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지 않는' 5만원권의 비밀

그 많던 ‘신사임당’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일요시사 = 경제2팀] 박효선 기자 = 돈의 일생. 한국조폐공사에서 태어난 지폐는 세상에 나와 돈이 되어 국내를 떠돈다. 조폐공사에서 시중은행으로, 은행에서 고객이나 특정 기관 등을 거쳐 비로소 돈이 된다. 제 역할을 다해 너덜너덜해진 돈은 한국은행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한다. 그렇게 돌아온 돈은 재활용되고 끊임없이 환생한다. 그런데 고액권인 5만원이 한국은행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누군가의 금고 속으로, 장롱 속으로, 땅 속에 묻혀 깊고 어두운 곳에 숨어버렸다. 그 많던 5만원권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해외에 불법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개설한 뒤 수천억원대의 도박판을 운영한 조직이 경찰에 붙잡혔다. 경북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지난 22일 해외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에 가담한 국내 현금 인출책 양모(76)씨 등 3명을 도박개장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은 양씨의 아파트에서 수익금의 일부인 28억9000만원을 발견해 현장에서 압수했다. 모두 5만원권이었다. 경찰은 5만원권 5만7800매를 공개했다.

많이 풀렸는데…
절반 자취 감춰

5만원권은 누구에게나 사랑받는다. 가장 고액권이라 갖고 다니기 가벼우면서도 수표보다 사용이 편리하다. 명절 때마다 5만원권은 시중에 대량 유통되고 있다. 그런데 찍어내기 무섭게 5만원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5만원 지폐는 유난히 품귀현상을 보이고 있다. 발행을 많이 해도 한국은행으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3년도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은행권 발행잔액은 61조1000억원으로 전년 말 대비 9조원 증가했다. 이 가운데 5만원권만 7조9000억원 증가하면서 전체 은행권 발행잔액 중 66.6%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년 말보다 3.7%포인트 상승한 것이다. 4년여 동안 수요가 늘면서 5만원권 유통량은 40조원에 달했다. 그러나 한국은행으로 돌아오는 5만원권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

지난해 5만원권 환수율(한국은행으로 돌아오는 돈의 비율)은 전년보다 13.1% 포인트 떨어진 48.6%를 기록했다. 5만원권 환수율은 2011년 59.7%, 2012년 61.7%를 기록했지만 지난해를 기점으로 급격히 떨어졌다. 2장 중 1장은 중간에서 잠적한 셈이다.


40조 넘게 발행…환수율 절반 이하로 ‘뚝’
시중은행선 부족해 쩔쩔…한국은행 팔짱만

환수율이 낮아지면서 국민은행, 하나은행, 외환은행 등 시중은행들은 5만원권이 부족해 쩔쩔매고 있다. 일부 은행에서는 현금 자동지급기에 충전시킬 돈조차 부족한 것으로 파악됐다. 고객들의 5만원 인출 요구에 응하지 못해 창구에서는 만원권 지폐를 섞어 인출해 주는 곳도 있을 정도다.

최소한의 현금지급기용 보유고를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새마을금고, 신용협동조합,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도 마찬가지다. 고객들의 인출 요구는 많은데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5만원이 부족한 상황이다.

한국은행과 조폐공사 측은 5만원권 지폐에 대해 평소보다 적게 발행하거나 인위적으로 통화량을 축소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있을 확률이 높다.
 

1만원권은 평균 100개월(8년4개월), 5000원권은 평균 65개월(5년5개월), 1000원권은 평균 40개월(3년4개월)을 누군가의 소유로 지냈다. 5만원권의 수명은 적어도 100개월을 넘을 것이다. 2009년 6월 탄생한 5만원권은 아직 60개월도 채 안 돼 정확한 수명을 알 수는 없다.

