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기획> 재벌그룹 사외이사 대해부

  • 김설아 sasa7088@ilyosisa.co.kr
  • 등록 2013.10.15 15:3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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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처럼 갱신” 정권 바뀌면 흑기사도 물갈이

[일요시사=경제1팀] 검찰이나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감사원 등 권력기관 출신 실세들. 그들이 ‘슈퍼갑’의 품에 뛰어드는 통로로 활용되는 것이 지금의 ‘사외이사 제도’다. 주요 그룹마다 거의 예외 없이 관료 출신 인사들을 사외이사라는 이름으로 갖고 있다. 재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들은 퇴직 후 기업으로 돌아가 일종의 방패막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30대 그룹 계열사의 사외이사 10명 중 4명은 검찰, 세무, 공정거래위원회 등의 관료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하위 그룹으로 내려갈수록, 내수 비중이 높을수록 관료 출신 사외이사의 비중이 두드러졌다.

기업경영성과 평가 사이트인 CEO 스코어(대표 박주근)가 최근 국내 30대 그룹 185개 상장계열사의 사외이사 현황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총 609명의 사외이사 중 관료 출신은 240명으로 전체의 39.4%에 달했다.

학계(196명 32.2%)와 재계(128명 21.0%), 법무법인 등 민간 법조(17명 2.8%), 언론(17명 2.8%), 회계(6명, 1.0%) 등 다른 분야를 압도했다. 관료 출신 중에서도 검찰·법원 등 법조계, 국세청·관세청 등 세무, 공정거래위원회·감사원 등 소위 4대 권력기관 출신이 총 153명으로 64%에 달해 주류를 이뤘다. 특히 법조 출신은 87명으로 전체 관료 출신의 36.3%를 차지했다.

퇴직 관료들의 ‘양로원’

역대정권 거물급 즐비


그룹별로는 SK와 삼성, 동국제강이 8명씩으로 가장 많은 법조관료를 사외이사로 두고 있었으며 두산(7명)과 현대자동차(6명), 롯데(6명), CJ(6명)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KT와 동부, 포스코, STX, 대림, S-오일, 대우조선해양 등 7개 그룹은 법조관료 출신 사외이사를 한 명도 두지 않아 대조를 이뤘다.

법조관료 출신 사외이사의 비중이 가장 높은 곳은 동국제강과 대우건설로 전체 사외이사 16명과 4명 가운데 절반을 차지했다. 이어 15명 중 4명을 법조관료 출신으로 임명한 OCI가 26.7%로 3위, 25%를 기록한 두산이 4위였다.

뒤이어 최근 이재현 회장이 구속된 CJ 외에 영풍, 효성, 롯데, 현대중공업이 20%가 넘는 비중을 기록했다. 재벌그룹들이 영입한 법조관료 출신 인사 가운데는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 등 최고위 인사들이 즐비했고 이들 대부분이 현재 김앤장이나 율촌 등 초대형 로펌에 소속돼 있었다.

30대 기업 10명 중 4명 권력기관 관료 출신
이름만 대면 아는…퇴직 후 방패막이 역할

고려아연 사외이사인 송정호 청계재단 이사장은 52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이명박 전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로 이 전 대통령이 청계재단을 세울 때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CJ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김성호 재단법인 행복세상 이사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법무부장관을 지낸 뒤 이명박 정부에서는 국정원장직을 수행했다. 김 이사장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양건 감사원장 사퇴 후 유력한 감사원장 후보로 꼽히고 있다.

GS의 이귀남 전 장관은 61대 법무부 장관 출신으로 2011년 8월 퇴임 후 오리온그룹의 고문으로 영입돼 한 차례 논란을 겪은 이력이 있다. 장관 시절 고위공무원의 기업행을 막기 위해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했으면서 정작 본인은 개정법 시행 직전 퇴임해 오리온행을 택했기 때문이다.

법무부 장관 외에 법무부 차관 출신도 4명이나 재벌그룹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특히 예스코의 사외이사인 한부환 전 차관 외에 3명은 모두 2개사의 사외이사를 겸직하고 있었다.

