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스포츠> 챔피언벨트와 디 오픈 트로피 스토리

3연속 우승 톰 모리스, ‘챌린지벨트 영원히’

 

디 오픈(브리티시 오픈)은 그 역사만큼이나 우승트로피도 유명하다. 은으로 제작된 클라레 저그(Claret Jug)는 골프대회 우승트로피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그러나 초기 디 오픈의 우승트로피는 클라레 저그가 아닌 가죽에 은 버클로 장식된 챔피언벨트였다.

 

 

1860년 스코틀랜드 프레스트윅 골프장에서 첫 디 오픈 대회가 개최됐을 당시에는 붉은색 가죽벨트에 은색 버클이 달린 ‘챌린지벨트’가 우승트로피로 사용됐다. 현재 복싱과 종합격투기 등에서 챔피언에게 주어지는 챔피언벨트와 매우 흡사하다.

힘겨운 부활

챌린지벨트가 트로피로 사용된 것은 10년 밖에 되지 않았다. 디 오픈이 처음 개최될 당시 대회 주최 측은 ‘3번 연속 대회에서 우승하는 챔피언에게 챌린지벨트의 소유권을 제공한다’는 룰을 적용했고 1870년, 톰 모리스 주니어가 3년 연속 디 오픈에서 우승하며 챌린지벨트의 영구 소유권을 획득해서다. 1871년에는 디 오픈을 개최하겠다는 골프장이 나오지 않으면서 출전 선수들의 동기가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대회가 개최되지 않았다.
이후 영국왕립학회(R&A)는 디 오픈의 미래와 새로운 트로피의 선정방식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1871년 5월1일, 세인트 앤드류스 골프장을 포함한 여러 골프장이 “디 오픈과 우승트로피의 부활을 위해 각자 재정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15파운드를 기부하기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디 오픈이 부활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1872년 9월11일, 프레스트윅 골프장과 뮈어필드 골프장, 세인트 앤드류스 골프장의 핵심 인물들이 합심해 디 오픈의 부활을 추진했다.
챔피언은 새로이 제작된 우승트로피를 수상하며 우승트로피의 제작은 각 골프장에서 10파운드씩 기부한 금액으로 제작된다는 협의하에 트로피 제작이 시작됐다. 1872년 디 오픈에서 4번 연속 우승에 달성한 톰 모리스 주니어는 아직 제작되지 않은 트로피 대신 우승메달을 수상했다.
클라레 저그는 1873년에 완성됐다. 맥케이 커닝햄 & 컴퍼니 오브 에딘버러사에서 약 40파운드의 비용을 들여 제작한 클라레 저그의 첫 주인은 1873년 우승자인 톰 키드였다.
그러나 1872년에 우승하고 트로피 대신 메달을 받은 모리스 주니어의 이름이 키드보다 위에 각인된 뒤 주어졌다. 당시 클라레 저그는 ‘더 골프 챔피언 트로피’라고 불렸다.

1920년에 디 오픈의 주최권이 세인트앤드류스 골프장 측으로 이권 되면서 챔피언들의 클라레 저그 소유권에 대한 규칙이 변경됐다. 1927년까지는 챔피언이 이듬해 디 오픈이 개최될 때까지 클라레 저그를 소유했다가, R&A측에 반납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1928년부터는 복제품을 만들어 원본은 세인트앤드류스 골프장에 전시하고 복제품은 챔피언에게 제공되는 것으로 규칙이 변경됐다.



공식적으로 총 3개의 ‘클라레 저그’ 존재
클라레 저그 첫 주인은 1873년 우승자 톰 키드

 

이후로는 클라레 저그의 원본인 더 골프 챔피언 트로피는 R&A 측이 보관하고 복제품인 클라레 저그를 선수들이 일시적으로 소유하게 됐다. PGA에 의하면 이듬해가 돼 클라레 저그를 반납할 시기가 오면 챔피언들은 개인 소장을 위한 클라레 저그의 또 다른 복제품을 요청할 수 있다.
역대 챔피언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클라레 저그와 대회 우승 뒤 1년 동안 소장한 뒤 R&A 측에 반납하는 것을 제외하면 공식적으로 총 세 개의 클라레 저그가 존재한다. 하나는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류스에 위치한 골프 박물관에 전시돼 있으며 나머지 둘은 각종 골프 관련 이벤트에서 전시를 위해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한편 8월에는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전설’ 샘 스니드(미국)의 우승트로피가 경매에 나온다.
<AP통신>은 “8월 미국 시카고에서 헤리티지 옥션이 주관하는 경매에 스니드 우승트로피와 메달 14점이 출품된다”고 전했다. 이번 경매에는 스니드가 1954년 마스터스대회에서 벤 호건과 연장전 끝에 획득한 우승트로피와 1946년 브리티시오픈 우승으로 받은 클라레 저그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설의 트로피

경매에 나올 물품 가운데 가장 큰 관심을 받는 것도 1954년 마스터스 우승트로피와 1946년 클라레 저그다. 업계는 마스터스 우승트로피와 클라레 저그 모두 10만달러(약 1억1000만원) 이상 가격에 낙찰될 것으로 전망했다.
2005년 5월23일 8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스니드는 82승으로 PGA투어 최다승 기록을 세운 ‘전설’이다. 스니드가 세상을 떠난 이후 우승트로피들은 아들 잭 스니드가 물려받았다. 그린브라이어 골프리조트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잭은 “식당에 경영상 문제가 생겨 아버지 유품을 경매에 부치기로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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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