5만원권은 지난 2009년 편익과 화폐 발행비용 절감을 위해 발행됐다. 많은 현금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5만원권의 등장을 반겼다. 그러나 서민들은 많은 돈을 들고 다닐 일도, 보관할 일도 없다. 따라서 얻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꼬리표가 없는 5만원은 지하경제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한 세수 증대라는 현 정부의 정책목표와 달리 지하경제가 확대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깊은 곳 숨어
검은돈으로

5만원권은 지하경제로 흘러 들어갔을 확률이 가장 크다. 고액 자산가와 자영업자의 금고, 사설 카지노 등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 근로자와 교포 등을 통해 해외로 빠져나갔거나 10만원권 수표 대신 어디선가 비자금으로 돌고 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5만원권이 악용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2011년에는 전북 김제의 한 마늘밭에서 5만원권 22만장의 110억원대 뭉칫돈이 발견됐다. 이 금액은 인터넷 도박으로 벌어들인 범죄수익금이었다. 옷장과 침대 밑에 5만원권 지폐 22만장이 숨어있었다. 

당시 수사당국은 자신의 처남 등이 불법 인터넷 도박 사이트로 벌어들인 돈을 소유하고 있던 마늘밭에 숨긴 이모씨 등을 검거했다. 주범인 그의 처남 이모씨는 수배 중이다.

지난 2012년에는 서울 강남에서 유명 여성전문병원을 운영하는 여의사의 집에서 현금 24억원이 발견됐다. 이 의사의 자택에서는 5만원권이 가득 찬 박스와 가방들이 안방 장롱, 베란다, 책상 등에서 쏟아져 나왔다. 모두 탈세를 위해 빼돌린 돈이었다. 지난해에는 원전 비리와 관련돼 한국수력원자력 간부의 집에서 5만원권 6억원어치 뇌물이 발견됐다. 

이렇게 5만원은 보란 듯이 지하경제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5만원권이 깊은 곳으로 숨을수록 지하경제 규모는 더욱 커진다. 지하경제가 커진다는 것은 세금을 걷기 어려워진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되면 정부는 세금을 더 올릴 수밖에 없다. 5만원권이 지하경제 깊은 곳으로 숨어들수록 악순환은 되풀이되는 것이다. 유리지갑 월급쟁이들과 성실한 납세자들만 올라간 세금을 모두 떠안게 된다.
 

그런데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한국은행은 ‘5만원권 환수율 하락’이 경제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팔짱만 끼고 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5만원권이)어디에 잠겨있는지 부서마다 조사를 하고 있다”며 “아무래도 고액권이다 보니 지하경제로 들어갔을 확률이 커 추적이 어렵다”고 말했다. 5만원의 행방 추적에 사실상 손놓고 있는 모습이다. 

로비로 빠지고
해외로 빠져나가

5만원은 최고의 로비 수단이다. 부피와 중량의 효율성 때문이다. 무게가 가벼워서 이동이 쉽다.

로비가 많은 것으로 유명한 건설사, 제약회사 등의 업체들은 5만원권 확보에 열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설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5만원권을 많이 확보할 수록, 로비를 잘할수록 능력있는 직원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5만원권이 없으면 상품권으로 로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상품권은 5만원권보다 위험하다. 추적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5만원은 자금 추적으로부터도 안전하고 무게도 가볍다.

1억원은 5만원권 2다발로 무게가 2kg도 되지 않는다. 와인이 2병 들어가는 007가방에 보관해도 5억원은 충분히 들어간다. 그만큼 거액의 돈을 보관하거나 운반하는 게 쉽다. 가정용 금고는 보통 소형 사이즈도 10억원 정도는 들어간다. 자금 추적으로부터도 안전하다.

그래서 5만원권의 행방은 자주 뉴스거리로 등장하곤 한다. 뇌물 혹은 비자금 관련 소식이 주를 이룬다. 

지난 2012년 장진수 전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이 공개한 5만원권 100장 묶음 10개 다발이 대표적이다. 당시 장 전 주무관은 자신이 청와대의 민간인 사찰 은폐 의혹을 폭로하려 하자 류충렬 전 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이 5000만원을 주며 회유했다고 밝혔다.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전 회장은 5만원권 240장(1200만원)을 브로커에게 내고 중국으로 밀항하려다 경찰에 붙잡혔다.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5만원권이 정치권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선거철을 맞아 5만원권이 뇌물로 빠지고 있다는 뒷말이 오간다.

