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지 않는' 5만원권의 비밀

그 많던 ‘신사임당’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일요시사 = 경제2팀] 박효선 기자 = 돈의 일생. 한국조폐공사에서 태어난 지폐는 세상에 나와 돈이 되어 국내를 떠돈다. 조폐공사에서 시중은행으로, 은행에서 고객이나 특정 기관 등을 거쳐 비로소 돈이 된다. 제 역할을 다해 너덜너덜해진 돈은 한국은행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한다. 그렇게 돌아온 돈은 재활용되고 끊임없이 환생한다. 그런데 고액권인 5만원이 한국은행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누군가의 금고 속으로, 장롱 속으로, 땅 속에 묻혀 깊고 어두운 곳에 숨어버렸다. 그 많던 5만원권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해외에 불법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개설한 뒤 수천억원대의 도박판을 운영한 조직이 경찰에 붙잡혔다. 경북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지난 22일 해외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에 가담한 국내 현금 인출책 양모(76)씨 등 3명을 도박개장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은 양씨의 아파트에서 수익금의 일부인 28억9000만원을 발견해 현장에서 압수했다. 모두 5만원권이었다. 경찰은 5만원권 5만7800매를 공개했다.

많이 풀렸는데…
절반 자취 감춰

5만원권은 누구에게나 사랑받는다. 가장 고액권이라 갖고 다니기 가벼우면서도 수표보다 사용이 편리하다. 명절 때마다 5만원권은 시중에 대량 유통되고 있다. 그런데 찍어내기 무섭게 5만원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5만원 지폐는 유난히 품귀현상을 보이고 있다. 발행을 많이 해도 한국은행으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3년도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은행권 발행잔액은 61조1000억원으로 전년 말 대비 9조원 증가했다. 이 가운데 5만원권만 7조9000억원 증가하면서 전체 은행권 발행잔액 중 66.6%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년 말보다 3.7%포인트 상승한 것이다. 4년여 동안 수요가 늘면서 5만원권 유통량은 40조원에 달했다. 그러나 한국은행으로 돌아오는 5만원권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

지난해 5만원권 환수율(한국은행으로 돌아오는 돈의 비율)은 전년보다 13.1% 포인트 떨어진 48.6%를 기록했다. 5만원권 환수율은 2011년 59.7%, 2012년 61.7%를 기록했지만 지난해를 기점으로 급격히 떨어졌다. 2장 중 1장은 중간에서 잠적한 셈이다.

40조 넘게 발행…환수율 절반 이하로 ‘뚝’
시중은행선 부족해 쩔쩔…한국은행 팔짱만

환수율이 낮아지면서 국민은행, 하나은행, 외환은행 등 시중은행들은 5만원권이 부족해 쩔쩔매고 있다. 일부 은행에서는 현금 자동지급기에 충전시킬 돈조차 부족한 것으로 파악됐다. 고객들의 5만원 인출 요구에 응하지 못해 창구에서는 만원권 지폐를 섞어 인출해 주는 곳도 있을 정도다.

최소한의 현금지급기용 보유고를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새마을금고, 신용협동조합,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도 마찬가지다. 고객들의 인출 요구는 많은데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5만원이 부족한 상황이다.

한국은행과 조폐공사 측은 5만원권 지폐에 대해 평소보다 적게 발행하거나 인위적으로 통화량을 축소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있을 확률이 높다.
 

1만원권은 평균 100개월(8년4개월), 5000원권은 평균 65개월(5년5개월), 1000원권은 평균 40개월(3년4개월)을 누군가의 소유로 지냈다. 5만원권의 수명은 적어도 100개월을 넘을 것이다. 2009년 6월 탄생한 5만원권은 아직 60개월도 채 안 돼 정확한 수명을 알 수는 없다.

