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기획> 경영권 버린 재벌가 사람들

  • 김설아 sasa7088@ilyosisa.co.kr
  • 등록 2013.03.18 11:4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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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장손도, 금지옥엽 막내도 ‘마이웨이’

[일요시사=경제1팀] 재벌 후계자. 소위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인생’이라며 부러움을 살만하다. 최근엔 ‘은수저’가 아닌 ‘다이아몬드 수저’라고 불릴 정도로 서민들의 삶과는 차이가 크다. 돈 걱정 없이 화려하게 보장된 삶은 물론, 어려서부터 경영수업을 받고 가업 승계를 받기까지 그야말로 탄탄대로다. 하지만 국내 재벌가 자손 중에서도 이러한 천편일률적인 캐릭터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이 선택한 것은 ‘빽’이 아닌 ‘꿈’이다. 



‘출생의 비밀’ 만큼이나 TV드라마 속 단골 소재인 ‘재벌자제’의 모습이 진화하고 있다. 드라마작가들이 갇혀 있는 상상력의 한계를 확 깰 만한 실존 캐릭터가 국내 재벌가에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회장님
내 꿈은 변호사

우선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차남 조현문 효성 전 사장의 행보가 재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효성그룹의 유력 후계자 중 1명으로 거론돼 온 그는 이달 초 중공업 PG장을 갑작스럽게 사임, 여느 재벌가 자제들과는 다른 ‘이반’의 길을 택했다. 그는 경영일선에서 손을 떼고 ‘법무법인 현’의 고문 변호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룹을 완전히 떠나 외부에서 변호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뜻이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수석입학, 수석 졸업한 조 전 사장은 1996년 미국 하버드 법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효성그룹으로 출근하기 전까지 뉴욕 주 변호사로 활동한 바 있다.

당시 조 전 사장은 국제 변호사로서 굵직굵직한 성과를 이뤄냈다. 효성 도메인(www.hyosung.com)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되찾아 온 것이 그것이다. 닷컴 도메인을 선점한 사이버 ‘스쿼터(도메인 매점매석 행위자)’가 조 전 사장에게 수 억원을 요구해 왔지만, 미국 도메인등록협회와 미 법원에 제소, ‘효성닷컴’을 찾아왔다.


이후 그는 1999년 효성 전략본부팀장으로 입사해 전략 부문에서 활동하다 2006년부터 그룹의 주력사업인 중공업 부문을 맡아오며 매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

넉넉한 후계자 삶 포기 “꿈 찾아 옆길로”  
처음부터 입사 거부…임원 지내다 결단도

중공업PG 매출액은 2조원을 넘어서 회사 전체의 20%를 차지했고, 국내 최초로 북미 풍력발전 시장 진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특히 중국 남통 우방 변압기 기업 인수나 750KW 및 2MW 급 풍력발전시스템 국내 최초 인증 등은 업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조 전 사장은 사내 인트라넷에 ‘사임사’라는 글을 통해 “법률가로서의 전문성과 효성에서 10여 년간 축적한 경영 노하우를 접목해 법조 분야에 매진하고자 한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조 전 사장이 근무할 ‘법무법인 현’은 40대 초반의 젊은 변호사들이 주축이 돼 2007년에 설립한 신흥 로펌으로, 매출액 기준 국내 10대 로펌에 들어간다. 특히 조 전 사장의 부인으로 법무법인 김&장 등에서 근무한 이여진씨도 조 전 사장과 같은 법무법인에서 함께 일할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그의 퇴진을 두고 재계 일각에서는 “조 회장의 장남인 조현준 사장, 3남인 조현상 부사장과의 경영권 승계 경쟁에서 밀려난 결과가 아니냐”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조 전 사장의 퇴진이 관심을 끄는 것은 ‘재벌가 대물림 경영’이라는 방정식에 변화를 주는 신호탄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기업 경영보다
자선 활동 관심


조 전 사장과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정경선 사단법인 루트임팩트 대표이자, ㈜허브서울 공동대표가 그 주인공. 그는 고 정주영 현대 창업주의 손자다.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의 장남으로, 회사 지분 15만1530주, 지분 0.17%를 보유하고 있는 유력 주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부모 후광에 기대지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지난해 2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정 대표의 관심사는 ‘후계 수업’ 보단 ‘자선 활동’에 있었다. 대학시절 정 대표는 대학생 문화 기획 동아리 ‘쿠스파(KUSPA)’를 결성, 자선 파티를 열어 수익금을 기부하거나 아마추어 음악인을 돕기 위한 콩쿠르를 여는 등의 활동을 했다.

