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경세태> 불황에 치졸해진 조폭들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12.17 09:3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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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묻은 돈까지 손대는 하이에나 형님들

[일요시사=사회팀] 건장한 조폭도 불황은 피할 수 없다. 서민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 약자만 골라 등쳐먹는 조폭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푼돈에 손 벌리는 그들의 이야기. 치졸함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지난 9일 광주 동부경찰서는 도심 하천 다리 밑에서 윷놀이 도박장을 열고 판돈을 받은 혐의로 신모(45)씨 등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1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또 도박에 가담한 최모(76)씨 등 9명을 불법도박 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조직폭력배인 신씨 등 일당 4명은 지난 9월15일부터 11월23일까지 매일 오후 광주천변다리 밑에서 윷판을 벌여 판돈 수천만원을 갈취한 혐의를 받고 있다.

노인 윷판까지…
푼돈에 손뻗은 조폭

광주지역에서 활동하는 조직폭력배인 이들은 이미 다른 조직원이 같은 혐의로 수차례 붙잡혔음에도 수법을 따라 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들은 조직적으로 역할을 확실히 나눈 것으로 확인됐다. 도박 주최자, 망을 보는 ‘문방’, 도박자금을 빌려 주는 ‘꽁지’ 등으로 호흡을 맞췄다. 주로 노인이나 영세상인들을 상대로 도박장을 열었고 이번에 붙잡힌 이들 중에는 생활이 어려운 기초생활수급자도 끼어 있었다.

경찰은 지난 10월께 윷 도박장이 개설된다는 첩보를 입수해 인근 건물 옥상에서 동영상 촬영 등을 통해 증거를 확보한 뒤 이들을 검거했다.


최근 들어 조폭들이 이러한 푼돈에 개입하는 일이 늘고 있다. 경기침체에 조폭들도 울상이다. 돈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달라붙는다. 불황에는 장사 없다. 조폭도 예외는 아니다.

불황이 지속되면서 조폭들의 행태도 달라졌다. 흔히 조폭이라고 하면 난투극을 벌이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요즘 조폭은 생계형 조폭이다. 난투극을 벌이는 폭력 조폭은 옛말. 일단 먹고 사는 게 먼저다.

조폭도 불황은 피할 수 없다. 갈수록 깊어지는 불황에 폭력조직이 불법대부업에 손을 뻗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폭력조직들이 실제 불법대부업에 나선 것으로 파악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조직폭력배 검거 실적은 2003년 3309건, 2004년 3203건에서 2007년 3968건, 2008년 5411건으로 꾸준히 증가추세다.

경찰 관계자는 “검거 실적이 급증한 것은 불법대부업과 연루된 폭력조직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상반기와 하반기에 각각 2개월씩 진행하던 기획수사가 하반기 5개월로 연장됐다”고 덧붙였다. 2008년 9월 금융위기가 정점에 달하는 시점에 조직폭력배가 급전이 필요한 서민들을 타깃으로 돈을 빌려주고 살인적인 고금리를 강요하는 사례가 늘었다는 지적이다.

과거 조폭들이 보여 왔던 단순 폭행·협박·상해 등의 범죄유형이 점차 지능화 되면서 불법대부업 등에 손을 대 서민 등 약자의 푼돈을 건드리는 것으로 분석했다. 그만큼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영역다툼보다는 생계로, 조폭들의 포커스가 맞춰지고 있다.

화려한 조폭?
현실은 생계형


청주지역에서 활동하는 청주 P파 폭력조직 단체 간부급 조직원인 A(40)씨는 도내 군 단위 지역에서 정통으로 주먹계를 장악하고 청주 폭력조직에 입성했다. 그는 조직 내에서도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영향력을 넓혔다. 청주는 물론이고 서울지역까지 영역을 넓혔다. 심지어 서울 강남 일대에서 소위 잘나간다는 거물급 조폭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인맥을 과시했다.

그러나 30대 중반 주먹을 크게 휘둘러 결국 수년간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됐다. 교도소 생활을 마친 A씨는 후배 조직원들의 기세에 눌려 폭력조직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그는 시골지역에서 작은 음식점을 개업해 먹고 사는 데 혈안이 돼 있다. 그가 폭력조직에 몸 담아오면서 얻은 것이라곤 경찰의 ‘조폭 관리대상’이 된 것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겪는 사람은 A씨 뿐만이 아니다.