5만원권은 지난 2009년 편익과 화폐 발행비용 절감을 위해 발행됐다. 많은 현금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5만원권의 등장을 반겼다. 그러나 서민들은 많은 돈을 들고 다닐 일도, 보관할 일도 없다. 따라서 얻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꼬리표가 없는 5만원은 지하경제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한 세수 증대라는 현 정부의 정책목표와 달리 지하경제가 확대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깊은 곳 숨어
검은돈으로

5만원권은 지하경제로 흘러 들어갔을 확률이 가장 크다. 고액 자산가와 자영업자의 금고, 사설 카지노 등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 근로자와 교포 등을 통해 해외로 빠져나갔거나 10만원권 수표 대신 어디선가 비자금으로 돌고 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5만원권이 악용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2011년에는 전북 김제의 한 마늘밭에서 5만원권 22만장의 110억원대 뭉칫돈이 발견됐다. 이 금액은 인터넷 도박으로 벌어들인 범죄수익금이었다. 옷장과 침대 밑에 5만원권 지폐 22만장이 숨어있었다. 

당시 수사당국은 자신의 처남 등이 불법 인터넷 도박 사이트로 벌어들인 돈을 소유하고 있던 마늘밭에 숨긴 이모씨 등을 검거했다. 주범인 그의 처남 이모씨는 수배 중이다.

지난 2012년에는 서울 강남에서 유명 여성전문병원을 운영하는 여의사의 집에서 현금 24억원이 발견됐다. 이 의사의 자택에서는 5만원권이 가득 찬 박스와 가방들이 안방 장롱, 베란다, 책상 등에서 쏟아져 나왔다. 모두 탈세를 위해 빼돌린 돈이었다. 지난해에는 원전 비리와 관련돼 한국수력원자력 간부의 집에서 5만원권 6억원어치 뇌물이 발견됐다. 

이렇게 5만원은 보란 듯이 지하경제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5만원권이 깊은 곳으로 숨을수록 지하경제 규모는 더욱 커진다. 지하경제가 커진다는 것은 세금을 걷기 어려워진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되면 정부는 세금을 더 올릴 수밖에 없다. 5만원권이 지하경제 깊은 곳으로 숨어들수록 악순환은 되풀이되는 것이다. 유리지갑 월급쟁이들과 성실한 납세자들만 올라간 세금을 모두 떠안게 된다.
 

그런데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한국은행은 ‘5만원권 환수율 하락’이 경제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팔짱만 끼고 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5만원권이)어디에 잠겨있는지 부서마다 조사를 하고 있다”며 “아무래도 고액권이다 보니 지하경제로 들어갔을 확률이 커 추적이 어렵다”고 말했다. 5만원의 행방 추적에 사실상 손놓고 있는 모습이다. 

로비로 빠지고
해외로 빠져나가

5만원은 최고의 로비 수단이다. 부피와 중량의 효율성 때문이다. 무게가 가벼워서 이동이 쉽다.

로비가 많은 것으로 유명한 건설사, 제약회사 등의 업체들은 5만원권 확보에 열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설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5만원권을 많이 확보할 수록, 로비를 잘할수록 능력있는 직원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5만원권이 없으면 상품권으로 로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상품권은 5만원권보다 위험하다. 추적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5만원은 자금 추적으로부터도 안전하고 무게도 가볍다.

1억원은 5만원권 2다발로 무게가 2kg도 되지 않는다. 와인이 2병 들어가는 007가방에 보관해도 5억원은 충분히 들어간다. 그만큼 거액의 돈을 보관하거나 운반하는 게 쉽다. 가정용 금고는 보통 소형 사이즈도 10억원 정도는 들어간다. 자금 추적으로부터도 안전하다.

그래서 5만원권의 행방은 자주 뉴스거리로 등장하곤 한다. 뇌물 혹은 비자금 관련 소식이 주를 이룬다. 

지난 2012년 장진수 전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이 공개한 5만원권 100장 묶음 10개 다발이 대표적이다. 당시 장 전 주무관은 자신이 청와대의 민간인 사찰 은폐 의혹을 폭로하려 하자 류충렬 전 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이 5000만원을 주며 회유했다고 밝혔다.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전 회장은 5만원권 240장(1200만원)을 브로커에게 내고 중국으로 밀항하려다 경찰에 붙잡혔다.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5만원권이 정치권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선거철을 맞아 5만원권이 뇌물로 빠지고 있다는 뒷말이 오간다.