2010년에는 대학생과 사회 초년생들이 모인 재능 기부 단체 ‘크리에이티브 셰어(Creative Share)’를 만들기도 했다. 이후 2011년 11월부터 아산나눔재단 인턴 생활을 거친 후, 본격적으로 진로를 수정했다. 완강히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해 사회적 기업 후원단체인 비영리 사단법인 ‘루트 임팩트’를 만든 것이다. 목적은 자선 사업가들과 사회 혁신가들의 육성 및 역량 강화에 있다.

정 대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난달 사회적기업 인큐베이팅 사업을 수행하는 임팩트스퀘어(Impact Square) 의 박동천 공동 대표를 포함한 몇몇 지인들과 함께 사회 혁신가들의 협업 공간인 ㈜허브서울을 열었다. 허브서울은 최근 이용자 수가 늘며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정 대표는 2호점 확장은 물론이고 소셜 벤처 육성을 위한 프로그램도 적극 가동할 예정이다.

정남이 아산나눔재단 기획팀장 역시 자신의 의지를 펼친 현대가 자제 중 하나다. 정 팀장은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의 장녀로 지난해 12월 재단에 합류했다.

아산나눔재단은 청년 창업 활성화와 글로벌 리더 육성을 위해 현대중공업 등 범 현대가에서 5000억원을 출연해 2011년 출범한 민간 공익재단으로 최근 신설된 재단 기획팀은 창업 관련 신사업을 발굴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팀장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유학해 MIT 경영학 석사(MBA)를 받은 후 컨설팅회사인 베인앤컴퍼니에서 일해 왔다. 평소 창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현장에서 창업을 지원하는 역할에서 의미를 찾고, 스스로 재단을 선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재벌가 문제아서
광고계 기린아로

꿈을 찾은 재계 자제 중에는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의 장남 박서원씨도 빼놓을 수 없다. 박씨는 지난 2006년 대학생 5명이 창업해 국제 광고제를 휩쓸고 광고계의 룰을 바꾼 ‘빅앤트 인터내셔널’의 대표다.

빅앤트는 설립 3년 만에 한국 최초로 국제 5대 광고제인 칸 국제 광고제, 뉴욕 페스티벌, 클리오 광고제, D&AD, 뉴욕 원쇼 석권과 3년 연속 수상을 기록하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주목받았다.

박 대표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이름을 알릴 당시 두산그룹 회장의 장남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기도 했다. ‘돈 있으면 누가 못 해’, ‘아버지 후광 효과’라는 등의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예상과 달리 학창시절부터 번듯한 재벌 3세의 장남들과 맥을 달리했다. 남들보다 10배 이상 놀던 중ㆍ고교 시절을 보내고 1998년 정원 미달로 단국대 경영대에 입학했다 3회 학사 경고 후 자퇴, 도피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이 후에도 2회 학사경고에 5차례나 전공을 바꿔야 했던 긴 방황 끝에 박 대표는 산업디자인에서 물을 만났고, 한국인 최초로 세계 5대 광고제를 휩쓴 광고계의 기린아로 돌아온 것이다.

박 대표는 지난달 방송된 KBS2 TV <이야기쇼 두드림>에 출연해 ‘재벌2세가 아닌 광고쟁이’로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털어놓기도 했다.