김상희 전 차관은 효성과 LG전자, 문성우 전 차관은 GS와 한화생명보험, 정진호 전 차관은 한화와 호텔신라 사외이사를 겸임중이다. 특히 정진호 전 차관과 문성우 전 차관은 나란히 50대, 51대 차관을 지낸 후 한화행을 택해 눈길을 끌었다.

검찰총장 출신 사외이사도 4명이 있었다. 두산엔진의 정구영 전 검찰총장, 금호산업의 김도언 전 총장, CJ오쇼핑의 김종빈 전 총장 그리고 삼성전자와 두산의 사외이사를 겸직하고 있는 송광수 전 총장이다.

이외에도 전두환 정부시절 3대 중수부장을 지내며 역대 최장기간 재직 기록을 세웠던 한영석 전 민정수석이 SK C&C 사외이사를 맡고 있으며,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지낸 신현수 변호사가 HMC투자증권 사외이사로 있다.

재무위기 극복 
‘도우미 이사들’

한 전 수석은 현직 시절 정부발주공사비리사건, 65만 달러 외화밀반출사건 등을 처리했고 이후 법무부차관과 민정수석, 법제처장을 거쳐 현재는 법무법인 우일에서 고문변호사를 맡고 있다. 신 변호사는 대검찰청 마약과장 출신으로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지냈고 현재 김앤장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재벌그룹들이 이처럼 법조관료 출신 인사들을 사외이사로 많이 영입하는 것은 이들의 인맥과 영향력을 활용해 바람막이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최근 그룹 총수가 구속되며 법난을 겪고 있는 SK, CJ, 한화 등은 총수 구속을 전후해 유력 법조인사들을 사외이사로 임명하며 ‘구속 대비’ 인사가 아니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법조계에 이어 세무 출신이 38명(15.8%)으로 뒤를 이었다. 특히 국세청 출신 사외이사는 33명으로 집계됐다. 국세청 출신 사외이사가 가장 많이 포진한 곳은 현대자동차그룹이다.

현대글로비스가 석호영 전 서울지방국세청 국장을 사외이사로 두고 있으며 기아자동차가 홍현국 전 국세청 감사관, 현대비앤지스틸이 박외희 전 서울지방국세청 부이사관, 현대모비스가 박찬욱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을 각각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또 현대위아에는 이병대 전 부산지방국세청장, 현대자동차에는 강일형 전 대전지방국세청장, 현대제철)에는 전형수 전 서울지방국세청장, 현대건설에는 이승재 전 중부지방국세청장이 사외이사로 포진해 있다.

이 가운데 현대제철의 전형수 전 서울지방국세청장과 현대건설 이승재 전 중부지방 국세청장은 각각 이마트와 SK씨솔믹스 사외이사를 겸직하고 있다.

삼성·SK·동국제강 법조인들로 빼곡
현대차·롯데·CJ는 국세청·공정위
신세계 가장 화려 영풍·동부도 막강

롯데그룹은 박차석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이 롯데제과, 서현수 전 대구지방국세청장이 롯데케미칼, 정병춘 전 국세청 차장이 롯데하이마트에서 각각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박차석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은 CJ CGV의 사외이사도 겸하고 있다.

신세계그룹은 신세계에 손영래 전 국세청장, 신세계인터내셔날에 김재천 전 대전지방국세청장, 이마트에 전형수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사외이사로 두고 있다.

CJ그룹은 김재천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이 CJ오쇼핑, 박차석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이 CJ CGV, 김갑순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이 CJ제일제당에 사외이사로 있다. 김재천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은 신세계인터내셔날과 CJ오쇼핑에서 사외이사를 겸직하고 있다. SK그룹은 SK씨솔믹스에 이승재 전 중부지방국세청장, SK텔레콤에 오대식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을 각각 사외이사로 두고 있다.





세무 출신 다음으로는 공정위 출신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룹별로 현대차그룹이 공정위 출신 사외이사를 7명 보유해 가장 많았으며 롯데그룹이 3명, 동부그룹이 2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이밖에 SK와 현대중공업, CJ, 신세계 등 12개 그룹이 공정위 출신 사외이사를 1명씩 두고 있었다. 공정위 출신 사외이사 24명 가운데 3명은 공정거래위원장 출신이며, 부위원장 출신도 3명이었다.