돈줄 마른 조직들 노인·서민 주머니 털어 
‘돈되는 일이라면…’점조직 지능범죄 기승

청주 P파 폭력조직원인 B(39)씨 역시 조폭 생활을 접고 현재 PC방과 당구장 등에서 전전긍긍하다가 생계유지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20대 시절 여러 차례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마찬가지로 폭력 혐의였다.

교도소에서 나온 B씨는 화려했던 시절을 회상하다 폭력조직에 다시 발을 들였지만 후배들은 그를 외면했다. 그는 각종 수모를 당한 후에야 폭력조직에서 탈퇴했다. 그 후 동네 PC방 등지에서 시간을 보내는 B씨는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떠났다는 게 주변인들의 말이다.

이처럼 충북지역에서 현직 조직폭력배나 조직폭력 단체에서 탈퇴한 조직원들은 현재 화려한 조폭에서 생계형 조폭으로 살아가고 있다. 일반 소시민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경찰에 따르면 조직을 탈퇴한 조폭들은 대부분 무직이다. 일을 하고 있는 조폭들도 있지만 대부분 공사장을 전전하거나 지인들의 사업장에 겨우 눌러앉아 있는 형편이다. 부동산과 보험회사에 취직해 가족을 꾸려 성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도 있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 조폭들이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는 것. 주먹으로 돈 버는 시대는 지났다.

일부 조폭들은 그동안 꾸준히 모아놨던 자금으로 자동차 정비업체 등 작은 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가족으로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은 부유한 조폭들은 비교적 큰 사업체를 운영하기도 했다.

충북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조직을 탈퇴한 대부분 조폭들은 ‘세력다툼’에 개입하지 않고 먹고 사는 데 집중하고 있다”며 “도내 조폭들의 동향을 살펴본 결과”라고 말했다.

고질적인 사회문제였던 고교생들의 ‘조폭 양성’도 예전 같지 않다고 전해진다.

각목 대신 컴퓨터
적과의 동침도

이처럼 조폭 세계는 불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물론 사업 등을 통해 자신의 밥그릇을 챙기는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생계에 허덕이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보험사기, 심부름업체, 불법 게임장 등으로 서민을 쥐어짜고 있다.


특히 이들의 범죄가 지능형 혹은 서민 밀착형 범죄로 변하고 있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다수의 일선 경찰 관계자들은 경제 불황을 원인으로 꼽는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유흥업소나 집장촌을 찾는 발길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수입도 줄어든다는 것이다.

호남지역 일파 간부였다는 A씨는 “90년대까지만 해도 조폭이 관리하는 구역의 사업장(유흥업소, 집장촌)만 잘 운영해도 조직의 자금을 그럭저럭 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전했다.

무엇보다도 조폭들의 생태계를 흔든 굵직한 요인은 2008년 금융위기다. 과거 IMF때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을 했지만 건설경기는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 저축은행과 건설사 부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건설경기가 크게 위축됐다. 즉 과거에는 아파트 분양 브로커 및 돈세탁, 혹은 장애요소를 제거해주며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지만 건설경기가 파리를 날리면서 지금은 거대 관급 공사나 몇몇 재개발 지역을 제외하면 돈 되는 일거리 자체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또한 자영업자들로 이루어진 대형상권이 무너진 것도 한몫했다. 줄이은 대형마트의 등장으로 인해 조폭들이 남을 만한 여건이 보장되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아직까지 살아있는 상권으로는 서울 동대문, 남대문 등으로서 이곳에 조폭들이 몰려들고 있는 형국이다.

게다가 2004년 성매매 특별법, 2006년 사행성 게임장 집중 단속 등 경찰 수사력의 집중도 불법 유흥업소들이 대거 자취를 감추는 데 일조했다.

점조직 형태로
뭉치고 해산


이러한 사회구조적 변화는 조폭들의 행동방식까지 영향을 미쳤다. 가장 큰 변화는 나와바리(구역)의 실종이다. 과거에는 조폭들이 정해진 구역을 차지하고 지역의 이권을 빨아들이면서 동시에 지역을 지키기 위해 많은 조직원들을 동원했지만, 지금은 이러한 구역이 무의미해져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조폭의 영향력이 주먹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돈의 흐름에 따라 이동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인 조폭들은 사실상 와해되거나 세가 많이 약해졌다.

