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골프천재’ 노승열·리디아 고

세월호 참사로 슬픈 국민에 ‘희망샷’

[일요시사=사회팀] ‘코리안남매’ 노승열과 뉴질랜드 교포 리디아 고가 PGA·LPGA서 나란히 우승을 차지했다.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겨 있는 사이, 골프천재들이 먼 타국에서 희망을 안겨줬다. 우승컵을 쥔 노승열의 새하얀 모자에 달린 세월호 희생자를 애도하는 마음을 담은 노란 리본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노승열(23·나이키골프)과 뉴질랜드 교포 리디아 고(17·캘러웨이)가 지난달 28일(이하 한국시간) 나란히 미국프로골프(PGA)투어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대회를 동반 석권하며 한국 골프의 위상을 세계에 알렸다. 앞으로 두 선수가 세계 골프 무대를 호령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PGA 노승열
LPGA 리디아 고
 
‘영건’ 노승열은 지난달 28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애번데일의 루이지애나 TPC(파72·7399야드)에서 열린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취리히 클래식에서 최종일 1언더파 71타를 기록해 합계 19언더파 269타로 투어 진출 2년 만에 첫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같은 날 뉴질랜드 교포 리디아 고(17·한국명 고보경)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레이크 머세드 골프장에서 막을 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스윙잉스커츠 클래식에서 합계 12언더파 276타로 프로 전향 후 첫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노승열과 리디아고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골프 재능을 선보인 천재로 알려졌다.
 

PGA 투어에서 첫 우승을 거머쥔 노승열은 최경주(44·SK텔레콤), 양용은(42·KB금융그룹), 배상문(28·캘러웨이)에 이어 한국 선수로는 4번째로 챔피언에 올랐다. PGA 데뷔 2년 만에, 78번째 도전 끝에 얻은 소중한 우승이다.
 
우승상금 122만4000달러(약12억7000만원)를 받은 노승열은 앞으로 2년 동안 투어에서 뛸 수 있는 카드는 물론 올해 플레이어스 챔피언십과 PGA챔피언십 출전권, 그리고 내년 마스터스행 티켓을 한꺼번에 거머쥐는 기쁨도 함께 누렸다. 또 오는 5월29일 만 23세 생일을 앞두고 한국 선수로는 최연소 우승의 진기록도 세웠다.
 
노승열은 우승 직후 “안타까운 사고로 슬픔에 빠진 모든 분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국의 국민을 위한 행복 에너지 배달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내비쳤다. 웰스 파고 챔피언십을 그 일환으로 적극 활용하겠다는 각오다.
 
노승열은 인터뷰에서 “웰스 파고 챔피언십과 그 다음 주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 출전해 2승에 도전하겠다”고 의욕을 다졌다. 그리고 우승 다음 날인 29일, 세월호 피해 지원을 위해 5000만원을 기부했다. 노승열의 선행은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3년간 꾸준히 선행을 실천해왔다.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는 어린이 환자들을 위해 고대의료원에 2011년부터 3년 동안 모두 9000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노승열 우승에 현지 언론은 무척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단순히 나이 때문이 아니다. 3라운드까지 보기 한 개 없는 완벽한 플레이를 했고 메이저대회 우승 경력이 있는 베테랑 키건 브래들리와 최종일 맞대결을 하면서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던 대담한 플레이가 돋보였다는 것.
 
 
키건 브래들리는 2번홀에서 버디를 잡으면서 동타를 만들었다. 그러나 브래들리가 5번홀 보기, 6번홀에서 트리플보기를 하면서 갑자기 무너져버렸다. 노승열은 8번홀에서 버디를 잡으면서 브래들리를 완전히 떼어놨다. 메이저 우승 경력이 있는 미국의 차세대 스타 브래들리는 지난해 배상문에게 역전패한데 이어 노승열에게도 참패를 당했다.
 
복수의 전문가에 따르면 노승열은 인정받는 ‘골프 신동’이다. 타이거 우즈의 스승이었고 지난해 말까지 노승열을 가르쳤던 세계적인 골프교습가 숀 폴리는 그에게 특별한 애칭을 붙였다. ‘Soon You`ll Know’다. ‘Seung-Yul Noh’의 한국식 발음(승열 노)과 비슷하게 부르며 ‘곧 널리 알려지는 스타가 될 것’이라고 그의 재능을 인정한 것이다.
 