경북도내에서는 선거법 위반 적발 사례가 4년 전 지방선거 때보다 크게 늘었다. 경북도선관위는 지방선거 91일 전인 5일 현재 도내에서 모두 171건의 선거법 위반 사례를 적발했다. 이는 2010년 지방선거 91일 전의 63건 적발과 비교하면 3배나 늘어난 수치다.

없어질수록 지하경제 확대
도박자금·비자금으로 활용
암암리에 해외로 퍼져 유통

또한 일부 5만원권은 해외로도 빠져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동포들이 국내에서 번 돈을 중국으로 가져가 위안화로 바꾸고 있다는 것. 옌볜 등 일부 지역의 사설 환전소는 국내보다 더 좋은 환전 조건을 제시한다.

중요한 변수는 환율이다. 옌볜에서는 위안화 대비 원화의 가치가 떨어질 때마다 5만원권이 인기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원화가치가 다시 올라갈 것에 대비해 저렴할 때 원화를 사두려는 교포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교포들은 환전 조건이 한국보다 좋은 사설환전소에서 휴대가 편리한 5만원권을 바꾸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내국인의 해외여행으로 5만원권이 빠져나가기도 한다. 한류에 의해 동남아 등에서 원화 환전수요가 높아졌다는 분석도 있다. 외국 금융회사 원화 환전이 2006년부터 허용된 데 이어 해외 유출 원화에 대한 규제도 완화돼 이 같은 추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를 수치로 확인할 수는 없다.

위조지폐 활개
5만원 딜레마

5만원권 수요가 늘어난 만큼 위조지폐도 시중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지난해 적발된 5만원권 위폐만 100여건으로 시중에 유통되는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된다. 그 규모는 1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현금 거래를 하는 전통시장이나 편의점, 택시 등에서 위조지폐가 유통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월에는 울산과 경남지역에서 위조지폐들이 발견됐다. 울산 남부경찰서에 따르면 울산시 남구 삼산동 현대백화점 앞에서 남자 승객 2명을 내려준 택시기사가 요금으로 받은 5만원권이 위조지폐인 것을 확인했다. 택시기사는 남구 야음동 울산세관 앞에서 태운 승객들이 5만원을 요금으로 내 거스름돈 4만6000원을 줬다.

앞서 같은 날 남구 신정동 수암시장 앞에서도 하차한 남자 승객 2명이 5만원권을 요금으로 냈다가 택시기사가 지폐의 상태를 의심하자 다른 돈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승객들 말투가 중국동포(조선족)처럼 들렸다”는 택시기사들의 진술을 토대로 용의자를 쫓고 있다.

경남 남해군에서는 남해읍의 한 마트 직원이 물건값으로 받은 현금을 은행에 입금하는 과정에서 컬러복사기로 위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5만원권 한 장을 발견했다.

남해에서는 지난해 연말부터 5000원권과 5만원권 위조지폐가 4차례나 발견됐다. 경찰은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있으나 아직 범인을 붙잡지 못했다.

적발된 위폐 감별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불빛에 비춰 지폐 왼쪽 여백에 신사임당이 나타나지 않거나 나타나더라도 일그러지면 위조지폐다. 상하좌우로 움직였을 때 홀로그램 안쪽 태극마크가 움직이지 않아도 위폐다. 또 심하게 낡고 구겨진 5만원권은 위폐를 의심해 봐야 한다.

LG경제연구원 보고서는 캐시 이코노미(Cash Economy)의 증가에 대해 ‘지하경제 확대의 경고등’이라고 지적했다. 캐시 이코노미는 거래가 신용카드, 계좌이체 등이 아니라 주로 화폐, 즉 현금으로 이뤄지는 경제를 뜻한다. 캐시 이코노미는 지하경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고서는 5만원권이 사라지면서 한국 경제에서 캐시 이코노미가 확대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dklo216@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화폐개혁’가능할까 ‘경→조?’, ‘억→만?’

