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밤, 강남의 한 호텔 대연회장에서 열린 지역 명문고 재경총동문회 송년회는 오랜 전통을 담은 행사답게 무게감 있는 분위기로 시작됐다.
올해는 특히 상징적인 장면이 있었다. 93세를 맞은 1회 동문이 직접 참석했고, 1회부터 21회까지 약 30여명의 원로 동문들이 맨 앞 테이블을 가득 채운 모습은 한 학교가 걸어온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살아있는 아카이브와도 같았다.
필자도 21회여서 앞줄 테이블에 자리했다. 그런데 익숙한 풍경 속에서도 미세하게 달라진 공기가 느껴졌다. 명문고의 이름이 주는 상징성은 여전히 단단했지만, 동문 결속의 밀도는 과거에 비해 분명 줄어들어 있었다. 세월의 흐름은 자연스럽지만, 그 변화가 유독 선명하게 다가온 저녁이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우리 학교 재경총동문회는 전국의 명문고 동문회 중에서도 가장 활력 있고 영향력 있는 조직 중 하나였다. 당시 동문 중 현역 국회의원만 3명이나 있었고, 동문들은 정치·법조·경제·언론 등 각 분야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입시시험을 통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시험 세대’가 중심이던 그 시절, 송년회는 말 그대로 한 해의 ‘대형 행사’였다. 수백명이 호텔 대연회장을 가득 메웠고, 후원금은 억 단위로 모였다. 복도에서 기수만 확인해도 웃음이 터지던 풍경은 지역 명문고 재경동문회의 결속력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올해 송년회는 예전과 확연히 달랐다. 이제 재경동문회는 시험 세대가 자연스럽게 퇴장하고, 그 자리에 평준화 세대가 중심이 되는 시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들어선 것이다.
평준화 세대는 입시 경쟁으로 학교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교육제도 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정된 세대다. 따라서 학교 정체성 형성 방식 자체가 시험 세대와 다르다. 이 구조적 차이가 동문회의 결속 방식과 활동 패턴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행사 내내 ‘10년 뒤 우리가 다시 이 자리에 선다면, 재경총동문회는 어떤 모습일까? 평준화 세대 중심의 동문회는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결속을 만들어낼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는 특정 학교만의 문제도, 특정 지역만의 변화도 아니다. 전국 거의 모든 지역 명문고 재경동문회가 동시에 겪고 있는 구조적 변화다.
올해 행사장은 예전만큼의 열기로 가득 차진 않았으나, 그 안에서도 눈에 띄는 장면들이 있었다.
우선, 전국 총동문회장과 임원진이 직접 참석해 축사를 했고, 금일봉까지 전달한 사실은 우리 재경총동문회가 오랜 전통 위에 여전히 지역 명문고의 위상을 지키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었다.
또 골프·금융·IT·건설·문화예술 등 10여개 소그룹 모임 회장들이 무대에 올라 활동을 소개했는데, 필자는 그 장면에서 동문회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볼 수 있었다.
앞으로 동문회는 대규모 행사가 중심이던 시절을 지나, 소모임 기반의 네트워크 중심 구조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 직업·취미·관심사별 소그룹이 실제 연결의 중심축이 되고, 동문회는 이 다양한 소모임을 묶어주는 ‘플랫폼’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이날 필자가 추천한 번호가 추첨에서 당첨돼 상품을 받는 행운도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그 순간의 따뜻함과 박수 속에서 동문회라는 공동체가 여전히 숨 쉬고 있음을 느꼈다.
필자가 40대 시절 참석했던 송년회는 200점 만점에 170점 이상이 돼야 입학할 수 있는 명문고답게 동문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강력한 소속감이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선배는 후배를 품고, 후배는 선배를 존중하며 사업·취업·경조사까지 모든 것이 동문 네트워크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 결속 방식은 이제 시대 변화 앞에서 조용히 저물고 있다.
앞으로 동문회는 시험 세대 중심 결속 구조에서 평준화 세대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구조로 재편돼야 한다. 소모임 기반 활동 강화, 세대 통합 프로그램, 명문고 브랜드의 재정 같은 전략적 설계가 필요하다.
행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필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현 재경총동문회장에게로 향했다. 차분한 리더십 속에 드러나는 단단함, 동문회를 안정감 있게 이끄는 균형감각, 그리고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는 감각이 느껴졌다.
동문회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과도기를 이끌어갈 회장과 새로운 세대의 연결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지역 명문고 재경총동문회가 앞으로도 품격을 지키며 또 다른 10년을 써 내려가길 기대하며, 필자는 조용히 그러나 단단한 마음으로 응원을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