이들 관료 출신 사외이사 비중은 11∼30대 하위 그룹으로 갈수록 더 높아졌다. 10대 그룹 332명의 사외이사 중 관료 출신은 107명으로 32.2%에 불과했으나, 11∼30대 그룹의 관료 출신 사외이사는 277명 중 133명으로 40.1%에 달했다.

또 포스코, LS 등 중화학 수출 주력 기업보다 롯데, CJ, 신세계 등 내수업종에서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를 더 선호했다. 신세계, 롯데, CJ는 30대 그룹 중 전체 사외이사 대비 관료 출신 비중이 높은 1, 5, 6위에 각각 올라 있다.

그룹 규모가 작을수록, 규제가 많은 내수산업일수록 힘 있는 ‘방패’ 사외이사를 선호하는 셈이다. 그룹별로는 신세계의 관료 출신 사외이사 비중이 가장 높았다.

신세계 그룹 7개 상장계열사에서 활동하고 있는 17명의 사외이사 중 관료 출신은 총 15명으로 무려 88.2%를 차지했다. 나머지 2명은 재계 출신이었다. 관료 출신 15명 중에서도 세무(5명), 감사원(4명), 법조(2명), 공정위(1명) 등 소위 4대 권력기관 출신이 총 12명(80%)을 차지해 가장 두터운 ‘방패’를 자랑했다.

2위는 영풍그룹으로 13명중 11명(84.6%)이 관료 출신이었고, 동부그룹이 19명 중 12명(63.2%) 동국제강그룹이 16명 중 10명(62.5%)으로 각각 3, 4위를 차지했다. 5위와 6위는 내수 산업이 주력인 롯데와 CJ가 이름을 올렸다.


유통·식품기업 

‘방패이사’선호

10대 그룹 내 유일하게 관료 출신 비중이 60%를 넘는 롯데의 경우 총 29명의 사외이사 중 무려 18명(62.1%)이 관료 출신이었다. 역시 법조 출신이 6명으로 가장 많았고, 세무 5명, 공정위 3명 등의 순이었다. 김태현 전 법무연수원장, 조근호 전 법무연수원장, 정병춘 전 국세청 차장, 강대형 전 공정위 부위원장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재현 그룹 회장이 구속된 CJ는 총 26명의 사외이사 중 16명이 관료 출신으로 61.5%를 기록했다. 검찰·법원 등 법조 출신이 6명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해 ‘법난’을 반영했다. 김성호 전 법무부장관, 김종빈 전 검찰총장, 김갑순 전 서울지방국세청장 등이 활동하고 있다.

이어 두산(53.6%), 현대자동차(51.2%), 효성(50.0%) 등도 관료 출신 비중이 50%를 넘었다.

총 59명의 사외이사를 두고 있는 삼성그룹은 관료 출신이 15명으로 25.4%에 불과했다. 이중 법조 8명, 세무 1명에 불과했고, 공정위는 아예 없었다. 삼성 사외이사 중 가장 많은 비중은 학계 출신 35명으로 59.3%를 차지했다.

30대 그룹 중 사외이사가 가장 많은 곳은 재계 3위 SK로 무려 62명에 달했다. 삼성보다 3명, 현대차보다는 무려 19명이나 많았다.

반대로 대우건설, 대우조선해양, 에쓰오일 등 단일 기업을 제외하고 사외이사가 가장 적은 그룹은 대림으로 7명에 불과했다. 이어 현대중공업 10명, 현대 12명, 영풍 13명, 효성 14명 등이었다.

사외이사 중 2개 기업에서 활동하고 있는 겸직자는 총 38명이었다. 송광수 전 검찰총장이 삼성전자와 두산 사외이사로 겹치기 출연하고, 윤세리 전 부산지검 검사는 SK하이닉스반도체와 두산인프라코어에서 활동하고 있다. 정진호 전 법무부차관도 한화와 호텔신라, 노영보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현대중공업과 LG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상희 전 법무부 차관은 LG전자와 효성, 주종남 서울대교수는 LG전자와 두산엔진, 한민구 서울대 교수는 삼성전기와 효성에 적을 두고 있다. 이들은 사외이사 활동만으로 연간 1억2000만∼1억8000만원의 수입을 챙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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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