경북도내에서는 선거법 위반 적발 사례가 4년 전 지방선거 때보다 크게 늘었다. 경북도선관위는 지방선거 91일 전인 5일 현재 도내에서 모두 171건의 선거법 위반 사례를 적발했다. 이는 2010년 지방선거 91일 전의 63건 적발과 비교하면 3배나 늘어난 수치다.


없어질수록 지하경제 확대
도박자금·비자금으로 활용
암암리에 해외로 퍼져 유통

또한 일부 5만원권은 해외로도 빠져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동포들이 국내에서 번 돈을 중국으로 가져가 위안화로 바꾸고 있다는 것. 옌볜 등 일부 지역의 사설 환전소는 국내보다 더 좋은 환전 조건을 제시한다.

중요한 변수는 환율이다. 옌볜에서는 위안화 대비 원화의 가치가 떨어질 때마다 5만원권이 인기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원화가치가 다시 올라갈 것에 대비해 저렴할 때 원화를 사두려는 교포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교포들은 환전 조건이 한국보다 좋은 사설환전소에서 휴대가 편리한 5만원권을 바꾸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내국인의 해외여행으로 5만원권이 빠져나가기도 한다. 한류에 의해 동남아 등에서 원화 환전수요가 높아졌다는 분석도 있다. 외국 금융회사 원화 환전이 2006년부터 허용된 데 이어 해외 유출 원화에 대한 규제도 완화돼 이 같은 추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를 수치로 확인할 수는 없다.

위조지폐 활개
5만원 딜레마

5만원권 수요가 늘어난 만큼 위조지폐도 시중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지난해 적발된 5만원권 위폐만 100여건으로 시중에 유통되는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된다. 그 규모는 1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현금 거래를 하는 전통시장이나 편의점, 택시 등에서 위조지폐가 유통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월에는 울산과 경남지역에서 위조지폐들이 발견됐다. 울산 남부경찰서에 따르면 울산시 남구 삼산동 현대백화점 앞에서 남자 승객 2명을 내려준 택시기사가 요금으로 받은 5만원권이 위조지폐인 것을 확인했다. 택시기사는 남구 야음동 울산세관 앞에서 태운 승객들이 5만원을 요금으로 내 거스름돈 4만6000원을 줬다.

앞서 같은 날 남구 신정동 수암시장 앞에서도 하차한 남자 승객 2명이 5만원권을 요금으로 냈다가 택시기사가 지폐의 상태를 의심하자 다른 돈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승객들 말투가 중국동포(조선족)처럼 들렸다”는 택시기사들의 진술을 토대로 용의자를 쫓고 있다.

경남 남해군에서는 남해읍의 한 마트 직원이 물건값으로 받은 현금을 은행에 입금하는 과정에서 컬러복사기로 위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5만원권 한 장을 발견했다.

남해에서는 지난해 연말부터 5000원권과 5만원권 위조지폐가 4차례나 발견됐다. 경찰은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있으나 아직 범인을 붙잡지 못했다.

적발된 위폐 감별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불빛에 비춰 지폐 왼쪽 여백에 신사임당이 나타나지 않거나 나타나더라도 일그러지면 위조지폐다. 상하좌우로 움직였을 때 홀로그램 안쪽 태극마크가 움직이지 않아도 위폐다. 또 심하게 낡고 구겨진 5만원권은 위폐를 의심해 봐야 한다.

LG경제연구원 보고서는 캐시 이코노미(Cash Economy)의 증가에 대해 ‘지하경제 확대의 경고등’이라고 지적했다. 캐시 이코노미는 거래가 신용카드, 계좌이체 등이 아니라 주로 화폐, 즉 현금으로 이뤄지는 경제를 뜻한다. 캐시 이코노미는 지하경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고서는 5만원권이 사라지면서 한국 경제에서 캐시 이코노미가 확대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dklo216@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화폐개혁’가능할까 ‘경→조?’, ‘억→만?’