노승열은 PGA 투어 첫 승을 새 캐디와 이뤄냈다. 하버드대 출신의 캐디 마크 마조(미국)와 호흡을 맞췄던 노승열은 지난 3월 아놀드 파머 인비테이셔널을 끝으로 캐디를 교체했다. 이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베테랑 캐디 스콧 새즈티낵(호주)과 마침 일정이 맞았고, 이번 경기부터 함께 플레이를 했다.
 
새즈티낵은 트레버 이멜만(남아공)과 스튜어트 애플비(호주) 등의 백을 멨고, 10년 이상 PGA 투어를 누빈 베테랑이라 젊은 노승열에게 큰 도움이 됐다. 앞으로도 새즈티낵과 함께 PGA 투어를 누빌 가능성이 크다.

노란 리본 승전보
고국에 위로 안겨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난 노승열은 초등학교 1학년 때 골프채를 잡아 장타자로 이름을 날리며 중학교 3학년 때인 2006년 국가대표로 발탁돼 일찌감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이후 2007년 프로로 전향해 2008년 아시안투어 대회인 미디어 차이나 클래식에서 정상에 오르는 등 그해 아시안투어 신인상을 받기도 했다.
 
2010년에는 아시안투어와 유럽투어가 공동 개최한 메이뱅크 말레이시아오픈에서 18세 282일의 나이로 1위에 올랐다. 그는 그해 아시안투어 상금왕에 오르기도 했다. 뉴질랜드 교포 대니 리가 보유한 유럽투어 최연소 우승(18세 213일)에 이어 두 번째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운 것이다.
 
노승열은 2012년 두 번째 도전 만에 PGA 투어 퀄리파잉스쿨을 통과해 꿈의 PGA 투어 무대에 진출했다. 하지만 PGA 정복은 쉽지 않았다. 함께 PGA 티켓을 따낸 배상문이 지난해 바이런 넬슨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는 동안 노승열은 톱‘10’에만 5번 오르는 데 그쳤다.
 
2013년 난조에 빠져 투어 카드를 잃을 뻔하는 고비를 맞았지만 2부 투어인 웹닷컴 투어 파이널 대회에서 우승하며 2013-2014 시즌에 합류했고, PGA 투어 78번째 출전 대회인 취리히 클래식에서 마침내 우승컵을 거머쥐며 자신의 실력을 당당하게 입증했다.
 
노승열의 골프 인생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아버지 노구현(51)씨다. 그는 어릴 적 노승열의 캐디를 자청하는 등 적극 지원했고, 노승열이 미국 생활을 할 때도 함께 했다. 
 
한국 남녀 골프 유망주
미국 프로무대 동반우승
 
테니스 선수 출신인 노씨의 권유로 초등학교 1학년 때 골프채를 잡은 노승열은 아버지의 지도 아래 집에서 3분 거리인 바닷가를 훈련장으로 삼아 매일 4km 거리의 모래사장을 뛰었다. 강한 하체에서 나오는 장타 본능은 어린 시절 훈련에서 나온 것이다.
 

노씨는 어릴 적 아들의 캐디백을 직접 메는 등 열성적으로 지원했다. 아들이 프로가 된 후에는 직장까지 그만두고 캐디를 자처했다. 노씨는 갑상선암 재발로 그동안 건강 상태가 나빴지만 우승 소식을 듣고는 “갑상선 질환은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는데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가 다 풀린 것 같다”며 기뻐했다. 
 
또 한 명의 골프 신동 리디아 고는 지난해 10월 프로 전향 선언 후 처음으로 LPGA 투어 대회를 제패했다. 이로써 리디아 고는 여자골프 세계랭킹 2위로 올라섰다. 지난달 29일 발표된 세계여자골프랭킹에서 9.42점을 받아 4위에서 2계단 상승했다.
 
프로 데뷔 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첫 우승이 순위 상승을 견인했다. 리디아 고는 28일 끝난 스윙잉스커츠 클래식에서 스테이시 루이스(미국)를 1타차로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지난달 24일 17번째 생일을 맞았던 그는 선물로 우승을 받은 것.
 
