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다시 등장한 김종필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12.16 14:3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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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시대’ JP가 움직인다

[일요시사=사회팀] 한국 정치사는 김종필 전 총리의 정치 인생과 맞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대 최다 9선 국회의원을 지낸 김 전 국무총리는 살아 있는 한국 정계의 거목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식 이후 잠잠했던 그가 5년10개월 만에 국회에 나타났다. 존재감은 여전했다. 현 정국에 그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을 무엇일까.




지난 10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국회를 찾았다.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운정회’ 창립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운정회는 그가 한국 산업화 시대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자는 취지로 결성됐다. JP의 국회 방문은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던 2008년 2월 이후 처음이다. 무려 5년10개월 만이다. 그는 2008년 12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칩거해왔다.

운정회 창립총회
참석차 국회방문

JP는 이날 흰색 밴을 타고 국회에 도착해 휠체어에 앉았다. 이완구 새누리당 의원과 정진석 국회사무총장이 행사장까지 JP의 휠체어를 밀어 눈길을 끌었다. JP는 국회 헌정기념관 1층에 도착해 전시돼 있는 자신의 두상을 둘러봤다. 행사장 안에는 참석자 300여 명이 대기하고 있었고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김종필’을 연호하며 칭송했다.

이들은 발기문을 통해 “우리는 지난날 운정 김종필 전 총리를 모시고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는 데 참여하고 헌신해 왔다”며 운정 선생은 고 박정희 대통령을 지도자로 추대, 국구 충정으로 5·16혁명을 주도해 최빈국 대한민국을 세계 속의 선진대국으로 도약시키는 데 초석을 놓으셨다“고 평가했다.

이어 “두 차례의 총리와 9선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등 4개 정당의 총재와 대표를 역임해 오신 우리 현대사의 주역이며 산 증인”이라며 “우리는 한평생 국태민안을 위해 헌신해 오신 운정 선생의 공업을 기리며 뜻을 같이해 온 동지 상호 간의 친목을 증진시키고자 김 전 총리의 아호를 빌려 운정회 발기인총회를 개회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대회사와 축사에 나선 주요 인사들은 김 전 총리가 196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삼김 시대’의 한 축을 담당하며 풍운아와 같은 삶을 살아온 점을 환기시키며 조국근대화에 대한 그의 업적을 평가했다.

정운찬 전 총리는 “운정 선생님의 명성을 처음 대한 것은 20세가 채 안 된, 대학에 입학하고 난 직후였다. 선배들이 거사의 정당성을 설파하실 때 보여주신 선생님의 논리적인 언변을 전설처럼 들려줬다”며 “선생님은 대한민국 현대사 자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마이크를 잡은 JP는 40여분간 비교적 또렷한 목소리로 원고 없이 자신의 정치 역정을 연설하며 건재함을 알렸다. 특히 맹자의 ‘무항산 무항심(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할 수 없다)’을 인용했다. 그는 “배가 고픈데 무슨 민주주의가 있고 자유가 있느냐”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 성과를 언급했다. 8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했지만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았던 한일 국교 정상화에 대해서는 “저는 나라는 팔아먹지 않았다. ‘제2의 이완용’도 아니다”라며 “그 돈으로 포항제철을 건설했고, 거기에서 생산된 철로 현대자동차와 조선업도 가능해졌다”고 강조했다.

JP는 “이제 갈 곳은 죽는 곳밖에 없는데 국립묘지(현충원)에 가지 않고 우리 조상이 묻히고 형제들 누워 있는 고향(부여 선산)에 가서 눕겠다. 누구나 늙으면 병이 생기고 병이 생기면 죽는 경로를 밟는데 저도 ‘생로병’까지 왔다”며 남은 인생에 대한 자신의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또한 국회 사랑재에서 강창희 국회의장, 김수한·박희태 전 국회의장, 이한동·이홍구 전 총리 등과 환담하는 중에 강 의장이 “정치가 시끄러워 죄송하다”면서 조언을 구하자 “야당은 실권을 쥔 사람들을 때려 얻어내려고 하지 말고 져주면서 얻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야당은 집권당을 상대로 머리를 쓰고, 지면서 이기는 방법을 모색해야지 물리력을 쓰면 결국은 손해”라고 했다.

