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요즘 정치권에서는 비례대표제가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선거구 획정 불합치 결정으로 국회는 내년 말까지 지역구 정수와 비례대표 정수를 조정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에서는 비례대표 정수 축소 의견과 확대 의견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과연 비례대표제는 필요한 것일까? <일요시사>가 비례대표제의 현주소를 살펴봤다.
헌법재판소의 선거구 획정 불합치 결정으로 비례대표제가 정치권의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지역구 정수와 비례대표 정수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비례대표 정수 축소 의견과 확대 의견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늘려?
비례대표제는 정당의 득표율에 비례해 당선자 수를 결정하는 선거 제도로 비례대표 후보들은 지역구를 따로 배정받지 않고 총선에서 각 정당이 정한 순번에 따라 국회에 입성한다. 정치색은 옅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를 국회에 진출시켜 적극적인 입법활동을 펼치도록 하는 것이 당초 비례대표제의 취지였다. 19대 국회 비례 의원은 모두 54명으로 새누리당이 27명, 새정치연합이 21명, 통합진보당 2명, 정의당 4명 등으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비례대표제의 당초 취지가 잘 지켜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직능전문성을 발휘하라는 취지로 선발된 여야 비례대표 의원들이 임기가 고작 절반 정도 지난 시점부터 지역구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치연합)의 당헌·당규에 따르면 비례대표는 연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재선을 위해서는 미리 지역구를 선점해 표밭을 다져놔야만 한다. 때문에 지난달 마감된 새정치연합 지역위원장 공모에는 현역 비례대표의원이 11명이나 몰렸다. 새정치연합 전체 비례대표 중 절반이 넘는 인원이 지역구의원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새누리당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새누리당도 19대 국회가 시작된 이후 당내 비례대표의원들을 꾸준히 당협위원장에 임명하면서 벌써 5명 중 1명꼴로 자신의 지역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비례대표의원의 생존율은 매우 낮은 편이다. 지난 18대 비례대표 출신으로 19대 때 지역구 의원으로 생환한 이들은 새누리당에서 나성린(부산 진을), 새정치연합에서 김상희(부천 소사) 의원 두 명뿐이었다.
이처럼 여야 비례대표의원들이 벌써부터 차기 지역구 찾기에 나서자 “직능전문성을 살리자는 취지가 퇴색됐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비례대표의원들이 자신의 직능전문성을 살리는 활동을 하기보단 지역구관련 법안을 통과시키거나 예산을 따내는 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구의원과 비례대표의원 간 차이점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의문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 국회 비례대표의원들은 지역구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직능전문성을 살리기가 어려운 구조다. 일단 상임위 배정부터 비례대표의 전문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 상임위 배정에서도 힘의 논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벌써? 지역구 찾아 나선 비례대표들
대표성 모호, 사실상 지분 챙기기 수단
비례대표 의원들은 대부분 초선으로 상임위 배정과정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다. 결국 전문가라고 데려다 놓고는 힘의 논리에 따라 전혀 엉뚱한 상임위에 배치해놔 전문성을 사장시키는 것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상임위별로 미리 자리를 만들어 놓고 그에 맞는 인사들을 비례대표로 뽑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비례대표제가 당초 취지와는 달리 운영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청년비례대표들이다. 현재 19대 국회에는 청년비례대표 5인이 활동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김상민, 이재영 의원과 새정치연합 김광진, 장하나 의원,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 등이다. 국회는 이들의 입성으로 청년문제 해결이 속도를 낼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이들은 청년층을 대표해 국회에 입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층과 직접 관련된 법안을 대표발의한 경우는 전체 법안 중 채 20건이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들은 각자 상임위에서 나름대로의 성과를 얻어내기도 했지만 청년비례대표의 당초 취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비례대표가 선정되는 과정도 문제다. 당에서 명단을 작성하는 비례대표의 경우 여야 할 것 없이 지도부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해 국민대표성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새정치연합 문재인 의원은 최근 있었던 각 지역 광역의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강연에서 “우리당은 비례대표 후보의 경우 어떤 기준으로 선정되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했고, 새누리당 김태흠 의원도 “지금 비례대표는 당권 잡은 사람의 전리품 아니냐? 국민들이 검증할 수 없는 불투명한 절차를 거쳐 선출되는데, 그 숫자가 전체 국회의원 정수의 5분의1이나 된다”고 지적했다.
비례대표제가 사실상 보은인사와 계파지분 챙기기로 변질됐다는 주장이다. 당 지도부가 비례대표 순번을 자의적으로 정할 수 있다 보니 이와 관련해 금품수수 등 잡음도 끊이질 않는다.
심지어 비례대표제는 총선을 총지휘하는 당대표의 꼼수 국회 입성 방법으로도 자주 이용됐다. 당 선거를 총지휘해야 하는 당대표는 개별적으로 지역구 선거활동이 어렵기 때문에 당대표를 비례대표 순번에 넣어 당선되게 하는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한명숙 의원이 각각 비례대표로 출마해 국회에 입성했다.
외국의 사례를 살펴봐도 비례대표제는 필수가 아니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에서는 비례대표제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영국의 경우 고위성직자와 작위 소유자에게 상원 의석이 배당되기는 하지만 비례대표라고 분류하기는 어렵다. 독일처럼 의석의 절반가량이 비례대표로 채워진 나라도 있긴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비례대표제 확대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물론 비례대표제를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여성과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를 대표하는 의원들을 국회에 진출시킴으로써 이들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다는 순기능도 분명히 존재한다. 또 일부 비례대표들과 비례대표 선출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수가 일으킨 문제를 전체의 문제인 양 확대해석해서도 안 된다.
줄여?
하지만 최소한 비례대표제가 제대로 정착되게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의석수만 늘릴 것이 아니라 전문성을 갖춘 후보들을 제대로 뽑을 수 있도록 하는 공천 민주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서만큼은 여야 모두 공감하고 비례대표 제도의 개선을 위해 다양한 방안들을 연구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선거구 획정 불합치 결정으로 갈림길에 서게 된 비례대표제도. 과연 늘려야 할지 줄여야 할지 국민들의 선택만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