박인비(26·KB금융그룹)는 55주 연속 세계랭킹 1위(10.12점)를 지켰고, 루이스는 3위(9.31점)에 자리했다. 반면 박인비를 위협했던 수잔 페테르센(노르웨이)은 최근 부상으로 인한 대회 불참으로 4위(8.91점)까지 밀려났다.
 
베테랑 카리 웹(호주)은 5위(7.24점)를 유지했고, 스윙잉스커츠에서 공동 9위에 올랐던 크리스티 커(미국)는 10위로 한 계단 올랐다. 롯데 챔피언십 우승자 미셸 위(미국)는 13위(4.19점)로 12위 최나연(27·SK텔레콤·평점 4.29)을 턱밑까지 추격했다.

나란히 우승하며

세계에 얼굴도장
 
리디아 고는 아마추어 시절 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LET)와 호주여자프로골프(ALPG)투어 대회에서 총 3차례 우승했고 LPGA투어 대회에서도 2승을 거두며 두각을 보였다. 프로 전향  불과 2개월 후인 지난 12월에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스윙잉스커츠 월드 레이디스 마스터스에서 우승했고, 이번 대회에서도 1위에 올라 ‘천재 소녀’라는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켰다.
 
그의 최대 강점은 침착한 경기 운영이다. 이날 최종 라운드에서도 초반 세계 정상급 선수인 스테이시 루이스(미국)에게 2타 차로 뒤졌지만 8, 9번홀 연속 버디로 동타를 만든 뒤 13번홀에서 버디를 낚아 이 홀에서 보기를 범한 루이스를 2타 차로 따돌렸다.
 
[노] 생애 첫 PGA 우승…최연소 타이틀
[고] 세계랭킹 2위…1위 박인비 0.7점차
 
리디아 고는 “루이스 같은 베스트 플레이어와 경기하는 건 항상 기쁘고 배울 점이 많다”며 최종 라운드를 출발했다. 2012년 캐나다여자오픈에서 LPGA 투어 최연소 우승을 거뒀을 때도 루이스와 챔피언 조에서 정면 승부를 펼쳤는데 결과가 좋았다. 선두로 출발했던 리디아 고는 5타를 줄이며 정상에 우뚝 섰고, 반면 1타 차 뒤진 채 최종 라운드를 맞은 루이스는 이븐파에 그치며 공동 6위까지 미끄러졌다.
 
루이스는 “15세 소녀의 플레이라곤 믿기지 않는다”며 혀를 찬 적이 있다. 스윙잉 스커츠 LPGA 클래식 최종 라운드에서 루이스는 침착했다. 작전대로 전반에 잠잠하다 후반에 승부수를 띄웠다. 반면 리디아 고는 전반에 업앤다운이 좀 있긴 했지만 버디를 보기보다 1개 더 잡아내 10언더파 공동선두로 올라섰다. 둘은 10번홀(파4)에서 나란히 보기를 적어 9언더파 공동선두가 됐다. 
 
13번홀(파4)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리디아 고가 2m 버디 퍼트를 성공한 반면 루이스는 2.5m 파 퍼트 실패로 보기를 적어 2타 차로 벌어졌다. 파5 14번홀에서도 리디아 고는 연속 버디를 낚았다. 루이스도 버디를 잡아 9언더파로 올라섰다. 세계랭킹 3위 루이스의 저력도 만만치 않았다. 루이스는 16번홀(파4)에서 버디를 솎아내 1타 차로 좁히며 숨통을 조여 왔다. 
 
하지만 루이스는 17번홀(파4)에서 찬스를 살리지 못했다. 리디아 고가 2온에 실패해 어려운 파 세이브를 하는 동안 루이스는 4m 버디 찬스를 잡았다. 그러나 퍼트가 약간 짧았고, 루이스는 아쉬움이 고개를 푹 떨궜다. 오히려 신지은이 3m 버디를 솎아내 10언더파로 올라섰다. 
 
18번홀에서 숨 막히는 1타 승부가 벌어졌다. 챔피언 조 3명 모두 3m 이내의 버디 찬스를 잡은 것. 먼저 퍼트한 신지은은 버디 기회를 놓쳤고, 리디아 고가 1.5m 버디를 시원하게 성공시키며 최종 우승을 확정 지었다. 
 