화폐개혁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정부는 이를 구체화한 대북 제안인 ‘드레스덴 구상’까지 발표했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 내부에서 리디노미네이션(화폐액면 단위변경) 검토 중이다. 특히 우리나라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조(兆)를 넘어 경(京)단위 화폐통계가 실물경제 부분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자금 흐름을 보여주는 한국은행 자금순환표 상의 금융자산은 작년 말 1경263조원, 금융부채는 1경302조원으로 집계됐다. 최근 경 단위 화폐 통계의 확산은 무엇보다 경제 규모 증대에 따른 것이다.

한국은행은 외국인들에게 통계를 설명할 때 1000조원만 돼도 ‘1쿼드릴리언’(quadrillion, 1000조)이라는 생소한 영어 화폐 단위를 사용해야 한다. 외국의 경우 통계 단위의 대부분이 10억(billion) 단위로 해결되고 최대치라도 조(trillion) 단위에 그친다. 이는 과거 5만원권이 나오기 직전 화폐액면 단위 변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액면 단위변경 검토

또한 화폐개혁은 지하경제 양성화 방안으로도 거론되고 있다. 구권을 신권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탈루된 현금 소득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에 묻힌 자금을 끌어내고 세수를 늘리는 데 화폐개혁이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민감한 사항인 만큼 한국은행도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현 상황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 총재는 지난 3월 인사청문회에서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시행 시 부작용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지금 상황에서 상당한 논란과 비용이 불가피한 화폐 단위 변경을 추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화폐개혁 움직임이 있었지만 매번 엎어졌다. 화폐개혁은 김영삼 정권 시절 한국경제에 파장을 일으켰던 금융실명제보다 더욱 강력한 수단이다. 화폐를 새로 만들고 물품 가격을 바꿔 표시하는 것은 물론 전국에 있는 은행 현금 지급기, 자판기 등 관련 기계와 각종 시스템을 모두 손봐야 하기 때문이다.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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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고객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쿠팡의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현재까지 대응만 봐서는 국민은 물론, 정부와도 전면전을 벌일 기세다. 새어나간 정보의 범위와 규모가 ‘역대급’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최악의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쿠팡의 고개는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뭘 믿고 저러나’ 소리가 나오는 중이다. 쿠팡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른바 쿠팡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수습은커녕 국민의 화만 돋우고 있다. 쿠팡의 대응 태도가 미지근한 수준을 넘어 뻔뻔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김범석 의장은 모습을 비추지 않고 보상안은 꼼수로 가득하다. 국민을 조롱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 달 만에 고개 숙여 지난해 11월 말 3370만명에 이르는 쿠팡 고객의 개인정보가 ‘탈탈’ 털렸다. 앞서 쿠팡은 4500여건의 고객 정보가 유출됐다고 정부 당국에 신고했지만 2주 만에 그 수치는 7500배까지 늘어났다. 전 국민의 65% 수준이며 지난해 4월 SKT 개인정보 유출 사태 범위(2300만명)를 훌쩍 넘는 사태였다. 쿠팡은 이커머스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대형마트 등이 규제에 막혀 뒷걸음질 칠 때 쿠팡은 로켓배송으로 시장을 싹쓸이했다. 전날 저녁에 주문해도 새벽이면 물건이 문 앞에 와 있는 총알 배송에 소비자는 쿠팡으로 몰렸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을 받던 물류센터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아이러니하게도 쿠팡이 국민의 실생활에 얼마나 스며들어있는지를 바로 보여줬다. 쿠팡 사태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쿠팡이 경쟁자가 없는 시장 지위를 누리고 있고 한국 고객이 데이터 유출에 덜 민감해 보인다”며 “잠재적 고객의 이탈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그래서일까? 쿠팡은 역대 최악의 정보 유출 사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언급하고 정부 차원의 TF가 꾸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힘겨루기’를 하는 태도를 보이는 중이다. 최근에는 정부의 반박에도 자체 조사 결과를 고집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쿠팡은 지난달 25일 ‘정보 유출자는 3300만개 계정에 접근했으나 실제 저장한 정보는 3000여개에 불과하며 제3자 유출 정황은 없는 등 피해가 미미하다’는 내용의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유출자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접한 이후 저장했던 정보를 모두 삭제하고 범죄에 사용한 노트북을 파손해 하천에 던졌다”고 주장했다. 