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세태> 기러기아빠 아지트 ‘기러기바’ 실태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09.16 11: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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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빈자리, 그녀들이 채워준다

[일요시사=사회팀] 자녀의 교육을 위해 부인과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내고 홀로 한국에 남아있는 ‘기러기아빠’들은 늘 외롭다. 이들은 가족을 그리며 술로 밤을 지샌다. 그리고 씻기지 않는 외로움을 달래고자 ‘기러기바(데이트바)’를 찾고 있다.



1990년대 조기유학 열풍이 불면서 시작된 ‘기러기아빠’ 문제, 한국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이미 국어사전과 국립국어원에 신조어로 포함됐을 정도로 한국사회에 엄연한 보통명사로 자리잡았다. 그 숫자도 50만 가구 이상으로 추산되니, 이미 가족의 한 형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기러기아빠’의 속은 썩어 문드러진다. 지금 그들은 속 얘기를 들어줄 대화상대를 찾고 있다.

데이트 상대 찾아
밤거리 헤맨다

서울 강남 일대에 외로운 기러기아빠들을 상대하는 일명 ‘기러기바(데이트바)’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이곳은 초저녁부터 기러기아빠 등 외로운 남성들로 북적댄다. 이색적인 건 이들은 동행 없이 혼자 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간 외로웠던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여성을 선택해 1대 1로 술을 마시며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장점이 이들의 발걸음을 옮기게 하고 있다.

수년 전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먼 타국으로 떠나보낸 A씨는 최근 외로움에서 한 발짝 벗어났다. 기러기아빠가 주 고객인 ‘데이트바’에서 대화녀를 만나고부터다. 묘한 술집시스템에 대해 꽤 만족하는 눈치다. “내 나이쯤 돼서 기러기족 생활을 하다보면 룸살롱도 재미없고 늘 외롭다. 우연히 데이트바를 알게 됐는데 술에 대한 부담도 없고 젊은 아가씨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위로받는 느낌이다.”

사실 A씨는 ‘데이트바’를 처음 접했을 때, 신종 변태 유흥업소인 줄 알았다. 하지만 데이트바를 직접 가보니 신종 유흥업소가 아니었다.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최상의 장소였던 것이다. 그는 ‘데이트바’에서 만난 대화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대 이상의 위안을 느꼈다. 그 뒤로  A씨는 한 달에 두 세 번씩 데이트바를 찾고 있다.


A씨는 기러기아빠들이 모이는 한 인터넷 카페를 통해 데이트바의 존재를 알게 됐다. A씨는 이곳에서 활동하는 기러기아빠들과 고민을 털어놓으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가끔 열리는 정기모임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리고 정기모임 어느 날, 데이트바에 다녀온 B씨의 후기를 듣게 됐다. 당시 A씨는 퇴폐업소라고 생각해 단순히 웃어 넘겼지만 그 호기심은 며칠이 지나도 가시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쓸쓸히 퇴근하는 발걸음에, 문득 정기모임 때 B씨가 말한 데이트바가 떠올랐다. A씨는 B씨에게 들은대로 곧장 데이트바로 향했다.

솔로 남성들을 위한 전용술집 데이트바는 대화녀라고 불리는 예쁜 여종업원과 독립된 공간에서 1대1로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다. 룸살롬 등에 싫증을 느낀 기러기 아빠들이 많이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러기아빠 A씨는 본인이 원하는 아가씨 한 명을 지목해 1대 1로 ‘프라이빗바’에서 술자리를 함께했다. 맥주와 안주는 무제한 제공된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제법 이야기가 통했고 재밌었다. 기본 한 시간에 10만원이지만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화녀가 자신의 고민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시덥잖은 농담에도 밝은 미소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화녀의 반응에 들뜬 A씨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데이트바를 이용하는 기러기아빠 A씨는 “가정에서 치이고 회사에서 치이다 보면 삶이 황량하다. 체면 때문에 속내를 털어놓기도 힘들다. 그렇다보니 늘 외롭다”고 토로했다. 그는 “그러던 중 우연히 데이트바를 알게 됐는데 술에 대한 부담감도 적고 대화녀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위안을 받고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털어놨다.