경영과 담 쌓고 생활…쉽게 독립했다 낭패도
‘변호사, 자선가, 광고인, 공직자, 영화감독…’

이날 방송에서 박 대표는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지금의 자리까지 왔지만 대기업 회장 아들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털어 놓으며 “대학교에서 늘 F였는데 산업 디자인과로 전과한 첫 학기에 올 A를 받았다. 이게 내 길이구나 생각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광고 분야에서 더 잘해 다음 세대에 이어 주는 것이다”라고 광고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 화제를 모았다.

이 외에도 일찌감치 비경영자의 길을 걸었던 자제들이 있다.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이 대표적. 박 이사장은 고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의 다섯째 아들이다.

박 이사장은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 교수와 공직자의 길을 걸어왔다. 물론 그룹 계열사의 지분은 갖고 있지만 다른 형제들과 달리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박 창업주의 장남 고 박성용 회장의 아들 박재영씨도 작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회사 경영엔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지난 2009년 금호그룹 관련 지분을 모두 팔고, 영화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뒤, 경영권 승계엔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상태다.

‘도련님 수발’에 
그룹 휘청하기도

다만 모든 기업인들의 경우가 그렇듯 이들의 독립도 늘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다. 부영그룹은 이중근 회장의 막내아들인 이성한 감독이 운영하는 부영엔터테인먼트(이하 부영엔터)가 자금난에 빠지자 자금 메꿔주기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부영엔터는 현재까지 3편의 영화를 제작했고, 이 제작비 중 상당 금액이 부영그룹의 비상장 계열사인 동광주택으로부터 출자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부영엔터의 업무용 사무실까지 모 기업의 지원을 통해 운영하면서 이 회장의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족벌 경영’이 빈축을 사기도 했다.

막내 아들을 위한 이 회장의 사랑만큼 이 감독의 일은 잘 풀리지 않았다. 지난 2007년 제작된 이 감독의 첫 작품인 <스페어>는 영화진흥위원회 영화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 관객 수가 4만5290명에 그쳤으며 이어 2009년 작품인 <바람>도 15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했지만 10만여 관객만을 동원했다. 이어 2011년 개봉한 <히트>도 11만명 만을 동원하는데 그쳐 모기업으로부터의 원조 없이는 사업을 지속하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부영그룹은 지난해 8월 부영엔터에 자금을 대거 쏟아 붓다 못해 부영엔터를 통째로 인수했다. 그룹 계열사인 대화기건이 부영엔터의 대주주가 됨으로써 69억 원의 빚을 지고 완전자본잠식상태에 빠진 부영엔터의 빚까지 모두 떠안았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국내 젊은 주식부자 순위
GS 9세 꼬마가 100억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아들인 구광모 LG전자 부장(35)이 ‘40세 이하 젊은 주식 부호’ 랭킹 1위에 올랐다.
지난 11일 재벌닷컴이 상장사 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주식 지분가치를 지난 8일 종가 기준으로 평가한 결과 40세 이하 대상자 중 구 LG전자 부장의 주식 평가액은 5685억원으로 전체 1위를 기록했다.
구 부장에 이어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의 장남 김남호 동부제철 부장(38)이 4951억원으로 2위, 정교선 현대백화점그룹 부회장(39)이 4416억원으로 3위에 올랐다.
장형진 영풍그룹 회장의 장남 장세준(39)씨는 3561억원으로 4위, 김영찬 골프존 회장 장남인 김원일 사장(38)은 3421억원으로 5위였다.
그 뒤를 고 박정구 금호그룹 회장 장남인 박철완 금호석유화학 상무보(3269억원), 장형진 영풍그룹 회장 차남인 장세환씨(2434억원),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장남인 박준경 상무보(2347억원)가 이었다.
재벌닷컴은 이번 조사에서 1000억원 이상 상장사 주식을 가진 40대 이하 부호는 23명, 100억원 이상을 기록한 부호는 195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195명 중 여성은 54명(27.7%)이었다. 100억원 이상 상장사 주식을 보유한 젊은 주식부자 중에서도 가장 나이 어린 부자는 허용수 GS에너지 부사장의 차남인 정홍(9)군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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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