쿠팡은 “잠수부들이 벽돌에 담긴 쿠팡 가방에 든 노트북을 하천에서 회수했고 유출자가 클라우드 계정에 등록한 일련번호와 해당 노트북의 일련번호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범행에 사용된 PC 와 노트북 등 모든 장치를 회수해 안전하게 확보했고 글로벌 보안업체들의 조사 결과도 진술 내용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매출 90% 나오는데 정보 유출 태도·대응 낙제점 쿠팡이 발표한 대로라면 고객 정보 유출 피해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또 유출자와 접촉해 장치를 확보했으니 추가 피해는 없다. 전체적으로 사건이 축소되는 것이다. 쿠팡의 발표에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쿠팡의 조사 내용은 사전에 정부와 어떤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됐다는 설명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는 “정보 유출 종류와 규모, 경위 등은 민관합동조사단이 조사 중인 사안”이라며 “쿠팡이 발표한 내용은 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과도 “쿠팡 측이 제출한 진술서와 노트북 등 증거물을 분석 중”이라며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확인하겠다”고 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쿠팡은 정부의 지시를 받아 조사를 진행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경찰은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실관계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쿠팡은 지난달 26일 내놓은 입장문에서 “정부의 지시에 따라 수주간 진행한 조사였다”고 선을 그었다. 같은 달 9일 정부가 쿠팡 측에 유출자와 접촉할 것을 제안했고 14일 쿠팡은 유출자를 처음 만난 뒤 해당 사실을 정부에 보고했으며 16일에는 정부 지시에 따라 유출자의 데스크톱과 하드드라이브를 정부에 제공했다는 게 쿠팡 측 주장이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도 “쿠팡의 입장문 형식의 보도자료에서 정부와 협력했다는 내용 중 일부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부분도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반박했다. 쿠팡이 자체 조사와 관련해 정부와 사실 공방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김범석 쿠팡 의장이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사과했다. 그동안 박대준 전 대표가 청문회 등에서 뭇매를 맞고 있는 동안에도 김 의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정부의 압박이 거세지자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5만원 상당 속사정은? 김 의장은 지난달 28일 “쿠팡의 창업자이자 이사회 의장으로서, 쿠팡 전체 임직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저희의 책임으로 발생한 이번 데이터 유출로 인해 많은 분께서 자신의 개인정보가 안전하지 않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꼈고 사고 초기부터 명확하게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큰 좌절감과 실망을 안겨 드렸다”며 “사고 직후 미흡했던 초기 대응과 소통 부족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한 달 만에야 입을 연 부분에 대해 “무엇보다 제 사과가 늦었다”면서 “모든 사실이 확인된 이후에 공개적으로 소통하고 사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돌이켜보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비판과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도 했다. 하지만 자체 조사 논란에 대해서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김 의장은 “쿠팡은 조사 초기부터 정부에 전면적으로 협력해 왔다”며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오정보가 확산하는 상황에서도 정부의 ‘기밀 유지’ 요청을 엄격히 준수했다”고 주장했다. 김 의장의 사과는 국회 6개 상임위원회가 참여하는 대규모 연석 청문회를 이틀 앞두고 나왔다. 정부가 범부처 TF를 과기부 총리 산하로 확대하고 다각도로 압수수색과 조사를 진행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그러나 사과와는 별개로 김 의장은 청문회에 불출석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장뿐만 아니라 동생인 김유석 쿠팡 부사장, 강한승 전 쿠팡 대표 등이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면서 쿠팡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쿠팡이 내놓은 보상안도 도마 위에 올랐다. 쿠팡은 지난달 29일 고객 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총 1조6850억원 규모의 보상안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보면 1인당 5만원 상당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쿠팡의 ‘꼼수’가 보인다. 