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정치팀] 여야의 정쟁은 그칠 줄을 모르고, 민생은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2014년 대한민국 정치권의 현주소다. 이럴 때 정계원로의 충고 한마디는 망망대해에서 만난 등대의 한줄기 빛처럼 반갑기 그지없다. 이정표를 잃어버린 정치권의 탈출구는 어디일까? <일요시사>에서 준비한 정계원로들과의 릴레이인터뷰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일요시사>가 이번 호에 만난 정계원로는 새정치민주연합 김상현(80) 상임고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 김상현 상임고문은 현대정치사의 산증인이다. 일제강점기, 광복, 6·25전쟁, 4·19혁명, 3선개헌, 유신, 10·26사태, 12·12사태,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한국 현대정치 주요사건들의 현장에서 야당 정치인으로 김 고문이 겪은 시련과 성취는 그 자체가 역사인 까닭이다.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운영했던 웅변학원에 취직한 것을 계기로 DJ와 인연을 맺고, 그를 따라 정계에 입문한 김 고문은 1965년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내리 3선에 성공했다. 1966년 3월에는 국회 한일협정 대일청구권자금 사용안에 반대하기 위해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4시간30분간 진행하며 "5·16은 4·19의 반동"이라는 유명한 연설로 단순에 스타 정치인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1972년 유신과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2004년 재심에서 무죄)으로 수차례 고문, 투옥을 당했고 무려 17년간 공민권을 박탈당하며 오랜 정치야인으로 지냈다.
야인으로 지냈던 시절인 1983년에는 당시 미국에 있던 DJ를 대신해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고, DJ를 대신해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맡기도 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돼 원내에 복귀한 그는 동교동계에 속했으나 DJ노선을 비판하기도 했고, 상도동계와도 친분을 유지하는 등 독특한 정치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행보에 대해 그는 "대의, 타협, 절충이라는 정치의 기본을 지키고자 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지만, 그 대가로 DJ와 동교동계 인사들의 배척을 받기도 했다. 결국 15·16대 국회의원에도 당선되며 6선 의원이 됐지만 당대표,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 당내 요직은 한 번도 맡지 못했다.
현대정치사 산증인이 말하는 진짜 정치
"정치적 선택, 눈앞 이익보다 대의 좇아야"
김 고문의 아호가 '인생 전반기에는 고생이 많지만 후반기에는 수확을 많이 한다'는 후농(後農)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호와 그의 삶은 맞지 않았던 셈이다. 이에 대해 그는 "정치적 기로에서 눈앞의 이익보다 대의를 좆았기 때문"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격동의 시기 야당 정치인으로 YS·DJ 등과 함께 민주화와 정치 발전에 큰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만큼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지난 삶과 정치에 대해 "최선을 다해 후회가 없다"고 말했다.
대립·갈등으로 점철된 작금의 정치 상황에서 서슬퍼런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에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당당히 맞섰고, 불이익이 뻔히 예상되지만 이를 감수한 채 늘 대의를 택했던 김 고문의 정치가로서의 삶은 교훈과 함께 묘한 울림을 준다.
다음은 지난 2일 서울 소재의 한 호텔에서 김 고문을 직접 만나 그의 삶과 2014년 정치권의 현실에 대해 나눈 대화 전문이다.
-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 합니다 김 고문님. 정치권의 최근 상황을 간략히 총평해주시지요.
▲ 통합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 발족에 창당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는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또 지방선거를 앞두고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은 기초선거 공천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공천을 하기로 했고, 야당은 지방조직이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무공천 약속'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치에 대해 국민들이 냉정한 심판을 내려야 합니다.
- 민주당과 새정치연합 통합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야권이 단일화, 통합하는 것은 국민의 여망입니다. 국민의 여망에 잘 따른 옳은 결정이라 생각합니다.
-여권에서는 야권이 그간 분열과 통합을 반복해온 만큼 이번에도 지방선거를 대비한 이합집산이 아니냐는 비판을 합니다만.
▲ 야권통합으로 위협을 느낀 여권의 모략, 선동으로 적절치 않은 비판입니다. 야권 입장에서는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반응입니다.
- '기초선거 무공천 약속 실현'을 고리로 통합야당이 만들어졌는데, 최근 이대로는 지방선거에서 전패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며 내부에서는 '공천을 해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장 기초선거 출마자들은 탈당을 한 후 출마를 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 조직이 깨지게 돼 엄청난 불이익이 예상됩니다.
반면 새누리당은 공천을 하기 때문에 불리해진 야권 출마자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요구라고 봅니다. 그러나 일단 새정치민주연합은 약속을 했기에 이번에는 다소 불리하더라도 멀리 보고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 야권이 지방선거에서도 패한다면 중앙권력, 의회권력에 이어 지방권력도 여권이 쥐게 되는데, 다음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 가까이는 7월 재·보궐선거, 그리고 차기 총선에서는 국민들이 약속을 지킨 새정치민주연합을 지원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약속을 지켜나가다 보면 국민들이 진정성을 알아 줄 것입니다.