진솔한 대화로
발길 끊이지 않아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데이트바’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는 물론이고, 손님들과 원활한 대화를 위해 대화녀들에 대한 철저한 서비스 매너 교육을 시키고 있다. 그리고 대화녀로 일을 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교양지식은 갖춰야 한다고. 학식 있는 기러기아빠들이 많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세태 속에 목돈 마련을 위해 ‘대화녀’를 자청하는 젊은 여성들이 늘고 있다.


사실 퇴폐적 서비스를 하는 바나 유흥업소는 천지에 널려있다. 하지만 데이트바는 유흥업소에 질린 외로운 남성들에게 안성맞춤이다. 큰 부담 없이 편하게 와서 기분전환하고 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뜨거운 서비스나 진한 스킨십을 원하는 손님은 드물다. 물론, 간단한 스킨십 정도는 허용된다.

가끔 꼴불견인 손님들도 있다. 도를 지나쳐 가슴 등 신체 은밀한 부위를 노골적으로 만지려고 하는가 하면 치마 속 등 몰래카메라를 찍으려는 남성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몇몇 남성들은 대화를 나누다 마음이 통한다 싶으면 “나랑 사귀자”고 말하기도 한다. 또 몇몇 손님은 은밀하게 성매매를 제의한다고 한다. 아무리 친절하고 매너가 좋아도 사적인 만남, 2차는 엄격하게 금지돼 있다.

서울 강남 일대에 ‘데이트바’우후죽순
초저녁부터 외로운 남성들 북적북적

‘대화녀’ 가희(27·가명)씨는 “손님들이 사귀자는 건 대부분 엔조이를 의미한다. 가끔 정말로 마음이 통하는 손님이 있기도 하지만 일일 뿐이다. 솔직히 사귀는 건 힘들다”고 말했다.

가희씨는 6개월 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자격증을 따러 학원에 등록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직장을 그만뒀지만 생활이 막막했다. 학원비며 수업에 필요한 도구며 돈 나갈 곳이 많았다. 거기에 생활비와 적금, 보험료 등 수입보다는 지출이 많아 경제적으로 힘들어 고민하던 중 지인의 소개로 데이트바에 발을 들이게 됐다.

“사실 처음엔 술집 접대부 같은 일은 아닐까 겁이 났다. 하지만 막상 일을 해보니 나름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있다”고 털어놨다.

가희씨에 의하면 데이트바 일 손님 대부분이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이다보니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어 견문이 넓어졌다고 한다.

과도한 스킨십 금지
여성은 목돈 목적

‘대화녀’로 일하면서 가희씨는 가끔 ‘카운슬러’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고 전했다. 딱딱하고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만큼 남들에게 말하기 힘든 남성들의 ‘속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남자들이 그렇게 외로움도 많이 타고 고민이 많은지 처음 알았다”면서 “처음엔 술집 접대부 같은 일이 아닐까 싶었지만 요즘엔 무슨 심리상담사가 된 기분”이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사실 ‘대화녀’들은 기러기남성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지만, 진심으로 경청해주며 가끔 조언도 해주면 손님들이 큰 위안을 받는 것 같아 자신도 힘이 생긴다고 했다.

가희씨는 “낮에는 자신의 미래를 위한 공부를 하고 밤에는 기러기바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희씨 뿐 아니라 데이트바에서 일하는 대화녀들은 대부분은 낮에 직장생활을 한다. 이중에는 자기계발 중인 대학생들도 많다. 이들 대부분은 새벽 3시에 퇴근해 다음 날은 자신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초미니스커트로 각선미를 과시하는 ‘대화녀’들은 대부분 낮엔 직장에 다니거나 피팅모델 등의 일을 하는 투잡족이다.

수연(22·가명)씨는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학교에 다닌다. 학비를 벌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대학 졸업 후 내가 원하는 직장에 들어갈 때 까지 계속 이 일을 할 예정이다”며 “시간을 많이 뺏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면서 고수익을 보장 받을 수 있어서 좋다”고 털어놨다.

한편 수연(24·가명)씨는 섹시바에서 일하다가 된통 당한 기억에 다시는 유흥업소 관련해서는 일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커져버린 씀씀이를 감당하기 위해서 다시 눈길을 돌렸다. 그러다 데이트바를 만나게 됐다.