5년10개월 만에 외출…존재감 드러내
나타난 속내는? 돌아온 속사정 주목

또 4대강 사업에 대해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4대강 사업을 일으켜서 비가 많이 오고 홍수가 날 지경인데도 홍수가 안났다고 하지만 그 효과 때문이 아니다”면서 “박 전 대통령 시절 산에 못 들어가게 하고 벌거벗었던 산이 파랗게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한 가지를 하더라도 어떻게 이런 것을 이롭게 해주셨나 하고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모르면 공부를 해서라도 어제를 잘 알아야 한다”면서 “그래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충청권 인사가 대거 결집했다. 회장을 맡은 이한동 전 총리와 전혁직 국회의장 등 거물급 인사들이 자리에 함께했다. 부회장을 맡은 새누리당 이완구, 정우택, 성완종 의원을 비롯해 이인제 의원, 심대평 전 충남도지사, 정진석 국회 사무총장 등 충청권을 기반으로 내년 지방선거나 당권 등을 노리는 인사들 등 400여명이 대거 참석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번 운정회 발족을 계기로 충청권이 세 결집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행사에 참석한 새누리당 충남도당 관계자는 “운정회 창립총회를 계기로 충청권이 다시 뭉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 아니겠느냐”면서도 “JP는 현실 정치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다시 돌아온
‘영원한 2인자’

JP의 외부활동이 그나마 가능한 현 시점에서 이러한 결집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여권 내부가 본격적인 세 결집으로 분주한 모습을 보이면서 계파 또는 지역 등을 기반으로 한 각종 모임으로 세 확장에 나설 모양새다. 근대 당내 모임이 잇달아 출범하더니 충청권 기반 모임까지 결성된 것. 이들은 나름의 명분을 내걸고 있지만, 내년 지방선거 등을 겨냥한 행보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새누리당 안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임을 보면 ‘국가경쟁력강화포럼을 꼽을 수 있다. 친박계 의원이 주축인 이 모임은 빠르게 몸집을 불려가고 있다. 출범 당시 33명에 불과하던 회원 수는 현재 70여 명에 이른다. 이 포럼 관계자는 “하루에도 몇 명씩 회원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유기준 최고위원이 총괄간사인 이 모임엔 홍문종 사무총장과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 등 친박 핵심인사가 대거 포진했다.

당대 최고 공부 모임인 ‘근현대사역사교실’도 세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차기 당권주자로 거론되는 김무성 의원이 주도하는 이 모임의 회원(의원) 수는 109명에 이른다. 왼외 회원은 23명이다. 이 모임 관계자에 따르면 매주 수요일 열리는 모임엔 50∼60명의 회원이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최근 불거지는 역사논쟁에서 보수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근현대사역사교실은 보수층 결집 의도를 담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 새누리당 중진인 남경필 의원이 주도하는 ‘대한민국 국가모델 연구모임’도 눈여겨볼 만하다. 회원 수 62명 가운데 20명 안팎이 매주 목요일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여권은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총궐기하고 있다. 더군다나 5년 만에 나타난 충청권 보스인 JP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여의도 정가에선 보수대연합이 촉발될 수 있다는 전망이 속속 나오고 있다. 그의 행보가 앞으로 정치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두고봐야할 일이다. 반면 범야권은 연일 전략부재를 노출한 데 이어 안철수 무소속 의원의 신당 추진 등으로 분열 조짐이 일고 있다. 박근혜 정부 1년 차 말기에 나타나고 있는 한국 정치의 현주소다.

지방선거 노린
여권의 결집?

김종필 전 총리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그는 유복한 소년기를 보내며 공주중과 공주고를 졸업했다. 졸업 후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대학 예과에 들어갔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곧 중퇴, 귀국후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945년 대전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고 보령군의 소학교 교사로 발령났다. 그러나 그는 교편을 잡은 지 2개월 만에 그만두고 경성제국대학(서울대 전신)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제8기생으로 입교했다. 그리고 1960년 일어난 항명 파동으로 육군 중령에서 예편했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된 그는 한때 ‘사상계’를 찾아가 이력서를 넣었으나 면접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예비역 중령 신분으로 자신의 처삼촌인 박정희 등과 교류했고 61년 5·16 군사정변을 준비한다.

5·16군사 정변이 성공하자 그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육군 중령이 됐다. 이어 대령으로 진급했고 준장까지 진급했다. 한편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을 거사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자, 그는 “내가 박정희 장군을 모시고 5·16을 기획했다”고 했다.

이후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구성되면서 중앙정보부가 신설됐다. 그는 제1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다. 군사 정변 직후 그는 장인 박상희의 경력과 관련해 사상 공세에 시달렸고, 황태성이 남하한 후에는 한일회담 직전까지 야당인사들로부터 수시로 의혹을 받았다.