- 박근혜정부가 최근 강조하고 있는 '규제완화'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 기본적으로 규제를 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규제가 있어야 할 곳은 유지하면서, 풀어야 할 규제가 있다면 풀어야 합니다. 선별적으로 규제가 필요한 부분과 필요 없는 부분을 잘 분별해서 정리해 나간다면 긍정적 효과가 기대됩니다. 지금 정부도 이러한 분별을 잘 해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 국정원·검찰이 서울시 공무원이었던 유우성씨의 간첩혐의 증거를 조작했다는 정황이 드러나며 사회·정치적 파문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선 어떻게 보시는지요?
▲ 미진한 검찰 수사를 바꿀 방법은 특검뿐입니다. 특검으로 확실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 드러난 국정원의 행태를 보면 과거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등의 활동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고문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 그렇습니다. 21세기 현실에 어울리지 않는 과거지향적 행태지요. 거듭 말하지만 특검을 통해 책임소재를 확실히 따져야 합니다.
"국익 앞에선 여야 구분 없이 똘똘 뭉쳐야"
"상대방 입장 배려·포용하는 정치 펼쳐라"
- 집권 2년차에 접어든 박근혜정부에 대해선 어떤 중간평가를 내리시겠습니까.
▲ 대체로 외교·안보면에서는 잘했고, 국내정치에서 보여준 독선적이고 소통하지 못하는 비민주적 모습은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현대 정치사의 산증인으로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개인적 평가도 궁금합니다.
▲ 역대 정권들은 모두가 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공도 있고 과도 있는 것이지요. 이런 부분은 역사가 평가할 것입니다. 제가 언론을 통해 개인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 40여년간 우여곡절이 많았던 본인의 정치사에 대해선 어떻게 자평하십니까?
▲ 격변의 시대에 정치를 했고, 역사와 국민의 편에서 최선을 다해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큰 후회도 없습니다. 당내에서 요직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는 저의 정치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던 셈이지요.
- 독재정권의 회유, DJ와의 결별, YS와 결합 등 정치적 선택의 기로가 많았습니다.
▲ 당장 눈앞의 이익을 탐했다면 그때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고, 지금 저의 삶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로에서 늘 국민과 대의를 좇았고, 때문에 불이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 후배 정치인들에게 한 마디 조언을 해주신다면?
▲ 정치는 국민, 역사의 편에서 대의를 지켜나가는 꾸준함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정치는 타협과 협상이 필요하지만 원칙은 그 대상이 아닙니다. 또한 국익을 위해선 여야 구분 없이 뭉쳐야 합니다.
일례로 최근 박 대통령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출국하기 전에 야당이 원자력방호법을 통과시켜주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야당도 국익을 위해선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 눈여겨보는 후배 정치인이 있으신지요?
▲ 안철수 공동대표의 행보를 관심 있게 보고 있습니다. 이번에 대구시장 선거에 나서는 김부겸, 전남지사 선거에 나서는 이낙연 등도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 끝으로 덧붙일 말씀이 있다면?
▲ 정치인은 상대방을 과대평가하는 것도 곤란하지만 상대방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더욱 곤란합니다. 여야가 자기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항상 반대당의 입장과 고민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배려·포용하는 정치를 하기 바랍니다.
대담=허주렬 기자 <carpediem@ilyosisa.co.kr>
<김상현 상임고문 프로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대한산악연맹 회장
▲민주당 부총재
▲6선 의원(6·7·8·14·15·16대)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대행
<기사 속 기사>
'한국 정치 아리랑', 김상현을 통해 본 대한민국 현대사
최근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으로 가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하는 것 외에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김상현 상임고문은 지난 2011년 9월 자서전 격인 <한국 정치 아리랑>을 펴냈다. <만다라>로 유명한 김성동 작가가 김 고문의 삶을 현대정치사와 연계해 기술한 것이다.
"나의 삶을 잘 녹여냈다"는 김 고문의 말처럼 이 책에는 인터뷰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예를 들면 '박정희·김형욱·전두환' 등을 만나서 대담한 것에서는 김 고문의 정치신념과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화려했던 그의 말솜씨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됐을 때 김 고문이 조문을 하려 했던 시도는 정치적 상대방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시사점을 준다.
이외에도 정치적인 전략·전술의 구사와 앞날을 보는 혜안도 참고할 만하다. 김 고문과 비슷한 시기 정치를 했던 남재희 전 장관은 이 책을 읽고 "김 고문은 재주가 비상하다"며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대성공을 거둔 DJ에 거의 버금가는 실력을 보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야권의 한 의원은 "자신의 개인적 이익과 집단의 이기심보다는 국민을 먼저 생각하고 힘없는 서민들과 약자의 편에 서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정치를 하고 싶은 정치 지망생이라면 김 고문의 정치력을 배워야 한다"며 "'김상현의 길'을 통해 서민의 정치, 대의의 정치, 민중의 정치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