수연씨는 “섹시바에서처럼 속옷만 입고 일하지 않아도 되고, 손님들과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란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귀띔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대화녀들은 한 달에 보통 300만원을 번다. 1시간에 10만원의 비용 중 5만원이 대화녀의 몫이다. 술을 많이 먹지 않아도 되니 목돈이 필요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 이렇듯 외로운 기러기아빠들과 그들의 지갑을 노린 이들로 데이트바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누구는 외로움을 달래고, 누구는 목돈을 마련한다. 어떻게 보면 서로 좋은 만남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한국사회의 슬픈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

정신적 고통 호소
아빠들이 위험하다

기러기아빠들은 정신적 고통을 가장 많이 호소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기러기아빠 3명 중 1명은 우울감을 느낀다. 또 이들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무분별한 음주습관으로 알코올중독에 걸리기 쉽다. 씨는 방송을 통해 “혼자 지내다보니 술을 자주 먹게 되는데 거의 기절할 정도의 폭음이 잦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지난해 6월, 기러기아빠였던 국립대 퇴직교수 K(69)씨가 숨진 지 한 달 만에 이웃에게 발견돼 논란이 됐다. 경찰은 “K교수가 외로움 탓에 술을 많이 마셔 건강이 악화됐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지난 3월에는 대구시 북구 한 아파트에서 치과의사 A씨가 유학중인 딸과 아내 문제로 고민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스웨덴 우메오대학 연구팀이 1991∼2000년 68만3000여명의 남성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자녀·부인과 떨어져 사는 경우 자살률은 2.3배, 알코올이나 약물중독으로 인한 사망률은 4.7배로 훨씬 높은 사망률을 보였다.
기러기아빠 현상을 중심으로 가족이 흩어져 사는 현상에 대한 연구로 연세대 대학원 신학과 목회 상담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양숙씨는 기러기아빠를 ‘비동거 가족’이라고 규정했다. 비동거 가족 문제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라는 것.


‘쭉쭉빵빵’아가씨와 토킹 1시간 ‘10만원’
이중 5만원 대화녀 몫…간단한 스킨십 허용

그는 논문에서 기러기아빠를 “자녀를 외국에서 공부시키기 위해 아내와 자녀를 외국에 보내 놓고 국내에서 혼자 생활하는 남자”라고 정의한 뒤, “한국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과 학력 중시 현상과 더불어 국제화 세계화 정보화라는 흐름 속에서 결국 자녀 조기 유학을 위해 가족 비동거라는 선택을 한다”고 요약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으로는 내 자녀가 잘 살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아 두렵다는 주관적 판단에서부터 군복무, 공ㆍ사교육 문제, 과열 경쟁 등이 제시됐다. 또 한반도 이남을 뒤덮고 있는 영어 콤플렉스는 영어가 곧 돈이라는 ‘영어 자본론’으로 직결되는데, 이는 공교육이 무너진 상황과 맞물려 ‘덩달아 유학’을 부추긴다.

그 이면은 어쩌면 더 심각하다. 이미 외국 생활에 익숙해지고 외국 교육의 장점 등에 길들여진 기러기 엄마와 자녀는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엄마 잘 만나야 대학 간다’는 말에 떠밀리듯 부인과 자식을 보낸 아버지는 갑작스런 독거 생활에 사실 처자식의 귀국이 그립기만 하다. 고독감, 정서적 불만, 성적인 욕구 불만 등은 그들이 맞닥뜨리는 보편적 문제라고 최 씨는 지적한다.

기러기 생활이 길어질 경우 가족 간 거리감이 심화돼 가정해체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물론 기러기 가족은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이지만 기러기아빠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을 고려할 때 이 같은 문제들을 방치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자녀유학 명암
무작정? 계산기부터 두드려야!

자녀를 무작정 유학길에 보내는 부모들이 많다. 하지만 미국에 입시경쟁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자녀를 아이비리그에 보내려는 미국인들은 초등학교부터 관리에 들어간다. 미국 중산층 엄마도 학교성적, 과외활동 등을 관리하는 맹모 생활을 한다. 그리고 ‘하버드 맘(엄마)’ ‘스탠퍼드 맘’ 같은 자녀 자랑을 자신들이 타고 다니는 차 번호판에 붙이고 다닌다.

경제학에 ‘밴드왜건 효과’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부화뇌동하는 것을 지칭한다. 연 10조원의 국부를 투입하고 50만명의 자발적 이산가족을 만들어내고 있는 지금, 기러기 가족의 비용과 교육성과라는, 투입과 산출의 냉정한 경제학적 계산을 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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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