62년에는 민주공화당의 사전 창당조직 연구팀과 사전 조직인 동양화학 주식회사의 창립을 주도했다. 이들은 연구실의 이름을 ‘동양화학 주식회사’로 위장하고 종로 2가 제일전당포 2∼3층에 사무실을 차렸다. 이렇게 재건당을 조직해 민정에 군출신 인사들이 참여하기 위한 창당작업을 지속적으로 준비해 나갔다. 63년 그는 육군 준장에서 예편했고 중앙정보부장직도 사퇴했다. 이후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야당 인사들은 구정치인 정정법으로 묶어놓고 자신들만의 사전조직을 비밀리에 결성했다며 비난했다.

한편 꾸준히 육사 5, 6기생들의 견제를 받던 그는 63년 2월 민주공화당 창당 준비위원장을 사퇴하고 순회대사의 자격으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여러 곳을 역방하고자 출국했다가 귀국하여 국회의원에 입후보했다. 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그해 12월 민주공화당 당의장에 선출됐다.


65년에는 일본 외무상인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비밀 접촉으로 논란이 일었다. 식민지에 대한 사과, 약탈 문화재 반환, 재일동포 지위, 동해어업권, 강제 동원 피해자 보상, 원폭피해자 문제 등 주요 현안은 무시한 채 경제적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모든 문제의 종결을 선언해 이후 야당 인사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이 협상은 ‘김-오히라 메모’로 불린다. 후일 그는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공적 기리는 ‘운정회’
보수결집 신호탄 되나

64년부터 한국에서는 한일협상을 반대하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한다는 학생시위가 일어난 것.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해 반대 목소리를 탄압하고 회담을 지속했다.

67년에는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됐지만 부정·타락 선거라는 이유로 그 이듬해에 의원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3선 후 물러난다는 선언을 하면서 JP는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과 함께 차기 유력주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민주공화당 내에는 그를 지지하는 파벌이 나타났다. 이것이 박 전 대통령이 그를 경계하는 원인이 되어, JP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JP는 당원직을 사퇴하고 일시적으로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정권의 2인자로 끊임없이 박 전 대통령과 갈등했고 75년 12월 총리직에서 전격 경질된다. 77년에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중남미를 순방한 바 있고, 79년 제10대 국회의원에 재선했다.

현충원 아닌…
고향에 누울 것


79년 10월,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후, 그해 11월 민주공화당 당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총재로 선출됐다. 이후 JP는 김영삼, 김대중 등과 함께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부각했다.

80년 5월에는 보안사에 체포돼 감금당했다. 신군부는 관제보도를 통해 JP 등 10여 명을 유신 시대의 부정축재자로 발표했다. 이때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전두환을 증오하게 됐다. 그리고 그해 9월 신군부에 의해 재산을 헌납하도록 강요받고,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각서를 썼다.

이후 정치활동이 정지당한 채 87년까지 야인생활을 했지만, 그해 다시 정계에 복귀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추대돼 민주공화당과 국민당을 흡수했다. 그리고 87년 8월, 신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선거 결과는 4위였다. 이후 88년 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민주정의당의 노태우로부터 삼당합당의 제의가 오자 고려 끝에 노태우의 제안을 수용했다. 90년 2월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그러나 내각제를 추진하려는 JP와 대통령중심제를 고수하려는 YS 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92년에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 재선임되고, 95년 민자당 총재직 사퇴와 동시에 탈당해 독자정당인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이후 일부 영남권 인사들을 포섭하고 군부 출신 인사들과 지지층의 표심을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96년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97년, 이념적으로 차이가 있는 DJ와 손을 잡고 DJ를 당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일명 DJP연합), 그해 11월에는 자유민주연합 명예총재로 정계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자민련을 이끈 JP는 2000년 실시된 제16대 총선에서 원하는 의석을 얻지 못해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소수야당의 총재로 남게된 것이다.

2004년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에서 아무도 비례대표가 나오지 않자,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JP의 정치 생명은 사실상 종결됐고, 대통령에 끝내 당선되지 못했다. 충청권 지역 정당으로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 등이 만들어졌지만 JP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2008년 12월, 갑자기 뇌놀중으로 쓰러져 입원했고, 재활운동을 통해 건강을 회복했다. ‘JP’라는 약칭은 정치가로 활동할 당시 JFK(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본따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알파벳 이니셜’의 원조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김종필은?]

▲충남 부여 출생
▲공주고 졸업
▲서울대 교육학 학사, 육군사관학교 학사
  페어리디킨슨대 등 명예박사학위 9개
▲제 1대 중앙정보부 부장
▲제 6대 공화당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당의장
▲제 7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부총재
▲제 8대 국회의원
▲제 11대 국무총리
▲제 9대 국회의원
▲제 10대 국회의원
▲제 13대 국회의원
▲민주자유당 최고위원
▲자유민주연합 총재
▲제 15대 국회의원
▲자유민주연합 명예총재
▲제 31대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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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