부자조폭 vs 거지조폭
주먹계도 양극화 심화

이에 따라 자연스레 조직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돈만 벌 수 있다면 파벌은 무시됐다. 그저 친분이 있는 조폭들끼리 연락해 프로젝트 활동을 벌이다 일이 끝나면 해산하는 식으로 움직이게 됐다. 조폭도 프리랜서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한 전직 조직원은 “파벌이 달라도 학연, 지연, 혈연, 교도소 등으로 서로 형, 아우지간으로 관계를 맺고 지낸다”며 “그러다 일거리가 생기면 서로 연락해 같이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전했다.
그리고 조폭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합법적인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돈맥을 수색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먹고 살 길을 찾은 것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행동대원은 사원, 간부들은 임원, 두목은 회장으로 명함을 바꾸고 회계사를 두고 회계장부를 최대한 깨끗이 운영하려 한다”며 “주로 부동산, 사채, 유통, 철거 및 경비용역 같은 부문에 진출하고, 혹은 상장기업을 인수하거나 주가조작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경찰관계자들은 조폭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러한 돈줄을 뽑아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자금추적 및 회계조사를 할 수 있는 인력, 그리고 최소 6개월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지만 이러한 장기수사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그나마 지능화된 범죄를 하는 조폭들은 규모가 있는 편. 경찰도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반면 여전히 유흥점주, 자영업자 갈취, 보험사기 등 서민 밀착형 범죄를 통해 명맥을 이어가는 조폭들은 경찰에 꾸준히 적발된다. 사회양극화가 조폭세계에도 영향을 미쳐 빈부격차도 극심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서민 밀착형 범죄를 저지르는 조폭들 가운데 부유층은 거의 없다. 대부분 무직이며, 손쉽게 돈을 벌기 위해 상대적으로 약한 서민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

어깨와 조직만 있으면 마냥 탄탄대로인 줄로만 알았던 조폭세계. 지금 조폭들은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조폭들도 경기침체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전국 조폭 현황

216개파 5000여명 활동

경찰이 파악하고 있는 국내 조직폭력배(조폭)가 전국에 216개파 5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생 도시인 세종특별자치시에도 1개파가 활동하고 있다.

새누리당 강기윤·민주당 김현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전국 관리대상 조직폭력배 현황’을 보면 올해 경찰이 파악·관리하고 있는 국내 조폭은 전국 216개파 5425명이다.

경찰관계자는 “경찰이 동향 등을 파악하는 조폭의 간부급을 위주로 집계한 것이라 실제 조직원은 이보다 서너 배 이상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별로는 인구가 많고 경제력이 집중돼 있는 서울·경기에 조폭이 밀집해 있었다. 경기 지역에는 31개파 893명이 운집해 전국 1위를 기록했다. 서울이 22개파 479명으로 뒤를 이었다. 부산은 22개파 384명, 경남 18개파 411명, 충남 17개파 288명, 전북 16개파 408명, 인천 13개파 312명, 경북은 12개파 349명 등이다. 광주·전남 지역은 각각 8개파씩으로 나타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서울·경기 수도권 밀집
부산 경남 충남 전북 순
광주·전남 갈수록 쇠약

단일 조폭의 조직원 수로는 충북 파라다이스파가 76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대구 향촌동파(75명), 부산 칠성파(71명), 인천 부평신촌파·광주 국제PJ파(65명), 충북 화성파(64명) 순이다.

1980년대 전국 3대 조폭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조양은의 양은이파와 고 김태촌의 범서방파는 현재 관리대상 조직원이 각각 26명과 11명에 불과하다. 광주의 OB파는 49명이 관리대상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은 대부분 유흥가가 밀집한 곳이 조폭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한 도시에 4~6개의 조폭이 있는 곳도 많다. 그중 전북 전주시와 익산시는 6개파씩 난립하고 있다.

최근 5년간 경찰에 검거된 조폭은 감소 추세다. 2008년 5411명에서 2009년 4645명, 2010년 3881명, 2011년 3990명, 지난해 3688명이다. 올해는 8월까지 1732명이 검거됐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에는 조폭의 세력이 크게 위축된 데다 폭행 등으로 검거돼도 조직원임을 밝히지 않아 조폭 검거 실적이 감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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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