화폐개혁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정부는 이를 구체화한 대북 제안인 ‘드레스덴 구상’까지 발표했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 내부에서 리디노미네이션(화폐액면 단위변경) 검토 중이다. 특히 우리나라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조(兆)를 넘어 경(京)단위 화폐통계가 실물경제 부분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자금 흐름을 보여주는 한국은행 자금순환표 상의 금융자산은 작년 말 1경263조원, 금융부채는 1경302조원으로 집계됐다. 최근 경 단위 화폐 통계의 확산은 무엇보다 경제 규모 증대에 따른 것이다.

한국은행은 외국인들에게 통계를 설명할 때 1000조원만 돼도 ‘1쿼드릴리언’(quadrillion, 1000조)이라는 생소한 영어 화폐 단위를 사용해야 한다. 외국의 경우 통계 단위의 대부분이 10억(billion) 단위로 해결되고 최대치라도 조(trillion) 단위에 그친다. 이는 과거 5만원권이 나오기 직전 화폐액면 단위 변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액면 단위변경 검토

또한 화폐개혁은 지하경제 양성화 방안으로도 거론되고 있다. 구권을 신권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탈루된 현금 소득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에 묻힌 자금을 끌어내고 세수를 늘리는 데 화폐개혁이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민감한 사항인 만큼 한국은행도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현 상황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 총재는 지난 3월 인사청문회에서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시행 시 부작용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지금 상황에서 상당한 논란과 비용이 불가피한 화폐 단위 변경을 추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화폐개혁 움직임이 있었지만 매번 엎어졌다. 화폐개혁은 김영삼 정권 시절 한국경제에 파장을 일으켰던 금융실명제보다 더욱 강력한 수단이다. 화폐를 새로 만들고 물품 가격을 바꿔 표시하는 것은 물론 전국에 있는 은행 현금 지급기, 자판기 등 관련 기계와 각종 시스템을 모두 손봐야 하기 때문이다.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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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춤 추는 이정현 마이웨이

