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임시거처' 환자방에선 지금…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10.14 13: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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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 없으면 입원도 못한다

[일요시사=사회팀] 지방에 있는 대부분의 암 환자들은 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에 위치한 대형병원을 찾는다. 그만큼 신뢰도가 높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병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생긴 것이 ‘환자방’이다.




지방에 있는 암 환자들이 치료를 위해 가족들과 함께 상경하는 모습은 이제 흔한 풍경이 됐다. 의료서비스의 질이 지방에 비해 높은 서울 대형병원에 환자들이 몰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넘쳐나는 환자들을 수용할 병실은 부족하다. 몇몇 병원들은 이에 병실을 추가적으로 늘렸지만 여전히 수요가 공급을 초과한다.

서글픈 환자들

지방에는 암환자를 수용할만한 의료기관이 미흡한 실정이다. 보통 이름난 종합병원이 수도권에 몰려있으니 지방 환자들이 상경을 택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서울에 몰려있는 유명 종합병원에 환자들이 몰리다보니 병실이 부족해 환자나 환자가족이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게 ‘환자방’이다.

유명 대형병원 인근에는 대부분 환자방들이 몰려있는데, 이중엔 고시원이나 원룸을 개조한 무허가 시설도 많다. 똑같이 의료보험을 내는 국민인데 지방에 산다는 이유로 서러운 환경에서 치료를 받는 것이다. 통원치료가 계속된다면 입원조치를 취해야 함이 맞지만 병원들은 병실이 부족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통원치료 환자까지는 여력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자방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서울에 위치한 A대형병원 암센터에 찾아갔다. 병원 인근에는 원룸 등 주택가가 형성돼 있었다. 그런데 건물마다 ‘환자방’이라고 크게 써져 있었고 홍보 차량도 확인됐다. 환자방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한 환자방 관리인을 만났다. 이곳에 주로 거주하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환자’들이었다. 이들은 지방에서 왔다 갔다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임시로 거주하며 치료에 임한다. 문제는 이 환자방 이용금액이 결코 만만치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겐 이마저도 힘든 상황이다. 관리인은 “치료를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며 “지방에서 서울까지 매번 오가는 것이 힘드니 환자방을 찾는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도 요즘엔 시설이 많이 좋아진 편이다”고 말했다.


환자방의 일반적인 방 크기는 10㎡(3평) 정도로 매우 작은 편이다. 이러한 작은 방은 1일 기준 3만∼4만원 선이고 한 달에는 90만원 이상이 든다고 한다. 가격에 따라 화장실은 공용과 개인으로 나뉜다. 조리 시설이 딸린 거실 및 싱크대는 공동으로 사용한다. 위생은 관리하기 나름이지만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창문이 딸려 있기는 하지만 건물에 막혀 온전한 햇볕이 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주거 용도가 아닌 건물을 방으로 쪼개 이용하다 보니 옆방의 소음도 종종 들린다. 심지어 옆방의 부부가 치료비 때문에 싸우는 내용까지 알 수 있었다. 환자가 편히 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은 어쩔 수 없이 환자방을 택한다. 그런데 이마저도 수요가 많아 환자방은 대부분 만실이다.

유명 대형병원들 인근에 ‘우후죽순’
고시원·원룸 개조한 무허가 시설도

대형병원들이 이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다. 병원관계자들은 이러한 세태를 알고 있지만 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어떻게 보면 환자방의 존재가 환자들에게는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현상의 원인은 표면적으로는 환자들을 수용할 만한 병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환자들의 대형병원 쏠림현상 때문이다. 즉 지방에는 믿을 만한 대형병원이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다는 것. 한마디로 ‘의료 불균형’ 때문이다. 몇몇 대형병원들은 부족한 병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병실을 늘렸지만 단기적인 해결책에 불과하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원래 살던 지역이 아니라 수도권에서 암 치료를 받는 환자 비율은 제주도의 경우 95.0%다. 대도시에도 많아 광주의 암 환자 중 48.8%는 수도권에서 치료를 받고, 울산은 66.6%나 된다. 이처럼 암 환자의 수도권 집중 현상은 특히 심각한 상황이다. 

