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디우스의 매듭’은 그리스 신화에서 고르디우스 왕의 우마차를 신전 기둥에 묶은 복잡한 매듭으로, 칼로 매듭을 끊어 문제를 해결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화와 관련된다. 이는 발상의 전환으로 단번에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을 뜻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상징한다.
본성과 양육 논쟁 역시 그런 문제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주제는 플라톤의 관념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근대기에는 ‘빈 서판’ 개념을 앞세운 존 로크의 경험주의와 데카르트를 필두로 경험 이전의 지식을 토대로 한 합리주의가 서로 맞서기 시작했다. 이처럼 인식론의 차원에서 생득관념과 습득관념의 대립은 쉽게 풀어낼 수 없는 난제라 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서도 여러 연구자의 주장이 이어지고는 있지만, 확실한 답은 여전히 나오지 않은 듯하다.
본성과 양육 가운데 후자의 측면을 강조하던 행동주의는 가시적인 행동에만 집중해 왔다. 그 탓에 내면에서 일어나는 과정은 간과하면서 여러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이후 인지혁명을 계기로 내면의 인지 과정도 주목받기 시작했고, 유전학의 발전으로 본성의 영향력이 재조명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본성을 향한 열광의 흔적은 우생학이라는 세계사의 오점으로 남았다. 우생학은 백인 중심의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어 피차별 인종의 인권을 탄압하고, ‘인종 청소’를 명분으로 한 대량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이처럼 극단으로 치달아 온 두 매듭은 서로가 얽히고설켜 도저히 풀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 책에서는 현대 과학에서 채택한 바와 같이 본성과 양육의 이분법을 넘어선 상호작용적 관점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유전자가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통념과 달리 뇌의 발달과 형성에 환경의 영향이 완전히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의미다.
공격적인 성향의 아이라도 교육을 통해 공격성을 억제할 수 있듯,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요인에서 양육의 비중도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는 무엇을 타고나는가>에서는 유전자가 우리의 수많은 잠재적 형질의 방향성을 결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우리의 운명까지 확정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에 저자는 이상과 같이 편견이 불러온 오해를 종식하기 위해 스스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칼을 빼 들기를 결단한다.
우리 안의 빈 서판이 수많은 가능성으로 채워져 있더라도, 그 위에 새로운 글씨를 더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처럼 우리는 경험을 통해 배우고, 환경에 적응하며, 성격에도 일부 영향을 받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격에 기반한 습관적인 행동 양식을 발전시켜 나가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여지는 있다.
저자는 유전체에 부호화된 프로그램은 발달 규칙만을 명시할 뿐 구체적인 결과를 정할 수는 없으며, 프로그램에 영향을 주는 유전적 변이가 많을수록 결과의 다양성도 커진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어떤 유전자형이라도 다양한 잠재적 결과를 지니기는 하지만, 그중 실제로 실현된 것은 바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이다. 이 사실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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