칼춤 추는 이정현 마이웨이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이정현 공천관리위원장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고 있다. 주호영 국회부의장·김영환 충북도지사가 이 공관위원장의 칼에 희생됐다. 변방의 이방인이어서 휘둘러야 했던 칼의 운명은 반복되고 있다. 그는 왜 칼을 휘두르는 걸까? 국민의힘 이정현 공천관리위원장(이하 공관위원장)이 지난 13일 “여러 의견을 존중하는 과정에서 제가 생각했던 방향을 더는 추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면서 사퇴했다가 이틀 후 번복했다. 이 공관위원장은 사퇴했던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이틀 후 또 번복 정치권 안팎에선 대체로 이 공관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퇴의 주요 원인으로 오세훈 서울시장과의 갈등을 주된 원인으로 거론했다. 오 시장은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에 소극적인 지도부 혁신 ▲혁신적인 선거대책위원회 조기 출범 등을 요구하면서 지방선거 공천 기간 내 후보 등록을 하지 않았다. 이 공관위원장의 사퇴 번복에는 장 대표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퇴 번복 후 “장 대표가 지난 14일 공천 혁신을 완수해 달라면서 공천 관련 전권을 맡긴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 공관위원장의 사퇴는 대체로 ‘무력 시위’로 해석되고 있다. 결국 오 시장은 지난 17일 국민의힘 서울시장 경선 후보로 등록했다. 복귀한 이 공관위원장은 ‘장 대표가 부여한 공천 관련 전권’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지난 16일에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이하 공관위)는 박형준 부산시장 공천 컷오프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박 시장을 컷오프하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을 단수공천하자”고 주장한 핵심은 이 공관위원장이었다. 그러자 부산에 지역구를 둔 국민의힘 의원들이 장 대표를 방문해 항의했고, 장 대표는 박 시장·주 의원 간 경선을 결정했다. 같은 날 공천이 날아간 현역 광역자치단체장은 김영환 충북도지사였다. 공관위는 김 지사를 컷오프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저 “김 지사의 공적·업적을 부정·평가절하 하기 위한 게 결코 아니”라면서 시대 교체·세대 교체를 언급했다. 정치권에선 ▲만 70세 고령 ▲수뢰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는 등 사법 리스크 ▲재임 중 각종 발언 논란 등 대체로 김 지사의 약점이 컷오프의 실제 이유 아니겠느냐는 추측이 돌고 있다. 김 지사는 곧바로 “특정인을 두고 면접을 진행하다니 기가 막힌다”면서 일각에서 거론됐던 ‘국민의당 김수민 전 의원 충북도지사 후보 내정설’을 암시했다. 김 전 의원은 지난 2024년부터 1년 동안 충북 정무부지사를 지냈다. 김 지사는 지난 18일엔 서울남부지법에 공천 배제 효력 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어 다음 날 진행된 심문에서 “이 공관위원장이 김 전 의원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출마 여부를 타진했다”며 “절차적 정당성이 파기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관위는 이와 상관없이 지난 20일 김 지사를 제외한 경선 구도를 확정했다. 이 공관위원장은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 공천과 관련해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공관위는 지난 22일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 경선과 관련해 주호영 국회부의장·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을 공천에서 배제했다. 광주시장 출마 아닌 공관위원장 지방선거와 묶인 운명의 끝은? 대구시장 후보 경선에 대해선 한동안 “국민의힘 최은석 의원 공천이 사실상 내정된 게 아니냐”는 설이 돌아다녔다. 그러자 최 의원은 지난 21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공관위원장은 공천 심사 면접에서 처음 만났다”면서 이를 강하게 부인했다. 주 부의장은 공천 배제에 크게 반발했다. 그는 공천 배제 가능성이 거론되던 지난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대구를 공천 실험장으로 삼으면 안 된다”며 “대구시장을 더불어민주당에 상납하려는 거냐”고 비판했다. 이어 “이 공관위원장은 대구의 자존심을 더 이상 짓밟지 말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주 부의장 공천 배제는 지난 22일 확정됐다. 그는 지난 25일 가처분 신청과 무소속 출마 가능성을 언급했다. 일각에서 의아하게 해석하는 지점은 유튜버 고성국씨 등 강경 보수 진영에서 강하게 지지했던 이 전 위원장이 공천에서 배제됐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추 의원이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로 확정돼 의원직에서 물러나면, 이 전 위원장이 추 의원의 지역구 대구 달성 재보궐선거에 출마하는 게 아니냐”는 설이 나왔다. 