 많았고 베트남 1만2780명, 미국 1만226명, 태국 6179명, 필리핀 2771명 등이 뒤를 이었다.
 
문제는 전체 범죄 중 5대 강력범죄(성폭력·살인·폭행·강도·절도) 비중이 꽤 높다는 점이다. 이 기간 국내 외국인의 5대 강력범죄 건수는 총 6만1512건으로 전체 범죄건수(16만6922건)에 견줘 38%나 차지했다. 특히 서울 구로와 영등포, 경기 안산단원, 시흥 등 수도권 일부 지역은 이같은 외국인 범죄 쏠림현상이 심각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일반적으로 외국인 범죄는 더 큰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잔혹한 수법의 외국인 범죄가 우리사회에 충격을 안겨주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국인을 배척하는 태도는 지양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형사정책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범죄 대기 기소율은 외국인과 내국인 간 별 차이가 없다. 체류외국인이 늘어남에 따라 외국인 범죄 건수는 늘었지만 오히려 지난해 범죄율은 오히려 지난해에 전년보다 0.2% 낮았다.

배척하는 태도
지양해야…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내국인 범죄율(전체 인구 대비 범죄건수)은 약 1.97%인 데 비해 외국인은 그보다 낮은 약 0.8%에 그친다. 또한 합법체류자는 1.88%, 불법체류자는 1.13%의 범죄율을 보였다. “불법체류자가 범죄를 일으킨다”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거리가 있는 통계다.
 
이러한 사실을 비추어보면 실제로 외국인 범죄의 심각성은 다소 과장돼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동포에 대한 편향적인 언론보도로 인해 굳어진 선입견이 혐오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중국동포들이 밀집한 지역에 가거가 그들을 만나보면 우리와 별 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다문화 전문가들은 외국인 범죄로 인해 우리사회 전체로 퍼질 수 있는 ‘조선족 포비아(공포증)’나 혐오감 확산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KKK단(미국의 인종차별주의 극우비밀조직)’이나 일본의 혐한단체 같은 극단주의 세력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구인난’ 비상 걸린 연변
“전부 한국으로 떠난다”
 
중국 내 조선족 자치주인 연변에서 한국 등 외지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조선족들이 늘어나면서 서비스업계가 심각한 구인난에 허덕이고 있다. 지난 15일 현지 매체인 <연변일보>에 따르면 연변 주에서는 조선족들이 돈을 벌려고 한국이나 베이징, 상하이, 선전 등 대도시로 대거 진출한 데다 연변에 남은 이들도 힘든 직종을 꺼려 종업원을 구하지 못하는 업소가 늘어나고 있다.
 
연변 주 정부 소재지인 옌지시의 경우 당국이 올해 2014년 7∼9월 시내 인력 수급 상황을 조사한 결과 서비스업 구직자 수는 2273명이지만 구인수요는 37895명으로 1.5배가 많았다. 특히 음식점 종업원, 판매원, 청소원은 구직자 수가 구인수요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연변 주에서는 중·장년층의 외지 유출로 조선족 인구 감소에 따른 인력난뿐만 아니라 가족 해체와 젊은이들의 과소비, 사회 부적응도 심각한 문제로 꼽힌다. 연변 주에서는 지난해 총 1만9500쌍이 혼인신고를 하고 7800쌍이 이혼수속을 마쳐 연간 이혼율이 40%나 됐다. 이혼율이 높아지는 것도 부부 한쪽이 오랜 외지생활을 하면서 생긴 불화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현지 매체들은 외국에 나간 부모가 연변에 혼자 남은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에 중국 대졸자 평균 초임보다 많은 매월 3000∼4000위안(54만∼72만원)을 보내다 보니 과소비와 취업 기피 풍조가 만연했다는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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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