청문회는 나 몰라라 보상안은 ▲쿠팡 전 상품 구매 이용권 5000원 ▲쿠팡이츠 5000원 ▲쿠팡트래블 2만원 ▲명품 플랫폼 알럭스 2만원 등으로 구성됐다. 소비자들은 보상금의 상당 부분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 등 평소 이용 빈도가 낮은 서비스 이용권 위주로 구성된 점을 지적했다. 실제 이번 보상안을 통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를 처음 알게 됐다는 소비자도 있다. 시민단체도 쿠팡의 보상안에 반발했다. 참여연대는 “1인당 5만원 보상이라고 했지만 현금이 아닌 구매 이용권으로 사실상 강제 소비를 유도하는 방식”이라며 “보상이 아니라 매출 확대를 위한 마케팅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논평을 발표했다. 쿠팡의 행보는 사사건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을 조롱하고 정부를 기만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쿠팡이 미국 시장에 상장한 기업이지만 매출 대부분을 우리나라에서 벌어들이는 상황인데도 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회원 탈퇴, 보상안 거부, 집단소송 참여 움직임이 거세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이재명 대통령도 쿠팡 사태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쿠팡 사태가 일어나고 사흘 뒤인 지난달 2일 “쿠팡 때문에 국민의 걱정이 많다”면서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관계부처는 해외 사례를 참고해 과징금을 강화하고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도 현실화하는 등 실질적인 실효적 대책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뒤늦은 사과·꼼수 보상안 도마 위에 이래서 정치권 인사 영입했나? 의혹 12일에도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반복되는 것에 대해 “경제 제재가 너무 약해서 규정 위반을 밥 먹듯이 한다”며 “앞으로는 규정을 위반해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엄청난 경제 제재를 당해서 ‘회사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규정을 위반하면 난리가 나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런데 위반해도 태도를 보면 ‘그래서 어쩔 건데’ 이런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쿠팡에 강력하게 경고하며 전방위 대응을 예고했다. 실제로 같은 달 29일,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부 장관 주재로 ‘쿠팡 사태 범정부TF’ 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과기부와 경찰청, 개인정보위원회, 금융위원회 등은 역할을 분담해 신속한 조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배 부총리는 “쿠팡이 국내 고객 정보 3000만건 이상을 유출한 것은 명백한 국내법 위반 사항으로 정부는 쿠팡이 관련 법령을 위반한 사실이 확인될 경우, 다른 기업과 동일하게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영업정지 여부도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압박에도 쿠팡이 연달아 이상한 행보를 보이자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 정도로 쿠팡의 현재 대응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쿠팡이 미국 기업인 것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증시가 쿠팡의 모든 결정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는 것이다. 실제 쿠팡이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한 다음 날 미국 뉴욕 증시에서 쿠팡의 주가는 6% 급등했다. 국내에서는 쿠팡의 ‘셀프 조사’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데 미국 시장에는 호재로 작용한 것이다. 쿠팡이 정치·국회 인사를 대거 영입한 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권 인사를 영입해 쿠팡 관련 각종 논란을 틀어막고 있다는 의혹이다. 해당 의혹은 ‘강력 경고’ ‘전방위적 대응’ 등의 수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조사는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는 배경으로도 꼽힌다. 변죽 울리다 무사통과? 실제 최근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한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국정감사를 한 달여 앞둔 시점에 박대준 전 쿠팡 대표 및 대관 총괄과 오찬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쿠팡이 일용직 퇴직금 미지급 사건에서 검찰 외압 의혹, 물류센터·배송 기사의 과로 및 산재 사망 문제가 제기된 상황이었던 만큼 적절성 논란이 불거졌다. 김 의원은 그달 16일 자신의 SNS에 “공개 일정이고 적어도 5명이 (함께) 식사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만남보다 대화의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니냐? 참고로 지난해 7월16일 쿠팡 물류센터도 방문했었다”고 적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