반대로 “주 부의장이 무소속으로서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하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주 부의장의 지역구인 대구 수성갑에 출마하는 것 아니냐”는 설도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친한(친 한동훈)계 일원으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박정하 의원은 지난 24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주 부의장의 공천 배제엔 감정이 어느 정도 반영돼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하지 않고선 해석이 잘 안 된다”며 “장 대표의 생각도 분명히 들어가 있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이어 주 부의장과 한 전 대표의 연대설에 대해서도 “한 전 대표가 보수 재건 후 당에 돌아오는 길을 찾아가는 길에 있어선 주 부의장의 선택 여하에 따라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 검토할 것이라고 본다”면서 연대설을 부정하진 않았다. 장 대표는 지난 23일 국민의힘 대구시당을 방문해 “공천 관련 모든 것은 당 대표인 제 책임”이라면서 공천 내정설에 대한 간접적인 의견을 밝혔다. 이어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경선을 치르겠다는 말씀을 드렸고, 당 대표로서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광역지방자치단체장 경선 상황·흐름에 대해선 “영남권 기성 중진과 반 장동혁 성향 인사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장 대표와 이 곤공관위원장이 각각 ‘굿 캅’과 ‘배드 캅’으로 역할을 분담한다고 의심하고 있다. 의외의 연대설 이 공관위원장의 활동 방향을 놓고, 일각에선 그가 “사실상 장 대표의 칼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의 삶과 정치 활동은 국민의힘 주류 정치인과 많이 다르다. 국민의힘은 영남을 주된 지역 기반으로 두고 있지만, 이 공관위원장은 전남 곡성 출신이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곡성에서도 특히 위치가 외진 목사동면 동암리로 알려졌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둔 것으로 알려졌고, 정계 입문 계기는 그의 고향을 지역구로 두고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민주정의당 구용상 전 의원의 비서관으로 발탁된 것이었다. 구 전 의원이 지난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이 공관위원장은 민주정의당의 말단 간사로 특채됐다. 영남 기반 정당의 호남 출신 당직자였던 그는 훗날 “늘 근본 없는 놈 취급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26년 후 그는 고향 전남 순천·곡성에서 진행된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고, 다시 2년이 지나선 새누리당 대표로 당선됐다. 당선 이후 그의 28년에 대해선 “한 편의 드라마” 혹은 “인간 승리”라는 평가도 나왔다. 이 공관위원장에겐 2명의 이 위원장이 있다. 그는 재보궐선거 당시 49.43%를 득표해 40.32%를 득표한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서갑원 후보를 물리쳤다. 이 후보의 당선엔 서 후보와 노관규 전 순천시장의 갈등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정치적 흐름만을 탄 결과라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도 있다. 고향 곡성에서 이 공관위원장에 대한 지지세가 높아 70% 이상 득표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그는 새누리당이 아닌 ‘곡성 출신 이정현’을 내세워 자전거를 타고 지역구를 누볐다. 당시 그는 스스로 ‘머슴’ 혹은 ‘촌놈’을 자처했다. 그러면서 “고향을 위해 미치도록 일하고 싶다”며 “죽도록 부려먹다가 못하면 그때 쓰레기통에 다시 넣으시더라도 이번 한번만큼은 제 손을 한 번 잡아달라”고 호소하는 등 지역의 호감을 얻는 발언을 이어나간 영향도 컸던 것으로 분석됐다. 비판·조롱 낯설게하기 지난 2016년 총선에선 지역구 조정 영향으로, 이 공관위원장은 전남 순천에 출마했다. 고향이 아닌 지역구에 출마한 것은 일견 불리할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44.54%를 득표해 당선됐다. 그는 재보선 당선 이후 매주 지역구를 방문해 현장을 누빈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당시 야권이었던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에서 모두 후보를 출마시킨 구도의 영향도 호재로 작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공관위원장은 지난 2022년 지방선거에선 국민의힘 전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해 선거 비용 보전액 하한선 15%를 넘기는 18.81%를 득표해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그는 중앙 정치에선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중앙 정치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을 때 그 원인은 대체로 설화였다.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으로 재직했던 2014년엔 길환영 당시 KBS 사장에게 연락해 “세월호 참사 관련 해경에 대한 비판을 지금은 자제해 달라”고 요구한 게 2년여가 흐른 후 뒤늦게 알려져 물의를 일으켰다. 이는 방송 편성 관련 규제·간섭을 금지한 방송법 위반 행위가 될 위험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는 벌금형을 확정받았다. 새누리당 최고위원이었던 지난 2015년엔 광주를 방문해 ‘광주 비하’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했다. 