수도권의 대형 종합병원 근처에는 소규모 환자방이 있지만 가장 많은 곳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의 ‘국립암센터’ 앞이다. 이곳은 특히나 환자방이 밀집해 있다. 그리고 굳이 환자방이란 간판을 내걸지 않아도 남은 방을 빌려주는 형태로 운영하는 곳도 있다. 국립암센터에 많은 환자들이 몰리는 이유는 대학병원보다 저렴한 진료비 때문이다.

이들 중에는 상대적으로 저소득층이 많다고 한다. 대부분 항암 치료 후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머물 곳이 없어 환자방을 찾는 것이다. 국립암센터는 더 많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입원 사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먼 곳에서 올라온 환자들은 매번 모텔이나 호텔을 전전할 수 없으니 중장기적으로 머물 환자방을 찾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별도의 시설을 마련하지 않고 가정집의 빈 방을 활용해 환자방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업’ 아닌 ‘영업’이 성행하고 있는 현실이다.

보건복지부는 국내 암 환자가 2010년을 기준으로 한 해 100만명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통계청이 밝힌 2011년 사망 원인에는 남녀 모두 암으로 인한 사망이 총 사망자의 47.4%를 차지해 1위에 올랐다. 암 발생률도 해마다 증가해 2010년에는 202만53명의 암 환자가 새로 생겨났다. 한국 국민이 평균 기대수명인 81세까지 살 때 평생 3명 중 1명, 36.2%가 암에 걸린다. 이제 암은 보편적인 질환이 됐지만 암 치료와 자활에 드는 사회경제적·심리적 비용은 여전히 높다. 건강보험 보장 항목이 늘어났고, 암보험 가입률도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수술, 진료비 등을 제외한 비용 또한 만만찮다.


지방에 산다는 이유로…
3평짜리 하루 3만∼4만원

물론 암 환자들은 정부에서 제공하는 ‘중증환자 산정특례제도’를 이용해 5년 동안 건강보험 항목 중 5%만 납부하면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암 환자들은 “치료비용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의료보험으로 보장되지 않는 특진 진료비나 각종 검사비용, 항암 치료가 끝나고 나면 시작되는 방사선 치료비 등은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 국립암센터 사회사업실장을 지낸 한 관계자는 “환자방은 100만명 넘는 암 환자의 치료와 재활 과정을 환자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우리 현실을 잘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지적했다. 암 발병 전후의 사회적·심리적·경제적 비용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사회 때문에 암 환자들이 환자방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관계자는 “특히 환자방에 머문 경험이 있는 환자들의 경우에는, 치료 경험 자체가 박탈감과 우울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지역 의료 기반을 확충하거나 지방 환자들을 위한 별도의 제도를 마련해 도와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독한 치료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이상적인 대안으로는 수도권에 있는 대형병원들이 수도권 병상만 집중적으로 늘리는 게 아니라 지방 대도시에 암센터를 건립해 운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지방에서 근무를 기피하는 의료인력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지방 의료 인력을 잘 훈련시켜 지방에 기존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환자를 분산하는 효과를 낳을 것으로 예상된다. 해당 지자체의 각별한 관심도 요구된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환자방 대안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생명윤리위원회가 올 연말까지 ‘암환우 쉼터 건립을 위한 폐휴대폰 수거 캠페인’을 전개한다. 이번 캠페인은 환경부가 매년 1800만 대 이상 발생하는 폐휴대폰을 모아 재활용을 통해 금속 자원 회수는 물론 환경오염을 예방하는 것은 물론, 매각 수익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범국민 폐휴대폰 수거 캠페인을 벌여오던 것에 동참하기 위한 것이다. 매각 수익금은 암환우 쉼터 건립을 위해 사용할 계획이다.  

국립암센터에서 항암치료나 방사선치료를 받는 지방 거주자들은 대부분 병원 인근에 있는 환자방을 주로 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치료비도 버거운 상황에서 월 80만∼90만원이나 하는 환자방의 비용은 이들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암환우 쉼터가 건립이 되면 암환우들은 이곳에서 무료로 숙박을 하며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다. 

현재 국립암센터 주변에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베타니아 쉼터와 일산은혜교회, 맑은샘교회에서 운영하는 쉼터가 있지만 보다 많은 환우들에게 무료 쉼터를 제공하기 위해 암환우를 위한 쉼터 건립을 추진하게 됐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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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