최근 LPGA 투어에서 리디아 고에 버금가는 화제를 모은 렉시 톰프슨(19·미국)은 2010년 6월에 프로 전향을 선언하고도 첫 우승을 2011년 9월에 기록했고, 미셸 위(25) 역시 2005년 10월 프로로 데뷔한 뒤 첫 승을 2009년에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디아 고는 데뷔 후 첫 시즌부터 가볍게 우승컵을 거머쥐며 ‘골프 신동’의 등장을 세계에 알렸다. 
 
리디아 고는 제주에서 태어나 5살 때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2003년 가족들을 따라 뉴질랜드로 이민을 간 뒤 각종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우며 골프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리디아 고는 영국왕실골프협회가 수여하는 매코맥 메달을 3년 연속 수상했다.
 
매코맥 메달은 명예의 전당에 오른 마크 매코맥의 이름을 딴 메달로 매해 시즌이 끝난 뒤 가장 좋은 성적을 올린 아마추어 선수에게 수여한다. 리디아 고는 지난해 LPGA 투어 대회까지 제패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올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리면서 한국계의 명성을 높였다.

예견된 결과
골프 기대주
 
리디아 고가 작년 말 프로 전향 후 각종 대회에서 받은 상금은 하루 5300 뉴질랜드달러(약470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후원사와의 계약금이나 광고 수입 등은 포함되지 않은 액수다. 상금은 올해 LPGA 대회에서 받은 액수가 총 58만8816뉴질랜드달러, 지난해 두 차례 프로대회에서 21위와 1위를 해서 받은 액수가 23만4406뉴질랜드달러, 지난 1월 뉴질랜드 오픈에서 2위를 차지해 받은 액수가 3만2710뉴질랜드달러 등이다. 
 
리디아 역시 정상급 선수로 성장하기까지 아버지의 도움이 컸다. 리디아 고는 5세 때 처음 골프를 시작해 48일째 되는 날 첫 라운드에서 130타를 칠 정도로 골프감각이 뛰어났다. 그 이듬해 테니스 선수 출신인 아버지 고길흥(53)씨는 리디아 고를 데리고 뉴질랜드로 골프 이민을 감행했다.
 
고씨는 딸에게 “너는 천재다. 특별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아 리디아 고는 골프에 대한 스트레스보다는 즐길 줄 아는 선수가 됐다. 고씨는 또 자신이 고안한 훈련법으로 딸을 직접 지도했다. 집 근처 골프장의 파3홀에서 각각 다른 세 곳의 티에서 각각 30개씩 볼을 치며 거리 맞추는 연습을 매일 했다. 그 결과 리디아 고는 “홀 가까이 아이언 샷을 붙이는 대회가 있으면 내가 당연히 우승”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리디아 고는 우승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매우 특별한 존재다. 어떤 우승이든 큰 차이가 없지만 이번 대회는 아버지와 함께한 우승이라는 점이 달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khlee@ilyosisa.co.kr>
 
 
[노승열은?]
 
▲강원도 속초 출생
▲경기고 졸업
▲고려대 재학 중
▲2005∼2007 골프국가대표
▲2005 한국주니어선수권대회 우승
           한국 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 우승
▲2008 아시아투어 미디어차이나클래식 우승
▲2010 아시아투어 겸 유럽투어 메이뱅크 말레이시아 오픈 우승
▲2012 미국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진출
▲2013 PGA 2부 투어 웹닷컴투어 우승
▲2014 PGA 투어 취리히 클래식 우승
 
 
[리디아 고는?]
 
▲제주 출생(국적 뉴질랜드)
▲2011 마크 매코맥 메달
▲2012 호주 아마추어 여자 골프선수권대회 우승
▲호주 여자 골프 뉴사우스 웨일스 오픈 우승
▲제112회 US 아마추어 여자 골프선수권대회 우승
▲LPGA투어 캐나다 여자 오픈 최연소 우승
▲2013 LET ISPS 한다 뉴질랜드 여자 오픈 우승
▲LPGA투어 캐나다 여자 오픈 우승
▲KLPGA 스윙잉 스커츠 월드 레이디스마스터스 우승
▲LPGA 투어 스윙잉 스커츠 클래식 우승(프로 전향 후 LPGA 첫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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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