당시 그는 “광주 시민이 이정현이를 쓰레기통에 버렸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나 같은 쓰레기를 끄집어내서 탈탈 털어 청와대 정무수석·홍보수석을 시켜주는 배려를 했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에게 과잉 충성하는 이 공관위원장의 모습이나 발언은 지금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였던 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12년 9월 과거사 사과 기자회견에서 회견문을 읽은 후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당시 상황을 촬영한 사진 중에 후보 공보단장이었던 이 공관위원장이 “질의 시간을 가지면 안 된다”는 의미로 손가락으로 X 표시를 만드는 사진도 있다. 새누리당 대표였던 지난 2016년 11월엔 야권이 박 전 대통령의 임기 단축 협상을 거절하고 탄핵소추를 추진하자 “그 사람들이 탄핵을 실천하면 뜨거운 장에 손을 집어넣겠다”고 반발해 한동안 이 공관위원장을 조롱하는 합성 사진이 범람했다. 정치인은 대체로 선거 현장·당내 투쟁에선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 정치인은 그 간극이 커서 주목받는다. 이 공관위원장의 태도는 “상대방에게 진정성 있게 몰입한다”는 장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 진정성 있는 몰입은 정반대의 이미지를 연출한다. 지역구에선 유권자들이 전통적인 지역 구도에 따른 관성을 무시하고 그를 지지하는 이변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중앙 정치에선 지지자들의 환호와 반대파의 비판·조롱으로 나뉜다. 주호영·김영환 치니 한동훈 꿈틀…나비효과? 마구 휘두르고 장동혁이 수습…굿 캅 배드 캅? 20세기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따르면, 이 공관위원장은 ‘호남 출신 보수정당 소속’으로 던져졌다. 이는 그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주어진 운명이 그를 던진 측면도 있다. 던져진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그의 선택이 부여한 운명이었다. 이 때문에 이 공관위원장은 고향에선 ‘친근한 고향 사람’이 돼 선거에 임하면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보수정당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그를 발탁한 사람은 박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충성은 그 스스로 선택해 자신의 삶을 던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영남 출신 엘리트’ 주축으로 구성된 국민의힘 기준에서 이 공관위원장은 변방의 이방인이다.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은 지난 2016년 8월 이 공관위원장이 새누리당 대표에 당선된 후 그에 관한 칼럼을 썼다. 양 주필에 따르면, 이 공관위원장은 당직자 시절 자신보다 어린 당 출입기자로부터 반말을 들어가면서 그의 심부름을 했다. 변방의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태도는 훨씬 ‘편하게’ 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국민의힘에 있다. 러시아 문예비평가 빅토르 슈클로프스키는 시 창작과 관련해 ‘낯설게하기’란 이론을 창안했다. “익숙한 대상을 생경하게 바라보면서 그 본질을 시로 표현할 수 있다”는 취지의 이론이다. 그런데 이 공관위원장은 존재 자체가 ‘낯설게하기’였다. 고향에선 보수 정당 소속이기 때문에 낯설다. 보수 정당에선 호남 출신인 그의 존재는 낯설면서도 동시에 강렬하다. 공천관리위원장으로서 시행하는 주요 정치인 컷오프도 그가 낯선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부각된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그의 충성도 반대파·비판자의 관점에선 개종자의 열정·과잉 사회화로 보일 여지가 있다. 개종자의 열정은 원래 특정 집단 소속이 아니었던 사람이 집단에 들어간 이후 기존 구성원보다 더 근본주의적인 태도로 열정을 쏟아붓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대체로 “난 원래 이 집단 사람이 아니었다”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진행된다. 그에게는 늘 ‘근본’과 관련된 비판을 받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이다. 과잉 사회화도 뒤늦은 주류 문법 학습 때문에 유연성을 발휘하기보다 집단의 규범을 그대로 집행하려는 경향으로 이어지는 측면을 일컫는다. 개종자의 열정·과잉 사회화를 상징하는 역사 속 인물로는 긍정적인 측면에선 한때 유대교 바리새파에서 촉망받았다가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한 사도 바울을 언급할 수 있다. 부정적인 측면에선 20세기 소련의 공안 탄압을 상징하는 라브렌티 베리야를 언급할 수 있다. 조지아 출신인 베리야는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발탁된 후 대숙청을 진두지휘했던 니콜라이 예조프를 몰아내고 방첩기관 NKVD의 수장이 됐다. 지금도 베리야는 공안 탄압을 상징한다. 특정 집단에 기반이 없는 이방인이 그 집단에서 생존하기 위해 누군가의 ‘칼’이 되는 것은 숙명에 가깝다. 숙명적으로 묶인 운명 이 공관위원장은 원래 광주·전남통합시장 출마를 준비했다가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임명된 직후 군복을 연상시키는 야전상의를 입고 다시 등장했다. 사실상 장 대표의 칼로써 공천을 진두지휘하면서 그의 정치적 운명은 지방선거에 묶였다. 그의 운명은 여전히 칼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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